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3화. 백 년의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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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백, 묵안비휴 일맥에 후손은 너 한 명뿐이다. 네겐 절대 어떤 일도 벌어져서는 안 돼.”
백택이 나지막하게 충고했다.
흰둥이가 뭐라고 대꾸하려는데 백택이 손을 들어 말을 막았다.
“너와 한 수사가 무엇을 하려는지 내가 모르겠느냐? 구원관이 어떤 곳인지 내가 너희보다는 잘 알고 있다. 그들의 저력은 너희의 상상 이상일 게야. 겨우 둘이서 누군가를 구하러 숨어들었다가는 목숨을 버리는 꼴이 될 것이다.
소백, 팔황산에 남아 실력을 키워 만황 억만 생령을 위해 만황계역의 부흥을 돕거라. 만황이 너를 필요로 하고 있다. ……한 수사에게도 괜한 일을 하지 말라 충고하겠네. 그러다 십중팔구는 죽을 것이야.”
백택은 흰둥이에게 당부를 늘어놓다 한립에게도 말했다.
“한 수사, 내 이렇게 말하는 걸 이해하게. 구원관은 천정의 결맹 세력 중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거대 세력일세. 자네 둘이서 어떻게 할 수 있는 곳이 아니야.”
곁의 리기마도 말리려 했다.
한립은 얼굴을 굳힌 채 잠자코 듣고 있었다.
그와 흰둥이 둘이서 구원관에 쳐들어가 금동을 구하려 한다면 분명 현명한 생각은 아니었다. 무턱대고 일을 벌였다가 그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금동은 구원관을 벗어날 기회를 영영 잃게 될 테고.
윤회전이라는 방대한 세력이 더해지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지겠지만 극비사항이라 함부로 떠벌리고 다닐 수도 없었다.
“수련은 어디서든 할 수 있잖아요. 주인님이 지닌 공간법보 안에서 수련하면 돼요. 그리고 어떤 위험도 두렵지 않고요.”
흰둥이는 흔들림이 없었고, 이마에 주름이 잡힌 백택은 한립에게 눈짓을 하고 있었다.
“소백, 백택 선배님의 말씀이 일리가 있다. 이번 일은 너무 위험하니 나를 따라갔다가는 너를 안전하게 지키지 못할 수 있어. 이곳에 남아 있거라.”
가볍게 한숨을 내쉰 한립도 흰둥이를 설득하려 했다.
흰둥이가 대라경에 이르렀다지만 구원관이라는 거대 세력에 비교하면 발휘할 수 있는 능력에 한계가 있었다. 게다가 세상 구석구석 감시의 눈길이 퍼져 있는 천정이라면 팔황산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파악하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묵안비휴 혈맥의 힘을 계승한 흰둥이는 이전과 그 존재감이 확연히 달라졌으니 그가 대금원선역에 나타나면 천정에서 따로 강자를 파견해 하려는 일에 변수가 될 수 있었다.
게다가 지금 흰둥이를 데리고 떠나는 것은 만황계역 전체에 죄를 짓는 것과 같았다.
“누님이랑 구원관에 포위당했을 때, 누님은 자기가 달아날 기회를 제게 양보했어요. 누님이 아니었으면 어떻게 지금의 제가 있겠어요? 지금 그런 누님이 구원관에 잡혀 생사를 알 수 없는데, 저더러 만황계역에 숨어 있으라니요? 폐하가 좋은 뜻으로 하는 말씀인 줄은 알겠습니다만, 저는 반드시 누님을 구하러 가야겠습니다. 그렇지 않았다가는 평생 마음의 짐이 되어 영원히 수행이 늘지 않을 거예요.”
흰둥이는 흥분한 기색도 없이 결연하게 답했다.
그 말을 들은 한립도 이채를 띠고 더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러나 백택의 표정은 더욱 어두워졌다.
