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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2110화 (1,867/2,000)
  • 2110화. 얕보다

    *

    본색을 드러낸 상대를 보고 한립은 우습다고 생각했지만 그와 정말로 싸울 마음은 없었기에 그냥 뇌전전송진법으로 이곳을 뜨려 했다.

    “목 장로, 그만하지.”

    그때 대청 안쪽에서 한립과 일면식이 있는 백의 중년인이 나타났다.

    “족장.”

    회포 노인이 황급히 손을 거두고 백의 사내에게 예를 올렸다.

    동공을 수축한 한립은 일단 뇌전진법은 발동을 멈추었지만 체내의 선령력은 여전히 준비를 해두었다.

    예전에는 수행 차이가 너무 나서 수행의 깊이를 알 수 없었는데 다시 만나 보니 적몽, 묘법선존보다 훨씬 우위에 있는 듯했다.

    흑천마조보다는 못한 것 같았지만 엇비슷한 정도는 되었다.

    회계에서 호삼과 류기 노조의 대화를 떠올린 한립은 조용히 체내의 시간법칙의 힘을 일으켰다.

    품 안의 장천병에 콩알만 한 눈 두 개가 나타나 언제든 시공간초월을 할 수 있게 대비하고 있었다.

    “목 장로, 한립은 낙아의 오라비일세. 손님을 이리 대접하는 걸 알면 만황의 웃음거리가 되지 않겠는가? 여기는 내가 있을 테니 가보게.”

    백의 사내가 회포 노인에게 일렀다.

    “족장, 낙아의 일은……. 이 자가 팔황산에 나타난 것은 분명 무슨 꿍꿍이가 있어서일 겁니다. 목적을 알아야 대처를…….”

    “그만하라는 데도. 물러가 보게.”

    “알겠습니다.”

    회포 노인은 이대로 물러나는 게 마땅치 않은지 한립을 한번 흘겨보고 나갔다.

    “한립, 못 본 사이에 수행이 이리 늘다니 드문 일이구만.”

    백의 사내는 그제야 천천히 한립을 살피면서 미소 지었다.

    “아닙니다, 류청 족장님.”

    한립은 공수를 해보였다.

    “내 이름을 아는가?”

    “들은 적이 있습니다.”

    “목 장로는 자손 몇이 인족 수사에게 당한 뒤로 인족에게 한을 품은 사람이니 너무 마음 쓰지 말게. 낙아도 혈사대회에 대비하기 위해 비술 수련에 박차를 가해야 할 때이고.

    “제가 어찌 감히.”

    한립은 고개를 저었다.

    “목 장로의 말이 심하기는 하나 그게 사실이기도 하네. 한립, 낙아는 이전의 낙아가 아니야. 천호족의 혈맥을 계승해 이번 혈사대회를 지나면 그야말로 신분이 하늘과 같이 높아질 아이일세. 한 수사가 낙아의 오라비라고 하나 어쨌든 인족 수사이니 이미 사는 세계가 다르단 말이네. 내 말뜻을 알아듣겠나?”

    류청이 예의는 다 차렸는지 한립의 눈을 똑바로 보며 본론으로 들어갔다.

    한립은 비록 아무렇지 않게 듣고는 있었지만 기가 차 피가 거꾸로 솟는 심정이었다.

    류청이나 회포 노인이나 그를 무슨 류낙아에게 꼬이는 더러운 날파리 같은 존재로 여기고 있었다.

    수도계에 발을 들인 후로 누군가 자신을 이렇게 하찮게 본 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래, 자네 상황이 좋지는 않겠지. 성문에서 경원족에게 신분을 들켜 낙아에게 도움을 청한 것도 인지상정일 것이야. 허나 낙아는 지금 다른 데 신경을 빼앗겨서는 안 되네. 이렇게 하세, 내 특별히 자네가 혈사대회가 개최될 때까지 천호족에서 머무는 것을 허락하지. 그동안 천호족이 자네의 안전을 책임질 것이야. 그러나 혈사대회가 끝나는 즉시 팔황산을 떠나야 하는 것을 잊지 말게. 물론 바라는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 말해도 좋네. 낙아를 다시는 귀찮게 하지 않겠다는 약속만…….”

