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2117화 (1,874/2,000)
  • 2117화. 변수

    *

    “라후, 유천곤붕 두 분 대인은 만황으로 돌아올 생각이 아직 없으신 듯하군.”

    리기마가 그걸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두 분 선배님은 어째서 백택 선배님처럼 만황에 남아계시지 않는 겁니까?”

    한립은 궁금하던 것을 물었다.

    “라후 선배님과 유천곤붕 선배님은 모두 떠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이라 늘 여러 세계를 돌아다니시지. 나도 그분들을 직접 뵌 적이 없네. 선계가 난리가 날 조짐이 보이니 만황을 위해 두 분이 어서 돌아오시기를 바라지만 말이야.”

    다섯 종족들의 진령왕 허상이 만들어지자 백택은 더는 만황의 불길을 조종하지 않고 다시 하나로 뭉쳐 한 사람이 되었다.

    “다섯 혈맥의 힘을 소환하는 데 성공했다. 완전하지는 않아도 그럭저럭 충분할 게야. 다섯 종족의 계승인은 진령왕 혈맥을 융합하거라.”

    “감사합니다, 폐하!”

    백택의 분부에 경원족, 추오족 등 다섯 종족의 족인들이 허리를 굽혀 감사를 표했다.

    오늘 다섯 진령왕 혈맥을 소환한 것은 백택의 도움이 없었으면 영영 불가능할 일이었다.

    백택은 손을 젓고 혼돈족과 뇌붕족에게 걸어갔다.

    진작 계승자를 정해 둔 경원족, 추오족. 반산원족에서는 경전, 백발청년, 원산백이 나와 진령 혈맥 옆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고 묵안비휴는 흰둥이 혼자라 상의하고 말 것도 없었다.

    천호족에서는 류낙아가 다른 천호족 젊은이들의 질투 어린 시선을 받으면서 구미선호 허상 옆에 앉아 융합을 시도하려 했다.

    “기다려주십시오!”

    이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바깥쪽에서 들려왔다.

    회백색 빛이 천호족 무리 옆에 떨어져 중년 사내로 변했다.

    온화하게 생겼지만 눈빛은 냉랭한 중년인이었다.

    “누구냐!”

    갑작스러운 일에 놀란 만황 족인들이 소리쳤다.

    진령왕 혈맥 계승이 만황에 얼마나 중요한 일인데 변고가 생기게 둘 수 없었다.

    한립은 나타난 사람을 보고 흠칫 놀랐다.

    회색 장포를 입은 중년인은 류백재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냐, 류백재와 같은 얼굴이지만 분위기가 다르다.’

    눈을 빛낸 한립은 고개를 저었다.

    눈앞의 사내는 서늘하고 음산한 느낌이 들어 류백재와는 다른 사람이라 판단한 것이다.

    그런데 또 왠지 모르게 익숙한 게 어디서 만난 적이 있는 것 같았다.

    “저자는!”

    리기마가 눈을 가늘게 떴고, 천호족 족인들은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입을 쩍 벌렸다.

    “저도 천호족입니다. 구미선호의 진령왕혈맥을 두고 경쟁할 자격이 되겠지요? 의식을 망치려는 것이 아니니 갑자기 끼어든 것을 양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회포 사내가 주변 사람들을 향해 공수를 해보였다.

    그의 몸에서 퍼져나간 회백색 빛에 진한 천호혈맥의 힘이 느껴졌다.

    안색이 변한 천호족 사람들이 강렬한 기운에 밀려나서 류청과 그 옆의 키가 크고 작은 두 중년 사내만 제대로 서 있었다.

    허공으로 떠올랐던 류낙아는 기운의 파동을 직격으로 맞아 얼굴이 하얗게 변해 떨어져 나갔다.

    그때 류낙아 곁에 한립이 나타나 그녀를 부축하고 손에서 금빛을 뿜어 한 층의 방패를 만들어냈다.

    한숨을 돌린 류낙아가 작게 감사를 표했다.

    한립은 그런 류낙아를 살필 틈도 없이 회포 중년인을 주시하고 있었다.

    대라경 최고봉의 사내는 흑천마조와 맞먹는, 아니 조금 더 강한 기운을 발산하는 중이었다.

    ‘실력이 강한 자이다. 우리가 상대할 수 없으니 자리를 피하자꾸나.’

    한립은 류낙아에게 전음을 보내고 뒤로 물러섰다.

    혼돈족과 뇌붕족이 있는 곳에 백택이 서서 회포 사내를 보고 있었는데, 마치 자기와는 상관없는 일이라는 듯 지켜볼 심산인 것 같았다.

    다들 회포 중년인의 기운을 느끼고 입을 다문 채 조용히 물러났다.

    천호족 족인들 속에서 류청도 힐끗 백택의 태도를 살폈다.

    상대가 그냥 한쪽에 물러나 있는 것을 본 류청은 표정을 바로 하고 다른 족인들을 시켜 뒤쪽의 류낙아를 보호하게 했다.

