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3화. 등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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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거의 다 된 것 같으니, 산 아래 광장으로 가 보자구나.”
한립은 그런 흰둥이를 데리고 산 아래 광장으로 내려갔다.
멀리서 봐도 빼곡하게 만황 족인들이 모여 있는 게 눈에 띄었는데, 그 중 천호족과 반산원족(搬山猿族) 그리고 그들의 부속 부락들이 절반이 넘었다. 인원수로 따지면 거의 만여 명 정도?
흰둥이를 데리고 군중을 지나 광장 앞까지 걸어 나간 한립은 천호족 류청이 족인 수백 명을 데리고 서 있고, 그 옆에 반산원족도 비슷하게 수를 맞추어 모여 있는 것을 보았다.
천호족과 마찬가지로 반산원족도 10대 만황 종족 중 하나로 팔대 진령왕 중 하나인 산악거원 혈맥을 지니고 있었는데, 세월이 흐르다 보니 신통이 이전 같지 않았다.
반산원족은 경원족과 생김새가 비슷했으나 체구가 비교적 작고 흑청색 털과 금색 눈동자가 조화를 이루어 흉악하기보다는 신비해 보였다.
하얀 장포를 입은 등이 굽은 반산원족 노인이 무리의 우두머리인지 가장 앞에 서 있었고, 천호족과는 광장의 양쪽에 떨어져 있었다.
한립과 흰둥이가 보이자 류낙아가 화사하게 웃으며 다가서려 했다.
“혈사대회 날이다. 행동거지를 조심하거라.”
하지만 움직이기도 전에 류청이 낮게 질책해 제자리에 있어야 했다.
그녀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웃어준 한립은 군중들의 의혹이 담긴 시선을 받으면서 비휴 흰둥이와 같이 광장 맨 앞줄에 섰다.
반산원족에서 키가 다른 족인들의 절반밖에 안 되고, 새하얀 털을 지닌 녀석이 그들을 보고 힐끔거렸다.
흰둥이가 그걸 알고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그런데 조그만 반산원족 녀석이 담도 작은지 화들짝 놀라 다른 족인의 등 뒤로 몸을 숨기는 게 아닌가.
그걸 본 흰둥이가 재밌다는 듯 웃고 불쾌한 내색을 거두었다.
“한 수사, 폐하께서 참석을 허락했다지만. 오늘은 만황 종족에게 각별한 날이니 해줄 말이 있네.”
류청이 먼저 말을 붙였다.
“말씀하시지요, 선배님.”
“산 정상에서 당천종(撞天鐘)이 울리면, 만황 종족들은 팔황산 사방으로 흩어져 8개의 산길을 따라 정상으로 향하게 될 게야. 산길에는 여덟 진령왕이 설치해둔 금제가 있어 다른 생령들을 억압하기 때문에 힘이 아주 좋은 만황 짐승도 이겨내기 힘드네. 그러니, 너무 무리하지 말라고 충고하고 싶군.”
“조언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기억해 두겠습니다.”
한립은 고개를 끄덕이며 류낙아와 흰둥이를 쳐다보았다. 저들더러 산 정상에 오르라 하는 건 더 무리가 아닌가?
“원고팔왕의 혈맥을 타고난 후예들은 그 혈맥의 힘이 진할수록 억제를 덜 받게 되니 걱정할 게 없네.”
류청이 그걸 보고 말했다.
댕! 댕! 댕!
이때 정상에서 웅장한 종소리가 파도처럼 퍼져나갔다. 음파가 파동을 이루어 사방팔방으로 고루 흩어지고 있었다.
놀라운 일이었다.
특수한 파동이 한립 체내의 진령혈맥들을 일깨워 스스로 일어나게 만들고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둘러보니 주변 사람들도 신비한 힘에 이끌려 은은한 분홍빛 안개로 몸을 두르고 있었다.
아득히 먼 곳에서 스산한 가락이 들려오는데 자세히 들어보아도 주술은 아니었다.
“만황 종족의 사기를 높이기 위한 군가인가?”
듣기만 해도 힘이 차오르는 소리가 점점 더 커져 한립은 곁의 흰둥이를 돌아보았다.
흰둥이가 목구멍 깊은 곳에서 비슷한 소리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왠지 모르겠는데 따라부르지 않고는 참을 수가 없어서요…….”
흰둥이는 의식연계로 전음을 보내왔다.
고개를 끄덕인 한립이 흰둥이를 데리고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첫발을 떼서 산길의 계단에 올려두자마자 형언할 수 없는 중압감이 몸을 누르는 게 느껴졌다.
팔황산 전체가 거대한 자석이 된 것처럼, 다음 걸음을 떼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한립에게는 그렇게 큰 고난은 아니었다.
천호족과 반산원족 족인들도 빠르게 계단 백여 개를 올라가고 있었다.
