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2116화 (1,873/2,000)

2116화. 수라혈문(修羅血門)

*

백택은 생각을 해보다 고개를 끄덕여 청을 수락했다.

경전이 그걸 보고 한립을 보는 눈빛에 더욱 강한 분노가 깃들었다.

“만황종족의 은인인 한 수사를 위해 우리 추오족은 기꺼이 그리할 것입니다.”

추오족 소주도 싫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웃는 낯으로 먼저 나섰다.

활짝 펼친 그의 손바닥에서 정혈 한 방울이 더 밀려 나와 날아갔다.

불만스러운 얼굴의 경전이 추오족 소주를 보며 뭐라 하기 전에 추오족 소주의 전음이 들려왔다

“경전 수사, 우리 사소한 일로 시간 끌지 맙시다. 우리가 진령왕 혈맥을 계승하기만 하면 그야말로 신분이 하늘과 땅 차이로 달라질 텐데, 그때 저 녀석을 어떻게 처리하든 누가 뭐라 하겠습니까?”

경전도 그 말이 일리가 있다고 여겨 잠자코 정혈 한 방울을 밀어내 한립에게 날려 보냈다.

한립은 두 핏방울을 받아 꼼꼼히 살펴보고는 추호족과 경원족 소주가 아무런 짓도 해놓지 않아 오히려 놀랐다.

“감사합니다…….”

옥병을 꺼내 정혈을 넣어둔 한립은 자신의 정혈 한 방울을 백택 쪽으로 날려 보냈다.

백택의 손짓에 핏방울이 보글보글 끓더니 산악거원의 정혈을 제외한 나머지 혼잡한 피는 깔끔하게 연소해 버렸다.

그가 손가락을 튕겨 남은 핏방울을 화로 속으로 던져 넣었다.

쿵!

화로 안에 기름이라도 부은 것처럼 불길이 크게 치솟아 산악거원의 미간으로 불꽃이 날아갔다.

처음처럼 팔황산 산길에서 빛이 치솟아 밤하늘에 여덟 개의 진령왕 허상을 띄우고 더욱 왕성한 빛을 방출했다.

이를 본 팔황산 중턱, 산 아래 그리고 진황성 안 만황 종족들이 분분히 바닥에 엎드려 다시 기도를 시작했다.

만황계역 깊숙이 천만년 동안 묻혀 있던 고대 제단도 이때 깨어나 금빛을 만발하며 밤하늘에 빛을 쏘아 올렸다.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만황의 생령들이 그 기운을 느끼고 엎드려 기도하니 만황계역 전체가 하나가 된 것 같았다.

만황산 정상, 허공에 사방팔방에서 모여든 핏빛들이 떠올라 광활한 혈홍색 빛의 문을 만들었다.

문 양쪽의 기둥에는 아수라(阿修羅)의 거대한 얼굴이 떠올라 하나는 분노해 눈을 치켜뜨고, 다른 하나는 밝게 웃으며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거대한 문 위로 만황 진령들의 허상이 떠올랐는데 원고팔왕과 그들의 혈맥 후손 그리고 진룡, 천봉, 백호, 현구 등과 같은 선계 진령들의 모습까지 보였다.

“수라혈문이 나타났다!”

“드디어 수라혈문이!”

광장에서 환희에 찬 환호성이 터져 나오고 그제야 반산원족 긴 눈썹 노인도 얼굴을 펴고 웃음 지었다.

이제 진령왕 조각상 앞 여덟 좌석은 더는 비어있지 않고 중앙에 백택 본인이 앉아있는 것 외에 도올, 조염, 구미선호, 묵안비휴 그리고 산악거원 다섯 개의 좌석에 허상이 채워졌다.

생생한 모습은 그냥 허상이 아니라 핏줄에 남겨진 진혼 같았다.

흰둥이는 자기도 모르게 묵안비휴 앞으로 가서 고개를 들고 담담히 앉아있는 사내를 쳐다보았다.

“보아하니 라후와 유천곤붕을 제외한 진령왕들은 전부 목숨을 잃은 게로구나…….”

백택이 나지막이 말하는데 슬퍼하거나 즐거워하는 기색 없이 그저 차분히 옛 기억을 되새기는 듯했다.

그가 손을 저어 핏빛 허상들을 흩어버리고 대전 중앙의 화로에 불꽃이 돌아와 주먹 크기의 핏빛 화염 구슬을 만들었다.

“가자꾸나.”

화염 구슬을 불러들여 쥔 백택이 만황 후예들에게 말하고 먼저 대전 앞 광장으로 나섰다.

“폐하…….”

백택의 등장에 다들 소리 높여 ‘폐하’를 외쳤다.

“만황의 부흥이, 오늘부터 시작될 것이다!”

백택이 낭랑히 외치고 화염 구슬을 높이 들어 핏빛 문으로 날려 보냈다.

펑!

화염 구슬이 산산조각나 핏빛 불바다가 빛의 문을 뒤덮고 작열하는 열기 속에서 진령 허상들이 나풀거리며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수라혈문이 정식으로 열린 것이다!

