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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2112화 (1,869/2,000)

2112화. 보제성연(菩提聖宴)

*

한립은 시간법칙의 힘이 늘고 운용도 매끄러워진 것에 무척 기뻐했다.

이제 동을신목만 시간정사를 늘리면 다른 시간법칙 보물들과 균형을 맞추어 대라경에 도전해 볼 수 있을 터였다.

눈을 반짝인 그는 윤회전 가면을 꺼내 시간법칙을 함유한 재료나 물건에 대한 가격을 통상적인 거래가보다 5할이나 높게 매입한다고 올려놓았다.

보제연이 3천 년도 남지 않아 이제는 시간 싸움이었다.

어떻게든 그 전에 대라경에 이르러 구원관의 금동을 구하는 것이 중요했다. 게다가 선원석 칠천만 개를 지닌 그에게 이제 선원석을 좀 낭비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었다.

가면을 벗은 한립이 생각을 하다가 화지공간을 나와 별채 바깥의 사람을 시켜 리기마에게 소식을 전했다.

팔황산에 남아 지내기로 했다는 내용이었다.

다시 방으로 돌아온 그는 화지공간으로 들어가 소매 속에서 정염동자을 불러냈다.

“몇백 년 후에 아주 중요한 일을 해야 하는데, 네 도움이 필요할 수도 있다. 오늘부터 이곳에서 폐관 수련을 하며 하얀 불 구슬을 제련하는 데 최선을 다하거라. 네가 소모한 원기에 대해서는 내가 회복할 방법을 생각해 두마.”

그의 말에 정염동자가 고개를 끄덕이고 화지공간 구석으로 날아갔다.

은색 화염을 번득 일으켜 스스로 커다란 불 구슬처럼 변한 정염동자는 강렬한 화염법칙 파동을 내뿜었다.

한립은 미소를 짓다 다른 누각을 쳐다보았다.

희미하게 귀곡성이 들리는 게 제혼은 아직도 폐관 중인 듯했다.

언제 깨어나려는지.

시선을 거둔 그는 복잡한 진법도가 새겨진 손바닥 크기의 옥판, 광음천선대진 진법도를 꺼냈다.

진언문에서 시공간초월을 마치고 돌아와 오랫동안 꺼내 볼 시간이 없다가 이제야 틈이 생겼다.

해야 할 일이 산더미였다.

대라경에 이르는 것은 물론 통천검진도 연구하고 역전진륜과 법언천지 등의 신통도 강화해 두어야 해서 시간이 부족하기만 했다.

주위를 둘러본 한립은 약재원 주변의 공터로 날아가 각종 재료를 녹여 거대한 금색 바닥을 깔았다.

그런 다음 진법 도구들을 가지런히 꺼냈다.

진작 광음천선대진을 구축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었기에 지난번 갖고 있던 물건들을 처분할 때 진법 도구들과 관련 재료들은 미리 빼두었다.

규모가 있는 상고절진이라도 재료가 넘쳐나다 보니 그럭저럭 펼칠만했다.

한립이 광음천선대진을 준비하는 동안, 팔황산 정상의 원형 건물 안.

붉은 화로 앞에 선 백택이 그 안의 금색 불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곧 리기마가 바깥에서 걸어 들어왔다.

“부왕, 방금 한립이 팔황산에 남겠다는 소식을 전해왔습니다.”

“그래, 무엇을 요구하든 들어주라 일러두거라. 한립을 반드시 혈사대회까지 이곳에 묶어둬야 해.”

백택이 몸을 돌렸다.

“예.”

눈을 반짝인 리기마가 짧게 답했다.

“그만 가보거라.”

“부왕, 그냥 인족 수사에 불과한데 팔황산에 두시려는 연유가 무엇인지요? 신분이 알려지면 다른 만황 종족들의 불만을 살 텐데요?”

“내가 네 벗에게 불리한 짓이라도 할까 걱정인 게냐?”

백택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아닙니다. 부왕의 어진 성품을 아는데요.”

리기마가 얼른 고개를 숙였다.

“벗을 챙기는 마음은 칭찬할 만하다. 의리도 왕으로서 지녀야 할 덕목이지. 허나 진령왕으로서 선택의 순간이 오면 그 무엇보다 만황의 이익을 앞에 두어야 할 것이야.”

“부왕, 저는…….”

“그렇다고 걱정할 건 없다. 지금 네게 그런 선택을 하라는 게 아니니까. 내가 한립을 팔황산에 남겨둔 것은 나쁜 뜻이 있어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에게도 기연이 될 수 있을 게야. 아직은 때가 이르니 더는 묻지 말거라.”

백택은 리기마의 어깨를 다독여 주었다.

리기마는 부친인 백택이 갑자기 낯설게 느껴졌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혈사대회로 준비할 게 많을 텐데 어서 가보거라.”

“예, 가보겠습니다.”