“백택 수사, 우리 만황 사람들은 원래 은원이 분명합니다. 은혜든 원수든 필히 갚아줘야 하지요. 소백이 결심했다니 보내줍시다.”
악면이 다가오며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구원관이 어떤 곳인지 정녕 몰라서 하는 말입니까. 흰둥이야 뭘 모르니까 이렇게 말한다지만 수사가 그런 소리를 해서야…….”
백택이 악면을 돌아보며 반박했다.
“소백을 억지로 붙잡아 둔다 한들 아이의 마음이 만황에 남아 있지 않으면 아무 소용없는 겁니다. 게다가 한 수사는 충동적인 사람처럼 보이지도 않고요. 자네, 동료를 구출하기 위해 이미 계획해 둔 것이 있을 테지?”
악면은 담담한 어투로 한립을 향해 물었다.
“실은 준비해둔 일이 있기는 합니다. 다만 기밀이라 선배님들께 말씀드릴 수 없었고요. 절대 경거망동하지 않을 테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한립이 백택과 악면을 향해 공수를 해보였다.
“보세요, 한 수사가 다 알아서 대비를 해두었다지 않습니까? 그렇게 걱정이 되면 소백에게 몸을 지킬 쓸 만한 보물이라도 몇 개 들려 보내던가요.”
“그런……. 휴, 이리 고집을 부리니 나도 말릴 수가 없구나. 이 보물들을 몸에 지니고 다니거라.”
백택이 생각을 해보다 어느 정도 설득이 되었는지 흰둥이에게 세 가지 물건을 꺼내 주었다. 푸른 옥으로 만든 부적, 금색 부적, 하얀 보따리였다.
푸른 옥부에는 같은 색깔의 문양이 기이한 진법을 이루고 새겨져 있어서 부드러운 빛이 주변을 돌다 다시 옥부 안으로 들어가며 순환했다.
손바닥 크기의 금색 부적도 복잡한 요족의 주술문자가 적혀 강렬한 법칙 파동을 발산했다.
마지막으로 하얀 보따리가 법칙 파동이나 어떤 기운도 없이 평범했는데, 희미하게 영력이 깃들어 있는 것만 느껴졌다.
“이 푸른 옥부는 예전에 우연히 얻게 된 둔천부(遁天符)로, 형체와 기운을 숨겨주는 작용을 해서 대라경 후기의 수사도 쉽게 감지하지 못할 게다. 금색 부적은 내 기운의 3할이 담긴 일격을 봉인해 두었으니 상대하기 어려운 강적을 만났을 때 쓰거라. 마지막으로 하얀 보따리는 네 부친이 오래전 제련한 본명선기로 내 줄곧 지니고 있었는데, 앞으로는 네가 잘 보관하거라.”
“감사합니다, 폐하.”
흰둥이도 보물들의 비범함이 느껴져 좋아하며 받아들었다.
둔천부와 금색 부적은 바로 넣어두고 하얀 보따리를 들고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한립도 기뻐했다. 강력한 보물이 늘면 그들의 안위에 도움이 될 것이었다.
이때 백택의 손에서 느닷없이 12개의 하얀빛이 쏘아져 나와 흰둥이 체내로 스며들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하얀 주술문자들이 떠올라 흰둥이 주변으로 열 개의 고리를 지닌 진법을 형성했다가 서서히 사라졌다.
흰둥이가 화들짝 놀랄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한립도 안색이 변했는데 워낙 백택의 동작이 빨라 막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걱정하지 말거라. 내 십이도대나이부진(十二道大挪移符陣)을 펼쳐 둔 것이니. 소백, 네가 한 수사를 따라 떠나는 것을 허락하겠다만, 천정과 만황의 상황을 너도 알 것이다. 우리도 준비하는 일이 있으니……. 기껏해야 네게 2백 년밖에는 줄 수 없다. 2백 년 후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만황으로 돌아와야지, 그렇지 않았다가는 내가 이 십이도대나이부진을 이용해 널 강제로 불러들일 것이야.”