천호족 족인들과 비슷하게 계단을 오르던 한립이 산 아래 광장에 수천 명이 그냥 서 있는 것을 보았다.
“낙아야, 산 아래 남아 있는 족인들은 무엇이지?”
한립은 류낙아에게 전음을 보냈다.
“저들은 100대 부락에 들지 못하나 16대 만황 종족의 부속 부락이라 산 아래까지 올 수 있었던 거예요. 나머지 종족들은 대부분 진황성에 남아 성산 쪽으로는 접근하지도 못하고요.”
류낙아는 금방 답을 주었다.
“보아하니 혈사대회에 참가했다는 것만으로도 일족의 영광인 모양이구나.”
“그럼요. 그러니까 폐하께서 오라버니와 흰둥이가 산을 오르게 허락하신 게 더 놀라운 거고요”
류낙아의 감탄에 한립은 눈썹을 끌어올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계단 수백 개를 오른 다음부터는 바닥에 원고 주술문자가 떠올라 진흙처럼 발을 잡아당겼다. 그래서 이제는 등산하는 사람들의 자세가 기괴해졌다.
천호족과 반산원족은 원래 속도를 유지하고 다른 이들은 현저히 속도가 떨어져 거리가 멀어지고 있었다.
만황 종족들은 인족인 한립이 그들과 엇비슷하게 산을 오르는 것을 보고는 눈빛이 달라졌다.
몇몇은 이를 악물고 일부러 그보다 빨리 오르려고 속도를 높였는데, 한립은 경쟁할 마음이 전혀 없었기에 흰둥이와 같이 느긋하게 이동했다.
이때 반산원족 무리에 끼어있던 하얀 털을 가진 족인이 갑자기 한립과 흰둥이에게 다가왔다.
그들을 살피는 눈에 호기심과 경계심이 고루 들어있었다.
체내에 산악거원의 혈맥이 자리 잡고 있어서인지 한립은 꼬마의 행동에 그저 웃음이 나왔다.
반산원족 쪽에서도 딱히 말리지 않고 묵인하는 듯했다.
하얀 털 족인이 조심스럽게 한참을 배회하다 먼저 흰둥이에게 다가갔다.
“넌 네 가족은 따라다니지 않고 여기 와서 뭐 하는 거냐?”
흰둥이가 그걸 보고 거침없이 물었다.
“묵안비휴의 후예라면서요?”
하얀 털 원숭이는 무례하다고 할 수 있는 말에 신경도 쓰지 않고 궁금하던 것을 물었다.
“그래서?”
흰둥이는 계단을 오르느라 돌아보지도 않고 반문했다.
“저희 선조께서 8대 진령왕 중 한 분이었던 원홍 대인인데, 묵안비휴 묵옥 대인과 아주 친하셨대요…….”
“친해서, 그래서 어쨌다고?”
“듣기로는, 같이 실종되셨다고 해요.”
하얀 털 족인의 말에 흰둥이는 입을 다물었다.
“너, 이름이 뭐냐?”
잠시 뒤, 흰둥이가 드디어 하얀 털 반산원족 꼬마를 보며 물었다.
“원산백이요.”
“넌 산백이, 나는 흰둥이라……. 인연이 있는 것 같네.”
“흰둥이면, 본명이 묵소백이신 거예요?”
갑작스러운 질문에 흰둥이는 망설이다가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기억도 없겠다 본명 같은 것도 모르니까.
한립은 그저 두 꼬마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흰둥이는 원산백과 대화를 하면서 우울한 기분이 날아갔는지 허풍을 떠는 병이 도져 말끝마다 이 몸은 이러쿵저러쿵 하면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흰둥이가 자신에게 대단한 누님이 있다고 자랑했을 때, 원산백은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고 부러워죽겠다는 얼굴을 했다.
“헤헤, 부럽냐? 기회가 되면 내가 누님을 소개해 줄게. 성격은 별론데 의리는 있거든. 작은 선물을 준비해서 가면 너도 동생으로 삼아 줄걸? 우리가 같이 돌봐주마!”
흰둥이는 상대의 어깨를 툭툭 치면서 뿌듯하게 말했다.
한립은 흰둥이가 금동도 모르는 사이에 동생을 거둔 것을 보고 코끝을 긁적였다.
어린 녀석들이 한마디씩 하며 조잘거리니 산행이 훨씬 즐거워졌지만 그래도 주변을 경계하는 것은 잊지 않았다.
높이 올라갈수록 계단의 흡입력이 강해져서 다른 부락들은 천호족과 반산원족을 따라잡지 못하고 뒤처져 있었다.
바닥에서는 잡아끌고 주변에서는 억누르니 천호족과 반산원족 족인들도 낯빛이 안 좋아졌다.
산 중턱에 이르러 압력이 초반의 백배로 강해져 한립도 이전보다 가쁘게 숨을 내쉬었다.
