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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2122화 (1,879/2,000)

2122화. 완곡한 거절

*

“오라버니!”

류낙아는 한립의 달라진 모습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지 정답게 그를 불렀다. 흰둥이와 원산백도 그를 향해 달려갔다.

빠르게 몸을 수축해 사람으로 돌아간 그는 반라의 몸이 화려하게 번쩍거렸다. 현규들이 혈육 기운을 가득 머금고 있어서였다.

‘처, 천 개가 넘잖아? 저렇게 강해지다니!’

호삼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경악했다.

십여 초가 지나 그 빛마저 갈무리한 한립은 길게 숨을 내쉰 다음 푸른 장포를 불러내 몸에 걸쳤다.

천천히 바깥으로 걸어 나오던 그가 멈칫하더니 마지막 세 번째 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주위 풍경이 갑자기 달라져 또 다른 만황세계로 들어선 것 같았는데 어떤 짐승도 보이지 않고 오로지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순수한 기운만을 느낄 수 있었다.

이 만황의 기운은 어떤 것에도 구속받지 않는 원시의 기운으로 천지간을 지배하는 어떤 규칙과도 상관없이 세상이 처음 열릴 때의 상태를 보존하고 있었다.

그가 자세히 둘러보기 전에 강력한 힘이 그를 집어삼키고 갈가리 찢어발겼다.

모골이 송연해진 한립은 순식간에 깨어났지만 몸을 부르르 떨며 식은땀을 흘렸다.

사람들은 마치 일순간 시간이 멈췄던 것처럼 그의 이상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놀란 마음을 가라앉힌 한립은 감시 세 번째 문을 다시 돌아보지도 못하고 빠르게 만황 수사들을 향해 걸어갔다.

“왜 이제야 나오신 거예요?”

흰둥이가 원망스럽게 물었다.

“미안하구나. 너희를 걱정시켰어.”

한립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가 말을 마쳤을 때 공간이 크게 진동하며 등 뒤의 구릿빛 거대 문 세 개가 지하로 가라앉아 사라졌다.

여덟 개의 돌기둥이 서 있던 광장도 허상처럼 흩어지고 있었다.

“일단 나가서 이야기하자꾸나.”

한립은 흰둥이와 원산백을 잡고 수라혈문을 향해 날아갔다.

팔황산 정상에 빛이 번득이고 사람들이 빠져나왔다.

그렇게 백여 년 동안 자리를 지키고 있던 수라혈문도 무(無)로 돌아갔다.

산 정상 광장의 암홍색 금제는 진작 거둬져서 새벽 햇살을 충만하게 받을 수 있었다.

신선한 공기를 깊게 들이마신 한립은 눈을 가늘게 뜨고 멀리 태양을 바라보았다.

그 옆으로 파문이 일고 백택과 악면이 등장했다.

“한 수사, 많이도 강해졌구만. 축하할 일일세.”

백택은 한립을 아래위로 훑으며 말했다.

악면도 한립을 보는 눈빛이 반짝이는 게 아주 흥미롭다는 얼굴이었다.

한립은 악면의 주시에 불편함을 느끼고 상대의 기운을 확인한 다음 깜짝 놀랐다.

바다와 같이 끝 모를 수행이 백택보다 그리 모자라지 않았다.

‘또 다른 도조? 뇌붕족 소환진법이 밝게 빛을 머금었었는데, 혹시 유천곤붕 진령왕?’

이런 생각이 든 한립은 단정히 백택을 향해 예를 취한 다음 답했다.

“백택 선배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신 덕분입니다. 그렇지 않았으면 이 정도 경지에 이르는데 얼마나 더 시간이 걸렸을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사소한 일에 은혜라고 할 것도 없네.”

백택은 잔잔히 미소 지었다.

“선배님께는 사소한 일이겠으나, 저는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앞으로 제가 필요한 곳이 있으면 말씀해 주십시오.”

한립이 진지하게 말했다.

외부인인 그를 수라혈문에 들여 육신을 이렇게 단련시켜 준 것은 정말 큰 은혜였다. 미라노조가 그를 지도해주었던 것과 비교해도 결코 부족함이 없었다.

“허허, 한 수사가 그렇게 말하니 내 한 가지 요구를 하지. 후일 만황계역이 어려움에 처하면 자네의 능력이 닿는 한 조금만 도와줄 수 있겠는가?”

백택이 웃으며 묻는 말에 한립은 당황스러웠다. 자신을 잘 보아줘도 너무 잘 보아준 것 아닌가?

만황계역은 이미 진령왕이 둘에 류낙아와 같은 계승자들이 여럿인 데다 류청과 같은 대라급들이 잔뜩 있었다. 그런 만황을 어려움이 처하게 할 적이면 얼마나 강대한 세력이겠는가.

