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7화. 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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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성안으로 들어가겠다는 것인데 이렇게까지 해야 합니까?”
한립은 질문에 답하지 않고 평온히 반문했다.
“저도 뇌붕족에 아는 사람이 많은데 누구신지 이름을 말해 주시지요.”
경원족인이 미간을 좁혔다.
“이제 들어가도 되겠지?”
한립은 그를 상대하지 않고 두 병사에게 물었다.
“예, 물론입니다! 물론이지요. 이리로…….”
병사 한 명이 머리를 조아리며 답했다.
그 말에 부족인들이 나와 상도와 운표를 부축해 마차에 싣고 출발하려 했다.
“뇌붕족에 너 같은 자가 있단 소리는 들은 적 없다. 설마……. 어느 분파의 잡종인 건가? 잡종 따위는 대회에 참가할 자격이 없으니 썩 꺼지거라!”
경원족인은 자신을 무시하는 한립의 모습을 보고 분노해 소리를 높였다.
만황의 종족들은 혈맥을 중시해서 누군가에게 잡종이라 욕하는 것은 목숨을 거는 일과 같았다.
그러나 만황 종족이 아닌 한립은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저 진황성에 들어가야 팔황산에 올라 흰둥이를 깨울 수 있을 테니 길만 막지 않으면 되었다.
말없이 돌아서는 그가 겁을 먹었다 여겼는지 곳곳에서 야유가 쏟아져 나왔다.
그걸 본 경원족인은 더욱 의기양양해져서 한립이 진정한 뇌붕족이 아니라고 확신하고는 대뜸 손을 뻗었다.
“이 잡종 놈아! 안으로 들어가고 싶으면 날 이겨야 할 것이다!”
한걸음에 검은 돌판 바닥을 쾅, 부순 그는 한립의 심장을 노리고 등 뒤에서 공격을 해왔다.
인상을 찡그린 한립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넘어가려고 했더니 안 되겠구나.’
빙글 몸을 돌린 한립은 다섯 손가락을 매의 발톱처럼 굽혀 경원족인의 손을 할퀴었다.
혈맥의 힘에 성신지력을 격발한 그의 손에서 은색 뇌전이 응결해 뇌붕의 발톱 모양을 하고 경원족인의 주먹과 충돌했다.
쾅!
폭음과 함께 둘을 중심으로 바람이 몰아쳤다.
은빛 뇌전이 파칙파칙 터져 나와 주변에서 구경하던 이들도 연달아 뒤로 물러나고 말았다.
마차를 끌던 짐승들이 놀라 날뛰면서 행렬도 혼란에 휩싸였다.
한립을 얕보던 경원족인은 크게 놀랐다.
뇌붕족은 속도는 빨라도 힘으로는 경원족보다 못했는데 상대는 자신과 직접 충돌하고도 전혀 힘든 기색이 없었다.
이상하다는 생각을 한 경원족인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만일 힘에서 밀리면 경원족의 체면을 깎는 일이라 돌아가 다른 족인들을 볼 면이 서지 않았다.
기합을 터트린 그는 눈이 새빨갛게 변해 전신의 근육이 불룩 솟아올랐다.
“죽어!”
경원족인은 주먹 끝에서 핏빛 안개를 뭉쳐 열 배는 강한 힘을 발휘했다.
한립도 강력한 힘에 몸을 살짝 굽혔지만, 두 눈에서 뇌전을 번득이고는 두 발로 땅을 박차고 뛰어 올라가 한 자루 뇌전 창처럼 경원족인의 주먹으로 달려들었다.
쾅!
경원족인이 충격에 튕겨 나갔을 때, 한립은 공중에서 두 팔을 펼쳐 거대한 은색 뇌붕으로 변해 커다란 날개에서 비처럼 뇌전을 쏟아냈다.
콰쾅! 콰르르…….