    류청은 한립이 한마디 대꾸도 하지 않는 것을 보고 값을 올리려는 수작이라 생각해 줄줄이 할 말을 늘어놓았다.

    “류 족장께서 괜한 우려를 하십니다. 제가 비록 수행이 높지는 않으나 남의 것을 탐내며 살지는 않았습니다. 제 안전도 천호족에서 걱정할 바가 아니고요. 낙아를 따라 이곳에 온 것은 순전히 옛정을 생각해서였으니, 앞으로 우리가 다시 만날 날이 있을지는 하늘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그럼 이만!”

    한립이 아무리 성격이 좋아도 참는 데 한계가 있었다.

    차갑게 자신의 말을 끊고 나가는 한립을 보고 류청이 노기를 드러내며 소매를 펄럭이려다 멈칫했다.

    뒤쪽의 류청의 거동을 주시하던 한립도 바깥을 보곤 걸음을 멈추었다.

    두 사람이 걸어오고 있는데 한 명은 리기마였고, 다른 한 명은 새하얀 장포를 입은 영준하게 생긴 중년인, 바로 백택 진령왕이었다.

    “전하! 전하께서 여긴 어찌……. 제게 알려주셨으면 족인들을 이끌고 마중을 나섰을 터인데요.”

    류청이 잰걸음으로 나가서 새하얀 장포의 중년인에게 공손히 말을 붙였다.

    ‘전하…….’

    한립은 새하얀 중년인의 신분을 알고 안색이 약간 창백해졌다.

    진령왕의 정보를 얻으려 천호족까지 왔다가 아무런 소득도 없이 수모만 당하고 있는데 리기마와 함께 진령왕 본인이 나타난 것이다.

    한립은 새하얀 중년인의 기운을 느낄 수 없는 것에 가슴이 철렁했다.

    음승전, 각성 후의 해 도인 그리고 마주 등 소수에게서만 경험했던 일이었다.

    “개인적인 볼 일로 찾은 것이니 부담스러워 말게. 내가 여기에 온 것을 다른 이들에게 알리지도 말고.”

    백택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예, 무슨 일이신지요? 제가 바로 처리하겠습니다.”

    “천호족과는 관계없고, 여기 한 수사와 관련된 일일세.”

    백택이 한립을 향해 미소 지었다.

    류청은 그 말에 어안이 벙벙해져 한립을 돌아보았다.

    “백택 선배님을 뵙습니다.”

    슬쩍 리기마를 살핀 한립은 백택에게 공수를 해 예를 취했다.

    팔황산으로 오면서 진작 유일한 진령왕의 이름을 알아두었다.

    “한 수사, 자네와 흰둥이의 일은 부왕께 말씀 올렸네. 갑자기 모시고 찾아와 불편을 끼친 것은 아닌지 모르겠군?”

    리기마가 웃으며 그들이 나타난 연유를 밝혔다.

    “불편은요. 백택 선배님께서 바쁜 와중에도 시간을 내주시니 저야 영광이지요.”

    내심 쓴웃음이 나왔지만 한립은 웃는 낯으로 답했다.

    “내 아들의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니 본 족이 자네에게 빚을 진 셈이네. 그리 예의 차릴 것 없네. 또 진령혈맥을 지닌 것을 보니 우리와 인연이 깊은 것 같고.”

    “선배님, 저는 인족 수사이고 여러 진령혈맥을 지니고 있지만 대부분 하계에서 얻은 것입니다. 진선계로 비승해 만황계역의 각 족에 해를 끼친 적은 없습니다.”

    백택의 말에 한립은 망설이다 진령혈맥에 대해 해명했다.

