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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2124화 (1,881/2,000)

2124화. 담금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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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오광뇌역 외곽 어딘가에 사내 둘과 여인 하나가 서로 등을 맞대고 서 있었다.

세 사람 주변으로 산만한 체구의 거대 뱀 열댓 마리가 맴돌고 있었는데 전신이 보라색 뇌전으로 이루어져 입에서 뿜은 뇌전들로 그물을 이루고 그들을 궁지로 몰아넣고 있었다.

세 명은 수행이 그다지 약하지 않아, 회색 장포 노인은 금선 후기, 검은 갑옷을 입은 못생긴 사내와 붉은 장삼을 걸친 젊은 부인은 금선 중기의 수행을 지닌 데다 사용하는 선기들도 품질이 괜찮아 보였다.

그러나 보라색 뇌전 뱀들이 너무 강해서 셋이 합격술을 펼쳐 선령력을 한데 모으지 않았으면 진작 당했을 것이었다.

“제길! 왜 외각에 이렇게 많은 뇌수(雷獸)들이!”

흑갑 추한이 힘껏 보라색 항마장(降魔杖)을 휘둘러 지팡이 허상들로 간신히 뇌전 공격들을 막아냈다.

오광뇌역에서 난무하는 뇌전 말고 또 다른 위험요소가 바로 뇌역에서 탄생하는 뇌수들이었다.

오광뇌역의 뇌전 정화가 응결해 형성된 뇌수들은 실력이 강했으나 보통 뇌역 깊은 곳에서 활동하여 외곽에서는 마주칠 일이 많지 않았다.

“조 수사, 어차피 이렇게 된 것 원망만 해서 무엇 하겠습니까? 묘 선자, 자오화주(子午火珠)가 남았으면 어서 뇌전 그물을 끊어 최후의 반격이라도 해봅시다! 이대로 시간을 끌다가는 우리 모두 여기서 죽겠어요.”

회포 노인이 금색 거대 솥 선기를 발동해 금빛으로 방어를 하며 홍의 여인에게 소리쳤다.

“자오화주는 이제 한 알밖에 남지 않았어요. 아까 써봐서 알지만 이걸로 뇌전 그물은 끊을 수는 있어도 뇌수들에게 중상을 입힐 수는 없잖아요. 뇌전 뱀의 속도가 우리보다 훨씬 빨라 어차피 달아날 수가 없단 말입니다!”

머리 위에 붉은 깃발 세 개를 띄우고 용 모양 불길로 뇌전들을 막고 있던 홍의 여인이 의문을 드러냈다.

“제게 공간선부가 한 장 있으니 뇌전 뱀들을 잠깐은 멈출 수 있을 겁니다. 아까는 비교적 오광뇌역 깊은 곳에 있어서 사용하지 않고 지금까지 버티고 있었던 것이고요. 이제 변두리로 나왔으니 그 틈에 오광뇌역만 벗어나면 살 수 있어요!”

회포 노인이 다급히 재촉했다.

“손 수사, 그런 부적이 있었으면 진작 말 좀 해주시죠! 알겠습니다, 바로 해볼게요.”

홍의 여인이 안심하며 주먹 크기의 붉은 구슬을 손에 쥐었다.

불꽃 문양이 빼곡한 구슬에서 강렬한 화염 법칙 파동이 흘러나왔다.

문득 표정이 어두워진 흑갑 거한이 뭐라 말을 하려는데 홍의 여인이 알지 못하고 구슬을 뇌전 그물로 던져 버렸다.

콰쾅!

만장 불길이 치솟아 보라색 뇌전 그물을 찢고 인근 뇌전 뱀 두 마리도 불길에 휘말렸다.

그럼에도 다른 뇌전 뱀들은 도망치지 않고 분노하며 세 사람을 향해 달려들었다.

회포 노인은 은색 주술문자가 적힌 하얀 부적을 꺼내 입에서 정혈을 토해 흡수시켰다. 하얀 부적이 은빛으로 흩어져 허공에 스며들었다.