그런데 자신더러 도와달라니?

“그런 날이 온다면 큰 도움을 드릴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반드시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그 말에 백택은 고개를 끄덕이고 악면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아직 소개를 못했구만. 한 수사, 여기는 만황계역의 또 다른 진령왕 유천곤붕 악면 수사일세. 자네에게 아주 관심이 많으신 분이지.”

“저는 한립이라 합니다. 악면 선배님을 뵙습니다.”

한립은 ‘역시’라고 생각하며 공수를 해보였다.

다른 사람들도 진작 악면을 인지하고 있었으나 백택의 말을 듣고서야 분분히 앞으로 나서 인사를 했다.

“난 백택 수사처럼 이런 허례를 좋아하지 않으니 됐네. 자네, 혈맥의 힘을 융합하는 공법은 어디서 난 것이지?”

손을 내저은 악면의 시선이 송곳처럼 한립의 얼굴에 꽂혔다.

“제가 하계에 있을 때, 어느 곤붕족 선배님이 돌아가시고 남기신 사리에서 얻게 되었습니다.”

한립은 온몸의 힘이 풀리는 것처럼 시선을 견디기 어려워 통제를 잃고 말을 내뱉었다.

“하계에서 얻은 공법이라고?”

악면은 놀라더니 고개를 끄덕이고 시선을 돌렸다.

천천히 힘이 회복되고 몸의 통제권을 되찾은 한립은 놀라움과 분노가 동시에 일었다.

나름 진보를 했다고 하는데도 도조급 앞에서는 허망하기 그지없었다.

하긴 대라 최고봉이던 류천호도 도조인 백택 앞에서 아무것도 아니었는데 자신의 실력으로 무엇을 꿈꾼단 말인가.

“악면 수사, 한 수사는 우리 만황 사람이 아니니 궁금한 것이 있으면 제대로 물어 답을 얻어야 할 겁니다. 이런 식으로 남을 조종하다니 실례가 아닙니까? 만황 종족이 다들 수사처럼 생각 없이 행동하니 아직도 야만족 소리를 듣는 겁니다.”

옆에서 백택이 싫은 내색을 했다.

악면이 그 말을 듣고 또 한립을 힐끔 살피더니 미간을 좁혔다.

“아닙니다. 악면 선배님께서 제게 해가 되는 일을 하신 것도 아니고, 그저 질문하셨을 뿐인데 제가 어찌 원망하겠습니까.”

한립이 예의 바르게 미소를 지었다.

“들었지요? 한 수사는 괜찮다는데, 옆에서 무슨 잔소리가 많은지.”

그 말에 악면이 씩 웃으며 백택을 보았다. 내심 눈치 있는 인족 후배에 대한 인상이 좋아졌다.

백택은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만 저었다.

“한 수사, 뇌붕혈맥을 지니고 실력도 쓸만한데. 자네 내 도조사자(道祖使者)가 되어볼 생각이 있는가?”

악면이 몸을 돌려 한립을 향해 웃어 보였다.

“도조사자요?”

한립은 처음 듣는 말에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다른 만황 수사들도 그 말을 듣고 웅성거렸다.

대부분이 그처럼 아연한 얼굴이었으나 류청, 경전, 추오족 소주 같은 수사들은 당장 안색이 달라져 질투심 어린 시선을 보냈다.

“한 수사, 아직 수행이 대라경에 이르지 못해 도조에 관한 일은 모르는 게 많을 걸세. 부왕, 악면 선배님 같은 도조들은 늘 폐관수련을 하느라 바깥세상에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시네. 근래 들어 천정의 압박이 심해지지 않았으면 부왕께서도 출관하지 않으셨겠지.

그래서 도조들은 재능이 뛰어나고 실력이 고강한 인물을 선발해 도조사자를 두어 외부에 자신들의 의지를 전달하고 여러 가지 일처리를 도맡게 한다네. 도조사자가 되면 이익이 막대한데, 일단은 도조의 사람이라는 신분을 얻어 아무도 함부로 대하지 못하고 도조가 하사하는 강력한 선기를 받거나 지도를 받아 수련 상에도 큰 도움이 된다네. 악면 선배님께서 자네를 좋게 보신 것은 하늘이 내린 기회이니 절대 놓쳐서는 안 될 것이야!”

리기마의 목소리가 한립의 머릿속에 울렸다.

듣고 있는 한립은 표정이 연달아 달라졌지만 성급히 결정하지 않고 고민에 빠졌다.

백택은 그걸 보고 미소를 머금었고 악면도 재촉하지 않았다.

