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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2109화 (1,866/2,000)
  • 2109화. 천호족

    *

    떠나기 전 한립은 화우린을 리기마에게 돌려주려 했다.

    “이걸 돌려드리겠습니다.”

    “가지고 있게. 내 이번에는 친히 내준 것이라 일러 둘 테니 오늘과 같은 불편은 다시 없을 것이야.”

    리기마는 조금 미안한 기색으로 말했다.

    한립은 굳이 거절하지 않고 다시 화우린을 넣어 두었다.

    “오라버니, 아까 전음으로 한 말이요. 소주님과 아는 사이 같았는데 왜 거처로 가자는 청을 거절하신 거예요?”

    류낙아는 그의 옆에 붙어 입을 달싹였다.

    “그와 아는 사이이기는 하나 친분이 깊지는 않다. 또 특수한 신분에 그가 내게 귀한 화우린을 내준 목적도 아직 파악하지 못해 완전히 믿을 수가 없구나.”

    당장 진령왕을 만나러 나서지 않은 것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일단 천호족으로 가서 관련 정보를 수집한 다음에 움직이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소주와는 어떻게 알게 된 거예요?”

    “그 이야기는 천천히 해야 할 것 같은데……. 그보다 왜 그를 소주라 부르는 것이냐?”

    “그분이 진령왕 백택의 후예니까요. 내내 바깥세상을 유람하고 다니다가 백여 년 전에야 만황으로 돌아오셨는데 족장님들도 그분을 보면 소주라고 부르며 예의를 차리세요.”

    “그랬구나. 내가 눈이 삐었었지.”

    류낙아의 대답에 한립이 고개를 저었다.

    “족장께서 오라버니 소식을 못 알아보게 하셔도 몰래몰래 알아봤는데 그간 수많은 선역을 돌아다니면서 엄청난 일을 했더라고요. 걱정도 되면서 한 편으로는 얼마나 부러웠는지 몰라요.”

    류낙아가 장난스럽게 웃음 지었다.

    “적들에게 쫓겨 살기 위해 도망이나 다닌 나날이 많았는데 무엇이 부러웠더냐?”

    한립은 이해가 되지 않아 미간을 좁혔다.

    “그래도 자유롭잖아요. 여기는 안전하지만 너무 심심해요. 매일 수련 아니면 족장님 잔소리 들을 일밖에 없고요. 오라버니랑 함께 떠돌아다녔던 날들을 얼마나 그리워했는데요.”

    “안정적으로 살 수 있다면 그러는 것이 좋다. 수선이라는 것이 무엇이냐. 선도를 추구하며 영생을 구하는 것이다. 평생을 떠돌아다니며 불안하게 하는 것보다는 평안한 것이 낫다.”

    류낙아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한립의 말을 들었다.

    그들이 이야기를 나누며 천호족 주둔지에 이르렀을 때는 이미 석양이지며 하늘이 어둑해지고 있었다.

    * * *

    그날 밤, 한립은 류낙아를 따라 팔황산 아래 거대한 건물 앞에 섰다.

    검은 바위를 쌓아 만든 성벽과 달리 푸른 목재로 지은 건물에는 영수 그림이 그려져 있었고 그 옆으로는 관련 조각상이 놓여 있었다.

    푸른 건물의 맨 위에는 아홉 개의 꼬리를 늘어뜨린 하얀 여우 조각상이 하늘을 향해 울부짖고 있었다.

    한립은 하얀 구미호 조각상에서 발산되는 방대한 기운에 체내의 진령혈맥들의 움직임이 원활하지 않음을 느꼈다.

    “오라버니, 여기가 천호족 팔황산 주둔지예요. 저기 천호성조(天狐聖祖) 조각상 안에는 성조의 진령혈맥이 약간 들어있어 다른 종족의 혈맥을 억제하는 작용을 하니까 체내의 진령혈맥을 잘 다스리셔야 할 거예요.”

    류낙아가 그의 표정 변화를 보고 얼른 입을 열었다.

    <천살진옥공>을 발동해 다른 진령혈맥은 거두고 뇌붕혈맥만 남겨두자 확실히 몸이 편해졌다.

    “천호성조? 류기를 뜻하는 것이냐?”

    “어떻게 류기 노조를 아세요? 천호족에서도 그 이름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으로 아는데…….”

    “우연히 전해 들었다.”

    한립은 류낙아의 표정을 보고 류기와 만났던 일을 언급하지 않았다.

    “류기 노조께서는 천호성조는 아니세요. 성조는 8대 진령왕 중 한 분으로 어느 날 실종되셨어요. 일족의 천재로 이름을 날리셨던 류기 노조께서 천호성조의 혈맥의 힘을 계승해서 다음 대 천호진령왕이 되셨지만 안타깝게도 후에 또 종적을 감추셨고요. 그래서 우리 천호족이 이렇게 쇠퇴하게 되었고요.”

