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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2121화 (1,878/2,000)

2121화. 전승

*

첫 번째 구릿빛 거대 문에서도 이상 현상이 끊이지 않았다.

문을 투과하듯 들어간 계승자들은 각자 다른 공간에 들어간 듯 서로를 볼 수 없었다.

그때 류낙아는 거대한 원형 제단 위에 서 있었다.

하늘을 찌를 듯 뻗은 9개의 기둥에는 복잡한 문양이 새겨져 핏빛을 반짝였고, 새하얀 거대 여우가 고공에 도사리고 9개의 꼬리를 각각의 기둥에 감은 채 제단으로 빛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제단 중앙에 꼬리 여섯 개가 달린 하얀 여우가 전신에 핏빛 사슬을 묶고 엎드려 고공의 구미호를 올려다보았다.

기둥을 타고 내린 빛이 핏빛 사슬로 흘러들어 그녀의 체내로 들어가고 있었다.

꼬리 6개 달린 하얀 여우는 바로 류낙아였고, 꼬리 9개 달린 거대 여우는 진령왕 혈맥의 화신이었다.

* * *

또 다른 공간.

그곳은 제단이 아닌 거대한 산봉우리가 허공에 떠있었다.

피처럼 붉은 산맥에 근육질의 거대 원숭이 조각이 생생하게 새겨져 있는데 바로 산악거원이었다.

산봉우리 아래에서 본체의 모습을 한 하얀 원숭이가 어깨에 만 장 크기의 산을 지고 한발 한발 앞으로 나아가는데, 진작 어깨가 짓물러 살이 터지고 피가 났지만 결코 멈추지 않았다.

하얀 원숭이는 원산백이었다.

그의 계승할 혈맥의 힘이 핏빛 산맥 안에 있어, 산을 운반하는 원숭이라는 뜻의 ‘반산원(搬山猿)’이란 이름에 맞게 실행하고 있는 것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산맥은 철저히 그와 하나가 되어가고 있었다.

힘들어도 만황을 위해, 일족을 위해 어떻게든 참고 견뎌야 했다.

* * *

또 다른 검은 공간.

제단도 혈산(血山)도 없이 개울물이 졸졸 흐르고 있었다.

개울 한쪽에 검은 장포를 입은 중년인이 하얀 장삼을 걸친 아이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앉아 물에 맨발을 담그고 있었다.

검처럼 곧은 눈썹과 별처럼 빛나는 눈을 지닌 준수한 외모의 사내는 미간에 수직으로 금색 문양이 있어 제3의 눈이 숨겨져 있는 듯했지만 무섭고 이상하기보다는 신비로운 느낌이 강했다.

그 옆에 앉은 아이는 붉은 입술에 까만 눈을 지녀 아직 앳되어 보였지만 약관만 넘어도 준수한 미소년이 될 게 분명해 보였다.

“소백이라 나쁘지 않은 이름이구나.”

중년인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아버지, 제 원래 이름은 뭐였어요?”

아이가 중년인 옆에 붙어 물었다.

“성이야 나를 따라 묵 씨이고, 이름은……. 지을 틈이 없었구나.”

“아…….”

미안한 기색이 가득한 중년인의 말에 아이는 좀 실망한 것 같았다.

중년인은 묵안비휴 묵옥이고, 그 옆의 아이는 사람으로 변한 흰둥이였다.

“선계를 돌아다니다 인족과 요족이 유별하다는 것도 생각지 않고 네 어머니를 만나 서로 연모하였다. 후에 네가 태어났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린 천정에서 쫓기게 되었지. 내가 너를 데리고 안전하게 만황계역으로 달아날 수 있도록 네 어머니는 천정 도조를 유인하고 떠났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지.”

묵옥은 탄식하며 천천히 과거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어머니는 저를 위해 천정에게 목숨을 잃으신 거네요?”

그 말에 흰둥이는 가슴에 불같은 화가 치밀었다.

“네 어머니뿐만이 아니다. 너를 데리고 만황계역과 북한선역 경계에 도착했을 때, 네 원강 숙부가 머나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도우러 와주었지. 우리는 천정의 세 도조와 연달아 싸우면서도 밀리지 않았는데, 안타깝게도 나중에 고혹금이 공격해 와 지고 말았지.”

묵옥의 말 속에는 아쉬움이 진하게 남아 있었지만 원망이나 분노는 느껴지지 않았다.

“너무 비열해요! 아버지와 숙부가 세 도조와 전투 끝에 원기가 상했을 때 공격한 거잖아요.”

“실력이 대단한 자라 그런 수를 쓰지 않았어도 우리가 적수가 되었을지 모르겠구나. 소백아, 내게 약속해 주렴. 복수하기 위해 그자를 찾아가지 않겠다고.”

묵옥은 진지하게 당부했다.

“아버지,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되었어요?”

흰둥이는 약속하기 싫었지만 아비가 걱정하는 모습에 고개만 끄덕이고 화제를 돌렸다.

