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8화. 재회
*
“받아라!”
경전은 한립과 류낙아가 붙어 자기들끼리 속삭이는 것에 불같은 질투심이 일어 먼저 달려들었다.
그가 한 발을 내디딜 때마다 발끝에 암홍색 빛무리가 번져 성벽을 쿵쿵 울리고 주변의 구경꾼들을 밀어내 텅 비어 있는 공간이 생겨났다.
눈을 가늘게 뜬 한립은 눈이 새빨갛게 변한 경전의 벌거벗은 몸에 기괴한 적홍색 문양이 나타난 것을 보았다.
경전은 어느새 코는 짧아지고 입은 튀어나온 하얀 원숭이 얼굴의 반인반수로 변해 있었다.
한립은 앞으로 나서면서 류낙아를 자신의 뒤로 숨겼다.
무언가 말을 하려던 류낙아는 부드러운 힘에 이끌려 수백 장 뒤로 밀려났다.
앞으로 뻗은 한립의 손에서 은색 뇌전이 뇌붕의 발톱으로 뭉쳐 하얀 원숭이의 두 주먹과 충돌했다.
치지직.
미친 듯이 반짝이는 뇌전 속에서 한립은 천살진옥공을 운용해 경전의 주먹을 쥐고 메다꽂으려 했다.
“흥, 감히 나와 힘을 겨루겠다?”
냉소를 흘린 경전은 한립의 손길을 뿌리치고 두 주먹을 거두었다.
뇌붕의 힘이 산악거원보다 약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놀라운 일이었다.
경전은 바로 주먹을 들어 그의 머리를 내리쳤다.
은색 뇌전빛을 번득이고 경전의 주먹 아래에서 사라진 한립은 상대의 뒤에서 나타나 청죽봉운검을 들고 목을 향해 금색 뇌전을 분출했다.
너무 빠른 움직임에 경전은 몸을 돌릴 시간도 없었다.
괴성을 내지른 경전의 피부가 붉은 수정처럼 딱딱하게 변하고 쾅, 금빛 뇌전이 폭발했다.
자잘한 뇌전 줄기들이 뱀처럼 꿈틀거리며 사방팔방으로 퍼져나갔다.
그때, 찬란한 빛 속에 기괴한 핏빛 파동이 튀어나와 급속도로 한립을 공격했다.
가슴이 서늘해진 한립은 무의식중에 역전진륜 신통을 발휘해 횡으로 비켜섰고 핏빛 파동은 그를 스쳐 뒤쪽 성벽에 떨어졌다.
쿠앙!
성벽 전체가 진동했다.
한쪽 어깨가 화끈해진 한립은 찢어진 의복 사이로 붉은빛이 도는 것을 확인했다.
자세히 보니 시뻘건 용암이 어깨에서 흘러내리며 진극막을 뚫고 있었다.
진법으로 보호되고 있던 성벽도 커다란 구멍이 뚫려 용암에 바위가 녹아내리고 있었다.
눈살을 찌푸린 한립은 은색 화염을 불러낸 손날을 세워 용암이 묻은 어깨의 살점을 깨끗하게 도려냈다.
용암이 떨어져 나간 어깨의 상처는 아무렇지 않게 봉합되었다.
“오라버니, 제가 도울게요!”
멀리서 류낙아가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립은 자신은 괜찮다는 듯 고개를 흔들어 그녀가 말려들지 않게 했다.
그 시각, 성벽 위에서 등 굽은 백발노인이 서서 한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몸도 튼튼하고 시간법칙을 익히고 있구나. 뭐 겨우 입문한 수준이라도 전이가 고생을 좀 하겠어.”
몸은 새까맣고 얼굴은 새하얀 노인은 기운을 단단히 숨기고 있어 수행을 파악할 수 없었다.
그때 아래쪽 허공이 구불구불하게 왜곡되면서 붉은 기운이 번지고 있었다.
