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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2115화 (1,872/2,000)

2115화. 새로운 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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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립의 눈에 의외라는 기색이 스쳤으나 나머지 만황종족은 자신의 귀를 믿을 수 없다는 듯 놀랐다.

만황성전이 만황종족에게 얼마나 신성한 곳인데 인족이 들어간단 말인가.

리기마도 안색이 달라져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이었다.

“폐하, 아무래도 이건…….”

혼돈족장이 소리를 높였다.

“만황성전에 인족이라니요…….”

다른 족장들도 앞다투어 소리쳤다.

“절대 안 될 일입니다. 제발 다시 생각을…….”

추오족 소주와 경전은 다른 의미에서 눈빛이 복잡해졌다. 진령왕이 한립을 이렇게까지 신임하는 줄 몰랐었다. 이후에 보복이라도 당하는 것은 아닌지 우려되었다.

만황종족의 격렬한 반대에 한립도 망설였다.

“만황성전은 나와 다른 7명의 진령왕이 건립한 곳이다. 누가 들어갈 수 있고 누가 들어갈 수 없는지는 내가 결정할 일이야.”

미간을 좁힌 백택이 족장들을 훑었다.

“폐하…….”

다들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 폐하만 외쳤다. 그러나 백택은 이미 몸을 돌려 걸어가고 있었다.

리기마와 다른 제례 참가자들이 따라나서자 한립도 망설이다 따라붙었다.

석전 안으로 들어가자 떠들썩한 소음도 들리지 않게 되었다.

어둑한 대전 안에 화로가 놓여 있어서 안으로 들어선 사람들의 그림자가 길게 뒤로 늘어졌다.

주위를 둘러보니 도올, 주염, 라후, 백택, 산악거원, 유천곤붕, 구미선호 그리고 묵안비휴의 거대 조각상과 그 앞의 좌석들이 보였다.

돌로 만들어진 의자들은 아주 오랫동안 주인을 잃고 이곳에 놓여 있었다.

류낙아는 구미선호 조각상과 9개의 여우 꼬리를 보고 눈빛이 멍해졌다.

흰둥이는 자신과 닮은 묵안비휴 조각상을 봤지만 전혀 친근함을 느끼지 못하고 낯설기만 했다.

다른 사람들도 각자의 선조를 보며 호기심, 경외감 또는 열망을 느끼고 있었다.

“너희가 보고 있는 조각상들은 만황 원고시대의 여덟 진령왕들이다. 어떤 이는 내 벗이었고, 또 어떤 이는 한때 적이기도 했지만 만황계역의 안녕을 위해 힘을 모아 만황성전을 건립하고 수라혈문을 봉쇄하는 금제로 삼았다. 오늘 너희를 불러 모은 것은 너희가 지닌 진령왕 혈맥이 바로 그 금제를 여는 열쇠이기 때문이고.”

백택이 조각상들을 훑으며 입을 열었다.

“명을 내려주십시오, 폐하.”

선발된 만황 족인들이 입을 모아 답했다.

“라후와 유천곤붕은 성전을 건립하고 얼마 되지 않아 팔황산을 떠나 세상을 유람하고 있으나 나머지는 변고를 당해 생사를 알 수 없다. 성전을 열어봐야 그중 몇 명이 살아 있는지 알 수 있겠지.”

백택은 한립이 있는데도 만황진령의 비사를 줄줄 풀어 놓았다.

만황 종족에게 혈맥이 중요한 만큼 그 근원인 진령들은 일족의 영광이었다. 그런 진령왕들이 이미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는 말에 다들 얼굴이 신중해졌다.

“두려워할 것 없다. 진령은 곧 하늘이 낳아 기르는 법. 각종 신통과 천지법칙을 타고나는 만큼 죽는다고 해서 그 힘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오늘 수라혈문을 열면 그 안에 담겨 있던 천지대도의 힘이 성전으로 돌아와 진령왕의 혈맥을 계승한 너희들이 새로운 진령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백택의 말에 성전 안 사람들은 가슴이 울렁거렸다.

새로운 진령왕이 된다고?

만황 종족에게는 세상에 다시 없을 유혹이었다.

마음이 복잡하다 못해 이제 자신들의 노조인 진령이 살아 있기를 바라는지 아니면 죽었길 바라는지도 불분명해졌다.

백택은 그들의 반응을 눈에 담으면서 자신은 아무런 감정의 동요를 보이지 않았다.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았지만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이 화로의 불길은 8인의 진령왕들이 밝힌 정원화염(精元火焰)이다. 이렇게 약해진 것을 보면 대부분이 세상을 떠났다는 뜻이겠지. 만황 후예들은 앞으로 나서 명을 들으라.”