수라혈문 안은 혈홍색 세상이었다. 짙은 기혈의 기운이 파동을 이루어 바깥으로 새어 나왔다.

뒤따르며 혈문 안을 들여다본 한립은 적린공경 안에서 보았던 제단의 혈지(血池)보다 열 배 이상 농염한 기혈의 힘을 느낄 수 있었다.

광장 안 사람들도 그걸 느끼고 기쁨과 갈망의 눈빛을 보냈다.

“수라혈문이 열렸다. 이건 일생에 다시 없을 기연이니 광장에 선 사람들은 모두 안으로 들어갈 자격을 주겠다. 들어가자.”

백택은 한마디를 하고 먼저 문 안으로 들어갔다.

광장 안 수사들이 뜻밖의 은혜에 탄성을 내지르며 시끌벅적하게 몰려들었다.

영마족, 경원족, 천호족 등 팔왕의 직계 혈맥들과 그 족인들이 백택 바로 뒤에서 움직였다.

천호족의 류낙아는 움직이지 않는 한립을 보고 있었다.

“낙아 아가씨,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폐하께서 광장 사람들은 모두 들어가도 좋다고 하셨으니, 한 수사도 함께 들어갈 겁니다.”

누군가 다가와 조그맣게 말하는데, 바로 호삼이었다.

류낙아는 호삼을 향해 미소를 짓고는 성큼 핏빛 문 안으로 들어가고, 고개를 돌려 한립을 쳐다본 호삼도 그녀를 따라갔다.

여덟 종족들이 전부 들어간 후에야 나머지 종족들이 배분과 수행에 따라 차례로 안으로 들어서는데 순서가 엄격했다.

한립은 만황 종족들의 심사를 건드릴 생각이 없었기에 모든 이들이 들어간 후에야 수라혈문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백택이 한립의 진입을 허락했기에 불만이 있어도 그를 막거나 뭐라고 하는 사람은 없었다.

한립은 다른 만황 사람들의 적의와 경계심을 느끼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서 있었다.

수라혈문 안의 공간은 지면에 피와 살이 요동치는 것처럼 출렁이고 핏빛 안개가 진한 피비린내를 전해와 마치 어미의 뱃속에 들어가 태아가 된 기분이었다.

숨을 쉴 때마다 기혈의 힘이 몸 안으로 스며들어 기운이 펄펄 났다.

거대한 공간 상공에는 안개가 뭉쳐 핏빛 구름을 이루고 있어 적린공경의 유염혈운을 떠올리게 했다.

만황 젊은이들도 공간을 둘러보며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는데 류청 등 나이가 있는 이들만 평온했다.

백택이 주저 없이 앞으로 나아가자 여덟 종족을 시작으로 다른 사람들이 서둘러 쫓아갔고, 그들은 금방 핏빛 공간 깊은 곳으로 진입했다.

꼭 광장 같은 평평한 지면에는 여덟 개의 핏빛 돌기둥이 구름까지 뻗어 각각 여덟 명의 진령왕이 각인되어 있었다.

압도적인 기세가 느껴지는 게 당장이라도 진령왕들이 돌기둥에서 떨어져 나와 살아 움직일 것 같았고, 돌기둥 위쪽에는 각각 고풍스러운 모양의 암홍색 화로가 박혀 있었다.

백택, 유천곤붕, 라후 세 진령왕의 돌기둥을 제외한 화로들은 불길이 사라진 지 오래인 것 같았다.

족인들은 돌기둥 가까이에 모여 여덟 진령왕 조각을 향해 절을 올렸다.

경원족, 추오족, 반산원족, 천호족 족인들은 비통한 표정으로 주염, 도올, 산악거원, 구미선호 네 진령왕 돌기둥을 향해 엎드려 통곡했다.

흰둥이는 그냥 묵안비휴 돌기둥 앞에 서 있었는데 표정은 달라지지 않아도 눈빛이 물결쳤다.

한립은 만황 족인도 아니었고 그들처럼 엎드려 울 것도 아니라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천살진옥공을 살살 운용해 주변의 농염한 기혈의 힘을 흡수하니 몸 곳곳으로 강렬한 힘이 스며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새로운 현규들이 뚫릴 듯한 기미가 보였지만 이런 상황에서 전력을 다해 운공을 할 수 없어 조용히 기혈의 힘만을 흡수했다.

운공을 하며 핏빛 돌기둥을 살피던 그의 눈이 갑자기 반짝였다.

여덟 진령왕의 실력이 엇비슷했을 텐데 자신도 수행을 가늠할 수 없는 백택은 응당 도조경에 이른 존재일 터였다.

그렇다면 나머지 진령왕들도 도조였다는 말이었다.

만황계역의 세력이 만만치 않던데 이들 말고 다른 도조는 없는 걸까?

“진령왕의 죽음에 마음이 아픈 것은 이해하지만 현실을 받아들여야 할 때이다. 수라혈문의 열리는 시간에는 제약이 있으니 감정을 추스르고 진령왕 혈맥의 힘을 소환하도록 하지.”

