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9화. 세 개의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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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천호 허상이 점점 흐릿해지고 회백색 빛에 휩싸인 류낙아는 몸을 덜덜 떨며 고통스러워했다.
몸의 회백색 문양들이 굵고 복잡해져 등 뒤의 천호 허상도 꼬리가 늘어났다. 일곱 개, 여덟 개 마지막에는 아홉 개의 꼬리를 지닌 완전한 구미천호 허상이 되어있었다.
한립도 기뻐하며 안도했고, 류청을 비롯한 천호족 사람들은 엄청난 경사에 환호성을 터트렸다.
다른 부족 족인들도 기뻐하고 있었다.
정체 모를 류천호가 혈맥을 계승하느니 믿을 수 있는 류낙아가 나았다.
백택은 아무런 표정이 없었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이 결과를 즐겁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류천호는 받아들이기 싫어도 옆에 백택이 있어 딴짓을 하지 못했다.
류낙아를 시작으로 경전, 원산백, 추오족 백발 청년 그리고 흰둥이가 각자의 진령왕 혈맥을 받아들이고 있는데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뇌붕족 핏빛 돌기둥이 흔들리더니 화로의 만황의 불길이 펄떡였다.
그리고 핏빛 공간 자체가 외부에서 들려오는 엄청난 소리에 흔들리고 있었다.
수행의 고하를 막론하게 제대로 서 있지 못하고 비틀거렸는데 구미선호 등 다섯 진령왕 혈맥만 밝게 빛나 그들의 계승자를 보호했다.
의식이 요동치는 것을 느낀 한립은 급히 연신술을 발동해 마음을 안정시키고 바깥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팔황산 상공에 먹구름이 몰려들어 새까만 돌풍이 하늘과 땅을 잇고 있었다. 예전에 한립이 통천검진을 발동하며 일으킨 천지현상보다 몇 배는 규모가 컸다.
팔황산 전체가 흔들리고 있었다.
팔황산에 모인 만황 종족들은 급히 각자의 진영에 금제를 밝혔지만 큰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았다.
먹구름 깊은 곳에 거대한 검은 그림자가 유유히 떠서 머리통만으로도 하늘을 가렸는데 언뜻언뜻 보이는 비늘과 발톱만으로는 그 정체를 유추할 수 없었다.
핏빛 공간 속 백택이 기뻐하며 눈에서 두 줄기 기이한 빛을 쏘아 바깥을 보았다.
그걸 본 류천호가 홀연히 사라져 구미선호 허상 옆에 나타나더니 거대 손으로 허공을 갈랐다. 강제로 혈맥의 힘을 취해 달아나려는 것이었다.
“무엄한 것!”
휙 몸을 돌린 백택이 차갑게 소리쳤다.
그리 크지 않은 소리에 핏빛 공간 전체가 얼어붙었다.
류천호의 힘도 그대로 멈춰 혈맥의 힘을 훔치지도 달아나지도 못했다. 너무 놀라 심장이 떨어질 것만 같았다.
“감히 내 앞에서 도둑질을 하려 하다니, 살기가 싫었던 모양이로구나.”
냉랭한 얼굴의 백택이 손가락을 까딱였다.
굵직한 손가락 허상이 류천호 앞에 나타나 그의 가슴을 찍었다.
푸욱!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류천호는 몸이 거의 절반으로 뜯어져 나가 피를 콸콸 쏟아냈다.
입에서도 왈칵 피를 쏟은 류천호는 회백색 빛에 휩싸여 투명하게 변해갔다.
“환유몽경?”
코웃음 친 백택이 소매를 털어 무형의 힘으로 핏빛 공간 전체를 장악했다.
수백 장 허공이 웅웅 떨리면서 회백색 빛덩이를 응축해 펑, 터트리더니 류천호가 다시 피를 토하며 나가떨어졌다.
“삼라만상(參羅萬像)!”
힘겹게 숨을 내쉰 류천호는 양손을 미친 듯이 움직여 복잡한 허상들을 만들어냈다.
눈을 제대로 뜰 수 없는 회백색 빛이 터져 나오고, 해와 달, 별, 산과 강, 바위, 초목, 궁전, 뇌전, 화염, 사람들, 짐승들 따위의 모습들이 떠올랐다.
공간에 있던 사람들은 눈앞이 뿌옇게 변하더니 의식도 새까맣게 차올라 모든 의식의 힘이 환술 세계에 잡아 먹히고 있었다.
얼굴을 굳힌 백택이 손가락 끝에서 하얀빛을 밝혀 허공을 그었다.
촤악!
삼라만상의 환영은 금방 사라졌지만 류천호는 보이지 않았다.