백택의 명에 만황 후인들이 화로를 중앙에 두고 모여 섰다.

한립은 살짝 뒤로 물러나 흰둥이 뒤쪽에서 상황을 관찰했다.

그의 분별 있는 태도에 다들 조금 안심했지만 그래도 인족이 이런 중요한 순간 끼어있다는 것이 불만이었다.

백택은 신중한 표정으로 두 손을 합장해 손바닥 사이에서 금빛 물결을 퍼트렸다. 이를 시작으로 화로 아래에서 금빛이 연꽃잎처럼 피어나고 있었다.

그걸 본 만황 후예들이 무의식중에 뒤로 물러서려 했다.

눈을 가늘 게 뜬 한립은 금빛이 만든 연꽃잎에 빼곡하게 주술문자가 적혀 혈맥의 기운을 내뿜는 것을 알아보았다.

두 다리가 굳은 한립은 다른 만황 족인들처럼 움직이지 못했다.

잠깐 놀라기는 했지만 금방 금빛이 그를 구속하는 게 아니라 체내의 혈맥과 강력한 연계를 맺는 중이란 걸 깨달았다.

강제로 끊으려면 끊을 수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냥 그대로 두었다.

체내의 진령혈맥이 금빛에 아주 친근하게 반응한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주술문자를 품은 금빛 연꽃은 대전을 가득 채웠고 진령왕 조각상들이 광채를 발하고 있었다.

백택은 추억을 회상하며 자신의 조각상 앞에 있는 좌석으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

“이제 다들 자신의 본원 정혈을 한 방울씩 취해 화로 속에 넣거라.”

그의 말에 족인들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손을 뻗어 목 속에서 정혈을 한 방울 밀어냈다.

똑, 똑, 똑…….

고요한 대전 안에 핏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8대 진령왕 혈맥의 정혈이 화로 속에 떨어져 활활 타오르는 금색 불길 속에 허상들이 떠오르고 있었다.

한립은 그 안의 허상들이 진령왕 본체의 모습을 띠고 있는 것을 보았다.

화로 안에서 빛이 번쩍하고 여덟 개의 불빛 허상들이 튀어나와 각각의 조각상 미간으로 쏘아져 들어갔다.

쿠쿵.

격렬하게 진동한 조각상들이 각기 다른 요란한 빛을 방출해 석전 안을 알록달록하게 만들었다.

동시에 팔황산의 여러 산길에서 보광이 하늘 높이 솟아올라 하늘을 비추었고, 여덟 방위에 진령 허상들이 자리 잡고 포효했다.

광장에 모여 있던 수사들이 그걸 보고 무릎을 꿇고 한목소리로 기도하기 시작했다.

산 정상의 당천종이 스스로 울리고 수많은 짐승의 울부짖음이 군가를 이루어 천리만리까지 웅장하게 퍼져나가고 있었다.

산 아래 진황성에서 등불이 환하게 켜진 거리로 몰려나와 있던 수백만 만황족인들이 성산에서 벌어지는 천기현상에 함께 무릎을 꿇고 기도를 했다.

사람들이 격동하고 있을 때 이변이 발생했다!

팔황산 밤하늘에 떠올라 있던 산악거원 허상이 문득 흐릿해지더니 사라져 버린 것이다.

훅.

곧이어 만황성전 안 산악거원 조각상의 미간에서 성화(聖火)가 흩어지고, 연쇄반응을 일으키듯 다른 조각상들도 미간에서 빠져나온 불꽃이 다시 화로로 돌아가 대전 안은 어두워졌다.

충격을 받은 광장 안의 만황 족인들이 대노하여 반산원족 긴 눈썹 노인을 쳐다보았다. 산악거원을 시작으로 진령왕 법상들이 연달아 붕괴했다는 것은 반산원족에서 내보낸 혈맥의 후예가 수준 미달이라는 뜻이었다.

“원경 수사, 그 댁 원산백은 아직 성년이 되지 않아 혈맥의 힘이 부족했나 봅니다…….”

경원족 족장이 먼저 말을 꺼냈다.

“저런 종족도 16대 만황 종족이라고! 원고 진령왕의 핏줄이 맞기나 한지.”

원숭이처럼 생기고 등 뒤로 하얀 털이 난 거구의 사내가 까랑까랑하게 소리쳤다.

16대 만황 종족 중 하나인 백배귀원족(白背鬼猿族) 족장이었다.

백배귀원족은 진령왕 주염의 방계혈맥이어서 직계인 경원족을 섬겼다.

긴 눈썹 노인은 모욕적인 이야기를 듣고도 그를 돌아보고는 탄식만 했다.

