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6화. 팔황(八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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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립은 거래 화면을 닫자마자 씩 웃으면서 <대오행환세결>을 펼쳐 금색 고리로 수연시왕정을 감쌌다.
카착!
부서진 수연시왕정이 수많은 물방울 형태의 금빛으로 변하며 금색 고리로 녹아든 다음 가느다란 수정실들로 변해 무려 마흔한 가닥이 광음정병으로 달라붙었다.
시간법칙의 힘이 맹렬히 늘어 시공간초월을 하기 전과 비슷하게 회복되었다.
눈을 감고 묵묵히 <대오행환세결>을 운용해본 한립은 다섯 개의 시간법칙 보물들이 이전보다 매끄럽게 움직이는 것에 기뻐했다.
<대오행환세결>을 거둔 그는 바로 통천검진의 진법도를 꺼내 그 안의 현묘한 도리를 깨우쳤다.
팔황산에서 무슨 일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는데 조금이라도 더 실력을 키워놓아야 했다.
수련 중에는 수년의 세월도 금방 지나가 어느새 저 멀리 팔황산이 보이기 시작했다.
* * *
만황계역의 강토는 너무 넓어서 어느 선역과 어느 선역 사이에 있다는 식으로 불규칙하게 구역이 나뉘었는데 팔황산은 그중에서도 특별한 곳이었다.
왜냐하면 만황계역의 수많은 거대 산맥과 드넓은 강줄기 중 대부분이 팔황산을 기점으로 하기 때문이었다.
팔황산을 만황계역 산맥과 강들의 머리가 있는 곳이라 하여도 과분한 칭호가 아니었다.
당시 8인의 진령왕들이 만황계역의 혼란을 끝맺고 싶어 했을 때도 팔황산에서 결맹을 맺었고, 그때부터 팔황산은 만황계역의 성산으로 불렸다.
그 팔황산 정상에 검은 바위를 쌓아 만든 원형의 대전이 세워져 있었다.
봉쇄된 대전 중앙에는 사람 절반 크기의 암홍색 화로에서 금색 불길이 이글이글 타올라 도처를 밝혔다.
대전의 네 벽을 빙 두르며 놓인 8개의 돌의자는 대충 다듬어 만든 것처럼 투박한 형태를 취하고 있었고, 각각의 의자 뒤에 이빨과 발톱을 드러낸 사나운 짐승 석상들이 서 있었다.
그중 머리에 두 개의 뿔이 난 온화한 표정의 새하얀 수사자 석상은 굵고 긴 꼬리로 하얀 구름을 품고 있는 자세를 취하고 있었는데, 그 앞에 놓인 의자는 텅 빈 다른 의자들과 달리 새하얀 장포를 입은 중년인이 앉아 있었다.
눈썹은 칼날처럼 곧게 뻗고, 눈이 별처럼 빛나는 영준하게 생긴 중년인은 두 눈이 호수와 같이 깊고, 눈동자 주위에 옅은 금색 빛의 고리가 떠있어 호수에 비친 달빛을 보는 것 같았다.
머리에 굽은 뿔이 두 개나 나 있고 턱 아래로 산양 수염을 기른 중년인은 온화하면서도 정갈한 인상을 주었다.
푸른 옥간을 들고 대전 중앙의 화로를 보고 있던 중년인이 쓸쓸히 시선을 거두었다.
당초 대전 안에서 피로써 동맹을 맺었던 진령왕들 중 이제는 그만이 남아 이곳을 지키고 앉아 있었다.
중년인은 바로 8대 진령왕 중 가장 지혜롭다는 신수 백택이었다.
먼 옛날에도 그가 주축이 되어 다른 진령왕들을 설득해 팔왕회맹을 결성하고, 묵안비휴와 힘을 합쳐 만황법전을 만들어 만환계역에 근본이 되는 예법을 세웠다.
그때부터 만황계역은 오랜 혼란의 시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렇게 싫은 소리를 들어가며 어렵게 모아놨건만. 갈 놈은 가고 죽을 놈은 죽어 다들 흩어져 버리니 다 같이 벌여 놓은 일을 나 혼자 책임지게 생기지 않았습니까.”
백택은 빈 의자를 훑으며 원망하다 어쩔 수 없다는 듯 허탈하게 웃었다.
“오랜 세월 만황의 불길은 날로 쇠약해져만 갑니다. 선계 전체가 혼잡해지니 그 안에서 우리 만황계역도 고난을 피해갈 수 없을 거예요. 어쩔 수 없이 수라혈문(修羅血門)을 열게 되면 당신들의 홀가분한 생활도 오래가지 못할 겁니다.”