“악면 선배님께서 저를 좋게 봐주신 것은 정말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저는 사적으로 해결할 일들이 너무 많아 선배님의 호의를 받을 수가 없을 듯합니다.”

한립은 오래 고민하지 않고 몸을 굽혀 미안함을 표했다.

비밀도 많고 그로 인해 수많은 강자와 복잡한 관계를 맺고 있는 그는 안심하고 도조 곁에 머물 수가 없었다.

게다가 오늘 처음 본 악면에 대해 잘 알지도 못했기에 더욱 함부로 몸을 의탁할 수 없었다.

그걸 본 만황 수사들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는 얼굴이었고, 류청 등 그 의미를 아는 사람들은 특히 더 놀라 한립을 쳐다보았다.

“저자가 미친 것 아닙니까! 도조사자를 마다하다니.”

경전은 한립이 거절하는 것을 보며 놀라면서도 내심 신나 했다.

‘멍청한 놈.’

추오족 소주도 속으로 냉소를 흘렸다.

악면은 한립의 거절에 눈을 반짝였지만 화내지 않고 고개만 끄덕이고 말았다.

그걸 본 한립은 긴장하고 있다가 마음을 좀 놓을 수 있었다.

지긋이 한립을 본 백택이 다른 이들을 향해 돌아섰다.

“혈사대회가 마무리되었다. 너희들은 이제 각자의 종족으로 돌아가 실력을 비축해야 할 것이야. 진선계에서 시작된 혼란이 언제 만황까지 미칠지 모른다.”

“예!”

만황 수사들은 힘차게 답하고 서로 인사를 한 다음 떠나갔다.

경전, 추오족 소주가 차가운 시선으로 한립을 훑고 출발했다.

그런 두 사람을 본 한립은 슬쩍 눈썹을 끌어올렸다.

자신을 싫어하는 것은 알았지만 지금의 경지에 그가 크게 신경을 쓸 만한 인물들은 아니었다.

그저 진령왕 혈맥을 계승한 그들이 앞으로 성장해 언젠가 도조가 될지도 모른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런 화근은 일찍이 제거하는 게 옳았지만 백택과 악면이 있는데 손을 쓸 수도 없었다.

“오라버니, 혈맥을 전승받아 수라혈문 안에서 백 년 동안 수련했는데도 아직 철저히 융합하지 못했어요. 바로 천호족으로 돌아가 수련을 계속해야 할 것 같은데. 나중에 저를 보러 다시 만황에 와주셔야 해요?”

류낙아가 한립 앞으로 날아들어 물기 어린 눈으로 말했다. 톡, 건드리면 울기라도 할 것 같았다.

“꼭 그러마.”

한립은 미소를 머금고 류낙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동시에 류낙아의 얼굴에서 웃음이 피어났다. 힘차게 고개를 끄덕인 그녀는 천호족 무리가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류청, 호삼 등도 한립에게 한 마디씩 인사를 하고 천호족 수사들을 이끌고 날아올랐다.

광장에는 어느새 한립, 흰둥이, 백택, 악면, 리기마만 남았다.

“백택 선배님, 악면 선배님, 그간 잘 대우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저는 급히 처리할 일이 있어 그만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한립이 먼저 백택과 악면에게 다가가 예를 올렸다.

만황에서 백여 년을 허비해 금동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혹은 윤회전이 벌써 구원관을 상대로 무슨 조치에 들어갔는지 알지 못했다.

당장 만황계역을 떠나 알아봐야 할 일이었다.

“일이 있다니 남겨둘 수 없겠구만.”

백택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소백, 넌 대라경에 이르렀으나 혈맥의 힘이 안정화되지 않았다. 팔황산에 남아 수련을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

백택은 곁의 흰둥이에게 말했다.

“폐하의 배려는 감사하지만 저는 주인님을 따라갈 생각입니다.”

흰둥이가 고개를 저었다. 그 말에 백택의 얼굴이 약간 어두워졌다.

“소백, 내 전에는 너의 신분을 몰라 영수로 거두었던 것이다. 허나 묵안비휴 선배님의 후손이라는 것을 안 이상, 주인님이라는 호칭은 적당치 않으니 앞으로는 한 수사라 부르면 될 것이다.”

한립이 소백을 보고 분별 있게 말했다.

사적으로야 뭐라 부르든 상관없었지만 백택과 악면 두 명의 도조 앞에서 흰둥이에게 주인님으로 불리다가는 눈 밖에 날 것이 확실했다.

“주인님이든 한 수사든 호칭에 불과한걸요. 주인님이 입에 붙어서 편하니 그냥 그렇게 부를게요.”

흰둥이가 대수롭지 않게 손을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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