밀려 나가느라 아직 몸을 가누지도 못한 경원족인은 머리 위에서 거대한 은색 뇌붕이 떨구는 뇌전들을 맞고, 그 자리에서 피부가 새까맣게 타들어갔다.
한립은 즉시 몸을 수축해 사람으로 모습으로 돌아와 자신의 마차 옆에서 쓰러진 경원족인을 쳐다보았다.
전신이 화상을 입기는 했지만 실제로 큰 부상을 입은 것을 아니라서 몸이 얼마나 단단한 종족인지 알 수 있었다.
안 그래도 상대를 죽일 생각은 없던 한립은 엉망이 된 겉모습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와, 최고다!”
“맨날 거들먹거리더니! 이제는 못 그러고 다니겠습니다.”
“뇌붕족 선배님은 실력도 출중하신데 그런 내색도 하지 않으시고 어느 부족의 장로가 아니실까요?”
구경하던 주위 요족들도 환호성을 지르면서 쓰러진 경원족인을 욕하고 한립을 찬양했다.
상도와 운표도 흥분한 얼굴로 한립에게 대해 얼마간 품고 있던 불만이 싹 사라졌다.
그들이 볼 때 16대 만황 종족을 힘으로 때려눕힌 것만으로도 존경할만한 존재였다.
한립은 상대가 더는 싸울 의지가 없는 것을 보고 마차로 돌아가려는데 갑자기 주위의 환호성이 가라앉았다.
돌아보니 성안에서 몸에 적동 갑옷만 걸치고 맨몸을 드러낸 또 다른 경원족인이 걸어 나오고 있었다.
쓰러진 경원족인보다 몸집도 크고 태을경 최고봉의 기운이 느껴졌다.
“경저, 이 못난 놈! 네 놈이 내 체면을 구기는구나.”
“형님, 그게 아니라…….”
“닥치거라!”
경저라 불린 경원족인은 제대로 변명도 하지 못한 채 새로 나타난 경원족인의 손짓에 휙 날아갔다.
“형님? 경저의 형님이면 경원족의 신예라 불리는 그…….”
“맞습니다. 백만 년 만에 가장 정순한 주염혈맥을 타고난 인물이라 경원족 다음 대 족장은 따 놓은 당상이라는 경전입니다!”
“이거 일이 점점 재미있어지는데요? 누가 이길까요?”
“쉿! 들려오는 소문에 성격이 고약하다니, 무슨 일이라도 당하기 싫으면 조용히 합시다.”
한립은 주변에서 웅성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미간을 좁혔다.
“아무리 못난 놈이라도 내 동생을 아무나 팰 수는 없지. 네가 경원족 체면을 봐주지 않았으니 형인 내가 대신 나서야겠다. 말해 보거라. 승패를 두고 겨루겠느냐? 아니면 생사를 걸고 겨루겠느냐?”
경전은 조용히 물었다.
한립으로서는 답답한 소리였다.
아니 작은놈을 패니 큰 놈이 나서고, 저놈을 때려눕히면 다음은 종족의 늙은 놈이 나설 것 아닌가?
“내가 쓸데없는 걸 물었나? 그렇다면 어떻게 죽고 싶은지나 정해 두든가.”
대답 없는 한립을 보고 경전이 두 팔의 근육을 불끈 일으켰다.
한립도 그 말에 눈빛이 싸늘해져 펄럭이는 소매 속에서 은색 뇌전들을 응축했다.
주위의 다른 요족들은 말로만 듣던 경전이 뇌붕족 자제를 죽일 수 있을지 기대하면서 구경하고 있었고, 상도와 운표는 숨도 크게 쉬지 못하고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지금이라도 달아나야 하나 고민 중이었다.
한립이 강하기는 해도 경원족 다음 대 족장의 상대가 될까 하는 걱정에서였다.
살벌한 분위기를 맑은 목소리가 깼다.
“오라버니? 석두 오라버니…….”