“2백 년이요?”
백택의 말에 흰둥이가 한립의 표정을 살폈다.
한립도 그 안에 일을 마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윤회전이 언제 움직일지 구체적인 연락을 아직 취해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안에 다녀올 수 있기를 바라야겠구나.’
한립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흰둥이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네! 2백 년 후에는 돌아올게요.”
흰둥이가 바로 백택에게 약속했다. 그걸 들은 백택의 얼굴이 좀 풀어졌다.
“소백과 동행할 수 있게 허락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제가 흰둥이는 평안히 돌아올 수 있게 할 것이니 너무 심려하지 마십시오.”
한립은 백택과 악면을 보며 말했다.
“그래, 소백은 자네에게 맡기겠네.”
백택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립은 몇 마디를 더 나누다 인사를 하고 묵룡비주를 불러내 하늘 끝으로 사라졌다.
그와 흰둥이가 떠나는 것을 쳐다보던 백택이 곁의 리기마를 쳐다보았다.
리기마가 부친의 뜻을 알아듣고 인사를 하고 떠나니 이제 광장에는 백택과 악면만 남게 되었다.
“받으세요.”
악면이 손을 까딱해 핏빛 덩어리를 백택 앞에 던져놓았다.
핏덩어리 안에서 12개의 허상이 반짝이는데, 한립 체내의 12종류 진령혈맥 허상이었다.
진령 허상들 외에도 수많은 핏빛 문자들이 떠올라 공법 구결을 형성하고 있었다.
한립이 이걸 보았으면 식겁했을 게 분명했다. 세부적인 구결에 차이가 있기는 했지만 그가 수련한 경칩십이결 공법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백택이 눈을 빛내며 핏빛 덩어리를 잡아챘다.
“한립 체내의 곤붕혈맥을 통해 다른 혈맥들과 어떻게 움직이는지 감지 해보았더니 대충 어떤 공법인지 알겠더군요. 고명한 공법인 것은 확실합니다. 이런 공법이 어떻게 하계로 흘러 들어간 것인지.”
악면이 느긋하게 말했다.
“대단한 공법이에요. 우리에게도 혈맥을 융합하는 공법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기껏해야 네다섯 가지를 혼합해 사용하는 것 아닙니까? 그 이상을 융합하려 하면 피차간에 충돌이 일어나 목숨을 잃기 십상이고요. 무려 12가지 진령혈맥을 서로 균형을 이루게 하면서 융합해 사용하다니. 그 정교함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예요. 이 공법을 확보함으로써 우리 만황의 실력이 크게 늘게 될 겁니다.”
백택은 핏빛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렇게 애타게 공법을 원했으면 그냥 추혼술을 해버리거나 섭섭하지 않게 대가를 챙겨 주고 내놓으라 하면 되지. 나까지 끌어들여서 애들 앞에서 연기까지 시키고, 대체 왜 그런 겁니까?”
코웃음을 친 악면이 불퉁거렸다.
“한 수사는 특수한 신분을 지녀, 그렇게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될 인물입니다.”
“흠? 그 녀석이 누군데 백택 수사가 이리 신경을 쓰십니까?”
백택이 궁금해하는 악면을 힐끗 보고 검은 영패를 꺼내 보였다. 흉악한 짐승 얼굴이 그려진 영패였다.
“이건!”
악면도 짐승 얼굴 영패를 보더니 표정이 달라졌다.
“진선계에 폭풍이 몰아치려 합니다. 그 바람을 타고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겠어요.”
영패를 거둔 백택은 하늘 위를 떠다니는 구름을 보며 탄식했다.
묵룡비주는 빠르게 팔황산을 벗어나 어딘가로 날아갔다.