화로 속의 불길을 바라보며 중얼거리던 백택이 갑자기 수염을 쓸어내리며 웃음 지었다.
“큰바람이 불어오는데 구름이 흩날리지 않을 수 있던가…….”
* * *
팔황산 아래에는 검은 돌로 건축된 석성(石城)이 한 채 있었다.
백 장 높이의 성 아래 뚫린 입구는 짐승들이 끄는 마차 행렬이 기다랗게 이어져서 아주 소란스러웠다.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 작은 행렬이 그 웅장한 줄에 끼어 있어서 오히려 눈에 띄었는데, 그중 한 마차 주변에서 체구가 큰 은각서족 사내가 안절부절못하며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석 선배님, 곧 만황성에 도착합니다. 성문을 엄히 통제해 저희 신분으로는 성안으로 진입하기 부족함이 있습니다. 선배님께서 나서 주실 수는 없겠습니까?”
마차 앞에 이른 상도는 손을 비비면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마차 안에 앉아 있는 사람은 한립이었다.
오는 동안 한립은 기운을 철저히 감추고 거대 요수가 은각서와 운문호 양족을 공격할 때만 나서 신속하게 위험요소를 제거하고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 모습이 은각서족과 운문호족의 경외감을 이끌어냈다.
선계 전체가 그렇듯이 만황도 실력 있는 자가 존중을 받는 세계였다.
상도와 운표의 수행에 당연히 한립이 지닌 진령혈맥이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았지만 압도적인 실력 차이 때문에 군소리하지 않는 것이었다.
한립이 인족이라는 것을 들키면 그들도 화를 입게 되었다.
“안심하고 검문을 받거라, 나머지는 내게 맡기고.”
한립은 담담히 답했다.
그의 대답을 들은 상도는 정말 안심이 되었다.
그는 다른 요수 마차를 모는 운표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주고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오랫동안 함께 지내다 보니 둘 사이에 냉랭하던 분위기도 풀어지고 긴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부분이 생겼다.
시간이 지나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성문 앞에 이른 두 부락의 행렬을 창을 든 병사 두 명이 막아섰다.
매의 머리에 사람의 몸을 한 눈이 부리부리한 병사들이었다.
“멈추십시오! 어디서 온 부족입니까?”
병사 중 하나가 초라한 행렬을 훑으며 물었다.
“우리, 우리는 은각서족과 운문호족입니다.”
상도는 긴장해 목이 탔다.
병사는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돌려, 다른 병사에게 들어본 적 있냐는 얼굴을 했다.
“못 들어봤습니다. 16대 만황종족이나 100대 만황종족에 그런 이름은 없습니다.”
뒤쪽 병사가 고개를 저었다.
“저희는 지룡부족의 관할에 있는 작은 부락이라 당연히 못 들어보셨을 겁니다.”
진작 마차에서 내린 운표가 상도 옆에 서서 침을 꿀꺽 삼키며 답했다. 그 소리에 병사들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진황성(鎭荒城)과 팔황산이 무엇을 앞두고 있는지 모르느냐? 왜 이런 때 와서 성가시게 하는 것이야! 너희가 올 곳이 아니니 썩 물러나거라.”
그들을 검문하는 병사는 인내심이 많은 성격이 아닌지 손을 휘휘 내저었다.
“나리, 저희도 팔황산에서 혈사대회가 개최되는 것을 알고 참석하기 위해 멀리서 온 것입니다.”
상도가 급히 답하는 말에 주변 사람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들이 들어가려던 성문 옆 입구에 다른 행렬이 도착했다. 원숭이 얼굴에 머리에 뾰족한 뿔이 난 7, 80명의 요족들은 몸이 상도 보다 훨씬 컸다.
상도는 비웃는 소리에 그들을 힐끗 보았다가 얼른 시선을 거두었다.
그들이 16대 만황족에 속하는 경원부족(庚猿部族)인 것을 알아봤기 때문이다.
만황 팔왕 중 하나였던 주염(朱厭)은 네 명의 자손을 남겼는데 그들이 네 개의 부족을 꾸려 지금까지 전해졌다.
그중 가장 혈맥을 강하게 계승한 부족이 경원족이었다.
은각서족이나 운문호족 부락 같은 변두리 소부족과 달린 경원족은 성문의 병사들도 함부로 대하지 못하고 검문도 면한 채 들여보내려 하고 있었다.
“뭘 보고 있느냐, 어서 떠나라는데!”
성문 병사가 상도와 운표를 재촉했다.
“나리, 저희는 여덟 분의 진령왕 중 한 분의 후손을 모시고 있습니다. 그럼 진황성으로 들어갈 자격이 되지 않습니까?”