    류낙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한립은 표정 변화 없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머릿속에 많은 생각이 지나갔다.

    류기 노조와는 회계에서 마주쳤고, 호삼과 지내며 본 것도 들은 것도 많아서였다.

    “나 좀 봐, 오라버니에게 별소리를 다 하고 있어. 가요, 족장님께 데려다줄게요. 족장님은 수행도 높으시고 후배들에게도 자애로우시니까, 오라버니가 공손하게만 대하면 잘 해주실 거예요.”

    류낙아는 한립의 무표정한 얼굴을 보고 천호족 일에 관심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화제를 돌렸다.

    ‘자애롭다라…….’

    한립은 만황계역에서 그를 구해주며 앞으로 류낙아와 만나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경고하던 백의 중년인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리 유쾌한 만남은 아니었지만 그를 구해준 적이 있으니 마땅히 먼저 찾아가 인사를 하는 게 옳았다.

    류낙아는 한립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 신이나 그를 건물로 이끌었다.

    “낙아 아가씨.”

    푸른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든 병사 네 명이 류낙아를 보더니 공손히 인사를 했다.

    한립은 내심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금선 중기의 병사들이 류낙아를 이리 공손히 대하는 것을 보면 그녀의 지위가 상당히 높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류낙아가 그들을 신경 쓰지 않고 얼른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병사들이 무기를 들고 한립 앞을 막아섰다.

    “이 안으로는 들어갈 수 없습니다!”

    한립은 걸음을 멈추었다.

    “뭐 하는 거지?”

    류낙아가 뒤에서 벌어지는 일을 보고 서늘하게 소리쳤다.

    “낙아 아가씨,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천호족 주둔지는 족인이 아닌 자는 들어갈 수 없습니다. 목 장로님의 허락이 있어야 들여보낼 수 있습니다.”

    그중에 수행이 가장 높은 청갑 병사가 류낙아에게 공수를 하며 알렸다.

    “목 장로께는 내가 설명을 할 테니, 비키거라!”

    “낙아 아가씨, 저희는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입니다. 저희를 곤란하게 하지 말아 주십시오.”

    “뭐라고?”

    대노한 류낙아가 손을 저어 회백색 빛으로 병사들의 무기를 전부 날려버리려 했다.

    눈을 반짝인 한립은 신기하다는 시선을 보냈다.

    수행을 감추는 보물을 지니고 있어 몰랐는데 류낙아는 벌써 태을경 수사였다.

    태을경 초기이기는 했지만 영환계에 있을 때를 생각하면 그와의 거리를 거의 다 따라잡은 것과 다름없었다.

    금선경 수사들이지만 합격술에 능한 병사들이 빠르게 한곳에 모여 류낙아의 일격을 막고 입가에 피를 흘렸다.

    막 태을경에 이르러 원기가 안정되지 않은 탓에 공격에 실패한 류낙아는 아름다운 얼굴을 굳히며 더 호되게 몰아붙이려 했다.

    “그만!”

    그때 위엄 있는 목소리와 함께 희끗희끗 흰머리가 나고 눈빛이 칼날 같은 노인이 나타나 류낙아와 병사들 사이에 섰다.

    회색 장포를 입은 노인을 본 한립은 암암리에 뇌붕혈맥의 힘을 더 끌어올려 인족 수사의 기운을 가렸다.

    상대는 대라경 존재였다.

    “목 장로님!”

    “목 장로님.”

    병사들이 병장기를 거두고 허리를 굽혔고 류낙아도 예를 취했다.

    “만황 각 족이 팔황산에 모여 있건만. 주둔지 입구에서 체통도 없이 뭐 하는 짓이냐!”

    “죄송합니다. 낙아 아가씨께서 낯선 자를 주둔지 안으로 들이시려 하기에 법도에 맞지 않는 듯하여 막고 있었습니다.”

    병사 중 하나가 보고했다.

    “목 장로님, 제 목숨을 구해줬던 오라버니에요. 남이 아니라고요.”

    류낙아가 즉시 반박했다.

    “그만. 이 일은 내가 처리할 테니 너희는 신경 쓸 것 없다. 낙아, 너는 네 오라비를 데리고 따라오거라.”

    회포 노인이 류낙아의 말을 막고 돌아섰다.

    힐끗 한립을 보는 눈초리에 조소가 어려 있었다.

    한립은 그걸 알고도 아무 소리 없이 류낙아를 따라 문 안으로 들어섰다.

    길을 따라가니 화려한 대청이 나왔다.

    진귀한 재료로 만들어진 탁자와 의자가 있어 손님을 접대하는 장소로 보였다.

    “낙아야, 혈사대회가 얼마 남지 않았다. 지금이 얼마나 중요한 때인데 함부로 바깥출입을 한단 말이냐? 이렇게 수련을 게을리하다니, 족장님께서 심히 언짢아하신다. 어서 천호전으로 가거라!”

