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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2120화 (1,877/2,000)
  • 2120화. 진입

    *

    남은 만황종족들이 눈치를 살피며 한립이 어떻게 하는지 보았다.

    신중하게 정신을 집중한 한립은 훅, 탁한 공기를 내뱉고 발끝으로 바닥을 박찼다.

    화르륵!

    금빛 불길이 그를 감싸고 단번에 두 번째 문 안으로 들어가려던 한립은 작열하는 열기에 갇혀 멈춰 섰다.

    앞으로 갈 수도 뒤로 물러설 수도 없이 홀로 팔황산을 짊어지고 있는 것 같았다.

    체내의 혈맥의 힘이 지글지글 끓으면서 각자 제멋대로 움직이며 그의 심장을 향해 몰려들었다. 성문을 때리는 반란군의 포성소리처럼 쿵쿵, 소리가 연달아 들려왔다.

    한립은 부단히 의식으로 정염불새를 불러보았지만 정염불새는 그걸 감응하면서도 구속을 당한 듯 나오지 못했다.

    “저리 죽을 줄도 모르고. 폐하께서 진령왕 혈맥의 비호 없이 안 된다고 말씀을 해주셨는데도 은혜를 모르고 뛰어들었습니다.”

    경원족 족장이 비웃으며 그 광경을 살폈다.

    “하하, 안 그래도 꼴 보기 싫어 못 참을 것 같았는데 잘 되었지요.”

    통비원족 족장이 거들었다.

    다들 인족을 상대로 비슷한 생각을 하는데, 리기마는 힐끗 한립을 한 번 보고 가부좌를 틀어 혈육의 힘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한 형, 너무 성급했습니다. 만고 만황의 기혈의 힘을 인족의 몸으로 어떻게 견디려고…….”

    호삼이 안타깝게 탄식했다.

    한립은 모두의 반응을 전혀 모르고, 귀는 웅웅거리고 온몸의 피는 졸아드는 느낌에 굳어 있었다.

    펑, 펑, 펑…….

    이때 그의 몸속에서 폭죽이 터지기 시작했다.

    화려한 불빛이 일어나 산악거원 허상으로 변하더니 은시뇌붕, 진룡, 천봉, 현구 등 십여 개의 진령 허상들이 연달아 나타나 그를 중앙에 두고 춤을 추었다.

    “저길 좀 보십시오!”

    “저, 저게 무슨……. 어떻게…….”

    “인족이 저렇게 많은 진령혈맥을 지닐 수 있는 겁니까?”

    다른 족인들처럼 경원족 족장도 놀라 소리쳤다.

    “만황 종족은 완전히 불가능하겠지만 오히려 인족인 저 수사는 혈맥끼리 충돌하지 않고 융합할 방법이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반산원족 족장이 의아해하며 말했다.

    리기마도 주변 반응을 듣고 눈을 떴다.

    “이거 보고 있으면 놀랄 일이 끊이지 않는 자가 아닌가.”

    * * *

    그 시각, 팔황산 만황성전.

    여덟 개의 좌석 중 두 개가 차 있었다.

    백택이 자기 자리에 앉고 멀지 않은 곳에 흑포 거한이 앉아있었는데 의복이 낡아 구멍이 숭숭 뚫린 게 거지꼴이 따로 없었다.

    삿갓을 써서 광대가 튀어나온 뺨까지만 선명히 보이고 그림자 속에 두 눈이 번득이는데 시선이 노인의 것만 같았다.

    이제야 돌아온 진령왕 유천곤붕이었다.

    “악면, 만황 근처에 있을 줄은 알았습니다만 이렇게 빨리 돌아올 줄은 또 몰랐군요.”

    백택이 드물게 살가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쓸데없는 소리는 거기까지. 수라혈문을 연 이유나 말해보세요. 만황에 또 무슨 일이 난 겁니까?”

    악면이라 불린 삿갓 쓴 흑포 거한이 냉랭히 말했다.

    “천정이 보제연을 여는 것은 들었겠지요?”

    “그래서요?”

    “과거 일로 저를 원망하고 있다는 것을 압니다. 허나…….”

    백택이 여기까지 말하고 말을 잇지 않았다.

    “천정이 묵옥의 능력을 탐해 휘하에 들이려 할 때, 묵옥은 죽어도 싫다 하며 격전을 펼쳤습니다. 그런데 수사는 만황을 위한다며 우리가 나서지 못하게 했지요.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묵옥에다 원강까지 죽고 시체도 어디로 갔는지 아직 모르지 않습니까? 자, 이제 천정이 제대로 무슨 짓을 하려는데 우리는 다 흩어져 버렸습니다.”

    “당시……. 당시 제가 천정과의 전면전을 반대한 것이 아닙니다. 묵옥이 천정과 만황의 전쟁 결과를 짐작하고 차라리 죽겠다며 나서서 반대한 것이에요. 끼어들면 목숨을 끊겠다고 위협하며…….”

    백택이 힘든 표정으로 오랫동안 못했던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악면도 그 말에 안색이 달라져 숙고했다. 백택이 헛소리를 할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묵옥이라면 가능한 이야기였다.