    “한 수사, 걱정하지 말게. 자네 일은 내 부왕께 다 말씀드렸어. 우리 만황계역 최대의 적이 천정인데 한 수사는 천정에게 흉악범으로 몰려 수배를 당하고 있지 않나. 원래 적의 적은 벗이라는 말이 있지! 게다가 흰둥이를 팔황산으로 데리고 와주었으니 만황의 은인이라 할 수 있어. 마음 푹 놓아도 되네.”

    리기마가 웃으며 분위기를 풀었다.

    한립은 그 말과 백택의 미소를 띤 얼굴을 보고는 조금 마음이 놓였다.

    류청은 세 사람의 대화를 들으면서 슬슬 방금 한립을 대하던 태도가 후회되기 시작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류청은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고, 공손히 백택과 리기마를 대청으로 안내해 상석을 백택에게 내주었다.

    한립은 그저 대청 입구에 서서 그냥 물끄러미 보고만 있었다.

    “한 수사, 왜 여기 와서 앉지 않고?”

    리기마가 문가에 우두커니 서 있는 그를 보고 이상하게 여겼다.

    “이곳은 천호족 공간인데, 일개 인족 수사인 제가 함부로 앉을 수 있나요. 쫓겨나지만 않아도 감지덕지하지요.”

    한숨을 내쉰 한립이 힘없이 답했다.

    “응? 이게 무슨 소린가?”

    리기마가 곧장 류청을 보았다.

    백택의 시선도 따라서 류청에게 향해있었다.

    “전하, 소주, 아무 일도 아닙니다. 한 수사, 내가 전에는 작은 오해를 한 것 같으니 이해해 주게.”

    류청은 낯이 뜨거웠지만 얼른 한립의 곁으로 가서 공수를 했다.

    한립은 속으로 헛웃음이 나왔으나 류청과 완전히 척을 질 수는 없어 함께 공수만 했다.

    “내 한 수사와 할 이야기가 있으니 류 족장은 먼저 나가 보게.”

    백택은 마치 자기 방이라도 되는 것처럼 명을 내렸다.

    “예!”

    류청은 전혀 불만을 드러내지 않고 예의 바르게 답하고 방에서 나가주었다.

    천정이 부단히 만황계역을 침입해 오는데 만황의 모든 부족이 오직 백택 왕의 통솔하에 간신히 버티고 있었다.

    그간 백택은 만황의 유일한 왕으로 모두의 인정을 받으며 그 위상이 매우 높았다.

    류청은 대청을 나서 인근 대전으로 들어갔다.

    “족장님, 한립 그 녀석은 쫓아버리셨습니까? 인족 따위가 감히 만황계역에 들어와서는! 우리 천호족에게 괜한 골칫거리만 안겨 주고 말입니다. 내 이 죽일 놈을 그냥. 그래서 어떻게 처리하셨습니까?”

    회포 노인이 류청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질문을 쏟아냈다.

    류청은 그런 회포 노인을 보고 속에서 열불이 솟아 끙, 앓았다.

    그는 일이 바빠 한립이 천호족 주둔지에 찾아왔다는 소리 말고 다른 보고는 받지 못했다.

    “왜 그러십니까?”

    회포 노인은 류청의 표정에 찔끔했다.

    “아까 한립이 은각서족와 운문호족을 따라 팔황산에 왔다고만 하지 않았나? 다른 일은 없었던 겐가?”

    “그게, 뭐 인족 따위가 별일이야……. 그냥 소주와 아는 사이인 듯 했습니다.”

    “아니, 그걸 왜 내게는 알리지 않은 것인가?”

    “족장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소주께서 아직 천진하시고 워낙 이런저런 사람들을 사귀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이라, 그걸로 전하께 혼도 많이 난 것을요……. 한립도 바깥에서 떠돌다 우연히 알게 된 어중이떠중이일 테지요.”