웅!

주변 수십 리 공간에 은색 광선이 침투해 뇌전 뱀들을 붙들었다.

뇌전 뱀들이 거미줄에 걸린 나비처럼 꼼짝하지 못하는데 흑갑 추한과 홍의 여인도 그 자리에 구금되었다.

회포 노인만 은빛 보호막을 둘러 허상처럼 광선을 통과하고 있었다.

“손중산! 이게 어쩌자는 겁니까!”

흑갑 추한과 홍의 여인이 대노해 소리쳤다.

“이 공간선부가 원래 부적을 발동하는 사람 말고 주변의 다른 사람들도 전부 구금하도록 되어 있어 저도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정말 미안합니다!”

회포 노인도 마음이 편치 않은지 두 사람을 향해 공수하고 둔광을 일으켜 휙 사라져버렸다.

흑갑 추한과 홍의 여인은 너무 화가 나서 두 눈이 튀어나올 것 같았지만 그냥 회포 노인이 사라지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뇌전 뱀들이 사납게 포효를 하며 몸부림쳤다.

은색 광선들이 잘게 진동하는 게 금방 뜯겨 나갈 것만 같았다.

흑갑 추한과 홍의 여인은 분노할 틈도 없이 전력을 다해 발버둥 쳐보았다. 제발 뇌전 뱀들보다 먼저 구금에서 벗어나 살 수 있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은색 광선은 질겼고, 선령력이 얼마 남지 않은 그들은 희망이 없어 보였다. 반대로 뇌전 뱀들은 점점 더 미친 듯이 날뛰면서 주변의 뇌전의 힘을 끌어당겨 벗어나기 일보직전이었다.

참담한 표정의 흑갑 추한과 홍의 여인의 눈에 절망이 어렸다.

콰콰쾅…….

이때, 뇌역 깊은 곳에서 하늘을 울리는 굉음이 터져 나오고 검은빛이 상공의 먹구름을 꿰뚫었다.

희미하게 뇌역 깊은 곳에 72자루의 금색 검빛이 72마리의 거대한 용이 노니는 것처럼 허공을 가르는 게 보였다.

검빛이 방출하는 강렬한 검기와 뇌전법칙 파동이 사방의 뇌전을 집어삼켰다.

비록 흑갑 추한, 홍의 여인과 아주 먼 곳에 있었지만 그 성난 파도와 같은 엄청난 법칙 파동은 선명하게 느껴졌다.

“엄청난 뇌전법칙! 6품, 아니 5품 선기는 되겠습니다! 대라경 선배님이 오광뇌역에서 선기를 제련하는 걸까요?”

흑갑 추한과 홍의 여인이 놀라 시선을 마주쳤다.

주변 뇌전 뱀들도 일흔두 자루의 검빛에 압도된 듯 발버둥을 멈추고 뇌역 깊은 곳으로 시선을 빼앗기고 있었다.

“선배님! 살려주십시오!”

“도와주십시오, 선배님!”

추한과 여인이 눈빛을 교환하고 목청껏 외쳐댔다.

그 소리에 놀란 뇌전 뱀들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다시 포효하며 몸을 꿈틀거렸다.

파치칙!

뇌전 뱀들을 휘감고 있던 은색 광선이 끊기는 것을 보고 추한과 홍의 여인은 눈을 질끈 감고 죽음을 기다렸다.

그 순간, 72자루의 검빛이 하늘을 찌를 듯 금빛을 방출해 거대한 금색 원반을 형성하고 그 속으로 날아들었다.

콰릉!

금색 원반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뒤 천 리를 뒤덮은 금색 뇌전 구름으로 변했다.

휘이이잉.

금색 뇌운 속에서 귀곡성과 함께 소름 끼치는 포효소리가 들려왔다. 눈을 찌를 듯한 금빛 뇌전이 허공을 찢으며 떨어져 보고 있으면 심장이 떨어질 것 같았다.