    “사실 이 일은 원강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돕기로 결정하고 나섰지요. 그 일을 저도 후회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허나 후회한다고 한들 되돌릴 수 있는 일이 아니지요…….”

    백택은 회한에 젖어 한숨을 내쉬었다.

    “확실히 이제와 후회해도 부질없는 일입니다.”

    악면이 탄식하고 일어나 자리를 뜨려고 했다.

    “도올과 주염도 죽었습니다. 만황 전체에 이제 저와 악면 수사 그리고 라후만 남았단 말입니다.”

    백택의 말에 악면이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겨우 우리만…….”

    간신히 몸을 돌려 백택을 보는 그의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수라혈문을 다시 열어 만황성전을 불러내 다른 이들의 후손들을 모아 힘을 계승하게 하고는 있다지만. 그들을 육성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천정이 그걸 알고 만황에 손을 쓸까 봐 걱정되는 거군요. 그래서 나와 라후더러 돌아와 그들을 지켜달라는 겁니까?”

    다시 의자에 앉은 악면이 몸을 굽히고 물었다.

    “만황은 악 수사와 라후 수사가 간절히 필요합니다.”

    백택이 악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줄곧 바깥을 떠돌기는 했지만 어찌 만황으로 돌아올 날을 기다리지 않았겠습니까. 천정이 우리에게 진 피의 빚은 언젠가는 갚아줘야 한다 맹세하고 있었습니다.”

    눈을 부릅뜬 악면의 기운이 한순간에 사나워졌다.

    “그날이 멀지 않았습니다.”

    백택이 중얼거렸다.

    이때 악면이 미간을 좁히며 백택을 쳐다보았다.

    “흥미롭지 않습니까? 온 김에 같이 봅시다.”

    백택도 같은 것을 감지했기에 입을 열었다.

    그가 손을 저어 금색 불길을 펼치자 그 속에서 한립의 모습이 나타났다.

    진령 허상들에 둘러싸여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한립!

    “겨우 인족이 저렇게 많은 진령혈맥을……. 나와 원강의 혈맥까지 지니고 있는 것입니까?”

    악면도 놀라워했다.

    “그뿐이 아닙니다. 제게 도올과 주염 후예의 피까지 달라 해서 가져갔습니다.”

    백택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때 불길 속에 있던 한립의 품속에서 하얀 옥병이 날아올라 금색 불길에 녹아버리고 핏방울 두 개가 안개로 증발해 한립의 몸으로 스며들었다.

    마지막 두 개의 진령혈맥을 흡수한 한립의 몸에서 경칩십이결 공법이 자동으로 운용되어 핏빛을 터트렸다.

    하얀 머리에 붉은 발을 지닌 거대 원숭이와 기다란 꼬리에 깃털 날개를 지닌 얼룩덜룩한 거대 호랑이가 진령 허상 대열에 합류했다.

    “저러다 그냥 몸이 터져 죽는 것 아닙니까?”

    악면이 몸을 더 앞으로 기울이며 화면에 집중했다.

    “그렇지 않다는 게 가장 흥미로운 대목입니다.”

    백택이 웃음 지었다.

    그의 말대로 따라가듯이 한립 주위의 진령 허상들이 하나씩 그의 몸으로 돌아가 다채로운 빛을 밝혔다.

    놀랍게도 그때마다 한립이 각각의 진령 본체로 변신하고 있었다.

    “어떻게 저렇게!”

    놀란 악면이 탄성을 터트렸다.

    “진령 혈맥을 녹이는데 특화된 공법을 익혔더군요. 보시다시피 대단합니다. 보아하니 공법을 완벽하게 펼치는데 필요한 진령 혈맥들을 이제 다 모았나 봅니다.”

    “저 녀석은…….”

    “이미 조사를 해보았는데 우리의 적은 아닙니다. 그보다는 천정을 아주 골치 아프게 한 존재이고요.”

    백택이 이 말을 하며 웃음 지었다.

    “일부러 만황성화에 들어가 혈맥융합을 완성할 수 있게 도왔다는 소리로 들립니다?”

    “이렇게 한 목적이 어디 그뿐이겠습니까. 16대 만황 종족의 실력자들이 그가 진령혈맥들을 융합하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그를 통해 얼마나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지는 각자의 능력이겠지만요.”

    “만황 종족을 배양하려 고심을 하기는 하십니다. 나쁜 방법이라 여기지는 않지만 그래도 인족이 만황성전에 들어가려 하다니 당돌하지 않습니까? 아마 저 문은 열지 못할 거예요.”

    “글쎄요. 제 생각은 다릅니다. 현명한 녀석이에요. 제 주제를 모르고 무턱대고 도전한 게 아니라 처음 문을 보고 체내의 혈맥이 감응했기에 나선 겁니다.”

    백택이 고개를 저으며 하는 소리에 악면도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한립은 괴성을 지르고 전신에서 검은빛을 방출했다. 삼두육비 마신이 금색 불길을 가르고 두 번째 문을 향해 달려들었다.

    쾅! 쾅! 쾅!