    회포 노인은 류청의 표정이 어두워지자 뭔가 일이 잘못된 것을 알고 우물쭈물 변명했다.

    “그 무슨 개똥 같은 소릴!”

    류청은 버럭 성을 냈다가 자신이 체통을 잃었다는 것을 알고 의자에 주저앉아 입을 다물었다.

    족장의 불호령에 소스라치게 놀란 회포 노인도 더는 입을 놀리지 못하고 옆으로 가서 쭈그리고 섰다.

    “자네가 인족 수사를 어찌 그리 미워하는지는 알고 있네만, 한립에게만은 앞으로는 예의를 갖추어 대하며 절대 언쟁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야. 내 말 알아듣겠나?”

    잠시 눈을 감고 감정을 다스린 류청이 차분히 말했다.

    “예? 그놈이 아직도 여기 있단 말입니까?”

    회포 노인은 자기도 모르게 눈을 부릅떴다.

    “방금 내가 한 말을 못 들은 겐가? 같은 말을 몇 번을 해야 알아들을 게야!”

    “아, 알아들었습니다.”

    서늘해진 대청 분위기에 회포 노인이 서둘러 답했다.

    류청은 더는 회포 노인을 상대하지 않았다.

    백택이 대청에서 있던 일을 외부에 발설하지 말라 했기에 더는 어떻게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류청은 오래 머물지 않고 금방 일어나 다른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 * *

    천호족 접객실 안.

    “한 수사, 이번에 팔황산에 오면서 비휴 한 마리를 데려왔다던데 내게 보일 수 있겠는가?”

    류청이 나가고 백택이 한립에게 물었다.

    “물론입니다, 선배님.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한립은 다른 방법이 없었기에 흰둥이를 화지공간에서 불러냈다.

    여전히 의식을 잃고 생기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상태였다.

    “정말 묵안비휴였어. 게다가 그의 후손이라니! 하늘이 보우하신 게지.”

    백택이 흰둥이를 보며 중얼거리는데 감동한 기색이 느껴졌다.

    “선배님께서도 흰둥이를 아십니까? 제가 깨우려 해보았는데 어떤 방법도 통하지 않았습니다.”

    “흰둥이라고? 친근한 이름이구만. 이 아이는 나와 우애가 깊었던 묵안비휴의 후예가 확실하네. 천정 도조들에게 공격을 당해 비명횡사한 친구였는데 이 세상에서 후인을 남겨두었을 줄이야. 한 수사, 이 아이를 팔황산까지 데려와 주어 고맙네. 아마 흰둥이의 증상은 만황 전체에서도 나만이 고칠 수 있을 것이야.”

    “흰둥이는 제게도 소중한 존재입니다. 부상을 당해 의식을 찾지 못하니 치료할 방법을 찾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요.”

    백택의 고맙다는 눈짓에 한립이 고개를 숙였다.

    공을 탐하지 않는 한립의 태도에 미소를 지은 백택은 손에서 하얀빛을 방출해 흰둥이를 끌어왔다.

    손바닥을 뒤집어 그가 꺼낸 핏빛 단약은 도문과 비슷하게 하얀 줄무늬가 들어가 있고 비휴의 형태를 닮은 하얀 짐승 그림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었다.

    한립은 이채를 띠고 핏빛 단약을 눈에 담아두었다.

    백택은 직접 흰둥이의 아래턱을 눌러 입을 벌리고는 핏빛 단약을 튕겨 넣었다.

    이어 그의 손끝에서 흘러나온 눈부신 수정빛이 수많은 검은 주술문자를 품고 흰둥이의 미간으로 쉴 새 없이 흘러 들어갔다.

    축 늘어져 있던 흰둥이는 하얀 빛의 파문을 연달아 일으키며 미약하게 숨을 쉬기 시작했지만 눈을 뜨지는 못했다.

    지켜보고 있던 한립은 마음이 급해졌으나 치료에 방해가 될까 조용히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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