“정말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뒤집힐 것만 같은 전투였다……. 천정 도조 셋 중 하나가 죽고 하나가 다쳤지. 그래서 고혹금이 어쩔 수 없이 나선 게야. 나와 네 원강 숙부가 차례로 죽기 전, 난 전력을 다해 대부분 혈맥의 힘을 네 몸속에 봉인했다. 누군가 찾아낼까 두려워 네 혈맥과 기운을 전부 봉인하고 널 꽁꽁 열려두기까지 했지.”

“그래서 제가 아직도 사람으로 변신을 못 하는 거였네요.”

“아비도 정말 어쩔 수 없이 그런 것이다. 그래도 잔혼으로 너를 다시 보았을 때 내 기억 속의 그 모습 그대로라 기쁘구나.”

묵옥이 손을 뻗어 흰둥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금동도 이렇게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기를 좋아했지만 뭔가 낯간지러워 고개를 비틀곤 했는데 아비가 쓰다듬어 주니 마음이 편했다.

“천정은 우릴 왜 죽이려 한 거예요?”

흰둥이는 고개를 들고 물었다.

“그 원인은 우리의 천부적 신통에 있다. 우리가 일단 진령묵안(眞靈墨眼)을 뜨게 되면 허공을 맴도는 천기를 읽을 수 있게 된다. 누가 언제 어떤 일을 당하게 될지 일생의 궤적을 볼 수 있어, 이 본명신통으로 약간이지만 미래를 예측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천정은 그 능력을 이용해 뭘 예측하려고 한 건데요?”

흰둥이가 인상을 찌푸렸다.

“고혹금은 그걸로 자신의 미래를 보려고 했던 것 같다……. 허나 그건 천도를 거스르는 일이라 난 결코 그를 도울 수 없었지. 원래도 천정의 행실을 좋게 보지 않았기에 그들을 돕고 싶지도 않았고……. 때가 되면 너도 그 힘을 이어받게 되겠지만, 반드시 신중하게 사용해야 한다. 대가가 실로 엄청나기 때문이다.”

침음하던 묵옥이 차분히 설명해주었다.

“아버지, 만황 전체에서 어째서 원강 숙부만 나서주신 거죠? 백택은 자기 스스로 아버지와 절친한 사이라고 했는데 왜 도와주지 않은 거예요?”

“내가 돕지 못하게 한 것이니 백택을 탓하지 말거라. 다른 진령왕들이 그 일에 간섭했다면 만황계역와 선계의 전쟁으로 발전했을 테고 그때는 산맥 하나가 날아가는 정도로 끝나지 않았을 것이야. 대부분의 선역과 만황이 피로 물들었을 것이다. 어렵사리 만황의 평화를 되찾았는데 그렇게 망칠 수는 없었다.”

묵옥의 설명에 흰둥이는 침묵했다.

“직접 이런 이야기들을 해줄 수 있어 정말 기쁘구나. 흰둥이라는 이름이 친근하니, 앞으로도 묵소백이란 이름을 쓰면 되겠어…….”

묵옥이 잔잔히 웃으며 말했다.

“네, 난 어쨌든 나니까요.”

* * *

시간이 흘러 백 년 후.

수라혈문 안 광장의 여덟 돌기둥이 어둑해지고 주위의 혈육의 기운도 희박해져 있었다.

몇몇 수사들은 광장 중앙에서 벗어나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는데, 기색들이 다 달랐다.

그중 사람들이 가장 많은 천호족 무리에 류청, 호삼 그리고 류낙아 외에 원산백, 비휴 흰둥이가 함께 서 있었다. 자아시 류백재와 선시 류호연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지금의 흰둥이는 이전과 확 달라져서 뽀얀 피부에 붉은 입술을 지닌 잘생긴 소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미간에 수직으로 금색 선이 그어져 있어 제3의 눈을 감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원산백도 원숭이류의 특색이 거의 사라져 뻐드렁니가 작은 덧니로 바뀌어 훨씬 귀여워 보였다.

특히 류낙아가 가장 눈에 띄는 모습으로 달라져 있었다.

그녀도 미간에 금색 문양이 나타났는데 자태와 얼굴이 활짝 핀 꽃 그 자체라 누군가를 매혹하는 기운을 뿜어내지 않았는데도 도저히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들과 약간 떨어진 곳에 경전과 추오족 소주가 한 데 서서 우람한 덩치를 자랑했다.

경전은 머리의 날카로운 뿔이 사라지고 진령왕 주염과 더욱 닮아져 있었고, 추오족 소주는 원래도 완벽한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어 겉보기에 달라진 것은 없었으나 기운이 증폭되어 있었다.

진령왕 혈맥을 전승한 이들은 단기간에 실력도 폭발적으로 늘었지만, 그보다 더 막대한 이익은 앞으로 수행의 길이 탄탄대로일 거란 사실이었다.