한립은 익숙한 목소리에 성문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눈처럼 새하얀 치마를 입은 소녀가 이쪽으로 달려오는데 어린 나이에도 수련한 모습에 사람의 매혹하는 기운이 어려있어 모여 있던 사내들이 눈길을 떼지 못하게 만들었다.
경전만 해도 소녀를 보더니 차마 눈길을 돌리지 못했다.
하지만 소녀의 반짝이는 눈에는 오직 한립의 모습만 담겨 있었다.
“낙아구나.”
한립이 웃으며 부르는 소리에, 소녀가 안겨들었다.
향기로운 바람이 코끝을 스치고 부드러운 소녀의 몸이 맞닿았다.
그걸 본 요족들은 다들 눈에서 불길이 치솟아 오만방자한 경전을 이긴 한립에게 가졌던 약간의 호감이 죄다 질투와 분노로 바뀌었다.
소녀는 영환계에서 그와 함께 동고동락했던 어린 여우 류낙아였다.
“오라버니, 여기는 어쩐 일이세요? 제게 말씀해 주셨으면 마중을 나갔을 텐데요! 어렴풋이 오라버니의 기운이 느껴져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와봤는데, 정말 다행이에요!”
류낙아는 뛸 듯이 기뻐하며 반가운 마음을 쏟아냈다.
소녀의 어깨를 잡아 살짝 떼어낸 한립은 그녀를 아래위로 살피고 웃음 지었다.
“많이도 자랐구나. 내가 어깨에 목마를 태우고 다니던 어린 아가씨는 어디 가고.”
그 말에 류낙아가 옛일을 떠올리고 얼굴을 붉혔다.
그걸 보고 있던 요족들은 마치 미혼술에라도 걸린 것처럼 눈빛이 멍해졌다.
“조그만 계집이 어딜 끼어드는 것이냐!”
이제야 정신을 차린 경전은 동요를 감추고 소리쳤다.
한립도 슬쩍 화가 치밀었다.
다른 때면 몰라도 뇌붕족을 가장하고 있는데 여기서 이렇게 시간을 끌어서는 안 되었다.
어서 상황을 정리하려는데 류낙아가 고운 손으로 그의 어깨를 잡았다. 그리곤 앞으로 나서 경전에게 가볍게 예를 취했다.
“경원족 수사신가요? 이걸 알아보시겠습니까?”
류낙아는 손바닥 크기의 동그란 비늘 조각을 꺼내 들었다.
물결 모양 표식이 겹겹이 있는 새하얀 비늘을 본 한립의 눈에 놀란 기색이 스쳤다.
저건 세월탑 비경에서 리기마가 떠나기 전에 준 물건이 아닌가!
주위에서 구경하던 요족들이 비늘을 알아보고 허리를 굽혀 예를 취하거나 심지어 바닥에 엎드려 절을 하기도 했다.
‘왜들 저러는 것이야.’
“진령왕의 신물을 어떻게? 설마…….”
경전도 일단 허리를 숙인 다음 놀라 물었다.
“맞아요, 저는 천호족 사람입니다.”
류낙아가 빙긋 웃음 지었다.
“낙아, 그 비늘은 무엇이냐?”
한립은 전음으로 따로 물었다.
“오라버니, 이 화우린(化羽鱗)은 진령왕의 신물이에요. 세상에 딱 일곱 개밖에 없는 거라 진령왕의 신임을 뜻하고요. 저희 천호족은 줄곧 진령왕을 모셔왔기에 딱 하나를 받을 수 있었는데, 노조께서 저를 아끼셔서 제가 지니고 다닐 수 있게 해주셨어요.”
류낙아의 전음을 들은 한립은 의아해졌다.
그런 중요한 물건을 리기마는 어째서 자신에게 준 것일까?
경전은 류낙아와 그녀가 든 화우린을 보고 그녀의 신분을 확신했지만 한립을 보는 시선은 여전히 악의가 가득했다.
“이분은 제 벗이에요. 신물과 천호족의 체면을 보아 이분들이 저를 따라 성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해주시지요.”
