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4화. 성산 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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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호족이 먼저 출발하는데 수십 명 중 류청, 류낙아를 포함한 7명만 계속 올라가고 나머지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휴식을 취했다.
류청을 제외한 천호족인은 뒤쪽으로 새하얀 빛을 일으켜 포동포동한 여우 꼬리를 펼쳤다.
그 수가 사람마다 달라 대부분이 일고여덟 개밖에 되지 않고, 류낙아는 가장 적은 여섯 개의 꼬리를 지닌 대신 새하얀 빛이 아주 선명했다.
한립은 류낙아가 지닌 만황의 기운이 아주 정순하고 깊은 것을 느꼈다.
류낙아라도 무리 없이 오를 수 있을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우리도 가자꾸나.”
한립의 말에 흰둥이가 혀를 쑥 내밀고 일어나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보니 반산원족 쪽에서도 두 명이 출발하고 있었다.
충분히 마음의 준비를 했지만 한립은 암홍색 계단에 발을 올리자마자 사방팔방에서 찌르는 듯이 쇄도하는 힘에 비틀거렸다.
그 옆의 비휴도 네 다리를 후들후들 떨면서 간신히 서 있기는 했는데 낑낑 앓고 있었다.
고개를 돌린 한립이 싱긋 웃고는 기합을 넣었다.
천살진옥공을 전력으로 운용해 진령혈맥의 힘과 배합하니 검은빛에 휩싸인 그는 순식간에 삼두육비의 마신으로 변했다.
여섯 개의 팔로 계단을 짚고 흰둥이를 보호하면서 거미처럼 산을 탔다.
한립 아래에서 걸어가는 흰둥이는 확실히 이겨내야 할 압력이 줄어 타박타박 위로 올라갈 수 있게 되었다.
십여 계단을 올라 몸이 적응되었다고 느낀 흰둥이는 의식연계로 혼자 가보겠다고 말했다.
한립은 잠시 고민하다 흰둥이의 의견을 존중해 옆에서 따로 올라갔다.
흰둥이는 한립이 한대로 네 다리로 중심을 잡고 위로 기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공간압력이 위로 갈수록 커져서 한립도 힘들었는데 흰둥이는 말할 것도 없었다.
딱 마지막 계단 10개를 앞두었을 때 흰둥이는 코에서 피가 주르륵 흘러 암홍색 돌계단을 더욱 붉게 물들였다.
한립이 걱정되는 마음에 미간을 좁혔을 때 사고가 터졌다!
위쪽에서 올라가던 천호족인이 중압감을 견디지 못해 기절해 그대로 뒤로 쓰러져 흰둥이를 덮친 것이다.
천호족인은 체구가 그리 크지 않았지만 산길의 압력이 더해져서 산이 무너지는 것 같은 충격이 예상되었다.
이미 너무 무리한 탓에 귀가 웅웅거리던 흰둥이는 피할 길이 없었다. 천호족인이 아니라 위에 나뭇잎만 하나 얹어도 주저앉을 것 같았다.
위기의 순간 검은 그림자가 횡으로 스쳐 지나가며 무언가와 쾅, 충돌했다!
동시에 흰둥이의 귓가에 한립의 목소리가 들렸다.
“정상이 금방이니, 끝까지 올라가 보거라.”
영리한 흰둥이가 상황을 파악하고 고개를 돌렸다.
한립이 그를 대신해 기절한 천호족인과 엉켜 아래로 굴러떨어지고 있었다.
가슴이 뜨끈해진 흰둥이가 길게 포효했다.
그의 검은 눈동자 주변에 금색 테두리가 생기며 몸의 골격이 으드득 소리를 내고 있었다.
갑자기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힘이 차올랐다.
흰둥이는 네 발을 이용해 빠르게 남은 계단을 올라갔다.
“올라갈 거야. 올라갈 거야…….”
그렇게 마지막 계단을 오른 흰둥이는 기뻐할 새도 없이 스르륵 힘이 빠져 기절해버렸다.
먼저 정상에 올라와 있던 류낙아가 운기조식을 하던 것도 잊고 뛰어왔다.
“괜찮을 것이다. 봉인된 혈맥의 힘을 격발한 탓에 정신을 잃은 것이니 쉬고 나면 깨어날 수 있을 것이야.”
하얀 장포를 입은 준수한 사내가 다가왔다.
“폐하.”
류낙아는 그가 진령왕 백택인 것을 보고 놀라 고개를 숙였다.
“너도 가서 쉬거라. 이 아이는 내가 돌볼 것이니.”
백택의 말에 류낙아는 머뭇거리다 돌아갔다.
흰둥이를 안아 올려 입안에 암홍색 단약을 넣어 준 백택은 눈빛이 온화했다.
“인족이 널 위해 이렇게까지 해주다니, 쉽지 않은 일이야…….”
산길을 굴러떨어지며 기절한 천호족인을 떼어낸 한립은 여섯 개의 팔로 주변 계단을 잡아 멈추려 했다.