“저렇게까지 하는 걸 보면 무리 없이 이길 수 있겠지.”
백발노인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리고는 흥미가 다했다는 듯 돌아서려다 입술을 달싹였다.
“인족은 죽여도 되지만 천호족 인물은 건드려선 안 될 것이다.”
노인은 경전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 경전은 죽여도 된다는 노인의 허락을 받고는 송곳니를 드러내고 씩 웃었다.
크악!
핏빛 입을 쩍 벌린 경전은 핏빛으로 소용돌이를 만들어 강력한 흡입력으로 한립을 덮어씌웠다.
진작 이상을 감지하고 있던 한립이 진언보륜을 이용해 자리를 뜨려는데 아까 용암에 다쳤던 어깨가 저릿하면서 괴이한 반응을 보였다.
경전의 입에서 발생한 흡입력과 서로 호응하는 듯했다.
어찌 된 일인지 파악하기도 전에 한립은 시간법칙의 힘을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고 핏빛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들어 사라졌다.
“오라버니!”
놀란 류낙아가 소리쳤지만 소용없었다.
화가 난 그녀가 노려보는데도 경전은 흐흐 웃기만 했다.
웅성거리던 구경꾼들의 소리가 점점 조용해지고 상도와 운표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을 때, 류낙아가 노기를 가라앉히고 경전에게 걸어갔다.
* * *
이때 한립은 묘한 공간에 들어가 있었다.
비린내가 섞인 뜨거운 바람이 부는 공간에는 용암 폭포가 흘러 기포를 펑펑 터트리는 용암 호수로 흘러들고 있었다.
공중에 떠서 코를 찡긋한 한립은 그리 크지 않은 공간이 꾸물꾸물 움직이는 암홍색 벽으로 막혀 있는 것을 보았다.
불규칙하게 움직이는 암홍색 벽에는 혈관 같은 것이 흐르고 선령력 흐름이 느껴졌다.
“그 녀석의 뱃속이라도 되는 건가?”
구유마동으로 탐색을 마친 한립은 코끝을 긁적였다.
그가 의아해하고 있을 때 주변 암홍색 벽이 격렬하게 요동치더니 중앙으로 맹렬히 수축하기 시작했다.
솨아-
아래쪽에서 흐르던 핏빛 용암이 파도쳐 그의 머리를 덮쳐왔다.
한립은 얼른 청죽봉운검 36자루를 불러내 사방팔방으로 푸른 검빛을 쏘아 보냈지만 암홍색 벽은 뚫리지 않았다.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이 좁아질수록 밀집한 검기들도 버티지 못하고 사라졌다.
결국 폭포에 휩쓸린 한립은 머리 위로 쏟아지는 엄청난 용암에 용암 호수까지 떠내려가 가라앉았다.
뜨거운 열기에 몸은 고통스럽고 주위는 온통 용암뿐이었다.
단단한 몸이 당장 어떻게 되지는 않겠지만 이대로 시간이 길어지면 어떤 변수가 생길지 알 수 없었다.
잠시 고민하던 한립은 청죽봉운검들을 합일해서 용처럼 기다란 검기로 용암 속에 길을 뚫고 현천호리병을 꺼내 쏟아져 내리는 용암 폭포를 쓸어 담아 보았다.
용암 폭포가 방해하지 않자 몸이 뜨겁기는 해도 그럭저럭 거슬러 올라갈 수 있었다.
백여 장을 꿋꿋이 올라가 좁아 드는 벽을 벗어난 한립은 하얀 돌기둥 두 개가 있는 장소까지 도달했다.
봉인의 힘이 느껴지는 곳이었다.
“하하, 나갈 수 있는 문을 찾았구나.”
웃음을 흘린 한립은 청죽봉운검과 현천호리병을 거두고 새하얀 돌기둥을 찬찬히 관찰했다.
그 시각 밖에서는 류낙아가 경전을 가리키며 따지고 있었다.