팔황산을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립은 괴뢰들을 불러내 조종을 맡기고 선박의 은신, 방어 금제를 펼친 다음 흰둥이를 데리고 화지공간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공간 안으로 들어선 후 광음천선대진과 균천일귀를 발동하니 공간의 시간 유속이 급속도로 달라졌다.
“우와! 주인님 어떻게 하신 거예요?”
흰둥이가 그걸 느끼고 감탄했다.
“시간차 공간을 만든 것이다. 이곳의 시간 유속이 바깥보다 50배는 빠르니 적당한 곳을 찾아 열심히 수련하거라.”
한립은 태연히 웃음 지었다.
“이렇게 신기한 공간을 다 만드시고, 주인님의 시간법칙이 이런 경지에 이르렀을 줄은 몰랐어요!”
흰둥이는 연신 칭찬을 하더니 자리를 잡고 수련을 시작했다.
한립도 흰둥이와 떨어진 곳에 앉아 윤회전 가면을 쓰고 자신이 이전에 올려둔 임무를 확인했다.
아쉽게도 시간법칙 물건을 찾는다며 고액을 걸었는데도 아무도 연락이 없고, 교삼도 소식을 보내온 게 없었다.
마음이 좀 조급해진 한립이 주먹을 꽉 쥐자 공간이 웅, 떨렸다.
육신의 힘도 대폭 늘고, 세월신등이라는 강력한 선기에 절세 검진인 통천검진까지 장악해 실력을 늘리긴 했지만 앞으로 상대해야 할 거대한 적 앞에서는 한계가 분명했다.
게다가 아직도 수행이 태을경 최고봉에 머물러 있는 상태였다.
그때 한립이 거래화면에서 어떤 소식을 발견하고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찾을 때는 보이지 않더니.”
잠시 후 가면을 벗은 그는 가부좌를 틀고 통천검진을 연구하면서 법언천지와 역전진륜 두 가지 신통을 수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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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금원선역 서북쪽 근방의 만황계역은 천정의 압박과 인족들의 빈번한 침입으로 대부분 진령과 만황종족들이 이주를 해서 이제는 지능이 높지 않은 흉수들만이 도사리고 있었다.
이런 흉수들의 요핵, 정혈, 뼈 등도 진귀한 재료라 나날이 더 많은 인족 수사들을 불러들이고 있었다.
여전히 곳곳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어 각종 흉수, 천지영기를 잉태한 험난한 지형들 때문에 태을경, 심지어 대라경 수사도 멋모르고 돌아다니다 사고를 당할 수 있었다.
이곳 만황계역의 모처에는 바닥이 까만 돌의 색이고 하늘은 두꺼운 먹구름이 가득했다. 먹구름 안에 굵직한 뇌전들이 도사리고 있다가 수시로 떨어졌는데 깊은 곳으로 들어갈수록 구름도 짙어지고 뇌전도 많아졌다.
가장 안쪽은 뇌전이 폭포처럼 콸콸 쏟아져 내려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또한 이곳의 뇌전은 천연색으로 허공을 가득 채운 뇌전의 화려한 빛에 보기만 해도 전율이 흘렀다.
뇌전 구역은 규모도 상당해서 시야의 끝까지 이어져 몇만 리를 뒤덮고 있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이 구역을 일컬어 오광뇌역(五光雷域)이라 하고, 대금원선역 인근의 유명한 위험지역 중 하나로 꼽혔다.
간혹 몇몇 수사들이 나타나 각종 방어 선기를 발동하고 뇌적구역을 돌아다니면서 무언가를 열심히 주워갔다. 오광뇌역은 위험하지만 농염한 뇌전의 힘 덕에 각종 뇌전 속성 재료들이 탄생해서였다.
오광뇌역의 중심부는 치명적이어도 외곽은 그럭저럭 돌아다닐 만해서 운이 좋고 충분히 주의를 기울이면 목숨까지 걸 필요는 없었다.
물론, 운이 나쁜 경우에는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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