백택은 잠시 기다려주다 입을 열었다.

경원족, 추오족 등 팔왕의 후손들이 눈물을 거두고 일어나 서둘러 자신의 혈맥이 속한 돌기둥 주변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영마족은 백택이 있었기에 소환할 필요가 없어 한쪽으로 물러났다.

묵안비휴의 후손은 흰둥이 한 명이라, 돌기둥 옆에 딱 한 명이 앉아있으니 그 광경이 처량했다.

한립이 흰둥이를 보며 미간을 좁혔다.

“한 수사.”

리기마가 한립 옆으로 날아들었다.

한립은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걱정하지 마시게. 진령왕 혈맥의 힘을 소환하는 것뿐이니 위험할 일은 없을 거야.”

“흰둥이 혼자 다른 종족들이 힘을 모아 하는 일을 해낼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걱정하지 말래도. 진령왕혈맥의 힘을 소환하는 건 머릿수로 되는 일이 아니니까. 흰둥이는 비록 혼자이나 묵안비휴 대인의 아들이니 그 혈맥의 힘이 얼마나 짙겠나. 오히려 다른 이들보다 수월하게 술법을 펼칠 수 있을 게야.”

“그런 것입니까?”

웃으며 말하는 리기마를 보고 한립도 마음이 놓였다.

“직접 보면 알게 될 것이야.”

종족들이 각각 소환 술법을 펼치기 시작했다. 자신의 손목을 그어 낸 피를 허공으로 띄워 복잡한 피의 진법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돌기둥과 주변의 핏빛 주술문양들이 공명했다.

흰둥이는 혼자였지만 핏물로 만든 진법의 힘이 다른 여섯 종족의 것보다 분명히 강했다.

백택이 보고 있다 흐릿하게 사라져 일곱 개의 똑같은 신형으로 갈라지더니 진령왕 돌기둥에 박힌 화로 옆에 나타났다.

주염, 도올, 산악거원, 구미선호, 묵안비휴 다섯 개의 돌기둥 옆에서 백택이 손을 까닥여 불빛을 뿜었다.

화륵!

불길이 사라졌던 화로에 다시 금색 불씨가 살아났다.

그걸 본 다섯 종족들은 전력을 다해 핏빛 진법을 발동했다.

백택의 입에서 주문 소리가 들리고 금빛과 핏빛이 합쳐져 주변을 가득 채웠다.

곤붕족과 혼돈족은 백택이 만황의 불길을 살려줄 것 없이 스스로 핏빛 진법을 발동하고 있었다. 그 두 돌기둥 옆에선 백택은 화로의 불길을 조종해 진법에 협조하도록 이끌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금빛과 핏빛이 섞인 파동이 널리 퍼져나가면서 각각의 선역을 돌며 강력한 소환의 의지를 퍼트렸다.

“시간이 좀 걸릴 것이네. 한 수사, 혈사대회가 끝나면 무엇을 할 생각인가?”

리기마가 보고 있다가 한립과 한담을 나누기 시작했다.

“저는…….”

한립은 리기마와 대화를 하는 한편 암암리에 기혈의 힘을 흡수하고 돌기둥의 상황도 놓치지 않고 살폈다.

그렇게 반나절이 지나 흰둥이 옆 핏빛 돌기둥이 먼저 반짝반짝 빛나더니 하얀 화염이 크게 일어 돌기둥 표면을 덮었다.

“진령왕 혈맥?”

한립의 눈이 밝아졌다.

하얀빛이 함유한 짙은 진령혈맥의 힘은 흰둥이의 기운과 흡사하면서도 훨씬 고귀한 느낌이었다.

“내 말이 맞지 않은가? 흰둥이가 가장 먼저 묵안비휴 대인의 혈맥의 힘을 소환해냈군.”

리기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얀빛은 곧 상서로운 짐승의 형태를 이루었다. 흰둥이와 닮았으면서도 훨씬 위풍당당하고 두 눈은 만물을 오시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특히 미간이 갈라져 형성된 세로로 길고 좁은 눈에서 기이한 검은빛이 흘러나왔다.

흰둥이도 새하얀 신수를 보며 두 눈에서 기이한 검은 빛을 뿜어냈다.

백택이 그걸 보고 얼굴이 밝아졌다.

흰둥이를 시작으로 다른 네 종족도 빠르게 결실을 맺고 있었다.

천호족 석상의 회백색 빛 덩이들이 구미선호의 허상을 이루었다. 그걸 본 천호족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무리 속에서 류낙아의 몸이 밝게 빛나더니 어깨와 손 등 노출된 피부에 회백색 문양이 떠올라 구미선호 허상과 공명했다.

류청이 감격한 얼굴로 류낙아를 지켜보았다.

이어서 경원족, 추오족, 반산원족의 돌기둥에도 진령왕 혈맥의 힘이 뭉쳐 허상을 이루었다.

혼돈족, 뇌붕족 돌기둥만 아직까지 반응이 없었다.

*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