백택의 말에 리기마가 예를 올리고 물러났다.

* * *

반년 뒤.

화지 공간의 금색 바닥에는 빼곡한 문양이 새겨지고 수많은 진법도구들이 박혀 복잡한 진법을 형성하고 있었다. 바로 광음천선대진이었다.

한립이 마지막 선원석을 정해진 자리에 끼워 넣고 물러나서야 광음천선대진이 웅웅 발동하기 시작했다.

불길처럼 금빛이 일어 굵직한 빛기둥을 이루고 높이 치솟는 모습은 장관이 아닐 수 없었다.

공간의 시간 유속이 점점 변하기 시작했다.

한립이 희색을 드러냈다. 반년 동안 대량의 재료를 쏟아 진법을 마련한 보람이 있었다.

그는 금색 바닥 인근 땅으로 내려서서 순식간에 푸른 진법을 하나 더 펼쳤다.

웅웅 소리를 내며 작동하기 시작한 푸른 진법은 돌풍을 일으켜 선원석을 하나씩 광음천선대진 안으로 날랐다.

광음천선대진은 효과가 대단한 만큼 소모하는 선원석도 엄청나서 부단히 공급을 해줘야 했다.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인 한립은 균천일귀를 금색 빛기둥 속으로 던져 넣었다.

금색 빛기둥 속에 떠오른 균천일귀 주위로 주술문자들이 몰려들어 흡수되었다.

바르르 몸을 떤 균천일귀가 오랜 잠에서 깨어나 미약하지만 금빛을 반짝이고 있었다.

한립은 양손으로 빠르게 수결을 맺어 광음천선대진에 힘을 실었고, 균천일귀를 향해 몰려드는 주술문자들도 양이 늘어났다.

그러나 진법과 균천일귀가 예상보다 밝게 빛나지 못해 시간 유속에 큰 변화를 주지 못했다.

“역시 안 되는 건가…….”

시간법칙의 힘이 부족한 탓이었다.

진언문에는 수미금산이 있어 무한대로 시간법칙의 힘을 제공하지만 화지동천에는 그런 보물이 없었다.

“내가 그걸 잊고 있었다니.”

광음천선대진을 주시하던 한립이 갑자기 눈을 빛내더니 세월신등을 꺼내 들었다.

세월신등을 광음천선대진 한쪽에 두고 수결을 맺으니 등잔에서 금색 불길이 화륵 치솟아 진법 안으로 흘러 들어갔다.

수년간 성실히 제련해둔 덕에 이전보다 능숙하게 조종할 수 있었다.

광음천선대진은 굶고 있기라도 했던 것처럼 신등의 힘을 급속도로 받아 삼켰다.

금색 빛기둥이 진해지고 균천일귀가 눈부신 빛을 발산했다.

균천일귀에서 빠져나온 금색 파동이 화지공간 구석구석까지 미치고 있었다.

동시에 화지공간 안의 시간 유속이 오백여 년 정도 달라졌다. 진언문 금지에서 느꼈던 효과보다 더 강했다.

그걸 본 한립은 얼떨떨해하다가 활짝 웃음 지었다.

되나 안 되나 시도나 해보자는 마음으로 세월신등을 꺼낸 것이었는데 광음천선대진이 이렇게나 힘을 발휘할 줄 몰랐다.

세월신등이 진언문 수미금산보다 더 진법을 잘 보조하는 듯했다.

냉정을 되찾은 한립은 얼른 주문을 외워 광음천선대진 안으로 빼곡하게 법결을 던져 넣었다.

대진의 운용이 느려지면서 세월신등의 화염을 빨아들이는 속도도 줄어들어 균천일귀의 바늘도 열 배는 느릿하게 돌아갔다.

화지공간 안의 시간 유속도 이제 바깥과 오십 배 정도밖에는 차이가 나지 않았다.

3품 선기인 세월신등이 함유한 시간법칙의 힘은 적지 않겠으나 아낄 수 있으면 아끼는 게 좋았다.

세월신등의 강력한 능력을 이용해 강적의 손에서 목숨을 보전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광음천선대진에 모두 빼앗길 수는 없었다.

한립은 푸른 진법이 휙휙 가져가는 선원석을 보고 아까운 마음이 들기는 했다.

선원석이 칠천만 개나 생겨 넉넉하게 쓰겠거니 했는데 광음천선대진이라는 밑 빠진 독을 들여놓아 이제는 선원석이 얼마나 버텨줄지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는 심호흡을 해 복잡한 생각을 떨쳐버리고 몸을 바르게 하고는 통천검진 진법도를 꺼내 들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바깥에서 겨우 2년이 지났지만 화지동천 안의 한립은 백여 년 동안 수련을 하고 있었다.