마지막으로 리기마 혼자 돌기둥 하나에 등을 기대고 광장 뒤쪽의 거대 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녀석은 왜 아직도 나타나지 않는 걸까?”

마음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면서…….

“시간이 거의 다 되었습니다. 수라혈문이 닫히기 직전이니 한립 그놈은 저 안에서 죽었을 게 분명해요.”

경전이 만면에 웃음을 지으며 추오족 소주에게 큰 소리로 말했다.

“허허, 겨우 인족 따위가 주제도 모르고 설친 까닭이지요. 남들에게 비웃음을 사고 제 목숨도 잃고 이게 허세를 부린 대가란 겁니다.”

추오족 소주도 고의로 큰 소리로 답하며 웃음을 터트렸다.

“헛소리! 주인님은 절대 죽지 않아!”

흰둥이가 열 받아 소리쳤다.

“죽었는지 안 죽었는지는 우리가 떠들어서 정해지는 건 아니고. 한 시진만 지나면 세 개의 문이 전부 사라질 테니, 닫힌 수라혈문 안에서 아직 안 죽었어도 죽어야 할 겁니다. 으하하!”

경전은 유쾌함을 전혀 감추지 않고 떠들었다.

“생각해 보면 좀 아쉽기도 합니다.”

추오족 소주가 같이 웃으며 중얼거렸다.

막 진령왕 혈맥을 계승해 실력이 대폭 늘어난 그들은 한립에게 철저히 앙갚음을 해주고 죽이려 했는데 그럴 기회가 주어지지 않은 것이다.

그 말에 화가 난 흰둥이가 달려들어 따지려 했고, 그의 새로 사귄 벗인 원산백이 미간을 좁히고 따라나섰다.

“뭐라고 하든 그냥 둬요. 오라버니가 나오면 자기들이 얼마나 어리석은 소릴 하고 있는지 알게 될 테니.”

류낙아가 그들을 붙들면서 유유히 말했다.

그녀는 여기서 유일하게 한립이 무사히 돌아올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 사람이었다.

한립은 그녀가 하계에서 갈 곳이 없어 떠돌 때 유일하게 안정감을 준 사람이었기에 가슴 속 깊은 곳에는 절대적인 신뢰가 쌓여 있었다.

옆에서 류청이 그걸 보고 묵묵히 탄식했다.

일련의 사태들을 지켜보면서 그도 한립에 대한 생각이 완전히 바뀌어서 지금 류낙아를 상대로 설교를 할 마음은 없었다. 천호족에 강력한 맹우가 생기면 그도 기뻐할 일이니까.

하지만 모든 것의 전제는 한립이 살아서 저 문을 걸어 나와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원고팔왕이 진령왕이 되기 위해 걸었던 길이 그리 쉬울 리 있겠는가.

호삼은 말없이 서서 화내는 기색도 없이 걱정만 가득했다.

그러는 사이에도 시간이 흘러 이제 문이 닫히기까지 반 시진도 남지 않았다.

세 구릿빛 문의 금색 화염은 진작 꺼졌는데 두 번째 문은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하하, 아직도 기다려 볼 참입니까? 죽었다니까요…….”

경전의 웃음소리가 더욱 밝아졌다.

“우린 갑시다. 쓸데없이 기다리고 있을 것도 없겠어요.”

추오족 소주가 이렇게 말하고 바로 몸을 돌렸다.

구경도 할 만큼 했고 비아냥도 충분히 떨었으니 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가 몸을 돌린 순간 뒤에서 끼익- 하며 육중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놀랍게도 중간의 구릿빛 거대 문이 열린 것이다.

걸음을 멈춘 추오족 수주가 고개를 비틀어 뒤를 쳐다보자 열린 문틈으로 홍수처럼 핏빛 안개가 빠져나오면서 누군가 하얀 안개에 휩싸여 걸어 나오고 있었다.

거의 문만큼 체구가 크고 전신에 붉은색과 까만색이 반짝이는 머리 셋 달린 괴물체는 거북 껍데기 모양의 비늘로 몸을 두르고 여섯 개의 굵은 팔로 문을 지탱하고 있었다.

좌우의 머리는 원숭이와 호랑이를 닮아 주염과 도올의 것이었고, 가운데는 진룡이 아닌 현귀의 머리였다. 삼두육비 마신의 변신을 한 한립이었다!

천살진옥공의 수준이 높아져 4존 마신상을 합친 삼두육비 변신이 가능하게 된 그는 육신의 힘이 무시무시한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

주위의 진짜 만황진령들 보다 더 만황진령 다운 힘이었다.

“마, 맙소사…….”

경전이 중얼거렸다.

추오족 소주는 눈을 부릅뜨고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혈맥의 힘을 계승 받아 한립에게 수모를 주겠다는 생각이 연기처럼 사라졌다.

“정말 인족이 맞기나 한 것인가.”

류청도 참지 못하고 감탄했다.

눈을 가늘게 뜬 리기마는 아무 소리 하지 않았으나 속으로는 엄청 놀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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