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1화. 깨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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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택은 수결을 여러 번 바꾸어가다 마지막으로 손바닥을 펼쳐 흰둥이의 이마를 지그시 눌렀다.
손바닥을 거둔 자리에 특이하게 생긴 검은 흔적이 옅게 남아 있었다.
이때 몸을 바르르 떤 흰둥이가 흰빛을 격렬히 발산하다 회수하고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흰둥아, 정신이 드느냐?”
한립이 재깍 다가섰다.
“주인님!”
그를 본 흰둥이는 기뻐하며 일어나려다 비틀거렸다.
“부상이 가볍지 않으니 그리 급히 움직이려 하지 말거라.”
흰둥이를 부축한 한립이 말했다.
“주인님을 다시 만나 너무 다행입니다! 누님이 구원관에 잡혀갔어요! 저는 전력을 다해 겨우 탈출했고요. 엇, 그런데 여기는…….”
몸보다 입부터 회복했는지 큰 소리로 떠들던 흰둥이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만황계역이다. 금동은 내가 구할 것이니 걱정하지 말고.”
한립은 손에서 정순한 선령력을 내뿜어 흰둥이가 일어설 수 있게 도왔다.
자리에서 일어나 곁의 리기마와 백택을 본 흰둥이는 움찔했다.
백택이 그런 흰둥이를 온화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네가 깨어날 수 있었던 것은 여기 백택 선배님 덕분이다. 어서 인사를 올리거라.”
“도와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선배님.”
한립의 언질에 흰둥이가 백택을 향해 고개 숙여 감사 인사를 했다.
“네 아비와 나는 오랜 벗이었다. 흰둥이라고? 네 부친에 대해 기억을 하느냐?”
“아버지요? 제게 아버지가 있다고요?”
흰둥이는 멍하니 반문했다.
“아무래도 네 아비가 기억을 봉인한 모양이구나. 하긴 그래야 네가 무턱대고 복수를 한다며 천정으로 쳐들어가지 않았을 테니. 그 덕에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을 테고.”
“선배님, 저에 대해 잘 아십니까?”
백택이 중얼거리는 소리에 흰둥이가 급히 물었다.
“말했다시피 난 네 아비와 오랜 벗이었다. 당연히 네 내력에 대해 알지만 지금은 말해줄 때가 아닌 듯싶구나. 때가 되면 자연히 알게 될 것이다.”
흰둥이는 백택의 대답이 만족스럽지 않아 더 물으려다 한립이 전음으로 그러지 말라는 것을 듣고 입을 다물었다.
“한 수사, 흰둥이가 깨어났다지만 체내의 원기가 아직 부족하니 내가 데려가 요양을 시키겠네.”
백택은 한립에게 말했다.
“감사한 말씀입니다만, 저도 흰둥이와 지내며 어떻게 몸조리를 시켜야 할지 잘 알고 있습니다. 더는 선배님께 폐를 끼치지 않겠습니다.”
한립은 잠시 고민하다 이래도 될지 모르겠으나 일단 거절했다.
백택에게 흰둥이를 맡기는 게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흰둥이는 자네에게 맡기겠네.”
백택은 한립이 흰둥이를 진심으로 아끼는 것을 보고 미소를 보였다.
“한 수사와 흰둥이가 팔황산에서 지내는 동안 네가 잘 살피거라.”
백택은 곁의 리기마에게 명했다.
“예, 부왕.”
리기마의 대답을 들은 백택이 번득 사라지고 나서야 한립은 팽팽하게 당겨졌던 긴장의 실을 놓을 수 있었다.
흰둥이가 그런 한립과 리기마를 보며 무슨 일인지 궁금해 했지만 대놓고 묻지는 않았다.
“한 수사, 내 보니 부왕께서 자네를 좋게 보신 것 같아. 부왕께서 다른 사람을 이렇게 신경 써주시는 것을 본 적이 없다니까?”
백택이 떠나자 리기마도 진지한 표정을 풀고 시시덕거렸다.
“선배님의 배려에 황송할 따름입니다.”
“황송은 무슨! 하하, 부왕은 류청 같이 계산적인 분이 아니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한립의 공손한 대답에 리기마가 그의 어깨를 팡팡 두드리면서 웃음 지었다.
“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니었습니다.”
한립은 대답을 하면서도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제 어떻게 할 거지? 혈사대회까지 아직 시간이 좀 남았는데, 흰둥이도 묵안비휴 대인의 후손이라면 대회에 참가해야겠지. 게다가 부왕께서 자네도 남아서 대회에 참가하게 해줄 듯싶더라고.”
“백택 선배님께서요?”
리기마가 손을 저으며 하는 말에 한립은 백택의 의도를 알 수 없었다.