수만 리가 삽시간에 뇌운 지역으로 들어가 흑갑 추한, 홍의 여인 그리고 뇌전 뱀들도 반항할 틈도 없이 말려들었다.

눈앞에 뿌옇게 변한 사내와 여인은 끝 모를 금색 공간 안에서 마치 뇌신이 강림하는 듯 떨어져 내리는 뇌전과 위압적인 뇌전법칙 파동에 휩싸여 있었다.

그들을 구금하던 은색 광선이 뇌운에 흡수되어 산산이 뜯겨나가고도 그들은 공간의 압력에 아예 꼼짝하지 못했다.

그들을 향해 달려들던 뇌전 뱀들도 마찬가지였다.

지능이 높지 않은 뇌전 뱀들은 제압을 당하자 무조건 반격을 하며 굵직한 보라색 뇌전을 마구 뿜었는데 전부 금색 뇌전에 녹아들어 버렸다.

반항의 대가로 하늘에서 금색 뇌전이 떨어져 보라색 뇌전 뱀들의 머리를 강타했다.

강대한 힘을 지녔던 열댓 마리 뇌전 뱀들의 머리가 터지고 뇌전이 몸을 타고 흘러 폭발한 다음에는 뇌전 알갱이로 돌아가 전부 금색 뇌운 속으로 흡수당했다.

어안이 벙벙해 눈만 껌뻑이고 있던 추한과 여인이 한참 만에 자유를 되찾았다.

“36개의 천뢰 중 도천신뢰(都天神雷)! 천뢰 중에서 파괴력은 으뜸이라던데……. 어느 뇌전법칙을 익히신 선배님께서 절세의 신통을 펼치신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흑갑 추한이 주위를 살피고 기함해 중얼거렸다. 그는 뇌전법칙을 익힌 데다 거대 종파 출신이라 안목이 남달랐다.

홍의 여인이 그 말을 듣고 새로운 눈으로 주변 상황을 관찰했다.

이때 멀리 하늘 위에서 쿵, 하며 둔탁한 소리가 전해졌다.

금색 뇌전 속에 거대한 천문(天門)이 나타나 아득히 먼 고대의 기운을 담은 뇌전 문양을 드러냈다.

쿠르르!

질식할 것 같은 천문의 위압감은 금색 뇌전이 보여주었던 힘의 10배 이상이었다.

흑갑 추한과 홍의 여인은 푸확, 피를 토하고 얼굴이 창백해졌으며 감당할 수 없는 기운의 압박에 뼈가 으드득 으깨지려는 조짐을 보였다.

살아날 기회일 줄 알았는데 더 처참하게 죽게 생기자 두 사람의 표정은 점점 더 썩어갔다.

그때 공중에 청포 사내가 나타나 수결을 맺었고, 금색 천문이 번쩍 사라져 세 사람이 오광뇌역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다.

압박감에서 벗어난 흑갑 추한과 홍의 여인이 거칠게 숨을 내뱉었다.

청포 사내가 손을 젓자 하늘의 금색 뇌운이 빠르게 흩어지며 72자루의 금색 비검들이 팔각 옥판으로 변해 그의 소매 속으로 들어갔다.

“너희들은 대금원선역 수사들이더냐?”

흐릿하게 사라진 청포 사내가 추한과 여인 앞에 나타났다.

“예, 저는 신소종(神霄宗) 제자 조삼뢰라 하옵고, 여기 묘 선자는 금선 산수입니다. 저희를 살려주신 은혜에 감사 올립니다! 선배님의 성함을 여쭈어도 될지요?”

흑갑 추한이 한립의 수행의 깊이를 알 수 없자 공손히 물었다.

홍의 부인도 그를 향해 예를 올렸다.

“이름은 알 것 없고, 석 수사라 부르면 된다. 대금원선역 지도를 지니고 있느냐?”

청포 사내, 한립이 눈을 반짝였다.