    한립이 먼저 류낙아를 챙긴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가 류낙아를 아낀다는 것에는 의문을 품지 않았기에 그냥 놔두었다.

    한립과 류낙아 주위로 호삼, 목 장로 그리고 태을경 최고봉의 까만 얼굴 노인이 나타났다.

    “한 수사, 위험한 순간 낙아 아가씨를 위해 나서주어 고맙습니다.”

    호삼이 공수를 했다.

    “낙아를 한 번도 남이라 생각한 적 없습니다. 해야 할 일을 한 것이니 그러실 것 없습니다.”

    한립은 힐끗 목 장로와 다른 노인을 보고는 호삼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번에 보고 얼마 시간이 지나지도 않았는데, 한 수사는 더 강해진 것 같습니다? 특히 이렇게 강자들이 많은 자리에서도 항상 평정심을 유지하시는 게 대단합니다.”

    호삼이 그를 훑고 감탄했다.

    그 말에 한립도 다른 사람들을 살폈다.

    핏빛 공간 내의 여러 대라급 존재들이 자신의 기운을 내뿜어 회포 중년인의 기운을 밀어내고 있었다. 그렇게 공간에 대라급 존재들의 위압감이 자욱하게 퍼지니 태을경 수사들은 겉으로는 태연한 척해도 간담이 서늘할 터였다.

    그래서 경지가 다른 수사들끼리 싸우면 이미 기세가 9할은 꺾인 상태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한립은 수많은 대라급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았다. 연신술을 익혀 심경의 경지가 높은 것도 하나의 이유였고, 다른 태을경 수사들과 달리 시간법칙을 익힌 그의 실력이 더 셀 수밖에 없었다.

    아직 대라급이 된 건 아니었지만 세월신등을 장악하고 체내의 시간정사의 수가 대폭 늘어난 데다 통천검진까지 깨우치면서 거의 엇비슷한 힘을 품고 있는 덕이었다.

    한립은 그제야 자신도 그걸 깨닫고 암암리에 좋아했다.

    “과찬이십니다. 저는 실력이 부족해 류청 족장님께서 어떻게 강적을 물리치실지 궁금할 따름입니다.”

    한립이 차분히 답하자 호삼도 더는 그 일을 캐묻지 않고 전방을 살폈다.

    긴장한 천호족 족인들이 회포 중년인과 대치 중이었다.

    “류천호, 그런 짓을 벌여 놓고 오늘 수라혈문 안에 나타나다니 담이 크구나!”

    “무슨 일을 말하는 것인지 모르겠군요. 확실히 말씀해 주시지요.”

    류천호는 류청의 말에 담긴 진득한 살의를 개의치 않고 웃음 지었다.

    “기억력이 좋지 않은 것 같다만, 황천길에서 천천히 생각해 보면 될 것이다!”

    류청이 음산하게 웃으며 먼저 손을 썼다.

    류천호 주변에 핏빛 공간이 사라지고 칠흑 같은 어둠이 몰아쳐 그 안에 거대한 은하수가 회전하기 시작했다.

    쿠르릉!

    거대한 별들이 움직이며 공간 전체를 뒤흔들었다.

    별들은 운석처럼 날아들어 류천호를 퍽퍽 치며 그의 몸에서 피를 내고야 말았다.

    “환경영역(幻境靈域)을 제법 수련했습니다만, 이걸로 날 붙들어 둘 수는 없을 겁니다.”

    류천호는 운석들에 맞아 튕겨 나가면서도 오른손으로 수결을 맺었다.

    그의 미간이 갈라져 회백색 눈이 나타나며 무궁무진한 회백색 화염들을 방출했다. 정순한 환영법칙이 담긴 불꽃에 날아들던 운석들은 물론 검은 하늘이 무너져 다시 핏빛 공간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류천호는 다친 곳이라고는 하나도 없어 보였다.

    “환진화염(幻眞火焰)! 모든 환술과 상극인 술법을 익혀 왔구나.”

    류청은 자신의 영역이 깨진 것에 당황하지도 않고 비웃음을 흘렸다.

    류천호가 무슨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푹, 핏빛 장도가 그의 배를 뚫고 나왔다. 요사스러운 핏빛이 반작이는 장도는 그의 단전을 관통하고 있었다.

    동시에 두 개의 번쩍이는 하얀 빛의 손이 류천호의 가슴을 때렸다.

    핏빛 장도와 두 빛의 손의 주인은 류청 양옆에 서 있던 키가 크고 작은 천호족 사내들이었다.

    피를 토한 류천호의 기운이 급격히 약해졌다.

    “류천호, 넌 회계와 결탁해 주인님을 해쳤다! 그날의 빚을 갚겠다!”

    키 큰 사내가 핏빛 장도를 들고 소리쳤다.

    소리를 지르는 와중에 회백색 빛이 감돌며 사내의 용모가 달라졌는데, 놀랍게도 푸른 장포를 입은 류백재였다.