“오라버니를 어디로 보낸 거죠? 어째서 기운을 감지할 수 없는 거예요?”
“그 녀석은 내 복내공간(腹內空間)에 들어갔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원화용암(元火鎔巖)에 녹아 사라질 겁니다. 그러지 말고 나를 오라버니 삼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하하하!”
경전이 자기 반만 한 류낙아를 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안됐네요…….”
류낙아는 그 말에 당황하는 기색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경전은 류낙아가 한립이 안되었다고 하는 줄 알다가 그녀의 표정을 보고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석두 오라버니를 자기 뱃속에 집어넣다니 분명 후회할 거예요. 아니, 후회해도 이미 늦었다고 해야 할까요? 참 안됐어요…….”
류낙아는 불쌍하다는 듯 그를 보고 있었다.
그 순간 그의 뱃속에서 쾅 하는 소리와 함께 검은빛이 터져 나왔다.
갑자기 비틀거리며 고꾸라진 그의 입에서 핏덩이와 함께 송곳니 하나가 부러져서 성벽으로 날아가 꽂혔다.
경전의 입안을 빠져나온 검은빛은 급속도로 불어나 삼두육비의 마신 형상으로 변신했다.
“무사할 줄 알았어요!”
류낙아는 한립이 변신한 모습을 보고 놀라면서도 즐겁게 외쳤다.
그런 소녀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준 한립은 경전을 돌아보았다.
“안 돼…….”
입가에 피가 줄줄 흘러내리는 경전은 성벽에 박힌 자신의 송곳니를 보고 이성을 잃고 있었다.
두 개의 송곳니는 헤아릴 수 없이 오랜 세월 공들여 제련해 거의 6품 선기에 이른 보물로 체내 공간을 봉인하는 중요한 요소였는데 한립이 그중 하나를 부러뜨린 것이다.
“네 놈이 죽고 싶구나!”
경전이 핏빛을 왕성하게 일으켜 몸집을 더 부풀리더니 전신의 문양을 따라 눈동자까지 핏빛으로 물들어 요수 본체로 변신을 하려는 것 같았다.
그걸 본 한립도 더는 기운을 억누르지 않고 진령혈맥과 <천살진옥공>을 전력으로 격발해 경전에 못지않은 기운을 터트렸다.
퍽.
두 거물이 다시 붙으려 하자 구경꾼들은 더 멀리 자리를 피했는데, 누군가 하늘에서 떨어져 경전의 어깨에 안착했다.
아래로 몸이 기울어진 경전은 손으로 확 어깨를 털어내려다 상대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급히 몸집을 줄여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한립은 경전의 어깨에 서 있는 잘생긴 청년을 보았다.
하얀 법포를 입고 새하얀 장발을 옥관으로 높이 틀어 올린 자태가 기품이 넘쳤다.
“한 수사, 이게 얼마 만인가!”
사내가 먼저 인사를 해왔다.
한립은 모르는 사내였지만 기운을 감지해보고는 세월탑에 갇혀 있던 리기마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성문 앞 요족들이 안색이 확 달라져 포권을 하며 허리를 숙였다.
경전과 류낙아도 예외는 아니었다.
요족들의 대우에 화우린까지 더해지자 한립도 리기마의 신분이 대충 짐작이 가서 변신을 풀고 원래 모습으로 돌아갔다.
어느 정도 냉정을 되찾은 경전도 리기마와 한립이 아는 사이인 것을 보고 더는 경거망동하지 못하고 옆에서 기다렸다.
“리기마 수사, 생각했던 것보다 더 대단한 분이셨습니다. 당시 헤어지면서 만황계역에 올 일은 없을 거라 했는데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되었군요.”
한립은 미소를 지으며 포권을 해보였다.
“자네에게 화우린을 내주었을 때 이런 날이 있을 줄 알았지. 내 느낌이 맞았어. 한 수사, 자네가 우리 만황과 인연이 있구만.”