팔황산을 떠나 정보를 모으며 여기까지 오는데 이십여 년이 흘렀다.

그간 화지공간 안에서 통천검진을 깨우쳐서 이해도가 깊어졌기에 능숙하게 사용할 수 있었다.

다만 더없이 강력한 위력을 지닌 통천검진에 비해 청죽봉운검들이 부족한 면이 있어서 아쉬웠는데, 오광뇌역을 발견하고 당장 검을 정련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을 거친 청죽봉운검은 뇌전법칙이 증가해 5품 선기가 된 데다, 놀랍게도 뇌전의 성질도 달라져 36가지 천뢰 중 하나인 도천신뢰가 되었다.

“있습니다!”

조삼뢰가 급히 지도가 담긴 옥간을 꺼내 한립에게 건넸다.

지도를 받아 살핀 한립은 구원관, 백조산 등 거대 세력들의 위치가 표시된 것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대금원선역으로 가십니까? 제가 대금원선역에 오래 살아 어디든 안내해드릴 수 있습니다.”

조삼뢰는 기대감 가득한 눈으로 말했다.

“길 안내는 되었고, 이 지도로 충분하다. 오광뇌역은 너희 수행으로는 머물기 위험하니 어서 떠나거라.”

한립의 담담한 대답에 조삼뢰는 실망했다.

말이 길 안내를 하겠다는 것이지 실은 신소종으로 청할 생각이었다. 뇌전법칙을 수련하는 종문으로 이 같은 선배를 모시면 큰 공을 세울 수 있을 텐데, 제대로 말을 꺼내기도 전에 거절당했다.

“선배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저희가 생각이 부족했습니다. 바로 떠나도록 하지요. 혹시라도 제게 분부하실 일이 생기면 언제든 신소종을 찾아주십시오.”

조삼뢰는 한립에게 예를 올리고 홍의 여인과 같이 오광뇌역 바깥쪽으로 날아갔다.

그런데 얼마 가지 않아 눈빛이 몽롱해진 둘은 그 자리에 섰다.

그 앞에 나타나 그들의 미간에 손을 얹은 한립은 손에서 수정빛을 반짝였다.

비술로 기억을 확인하니 그들은 그의 신분을 알아채지도 못했고 천정으로 가서 고발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적도 없었다.

용모를 바꾸었어도 청죽봉운검이 노출되었으니 현상금이 걸린 그를 알아볼 수도 있었다.

대금원선역에서는 사소한 일도 넘어갈 수 없었다.

한립은 그들의 미간에 수정빛을 집어넣고 주문을 외웠다.

반 시진 뒤, 조삼뢰와 홍의 여인이 오광뇌역을 빠져나왔다.

“조 수사, 이제 어디로 갈 건가요? 금연성(金燕城)으로 돌아갈 생각입니까?”

홍의 여인이 물었다.

“그렇습니다. 손중산 그놈이 우릴 죽이려 들었는데, 마침 뇌전들이 폭동을 일으켜 뇌수들이 달아나지 않았습니까! 죽을 뻔하다 살았는데 그냥 넘어갈 수는 없지요!”

“맞아요, 분명히 따지고 넘어가야 할 일입니다!”

보랏빛과 붉은빛 둔광을 일으킨 추한과 여인이 대금원선역 쪽으로 날아갔다.

두 사람이 멀어지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뇌역 안에서 빠져나온 한립이 그들이 사라진 방향을 쳐다보았다.

방금 비술을 써서 그와 만났던 기억을 뇌역에 갑자기 뇌폭(雷暴)이 일어난 것으로 바꿔놓았다.

그들을 죽이는 게 가장 확실하고 간단한 방법이었지만 아무나 죽이는 취미도 없었고 함부로 살생하고 싶지도 않아 공을 들인 것이다.

대라경에 이른 후 삼시를 베어야 하는 고난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 한순간의 편리함을 위해 심경에 영향을 줄 업보를 쌓을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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