    류낙아 등과 달리 문이 열리지 않고 커다란 충돌음만 들려왔다.

    “저게 인족의 한계입니다. 만황성전이 그의 혈맥을 인정하겠습니까?”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악면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게 스스로의 기연과 조화가 아니겠습니까.”

    백택도 기대를 거두고 손을 저어 불길 화면을 거두었다.

    수라혈문 내 공간.

    광장에 모인 족인들이 다시 한번 비아냥거리며 조소했다. 고생만 하고 결국 문 안으로는 들어가지 못한다 여긴 것이다.

    “한 형, 아쉽게 되었습니다…….”

    긴장해 보고 있던 호삼도 가부좌를 틀고 앉았는데 일이 터졌다.

    금색 불길 속의 한립이 다시 진령 허상들을 뿜어내자 하나씩 춤을 추듯 움직이며 구릿빛 문 속으로 흡수되었다.

    크아아!

    이어 한립이 괴성을 터트리며 온몸으로 문을 들이받고 여섯 개의 팔로 주먹을 불끈 쥔 채 문을 두드렸다.

    쾅! 쿵쿵쿵쿵!

    육중한 충돌음에 꿈쩍 않던 구릿빛 문이 슬금슬금 밀리면서 작은 틈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 틈 사이로 진득한 핏빛 세계가 펼쳐졌다.

    한립이 쾌재를 부르며 체구를 줄이고 사람의 모습으로 틈새를 지나쳤다.

    쿠쿵.

    거대 문은 금방 닫혔지만 한립이 이미 안으로 들어간 뒤였다.

    “드, 들어간 겁니까?”

    경원족 족장이 기함해 소리쳤다.

    “들어갔습니다. 인족이, 인족이 저 안으로…….”

    다들 놀라 감탄을 하며 시끄럽게 떠드는 가운데 리기마만이 숙연하게 수결을 맺은 손을 거대한 문을 향해 뻗었다.

    문틈이 열린 순간 빠져나온 농염한 핏빛 안개가 그를 향해 몰려들었다.

    호삼이 그걸 보고 즉시 따라해 남은 핏빛 안개를 끌어당겼다.

    다른 사람들도 뒤늦게 왜 그러는지 알고 따라 했지만 문 틈으로 흘러나온 핏빛을 두 사람이 거의 차지해 아쉬워하며 남은 핏빛 안개를 나눠 흡수하기 시작했다.

    핏빛 안개를 흡수한 호삼은 두 눈이 핏빛으로 변했고 혼백이 요동치는 고통을 느끼다 전력을 다해 혈맥의 기운을 운용해 한참만에야 정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렇게 혼잡하고 포악한 기운이라니? 한 형은…….’

    호삼은 눈이 핏빛으로 변해서도 신기한 마음이 들었다.

    한편 리기마는 더 많은 핏빛 안개를 끌어가고도 호삼보다 상황이 나았다. 그러나 마음속으로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문 뒤의 세계로 간 한립이 십중팔구 죽을 거라 예상했기 때문이다.

    그 시각 구릿빛 거대 문 안.

    한립은 핏빛 돌풍 속에서 오락가락 날아다니고 있었다.

    겨우 몸과 마음을 가누고 주변을 둘러보자 망망대해와 같은 핏빛 허공에 짙은 피비린내만 코를 찔렀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거대한 핏빛 태양이 주위를 핏빛 광선으로 내리쬐었다.

    그리고 아래쪽에는 거대한 핏빛 소용돌이들이 폭풍 구름처럼 곳곳에 퍼져 서로 영향을 미치면서 폭발적인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놀랍게도 뭔가 익숙한 기운이었다.

    적린공경 안에서 혈맥에 이상이 발생했을 때 서로 충돌하던 것과 공간 안의 역량들이 비슷했다.

    추측이지만, 그의 몸이라는 작은 세상에서 발생하는 혈맥 간의 충돌과 핏빛 공간 안에서 발생하는 힘이 비슷해 문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던 것 같았다.

    생각을 정리한 한립은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경칩십이결과 천살진옥공을 동시에 운용하니 몸에서 핏빛과 검은빛이 밝게 퍼졌다.

    12가지 진령 허상이 고리를 이루고 주위를 맴돌았다.

    그의 몸에서 변화가 일어날 때 허공에도 변화가 생겨 아래쪽 핏빛 소용돌이가 더욱 빠르게 회전해 열두 진령 허상이 이룬 고리를 향해 돌진해왔다.

    고리를 이룬 진령 허상들은 목이 말랐던 것처럼 입을 크게 벌리고 그 핏빛 안개들을 꿀꺽꿀꺽 삼키고 있었다.

    “크윽…….”

    누가 등에 용암을 쏟는 것처럼 타는 듯한 고통을 느낀 한립은 혈관 안의 진령혈맥들이 미친 듯이 날뛰자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몸속으로 강대하기 짝이 없는 힘이 들어오고 있었다.

    눈은 새빨갛게 충혈되고 얼굴은 창백하게 질린 한립은 이가 갈릴 정도로 이를 악 깨물고 한 가지만 생각했다.

    ‘버텨야 해, 반드시……. 버텨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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