“기왕 선배님께서 초대를 해주셨으니 따라야겠으나, 제가 아직 이곳 사정에 어두워 바로 답을 드릴 수는 없겠습니다.”
금동이 구원관 수중에 있는데 흰둥이에게 자세한 사정을 들어야 이곳에서 잠시 머물지 말지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그럼 그러든가. 계속 천호족에 머물 생각인가 아니면 따로 거처를 마련해 줄 테니 나를 따라가겠나?”
눈을 빛낸 리기마가 웃으며 물었다.
“천호족에서는 저를 그리 환영하는 것 같지 않더군요. 송구스럽지만 리 수사께 다른 거처를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럼 거처는 나한테 맡겨두라고!”
한립의 말에 리기마는 자신의 가슴을 두드리며 답했다.
두 사람은 바로 대청을 떠나 바깥으로 걸어 나갔다.
흰둥이는 민감한 신분 때문에 일단 화지동천에 넣어 두었다.
류청이 기다렸다는 듯 걸어와 배웅을 했다.
“소주, 한 수사와 이제 가십니까? 전하께서는 벌써 가셨고요?”
지금의 류청은 만면에 친근한 웃음이 가득했다.
“한 수사와 오랜만에 보는 터라 내 거처로 데려가서 며칠 지내게 하려 하네. 족장을 불편하게 하는 건 아니겠지?”
리기마가 류청을 향해 묘한 얼굴로 물었다.
“어휴, 불편은요. 한 수사, 우리 천호족은 언제나 수사를 환영하니 언제든 찾아오게.”
류청이 활짝 웃으며 답했다.
한립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리기마를 따라 천호족 주둔지를 떠났다.
류청은 그들을 문 앞까지 배웅하고, 두 사람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쳐다보다가 한숨을 쉬고 돌아섰다.
리기마를 따라 진황성의 어느 별채로 향한 한립은 녹음이 우거진 거처가 고즈넉하니 마음에 들었다.
“본 족의 주둔지라 다른 족인들이 마음대로 찾아와 성가시게 굴지 못할 거야. 안심하고 쉬게. 바깥에 지키고 서 있을 사람을 내가 안배해 둘 테니 시킬 일이 있으면 그들에게 시키면 되네.”
리기마는 짧게 인사를 하고 다른 일이 있는지 곧장 별채를 떠났다.
한립은 리기마가 떠나길 기다려 별채를 의식으로 샅샅이 훑고 층층이 금제를 펼쳤다.
거처를 외부와 철저히 차단한 다음 화지공간으로 들어간 한립은 흰둥이가 죽루 앞에서 배회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이제 아무도 없으니 금동이 어찌 된 건지 말해 보거라. 어쩌다 구원관에 잡혀갔는지 말이다.”
“누님이랑 떠난 다음 금원선역으로 가서 주인님이 말했던 서금선을 찾아냈어요. 어려움 끝에 상대 서금선을 집어삼킨 누님은 대라경에 이르는 데 성공했고요.”
흰둥이는 구구절절 말하지 않고 핵심만 짚었다.
금동이 대라경에 이르렀다는 소리에 한립은 기뻤지만 그럼에도 잡혀갔다는 건 큰일이었다.
“그런데 그 서금선이 주인이 있는 영충이었더라고요! 그 일로 구원관의 실력자가 직접 나서서 저랑 누님을 쫓아다녔고, 몇 년을 도망치다 결국에는 따라 잡혔어요. 너무 강한 자라 싸움 끝에 붙들리고 말았는데 마지막 순간 누님이 술법으로 허공을 베어서 저만 탈출시켜줬어요. 안 그래도 어떻게든 주인님을 찾아 도움을 청하려고 했는데 이렇게 빨리 뵙게 될 줄은 몰랐네요.”
“금동을 잡아간 인물의 이름은 무엇이고, 구원관에서 어떤 직책을 가지고 있더냐?”
“귀령자라고 구원관 4대 성사 중 1명이에요.”
말을 하면서도 흰둥이는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귀령자…….”
한립도 눈을 가늘게 떴다.
남안에게 들은 구원관의 정보 속에 귀령자에 대한 것도 있었다. 묘법선존 이상의 실력자로 4대 성사들 중 최고로 꼽혔다.
“주인님, 너무 걱정은 마세요. 누님에게 무슨 짓을 하려고 끌고 간 건 아닐 테니까요. 보제연(菩提宴) 때 누군가에게 바친다고 하니 그때까지는 안전할 거예요.”
흰둥이가 한립의 안색을 살피고 덧붙였다.
“보제연?”
한립은 곧장 윤회전 가면을 꺼내 보제연에 대한 정보를 고가에 매입한다는 내용을 등록했다.