주변 압력이 더해져 엄청난 힘으로 떨어져 근육과 뼈가 다치는 것은 모르겠는데 몸 안의 장기가 섞인 듯한 느낌이 들었다.
막 아래 계단으로 세게 떨어지며 살짝 튕겨 나온 순간, 거대한 손이 아래쪽에서 턱 받쳐 그를 일으켜주었다.
입에서 울컥 피를 쏟은 한립은 그제야 손의 주인이 반산원족 노인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고맙습니다, 선배님.”
한립이 급히 포권을 하며 예를 올렸다.
노인은 긴 눈썹을 끌어올리며 그를 향해 웃어주고 원산백과 같이 천천히 산을 올랐다.
그들을 보며 가부좌를 튼 한립은 단약을 삼키고 기운을 다스렸다. 다시 일어섰을 때 정상을 올려다보는 그의 표정이 신중해졌다.
이번에는 처음 오를 때보다 더 힘든 길이 될 것이 분명했다.
부상까지 당해 망설여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후…….’
묵묵히 연신술을 운용해 정신을 집중한 한립은 다시 천살진옥공과 진령혈맥을 격발해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 * *
어느덧 해가 지기 시작해 금빛 석양이 산 정상을 비스듬히 비추고 있었다.
산 정상 광장에는 백 명 가까운 사람들이 모여 있었는데 그 중 대라급만 십여 명이었다.
족장들을 포함한 16대 만황 종족 속에 몇몇 100대 종족의 실력자들이 섞여 있었다.
그중 혼돈족(混豚族)의 수가 가장 많아 십여 명이고 반산원족은 원산백 혼자였다.
혼돈족은 8대 진령왕 중 라후의 주요 혈맥으로 세력이 영마족(英馬族)보다 강해서 만황세계 제일의 종족이라 할 수 있었다.
혼돈족 당대 족장은 덩치가 큰 중년인으로 화려한 자수가 수놓아진 보라색 장포 위에 검은 비늘 갑옷을 걸치고 있었는데, 입은 개구리처럼 크고 얼굴 곳곳에 가시가 비죽비죽 나와 무척 험악하게 생겼다.
몸에서 풍기는 기운이 강대해 대라 후기 수사의 위압감이 느껴졌다.
그는 천천히 광장을 훑다가 광장 중앙에 선 이들 중 한 명에게 다가가 공손히 허리를 굽혔다.
새하얀 장포를 입은 진령왕 백택이었다.
“폐하, 만황 각 종족이 다 모였는데 어째서 혈사대회를 시작하지 않으시는지요?”
“급할 것 없네. 아직 올 사람이 하나 더 있어. 곧 도착하겠구만.”
백택이 깨어난 지 얼마 안 된 흰둥이를 보았다.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광장 북쪽에서 포효소리가 들리고 누군가 거미처럼 계단을 타고 올라왔다.
다름 아닌 한립이었다.
천살진옥공과 진령혈맥을 전력으로 발동하고 시간법칙의 도움까지 받아 장장 세 시진에 걸쳐 정상에 오르는 길이었다.
한립이 광장에 도착해 쏟아지는 석양을 등지고 서자 흰둥이가 그를 향해 달려갔다.
류낙아도 반색하며 다가가고 있었다.
번득 검은빛을 반짝인 한립은 삼두육비의 마신 변신을 풀고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들 중 반산원족 노인을 제외하고 다른 족장들은 표정이 시시각각 달라졌다.
“인족……. 어째서 인족이 성산에 발을 들인 것이냐!”
자줏빛 얼굴에 짧은 수염이 나 푸른 표범을 닮은 근육질 사내가 노호성을 터트렸다. 비천표족(飛天豹族) 족장이었다.
비천표족은 도올혈맥의 후예인 추오족에서 떨어져 나온 한 갈래나 마찬가지여서 같은 16대 만황 종족이라도 배분이 낮았다.
“몸에서 진령의 기운이 느껴집니다. 그것도 한두 가지가 아니군요.”
또 다른 매의 머리에 사람의 몸을 한 남자가 등 뒤의 날개를 펄럭이며 말했다. 날개가 움직일 때마다 은색 뇌전이 감돌았다.
16대 만황 종족 중 은시뇌붕족(銀翅雷鵬族) 족장이었다.
다른 족장들도 대부분 살기등등하게 한립을 노려보았다.
경원족 등 굽은 백면 노인도 그걸 보고 남몰래 냉소를 흘렸다. 경원족 족장인 그는 한립의 신분을 미리 알고 있던 이들 중 한 명이었다.
경전과 경저가 노인 뒤에 서서 한립을 사납게 쳐다보았다.
백택은 그걸 보고 인상을 찡그렸다.
“다들 경거망동하지 마세요. 한립 수사는 폐하께서 특별히 초대한 사람입니다.”
백택 뒤에 서 있던 리기마가 즉시 그 뜻을 알아듣고 모두에게 한립을 소개했다.