의식을 회복한 사람들이 놀라 숨을 헐떡였고, 한립도 거칠게 숨을 쉬며 눈에 공포가 스쳤다.
방금 혼백이 강제로 몸에서 뜯겨나가는 느낌을 받았다.
백택은 그들을 돌보지 않고 오른손으로 핏빛 공간 어딘가를 쥐어 하얀 거대 손바닥을 날렸다.
퍽!
공간 어딘가가 찢어지면서 류천호가 하얀 손으로 떨어져 내렸다.
하지만 곧 찢어진 공간이 흔들리고 거대한 힘이 그 속에서 새어 나와 백택의 빛의 손을 막았고, 그 사이 류천호는 또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한패가 있었구나.”
백택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류백재 등은 어떻게 된 일인지 영문을 몰라 미간을 좁혔다.
류청이 입을 열려다 마는데 백택이 먼저 류낙아를 보며 말했다.
“이 일은 차후에 내가 조사를 할 것이니. 지금은 혈맥을 전승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 마음을 다잡고 네가 해야 할 일을 하거라.”
류낙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의식이 재개되자 백택은 두 손에서 금빛을 뿜었고, 여덟 개의 돌기둥에서 핏빛이 성대하게 일어나 상공의 핏빛 구름으로 솟아올랐다.
휘이이…….
공간에 원시만황의 기운이 차오르고 있었다.
쿠쿠쿵.
금빛과 핏빛이 어우러져 놀랍게도 또 다른 거대한 문 세 개를 만들었는데 황금으로 주조를 한 것처럼 광택이 흘렀다.
격동한 만황 족인들은 당장이라도 엎드려 절을 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고, 인족인 한립도 경외감이 들었다.
눈을 가늘게 뜬 한립이 왼쪽 문부터 차례로 살피니 첫 번째 문에는 여덟 개의 각기 다른 진령 조각이 새겨져 있었다. 조각들이 발산하는 진령의 기운이 강해 금방 눈을 돌리고 싶게 만드는 위압감이 전해졌다.
두 번째 문은 인공적으로 조각한 흔적 없이 대충 문 모양만 갖추고 있어 만황의 황량함을 드러냈다.
한립이 두 번째 문을 보았을 때 기묘한 감응이 발생했다.
눈앞의 문이 꿈틀거리는 것처럼 보이고 그를 다른 세계로 빨아들였다. 한립은 몸이 기름에 튀겨지는 것처럼 고통스러웠으나 체내의 진령혈맥은 마치 원래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온 듯 즐겁고 사납게 날뛰었다.
참기 힘든 열감에 한립의 목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세 거대 문에 시선을 빼앗겨 몰랐지만 백택이 그걸 감응하고 힐끔 그를 보았다.
그도 불가사의하다는 기색이었다.
백택은 그를 돕지도 막지도 않고 그저 신경을 써서 관찰하기만 했다. 아무래도 한립이 언제쯤 스스로 그런 상태에서 빼져 나오는지 지켜볼 셈인 듯싶었다.
한립은 몸의 이상을 느끼고 크게 놀랐다.
‘뭐였지?’
다급히 연신술을 발동해 동요를 가라앉히고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닦고 나니 주위 사람들은 아무도 그의 변화를 모르는 것 같았다.
다른 만황족인들은 두 번째 문을 보고도 금방 시선을 떼는 게 눈에 들어왔다.
‘이게 무슨 현규들이 왜…….’
몸에서 미미하게 폭죽 터지는 소리가 들리고 현규 하나가 그냥 뚫려버렸다.
“저런 기연이 있나. 보는 것만으로 현규를 뚫다니. 보통이 아니로구나…….”
백택이 그런 그를 살피고 혼자 중얼거렸다.
그러는 동안 한립도 그 원인을 짐작하고 두 번째 문으로 다시 시선을 주었다.
묘한 세계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은 착각은 재현되지 않아도 체내의 진령혈맥이 신이나 거대 문을 향해 다가가고 싶은 열망을 표했다.
한립은 아쉬운 마음을 억누르며 시선을 마지막 구릿빛 문으로 돌렸다.
다른 문보다 더 조악한 문은 사람이 손을 댄 흔적이라고는 없이 운석 비라도 맞은 것처럼 움푹움푹 들어가 있었다.
“저 세 개의 문 뒤의 공간이 진정한 만황성전이라 할 수 있다. 만황산의 석전은 만황성화를 놓기 위한 공간에 불과하고.”
백택의 목소리가 공간 전체에 울렸다.
“그럼 만황성전이 세 개란 말씀입니까?”
류청도 놀라 물었다.
“만황성전은 단 하나이다. 세 곳의 문으로 같은 성전으로 들어갈 수 있으나 어느 층으로 갈지가 달라지지. 첫 번째 문은 만황팔왕 혈맥의 근본이 되는 곳으로. 다섯 종족의 전승자들은 들어가 보거라.”