    류백재가 든 흉살기가 그득한 핏빛 장도는 천호화혈도였다.

    키 작은 남자는 기습을 마치고 뒤로 물러났지만 류천호 가슴에 깊이 인장을 남긴 빛의 손은 떨어지지 않았다.

    하얀빛이 구불구불 류천호 체내로 들어가 오장육부를 찢어발기려 하고 있었다.

    몸을 부들부들 떠는 류천호의 코와 입에서 부단히 핏물이 새어 나왔다.

    “류 수사, 기습이 군자가 할 일은 아니란 것을 알지만 당신이 했던 비열한 짓을 생각하면 우리를 원망할 수는 없을 겁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보다 수행이 월등한 당신을 제압할 수 없어 이런 수를 낸 것이니까요.”

    키 작은 사내가 정색을 하고 말했다.

    그는 말을 하며 용모가 달라져 하얀 장포를 입은 류백재, 류천호와 똑같이 생긴 사람으로 변신했다. 다른 점은 훨씬 선량한 분위기를 풍긴다는 것이었다.

    “류백재, 류호연 너희들이 천호족으로 돌아왔을 줄이야! 하긴 너희나 되니 소리 없이 내 곁에 다가와 기습을 할 수 있었겠지.”

    꼴이 말이 아닌데도 류천호은 무표정하게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걸 본 류청, 류백재, 류호연의 안색이 달라졌다.

    눈앞의 류천호는 기운, 촉감, 법칙파동까지 모든 게 분명해서 실체가 분명했다. 환영법칙이 절정에 달한 세 사람이 그렇게 판단했으면 환술은 아니란 이야기였다.

    류백재가 기합을 터트리며 천호화혈도를 키웠다.

    푸확!

    류천호의 몸이 폭발해 살과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그런데 그걸 본 류백재의 표정이 도리어 심각해졌고, 바로 천호화혈도에서 핏빛을 내뿜어 도기의 막으로 전신을 감쌌다.

    쿵!

    그러나 도기의 막이 완성되자마자 굉음이 들리며 깨져나갔다. 류백재도 장도를 든 채 무언가에 맞아 펑 날아갔다.

    류호연이 놀라 눈동자에 수정빛을 반짝이며 하얀빛을 두른 두 손으로 허공을 강타했다.

    쿵!

    요란한 빛 속에 류호연도 바람 속의 마른 풀잎처럼 날아올랐다.

    그걸 본 류청이 전신에서 회백색 빛을 일으켜 수십 장 규모의 응축된 영역을 발산했다.

    뒤쪽의 천호족 족인들도 각자 영역을 펼치고 선기를 발동해 그들과 구미선호 진령혈맥 허상을 보호했다.

    호삼, 목 장로, 까만 노인도 영역과 선기로 류낙아를 지키려 했다.

    한립은 천호족처럼 긴장하지 않고 묵묵히 구유마동을 운용해 주변을 살피면서 의식으로 류백재와 류호연을 날려버린 게 뭔지 찾으려 했다.

    아쉽게도 조사를 해보아도 알아낼 수 있는 게 없었다.

    “흠?”

    다른 만황 무리 속에서 백택이 이상하다는 듯 기척을 냈다.

    원래 한립 옆에 서 있던 리기마는 그가 류낙아를 구하러 간 뒤, 백택 옆으로 돌아와 있었다.

    “부왕, 왜 그러십니까?”

    리기마가 백택의 표정을 살피고 있다 조용히 물었지만 아무 대답도 들을 수 없었다.

    류청이 엄중히 방비하는데 예상했던 공격이 날아들지 않았다.

    파동이 일고 터져나갔던 류천호의 몸 조각들이 반투명하게 변해 허공에 녹아들었다. 살점들이 완전히 사라진 순간 다시 등장한 류천호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상한 데가 하나도 없었다.

    “이런, 환유몽경(幻有夢境)이었구나!”

    류청은 소리를 높이며 안색이 수시로 달라졌다.

    천호족 사람들도 환유몽경이라는 소리에 경악하고 있었다.

    “낙아야, 류청 족장이 말한 환유몽경이 무슨 신통인지 설명해 줄 수 있겠느냐?”

    한립은 똑같이 당황하고 있는 류낙아에게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천호족에서 전해 내려오는 전설과 같은 신통이에요. 본 족의 성조 구미선호께서 만드신 그분 말고는 류기 노조 외에 아무도 펼친 적이 없는 신통이고요. 듣기로 환유몽경을 펼치면 모든 부상을 환상으로 바꾸어 없앨 수 있기에 거의 무적의 신통이라고 해요.”

    “그런 신통이!”

    한립은 왜 다들 깜짝 놀라는지 그제야 알게 되었다.

    날아갔던 류백재와 류호연도 큰 부상을 입지는 않았는지 돌아와 반격하려다 류청의 말에 멈춰 섰다.

    “네가 어떻게…….”

    류백재는 믿고 싶지 않은 듯했다.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