머리 위에 통천검진 진법도를 띄워놓은 그는 진법도에서 흘러나오는 부드러운 빛에 휩싸여 있었고, 그 주위를 언뜻언뜻 크고 작은 검 그림자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때 번쩍 눈꺼풀을 들어 올린 그의 두 눈에서 기이한 빛이 뻗어 나가 통천검진 진법도로 스며들었다.

수많은 검 그림자들이 번득 사라지고 별안간 36자루의 검 그림자만 남아 가볍게 공명했다.

한립의 얼굴이 밝아졌다.

백 년 수련으로 기초적이지만 통천검진을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되었다.

훅, 숨을 내쉰 그는 평정을 되찾고 양손으로 수결을 맺었다.

청죽봉운검 36자루가 몸에서 빠져나와 통천검진의 검 그림자들을 경계하며 대량의 금빛을 머금었다.

한립의 손짓에 청죽봉운검들은 진법도의 36자루 검 그림자를 향해 날아가 융합되었다.

쿠쿵.

청죽봉운검과 통천검진 진법도가 융합되는 순간, 강력한 흡입력이 발생했다.

청죽봉운검들이 그 자리에서 사라져 통천검진 속으로 빨려 들어가자 한립은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체내의 선령력이 줄줄 새어나가 통천검진 진법도 속으로 흘러드는데 벌써 3할은 사라진 것 같았다.

인근의 천지원기도 벌떼처럼 진법도로 모여들었을 뿐 아니라 인근 허공에 굵직한 벼락들이 난데없이 나타나 진법도에 녹아들었다.

한립은 놀라기는 했지만 선령력을 빼앗기지 않으려 반항하지 않았다.

그때 별채 외부 팔황산 주변에 천지원기가 요동치고 먹구름들이 떼 지어 생겨나 하늘이 어두워졌다.

갑자기 광풍이 몰아치고 번개가 번득이니, 그 뇌전법칙 파동에 만황 부족들이 놀라 하늘을 가리키며 웅성거렸다.

“이게 무슨 일이랍니까?”

“누가 수행이 높아져 뇌겁을 겪는 것 아니겠습니까?”

“제가 볼 때는 아닙니다. 뇌전을 품은 구름이 심상치 않기는 하지만 뇌겁은 아니에요. 뭔가 강력한 신통이 주변 천지원기에 변화를 불러온 것 같습니다!”

다들 하늘을 보며 이런저런 추측을 했지만 먹구름은 뇌전을 품고 있기만 하고 팔황산으로 떨구지 않아 걱정을 덜 수 있었다.

각 종족의 대라급 수사들이 다양한 방법으로 뇌운의 출처를 알아내려 했으나 놀랍게도 강력한 시간법칙의 힘이 탐지를 가로막았다.

팔황산 정상, 백택이 대전에서 걸어 나와 먹구름 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눈을 감았다 뜨고는 한립이 있는 별원을 보더니 이채를 띠었다.

“어린 친구가 실력이 남다르구만.”

담담히 중얼거린 백택은 그대로 몸을 돌려 대전 안으로 돌아 들어갔다.

* * *

화지동천 안.

한립은 자신이 통천검진의 진법도를 발동해 바깥에서 천기현상이 일어났다는 사실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그저 얼굴이 하얗게 질려 절반도 남지 않은 선령력이 언제 고갈될지 근심하는 중이었다.

* * *

몇 년이 또 금방 지나갔다.

만황 부족들이 예상보다 빨리 당도하자 백택은 혈사대회를 앞당긴다는 선포를 했다.

혈사대회를 반년 앞둔 진황성은 경비가 더욱 삼엄해지고 누구도 바깥으로 나가거나 들어올 수 없게 되었다.

둥! 둥! 둥!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진황성 전체에 짐승 북으로 만든 북을 울리는 소리가 3번 들리고, 성벽의 주술문자들이 빛을 발하며 강력한 만황의 기운을 품은 진한 암홍색 빛의 결계로 하늘과 땅을 덮었다.

팔황산을 포함한 진황성 전체가 수만 리에 이르는 결계 속에 봉쇄되었다.

혈사대회가 드디어 개최되려는 것이었다.

암홍색 결계를 보던 한립은 의식 한 줄기를 분리해 진황성 바깥으로 보내보았다. 그 결과 의식이 결계에 닿는 순간 미간에 극통이 느껴지며 의식 줄기가 소멸되었다.

그리 좋게만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혈사대회에서 예기치 못한 일이 생겨 달아나야 한다면 육신을 지니고 시공간초월을 하는 것밖에 방법이 없었다.

“왜 그러세요?”

한립의 표정을 살피던 흰둥이가 걱정되었는지 물었다.

“아니다. 내가 있으니 걱정 말거라.”

한립은 웃으며 그런 흰둥이의 복슬복슬한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말에 흰둥이는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자신이 묵안비휴의 후예라는 것을 알고는 마음이 복잡해져서 이전의 쾌활하던 모습이 줄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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