리기마도 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그 화우린 말입니다, 그다지 쓸모가 없던데요? 신물이라기에 꺼내 보이니 누가 가짜라고 우겨, 여기 모인 사람들에게 몰매만 맞을 뻔했습니다.”
한립은 슥 경전을 보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미간을 좁힌 리기마가 웃는 얼굴로 말했다.
“내 생각에는 분명 오해가 있었던 것 같은데. 경전 수사, 생각은 어떤가?”
“소주의 말씀대로입니다. 전부, 전부 오해였습니다.”
경전은 한쪽 송곳니가 부러져 나간 뺨을 움켜쥐고 황송하게 답했다.
“지금이라도 오해가 풀렸으면 되었네. 일단 부러진 이를 가지고 그 댁 노조께 찾아가면 도와주실 게야.”
“……예.”
가보라는 리기마의 말에 경전은 내키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성벽으로 가서 자신의 부러진 송곳니를 뽑은 경전은 부리나케 자리를 떠났다.
“같이 가자고 해도 싫다더니 오늘 여기까지 온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을 테지? 도울 일이 있으면 말해보게.”
경전이 사라지는 걸 지켜보던 리기마가 한립에게 말했다.
한립은 잠시 생각하다 리기마에게 흰둥이에 대해 일러주었다.
“묵안비휴의 혈맥이라! 그게 정말이라면 한 수사가 부탁할 일이 아니라 우리 만황이 한 수사에게 큰 빚을 진 셈일세!”
리기마는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흰둥이와는 막역한 사이입니다. 누가 누구에게 빚을 지었는가는 상관없이, 그 아이를 구해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좋아. 그렇다면 나를 따라 바로 성으로 들어가세. 팔황산의 진령왕께 데려다주겠네.”
리기마가 이렇게 말하는데 한립은 조금 머뭇거리는 기색이었다.
“무슨 걱정이라도 있는가?”
“진령왕을 뵙는데, 아무렇게나 그냥 찾아갈 수는 없지요. 오자마자 진황성 성문에서 소란을 피우기도 했고요. 며칠 시간을 두고 뵐 수 있겠습니까?”
“그것도 나쁘지 않겠지. 나를 따라 내 거처로 가세. 준비되는 대로 진령왕께 데려다줄 테니.”
리기마는 한립이 꺼리는 것을 알아차리고 그렇게 하라고 허락했다.
“소주, 오랜만에 오라버니를 만나 회포를 풀고자 하니 우선 저희 천호족으로 청해도 되겠습니까?”
이때 곁의 류낙아가 입을 열었다.
“녀석, 천호족 아가씨와도 아는 사이였다니 여복이 있었구만.”
그 말에 리기마가 의외라는 듯 한립을 보면서 장난스럽게 속삭였다.
“오해는 마시지요, 저희는 그저…….”
한립이 해명을 하려 했지만 리기마는 다 안다는 듯 손을 저었다.
그걸 본 한립은 입을 다물었고, 류낙아는 가볍게 웃음 지었다.
“아, 여기 은각서족과 운문호족은 외진 지역의 작은 부족이나, 흰둥이를 먼저 발견해 여기까지 호송한 공이 크다 할 수 있습니다.”
한립은 뒤쪽의 부족 행렬을 가리키며 덧붙였다.
“걱정하지 말게. 내 저들은 잘 챙겨줄 테니. 이후 적잖은 봉토와 자원이 내려질 것이야.”
리기마는 힐끗 뒤쪽의 행렬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신경 써주셔서 고맙습니다.”
한립은 포권을 하고는 상도, 운표 등에게 몇 마디를 한 뒤 성안으로 들어갔다.
지금까지 많은 일이 있었지만 한립 덕에 종족이 부흥하게 되어 상도와 운표는 감지덕지하며 머리를 조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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