묵묵히 천살진옥공을 운용해 계속 걸음을 옮기는데, 중턱까지 온 다른 부락들에서 포기자가 속출해 따로 마련된 원형 판 위로 모여들었다.
천호족과 반산원족인들만 한 명도 멈추지 않고 꾸준히 산길을 올랐다.
이론적으로 반산원족이 천호족보다 몸이 튼튼해야 할 텐데 이상하게 천호족이 산을 오르는 속도가 더 빨랐다.
흰둥이는 아직도 원산백과 한담을 나누면서 제일 앞에서 성큼성큼 걸어 올라가고 있었다.
족인들이 멀어지는 것을 본 원산백은 인사를 하고 늙은 반산원족 노인 곁으로 돌아가 함께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금 만황족인들이 제일 이해가 되지 않는 건 한립이었다.
저 인족은 뭔데 이렇게 쉽게 산을 오르는 거지?
실질적으로 한립이 견디는 압력은 어깨에 산을 얹고 걷는 것만 같아서 그도 몇 걸음을 걷다 쉬고 다시 움직이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 한립의 속도가 느려져 한 명씩 그를 앞지르고 나서야 천호족 족인들은 마음이 편해졌다.
뺨이 붉게 달아오르고 이마에 땀방울이 맺힌 류낙아가 지나며 괜찮냐는 눈길을 보내왔다.
“류청 선배님을 따라 먼저 올라가 있거라. 난 금방 따라갈 테니.”
한립이 전음으로 그녀를 안심시켰다.
머뭇거리던 류낙아는 류청의 재촉에 어쩔 수 없이 먼저 올라가야 했다.
“너는 어떠하냐. 내가 도와줘야겠느냐?”
한립은 흰둥이가 체내의 묵안비휴의 힘을 아직 각성하지 못한 것을 알고 물었다.
“아뇨. 원산백이 하는 말을 들으니까, 이 산을 오르는 건 팔왕 혈맥에 대한 일종의 시험이래요. 혈맥이 진할수록 더 높이 올라갈 수 있다는데 직접 해보고 싶어요.”
그의 실력에 거의 한계에 이르렀지만 흰둥이는 다부지게 답했다.
이를 악물고 한발 한발 계단을 올라가는 흰둥이의 눈에서 순간 옅은 금빛 고리 같은 게 보이다 사라졌다.
* * *
정오(正午)가 되었다.
암홍색 결계 너머로 햇살도 한결 부드럽게 들어왔지만 아직도 정상에 다다르려면 멀었기에 사람들은 절망감을 느꼈다.
위로 딱 백여 개의 암홍색 계단만 남아 있었는데, 그 계단을 하나씩 넘는 게 난공불락의 요새를 뚫는 것만큼 힘들었다.
끄악!
그때 어느 산길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천호족 사내가 한참을 쉬고 용기를 얻어 다음 계단에 올랐다가 막중한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쓰러지면서 바닥에 머리를 찍은 것이었다.
류청이 눈살을 찌푸리고 직접 족인을 잡아채 아래로 끌어당겼다.
“남은 계단은 아무나 오를 수 없다. 혈맥의 힘이 약한 족인들은 여기까지만 하거라.”
류청이 기절한 족인을 넘겨주며 명했다.
그 말을 들은 천호족 족인들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다들 정상에 오르면 엄청난 기연이 기다리고 있을 걸 아는데 속이 좋을 리 없었다.
뒤늦게 흰둥이와 도착한 한립도 마지막 암홍색 계단 백 개를 앞두고 멈춰 섰다.
등과 가슴 양쪽에서 바위가 짓누르는 것처럼 숨도 쉬기 어려워서 진령혈맥을 암암리에 움직인 끝에야 압력을 해소할 수 있었다.
그래도 전신의 털이 땀에 푹 절어서 사지를 쭉 뻗고 누운 흰둥이를 보니 웃음이 새어 나왔다. 흰둥이는 처음 보았을 때와 많이 달라져 있었다.
얼마 뒤, 반산원족도 올라왔는데 그들 일행은 늙은 족장과 꼬마 원산백을 제외하고 다섯 명밖에 되지 않았다.
같은 높이에서 멈춰선 원산백이 바닥에 엎드려 있는 흰둥이를 보고 엄지를 치켜들고 있었다.
그걸 보고 흰둥이가 어떻게 안 일어서겠는가.
여기까지 온 사람들을 확인한 류청은 그중에 한립이 섞여 있는 것을 보고 의혹이 깊어졌다.
뭐, 한립은 익숙한 시선이었다.
반산원족의 눈썹이 거의 눈을 다 덮은 노인은 몰래 그를 힐끔거리기까지 했다.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건 자신이 산악거원 혈맥을 지녀서가 아닌가 싶었다. 어쨌든 원고팔왕 중에 산악거원도 있었으니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