그 말에 다들 조용해져서 아무도 왜냐고 따지지 못했다.
“안심하세요. 한 수사는 만황 종족의 벗입니다. 원고팔왕 중 묵안비휴왕의 후예를 호송해 여기까지 와준 인물이고요.”
리기마가 설명했다.
“아, 저자가…….”
무리들 틈에서 탄성이 들려왔다. 한립이 벌인 일들이 만황계역까지 소문이 난 것이다.
한립은 만황 종족들의 반응을 이상하다 여기지 않고 추오족 무리에게 시선이 멈추었다.
‘저자는?’
추오족 무리 맨 앞에서 음침하게 생긴 백발 청년이 뒷짐을 쥐고 그를 마주 보았다.
도단을 제련할 때 빼앗으려 했던 녀석이었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한립은 천호족 무리에서도 낯익은 사람을 찾아냈다. 같은 길로 정상에 오른 것이 아닌지 처음에 천호족 무리에서 보이지 않던 호삼이었다.
호삼은 인사를 하듯 눈짓을 했다. 그들이 전음으로 대화를 나누기 전에 한립은 리기마가 불러 광장 중앙으로 가야 했다.
“진령왕을 뵙습니다.”
한립이 포권을 하며 백택에게 인사를 했다.
백택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주고 서쪽 하늘을 올려다보니 벌써 어둑해지고 별이 떠오르려 하고 있었다.
“시간이 되었군. 의식 준비를 시작하라.”
백택의 명에 각 족장들이 족인들을 모았다.
“오늘 혈사대회를 열어 모두를 모이게 한 이유를 알 것이다. 선역들은 혼란에 빠졌고 오래전 묵안비휴의 통찰대로 만황도 곧 그 화를 피할 수 없을 것이야.”
광장의 사람들은 대부분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는데 족장들은 표정이 달랐다. 이는 진령왕 묵옥의 예언에 대해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뜻이었다.
한립 옆에 선 흰둥이도 무슨 소린지 몰랐지만 묵안비휴가 남긴 말이라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오늘 혈사의 제례를 통해 만황성전(蠻荒聖殿)에 들어 수라혈문(修羅血門)을 열 것이다. 만황팔왕의 자리가 오랫동안 비어있었으니 이제는 그들을 불러들여 다시 만황의 부흥을 이룰 것이다.”
백택의 눈 안에서 금빛이 반짝였다.
“팔왕이 귀환하여, 만황의 부흥을 이루리!”
“팔왕이 귀환하여, 만황의 부흥을 이루리!”
진령왕의 말에 만황 종족들이 격정적으로 소리쳤다.
한립은 의아했다. 혈사대회란 것이 일종의 제례이고 실종된 진령왕들을 소환하는 의식이란 말인가?
“16대 만황 종족에서는 혈사를 치를 인물을 선발했는가!”
영마족에서는 당연히 리기마가 나서 위풍당당하게 맨 앞에 섰다.
천호족에서는 류낙아가 사뿐사뿐 족인들 앞으로 나섰다.
이어서 경원족에서는 경전이 한걸음에 걸어 나왔다. 부러진 송곳니는 다시 붙였는지 이제는 멀쩡해 보였다.
추오족에서는 음산한 얼굴의 백발 청년이 팔짱을 끼고 앞으로 나왔고, 혼돈족에서는 검은 비늘 갑옷을 입은 철탑 같은 거한이 나섰다. 혼돈족 거한은 멧돼지처럼 입술 바깥으로 세 쌍의 이빨이 삐져나와 매우 흉악해 보였다.
은시뇌붕족에서 나선 것은 은발을 높게 올려 묶고 웃통을 벗은 청년으로 미간에 금색 뇌전 문양이 보이고 등 뒤의 날개에서는 뇌전들이 번득였다.
반산원족은 유일한 참가자인 원산백이 걸어 나와 한립 쪽을 쳐다보았다.
한립 옆에선 흰둥이는 머뭇거리다 고개를 들어 주인을 살폈다. 한립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흰둥이도 그를 떠나 걸어갔다.
총 8명의 원고팔왕의 혈통을 이어받은 직계후손들 모인 것이다. 나머지 여덟 종족, 예를 들어 통천서족(通天鼠族), 백족용족(百足龍族), 화골사족(化骨蛇族), 통비원족(通臂猿族) 등은 방계였다.
“제례에 참여할 이들은 나를 따라 성전으로 들어가고, 나머지는 남아 진법이 발동되기를 기다린다.”
백택이 명을 내렸다.
“존명!”
만황 종족들이 답하는 소리를 듣고 백택은 몸을 돌려 뒤쪽의 원형 석전 쪽으로 걸어갔다.
리기마 등이 그를 쫓아 석전으로 걸음을 옮겼다.
“자네도 들어가지.”
이때 갑자기 걸음을 멈춘 백택이 고개를 돌려 한립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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