    회포 노인은 대청으로 들어가자마자 류낙아를 혼냈다.

    한립은 그 말에 눈을 반짝였지만 여전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잘못했어요. 그래도 오라버니가 팔황산까지 왔는데 오늘만 쉴게요. 내일부터는 배로 더 열심히 해서 일을 그르치지 않게 하겠습니다.”

    “일을 그르칠지 아닐지 네가 판단할 일이더냐! 천호족의 흥망이 달린 일에 어찌 그리 안일하게 구는 것이야. 당장 천호전으로 가거라. 네 오라비는 내가 대접을 하면 될 것 아니냐.”

    회포 노인은 류낙아의 부탁을 거절하며 처음으로 한립을 제대로 쳐다보았다.

    류낙아가 눈썹을 끌어올리고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

    “낙아야, 중요한 일이 있으면 어서 가보거라.”

    한립은 담담히 웃으며 말했다.

    “알겠어요. 오라버니, 그럼 절대 떠나지 말고 꼭 여기 있어야 해요? 혈사대회가 끝나면 저도 한가롭게 지낼 수 있어요.”

    류낙아는 그에게 따뜻한 시선을 보낸 뒤 회포 노인에게 한립을 잘 부탁한다면서 수차례 당부를 하고는 대청을 나섰다.

    이제 대청 안에는 한립과 노인뿐이었다.

    “저는…….”

    한립은 공들여 뇌붕혈맥의 힘을 조종하면서 공수를 하고 자기소개를 하려 했다.

    “한 수사, 자네에 대해서는 노부도 훤히 알고 있으니 쓸데없는 짓 말게. 그런 허접한 술법으로 다른 종족의 눈은 속일 수 있을지라도 우리 천호족은 속일 수 없을 테니.”

    노인이 그의 말을 자르며 냉소했다.

    “목 장로께서 제 신분을 안다니 저도 괜한데 힘쓸 것 없겠습니다.”

    한립은 담담히 뇌붕혈맥을 거두며 속으로 탄식했다.

    류낙아 그리고 호삼과의 친분을 통해 천호족에서 유용한 정보를 좀 얻을 수 있을까 했는데 여전히 그를 이리 박대할 줄은 몰랐다.

    “한 수사, 그래서 천호족에 온 연유는 무엇인가?”

    “제가 인족 수사이기는 하나 만황 종족에 악의를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다. 팔황산에 왔다가 우연히 낙아를 만나 천호족에 잠시 들른 것이고요. 주인이 환영하지 않겠다면 바로 떠나겠습니다.”

    한립이 그냥 대청을 나서려는데 눈앞이 환해지면서 회포 노인이 나타나 앞을 가로막았다.

    “천호족이 아무나 마음대로 왔다가 마음대로 떠날 수 있는 곳인 줄 아는가! 여기 온 목적을 말하기 전에는 갈 수 없네.”

    회포 노인은 차가운 얼굴로 회백색 빛을 날려 대청 입구를 막았다.

    “이걸 어떻게 받아드려야 하겠습니까? 저를 붙잡아 두시겠다는 뜻입니까?”

    한립도 표정이 싸늘해져서 소매 속에 숨긴 손으로 뇌전 문양 다섯 개를 일으켜 희미하게 뇌전진법을 형성했다.

    세월신등을 제련하고 통천검진을 깨우치느라 피곤할 때마다 심심풀이로 <오뢰정법진경>을 꺼내 들춰보았는데 거기서 찾은 또 다른 뇌전 전송술이었다.

    명족 소주 뇌운자가 만들고, 그가 개선한 뇌광진법보다 이 뇌전술(雷轉術)이 더 깊이가 있음은 당연했다.

    한립은 술법을 자세히 연구해 자신의 뇌광진법과 구뢰목 전송진법에 적용했다.

    그렇게 하면 두 전송비술이 더 먼 거리를 더 빨리 가도록 만들 수 있었다.

    구뢰목은 기마자에 의해 훼손되었지만 오는 동안 다른 뇌전 재료를 구해 한 벌의 법기로 제련해서 오는 길 어딘가에 진법을 펼쳐두었다.

    그런 대비를 해두었기에 팔황산에 당당히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뿐 아니라 시간법칙으로 암암리에 장천병과 소통해 만일의 사태에는 시공간초월을 해 달아날 마음도 있었다.

    시간정사가 아까워도 목숨을 잃는 것보다는 시간정사를 소모하는 게 나았다.

    “네 속셈을 모를 줄 아느냐? 천호족에서 낙아를 전력을 다해 육성하는 것을 알고 과거에 베풀었던 보잘것없는 호의를 빌미 삼아 뭔가 떡고물이라도 얻어먹으려는 것 아니냐. 안됐지만 상대를 잘못 골랐다. 우리 천호족은 리기마 소주처럼 순진하지 않단 말이다!”

    회포 노인은 회백색 빛을 폭발하면서 그를 제압하려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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