웃으며 신물을 거둔 류낙아가 말했다.
“진작 천호족이 인족과 어정쩡한 관계를 유지한다는 소문은 들었는데, 오늘 보니 그게 사실이었습니다. 만황계역에 숨어들려는 인족을 색출하지는 못할망정 성안으로 호송이라도 하겠다는 겁니까? 만황을 배신하려는 거냔 말입니다!”
경전은 재미있다는 듯 씩 웃음 지었다.
“허튼소리 하지 마세요. 그리고 제게 이상한 죄명을 씌우려 하지도 말고요.”
류낙아는 미미하게 표정이 변했지만 아닌 척했다.
만황종족은 인족을 증오했는데 여기서 한립의 인족 신분을 밝히는 것은 죽으라는 것과 다름없었다.
구경꾼들도 한립이 인족이란 소리에 의심 어린 시선을 보내거나 적대감을 드러냈다.
상도와 운표쪽 행렬의 요족들도 표정이 복잡해졌다.
“당신, 경전이라고 했나요? 헛소리는 함부로 지껄이는 것이 아닙니다. 진령혈맥을 지닌 내가 어찌 인족이란 말입니까?”
한립은 태연히 냉소했다.
“인족 중에 수행을 위해 요수에게서 진령혈맥을 빼앗는 자들이 있다고 들었다. 네가 진령혈맥을 지녔다고 만황종족이라 볼 수는 없지. 게다가 류 수사가 화우린을 꺼내 들었을 때 예를 올리지도 않았다. 진령왕을 경외하지 않는 네가 어떻게 만황종족이란 거지?”
“흠, 일리가 있는 소리기는 합니다만 전부 추측에 불과하군요? 내가 인족 첩자라면 이걸 지니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경전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 준 한립이 손을 뒤집어 류낙아가 꺼내 보였던 것과 같은 화우린을 들어 올렸다.
“또 화우린이다.”
“가짜가 아닐까요?”
“저분도 진령왕의 신임을 받는 분이셨습니다!”
그걸 본 요족들은 놀라 웅성거렸고 류낙아조차 놀란 기색이었다.
이번에는 처음과 달리 일부만 예를 올리고 일부는 의심을 거두지 않고 상황을 주시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그건 분명 가짜다. 세상에 딱 7개 밖에 없는 절세의 보물이 이 자리에 두 개나 있단 말이냐!”
얼굴을 굳힌 경전이 소리쳤다.
“이게 가짜인지 진짜인지 수사는 정말 모르시겠습니까? 당신이 말했듯이 딱 7개 밖에 없는 진령왕의 신물을 누가 기운까지 똑같이 복제할 수 있죠?”
류낙아가 신중히 경고했지만 경전은 멈칫하면서도 물러서지 않았다.
“신물까지 보였는데 길을 트지 않겠다면 당신의 체면을 봐주는 것도 여기까지입니다.”
한립이 서늘하게 말했다.
“좋다! 어디 네가 우리 경원족의 체면을 깎을지 아니면 내가 네 정체를 들춰낼지 해보자꾸나!”
경전이 결정을 내린 것을 보고 한립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진령왕의 신물을 보고도 경전이 저러는 것은 그가 인족이라는 것을 확신했다는 뜻이고 멀지 않은 곳에서 대라급 존재가 숨어 지켜보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내 정체가 밝혀지면 네게 피해가 갈 수 있으니 일단 천호족으로 돌아가 있거라. 이곳을 벗어나 따로 연락하마.”
한립은 주변을 경계하며 류낙아에게 전음을 보냈다.
“석두 오라버니, 이제 저도 오라버니 등 뒤에 숨어만 있던 꼬마가 아니에요. 제 한 몸은 지킬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생각지도 못하게 류낙아가 싱긋 웃으며 그를 안심시켰다. 하긴 그녀의 배후에는 만황계역 16대 종족인 천호족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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