산악거원은 다른 진령왕과 달리 남은 후예들이 반산원족 밖에 없었다. 그러니 누가 정통인지 아닌지 말할 건 없었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혈맥의 힘이 옅어진 것은 사실이었다.

원산백은 반산원족 중에서도 특별한 존재로 다른 족인들보다 산악거원 혈맥이 훨씬 정순했지만, 문제는 성년이 되지 못해서인지 아직 혈맥의 힘이 약하다는 것이었다.

주위의 불만은 커져만 갔고, 광장 안이 기름이 끓는 것처럼 시끌시끌해졌다.

만황성전 안에서도 연달아 질책하는 소리가 들려와 원산백이 가책을 느끼게 만들고 있었다.

“혈맥의 힘이 자기 마음대로 되는 것도 아닌데, 산백이한테 왜들 그러는 거예요!”

흰둥이가 듣다가 참지 못하고 원산백 앞을 막아섰다.

류낙아도 말없이 그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남에게 피해나 주니까 손가락질을 당하는 것이지…….”

추오족 소주가 중얼거렸다.

“결국은 수라혈문을 열지 못했습니다. 전부 반산원족의 책임이에요!”

경전의 한 마디가 다른 수사들의 감정을 자극했다.

수라혈문을 열지 못하면 다른 사람들도 진령왕 혈맥을 계승할 기회를 잃고 만다.

그걸 보고 한립의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한 수사…….”

이때 돌의자에 앉아있던 백택이 입을 열었다. 그러자 다들 입을 다물고 한립을 보았다.

한립은 속으로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진령왕이 어째서 성산과 성전에 자신을 들였나 했더니 진작 이럴 생각이었던 것이다.

“예, 선배님.”

그러나 일단은 모른 척하며 포권을 해보였다.

돌의자에서 일어난 백택은 다른 족인들을 훑으며 말했다.

“너희들은 하나같이 한 수사가 성산에 오르고 성전에 들어선 것을 치욕이라 여겼을 것이다. 허나 수라혈문을 열기 위해서는 한 수사의 도움이 꼭 필요하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만황 후예들이 놀라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일개 인족에 불과한 저자가 어찌…….”

경전도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원산백의 혈통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 나이가 어린 탓에 혈맥의 힘이 아직 개방되지 않았을 뿐. 그리고 한 수사는 인족이라 하나 진령왕 산악거원의 혈맥을 지니고 있다. 대대로 전승되어온 혈맥이 아님에도 반산원족보다 더 정순한 혈맥을.”

백택의 설명에 다들 깜짝 놀라는 얼굴이었고, 원산백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는 표정이었다.

“한 수사, 우리 만황을 위해 도움을 줄 수 있겠는가?”

백택이 한립 앞으로 걸어가 그의 뜻을 물었다.

“제 체내의 혈맥이 혼잡해 도움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혈맥이 혼잡한 것은 내게 방법이 있네. 자네가 돕겠다고만 해준다면 수라혈문을 연 후 자네가 그 안으로 들어가 육신의 부족함을 보할 수 있게 해줄 것이네.”

백택의 말을 듣고 있던 경전 등은 마음이 더없이 혼란스러웠다.

한립이 수라혈문에 들어가지 않기를 바라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가 자신들을 도와 수라혈문을 열어주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

그 말에 한립은 경전과 추오족 소주를 힐끔 보고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의 시선에 경전과 추오족 소주가 불길한 예감을 느낀 것은 당연했다.

“폐하, 제게 한 가지 청이 있습니다. 그것을 들어주신다면 뜻하는 대로 하겠습니다.”

“말해보게.”

“저는 도올과 주염의 정혈이 한 방울씩 필요합니다.”

“그거야 어렵지 않네. 수라혈문을 열면 누군가 도올과 주염의 혈맥을 계승할 테니 그때 가장 정순한 정혈을 내어주지.”

멈칫했던 백택이 웃으며 답했다.

“그렇게까지 해주실 필요는 없습니다. 저기 경원족와 추오족 수사의 몸에서 그냥 한 방울씩 받아다 주시면 됩니다.”

한립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 말에 백택은 의외라 여겼다. 진령왕 혈맥을 계승한 다음에 정혈을 취해야 가장 강력한 힘을 얻을 수 있었다.

그는 몰랐지만 한립은 체내에 품은 진령혈맥이 복잡해서 한두 개가 강한 것보다는 조화를 이루는 것이 중요했다. 그러니 한립이 이런 요구를 한 것은 일부러 경원족과 추오족 소주를 괴롭히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천살진옥공과 경칩십이결을 융합하면 네 가지 형태의 마신 변신을 할 수 있었는데, 도올과 주염의 혈맥이 부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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