오래지 않아 거래가 성사되었고, 정보에 따르는 보제연은 천정이 오백만 년마다 주최하는 성대한 모임으로 아주 오래전부터 이어지고 있었다.
보제연은 천정의 보제도수(菩提道樹)라는 나무에서 기인해, 이 나무가 맺는 보제도과(菩提道果)는 한 입만 먹어도 천만년 수행을 늘릴 수 있다고 했다.
거기다 보제도과를 먹은 후, 일정 확률로 체질이 보제도체(菩提道體)로 변해 모든 법칙을 수련하는데 훨씬 유리하게 되었다.
보제도과는 원래 수억 년 만에 한 번씩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데 천정의 시간도조가 절세의 신통을 부려 오백만 년에 한 번씩 열매를 맺게 만들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보제도과가 익으면 시간도조는 그것을 자신이 쓰지 않고 성대한 모임을 열어 선역의 여러 세력에게 나눠주었는데, 그게 바로 보제연이었다.
아주 오래전에는 보제연에 모인 이들이 협의해 보제도과를 나눠 가졌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규모가 커지고 모이는 이들이 많아 그럴 수가 없게 되었다.
그 후로 각 선역의 세력들은 시간도조에게 선물을 바치고 보제도과를 얻기를 청하게 되었다.
모이는 세력이 많아질수록 보제연은 그냥 단순히 보제도과를 나눠 가지는 모임이 아니라 다른 선역의 세력들과 화합을 다지고 중대사를 상의하며 맹약을 맺는 자리로 발전했다.
이제 보제연은 그야말로 진선계 제일의 성대한 모임이라 할만 했고, 다음 보제연이 채 3천 년이 남지 않았다.
한립은 미간을 좁혔다.
흰둥이 말에 따르면 귀령자는 금동을 보제연에서 천정 혹은 시간도조에게 바치려 하고 있었다.
윤회전을 통해 알아낸 소식에 따르면 시간도조는 각종 특이한 물건이며 영수들을 좋아한다고 했다. 이에 귀령자는 희귀한 선물로 서금선을 택한 듯했다.
금동이 귀령자 수중에 있을 때는 구할 수 있겠으나 시간도조에게 보내지면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다.
교삼은 구원관에 관련된 임무가 있어 금동을 구하는 걸 도울 수 있다고 말했으나 그들만 믿고 있을 수는 없었다.
기한이 겨우 삼천 년밖에 남지 않아 마음이 급해졌다.
실력을 빠르게 늘리려면 시간법칙 보물들을 고루 성장시켜야 했는데 법칙정사를 뽑을 물건을 찾는 게 쉽지 않았다.
이번에는 운이 좋아 금방 대연시왕정을 구했지만 그런 행운이 몇 번이나 반복될 것인가?
“금동은 내가 구할 방법을 생각해볼 것이니. 흰둥이 너는 이제 막 깨어났으니 이것들로 몸을 보하거라.”
한립은 대량의 선기와 재료들을 쏟아두었다.
그걸 본 흰둥이가 눈이 휘둥그레져서 고맙다고 인사했다.
“아, 주인님. 누님이랑 다른 서금선을 잡으려고 구원관에 들어가서 찾은 건데 이건 소화를 못 시키겠더라고요. 주인님께서 쓰세요.”
허겁지겁 선기를 삼키려던 흰둥이가 뭔가를 떠올리고 입에서 황토색 발우를 뱉어냈다.
금이 가고 오래되어 보이기는 했지만 금색 문양이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었다.
“이건…….”
한립은 발우를 들고 멍하니 서 있었다.
줄줄 흘러나오는 법칙파동은 다름 아닌 시간법칙 파동이었다! 그것도 환지사루의 법칙과 아주 흡사했고.
발우의 법칙의 힘은 아주 강해서 수연시왕정보다도 귀한 보물이었다.
“흰둥아, 정말 잘했다!”
한립은 곧장 흰둥이를 안아 들어 쓰다듬어 주었다.
“이게 무슨 일인지. 시간법칙 보물들이 쏟아져 들어오는구나!”
“주인님께 쓸모가 있다니 다행이네요. 저는 수련을 하러 가볼게요.”
흰둥이는 씩 웃고는 한립이 내준 선기와 재료들을 챙겨 한쪽으로 날아갔다.
한립은 발우를 들고 심호흡을 해 흥분을 가라앉히고 가부좌를 틀고 앉아 <대오행환세결>을 발동했다.
금색 고리가 응결되며 금빛으로 황토색 발우를 감싸고 있었다.
파삭!
황토색 발우가 부서져 수많은 모래 알갱이 형태로 변해 금색 고리 속으로 녹아들더니 무려 예순세 가닥의 시간정사가 만들어져 환진사루를 휘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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