백택이 첫 번째 문을 보고 말했다.
“예!”
류낙아 등 다섯 명이 힘차게 답했다.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경전이 먼저 금빛 화염 속으로 날아들었다.
끄아악…….
불길로 뛰어들고 나서 끔찍한 비명이 들려왔다. 다들 화들짝 놀라 보니 경전의 몸에 불이 붙어 온몸 피부가 거북 껍질처럼 흉측하게 갈라져 있었다.
“만황성화는 몸 안의 찌꺼기를 불살라 줄 테지만 그 고통을 참아내야만 진정으로 혈맥의 힘을 계승하게 될 것이다.”
백택은 느긋하게 덧붙였다.
괴성을 터트린 경전은 불길 안에서 몸을 부풀려 하얀 얼굴에 붉은 손을 지닌, 머리에 뿔이 난 거대 원숭이로 변했다.
머리의 뿔로 거대 문을 밀치고 안으로 들어가자 그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추오족 소주가 히죽 웃고는 펄쩍 뛰어올랐다. 뒤이어 류낙아, 원산백도 화염 속으로 몸을 던졌다.
흰둥이가 가장 마지막이었다.
포효소리가 연이어 들리고 다들 경전처럼 본체를 드러내고 거대 문을 열고 안으로 사라졌다.
끔찍한 비명이 가득하던 공간이 고요해졌다.
“나머지 사람들은 이 광장에서 수련하거라. 혈육의 기운이 성전 안보다는 못해도 놓치기 아까운 기회일 테니.”
백택의 충고에 만황 수사들이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폐하, 첫 번째 문이 혈맥 전승인들을 위한 곳이라면 저희는 다른 두 문으로 들어가 수련하면 안 되는 것입니까?”
백배귀원족 족장이 질문했다.
그 말에 감히 그런 희망을 품지 못했던 이들이 고개를 들었다.
“저들은 혈맥의 선택을 받았기에 진령왕 혈맥이 비호를 해서 무사히 문을 통과한 것이다. 너희들은 비호 없이 어떻게 들어갈 생각이지? 죽음이 두렵지 않은 자는 도전해 보아도 좋다. 어디 너희 중 누가 문을 열 수 있는지 지켜보겠다.”
“제가 허튼 생각을 했습니다…….”
백택의 대답에 백배귀원족 족장이 목을 움츠렸다.
“다들 안심하고 수련에 임하거라. 계승자들이 돌아오면 다시 수라혈문을 열어 바깥으로 내보내 줄 것이다.”
“존명!”
만황 수사들이 우렁차게 답할 때 누군가 불협화음처럼 따로 목소리를 냈다.
“폐하, 제가 도전해 보고자 합니다.”
그 말에 다들 깜짝 놀라 누가 말한 것인지 확인을 하는데 그들이 가장 무시하던 인족 한립이었다.
“제 주제도 모르고, 어디서…….”
경원족 족장이 화가나 질책했고 다른 만황종족들도 분분히 욕을 해댔다. 호삼과 리기마도 이번에는 심했다고 생각했는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실례인 줄은 알지만 두 번째 문을 들어가 보고자 하는데, 청을 들어주실 수 있으십니까?”
한립은 포권을 하고 재차 말했다.
“자네는 만황에 은혜를 베풀었으니 도전을 하겠다면 불가능할 것은 없네. 허나 조언하고 싶은 것은, 저 문은 보통 문이 아니란 걸세. 만황계역에 얼마나 많은 종족이 살고 있는지는 알겠지? 그중 여덟 명이 탈속하여 진령왕이 되는데 저 문이 연관되어 있다는 점을 알려주는 바이네.”
미간을 좁힌 백택이 말했다.
놀라운 이야기였다.
“쉬운 일이 아닐 텐데 정말 도전을 해볼 텐가?”
백택이 다시 묻는 말에 한립도 생각을 해보았다. 여덟 진령왕이 넘어선 고비를 그도 넘어설 수 있을 것인가.
“도전해 보겠습니다. 제 뜻을 받아주시기를 바랍니다.”
금방 마음을 정한 한립이 말했다.
몸에 지닌 혈맥의 힘을 믿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어떻게든 빠르게 실력을 높여 금동을 구해내야 한다는 책임감도 있었다.
“……그리 마음을 정했다면, 뜻대로 하게.”
백택은 망설이다 답했다.
“감사합니다.”
“누구든 만황성화를 통과해 문 안으로 들어가 보고 싶은 자는 도전하라. 허나 그 대가는 스스로 책임져야 할 것이다.”
백택은 이 말을 남기고 홀로 수라혈문을 넘어 떠나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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