상도가 어쩔 수 없이 털어놓는 말에 성문 병사들이 티 나게 움찔했다.
“누가 진령왕 후손을 함부로 입에 담는 것이냐!”
이때 노호성이 들려와 상도가 바르르 떨며 돌아보았다.
얼굴에 흉터 자국이 있는 경원족 사람이 잔뜩 화가 난 얼굴로 걸어오고 있었다.
“저희는…….”
상도가 서둘러 고개를 숙이고 해명을 하려다 윽, 소리를 지르고 날아올라 성벽에 부딪혀 떨어져 내렸다.
가슴을 맞은 그는 피를 토하면서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고 있었다.
운표가 그걸 보고 부축하러 가려다 날아든 장풍에 바닥에 납작 짓눌렸다.
경원족 인물이 그의 몸에 발을 올리고 멸시하듯 말했다.
“너희 같은 것들이 진령왕 혈맥을 입에 올려? 우리 16대 만황 종족을 우롱하는 것이냐?”
운표는 담즙이 목을 타고 넘어올 것 같아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깔려 있었다.
태을경 초기의 경원족인에게 그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빌어먹을 놈들 때문에 이 몸의 귀한 신발만 더럽혀지고 말이야.”
입을 비죽인 경원족인이 혐오스럽다는 듯 발을 들어 올려 운표를 밟아 죽이려는 시늉을 했다.
지켜보는 눈이 수백 수천인데, 단 한 명도 나서서 말리는 사람이 없었다.
간신히 일어선 상도가 참사가 벌어지려는 걸 보고 달려들려는데 병사들이 앞을 막아섰다.
“그러게 가라고 할 때 가지 않고! 지금 가봐야 네 목숨만 버리는 꼴이다.”
병사 중 한 명이 조그맣게 속삭였다.
상도는 그러든 말든 눈이 핏빛으로 달아올라 몸집이 몇 배로 커지더니 검은 돌도끼를 불러내 단단히 손에 쥐었다.
그러자 성문 병사들도 몸집을 키워 창을 교차해 상도의 목을 틀어쥐었다.
“너 혼자 죽는 게 아니라 우리도 말려든단 말이다!”
그러는 동안 원경족인의 발은 운표의 머리를 향해 떨어지고 있었다.
운표가 비명횡사하려는 것을 본 두 종족의 족인들이 죽음을 불사하고 뛰어들려 했다.
그때 차분한 목소리가 행렬의 마차 안에서 들려왔다.
“그럴 배짱이 있다면 발길질을 해보거라.”
그리 크지 않은 목소리가 성문 앞에 모여 있던 모든 이들의 귀에 또렷이 들려와 다들 흠칫 놀라 주위를 둘러보았다.
“누군데 숨어서 허세를 부리는 것이냐! 내가 이놈을 밟아 죽이겠다면 어쩔 건데?”
순간 동작을 멈추었던 경원족인이 조소하며 더욱 힘을 실어 발을 내리찍었다.
치지지직!
은색 뇌전을 품은 푸른 인영이 마차에서 튀어나와 눈 깜짝할 사이에 경원족인 앞에 나타나더니 뇌전이 작열했다.
몸이 마비된 경원족인은 검은 성벽으로 튕겨 나가 성벽 전체가 흔들렸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다들 경악해 푸른 인영을 살폈다.
운표를 살리기 위해 부득이하게 모습을 드러낸 한립이었다.
그는 몸을 굽혀 직접 운표를 부축해 단약을 먹이고는 상도를 막고 있던 병사들을 향해 눈을 찡그렸다.
그와 눈을 마주친 병사들은 건드리면 안 되는 상대를 건드린 것을 알고 다급히 창을 거두었다.
한립은 열심히 뛰어온 상도에게도 단약을 튕겨 주어 복용하게 한 다음 경원족인에게 시선을 돌렸다.
몸이 어찌나 단단한지 두꺼운 성벽에 금이 가게 부딪히고도 크게 다친 데 없이 펄쩍 뛰어내려 있었다.
일을 크게 벌이고 싶지 않아 한립이 힘을 거의 쓰지 않은 덕이었다.
“뇌붕족……. 저들이 당신의 수하입니까?”
경원족은 한립의 진령혈맥을 감지하고 반격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뇌붕족과의 충돌은 꺼려지는 듯했다.
원경족과 마찬가지로 뇌붕족도 만황 8대 진령 유천곤붕의 후예로, 16대 만황종족 중 하나였다.
세력으로는 경원족보다 뇌붕족이 조금 못했지만 족장이 수행도 높고 자손들을 싸고도는 경향이 강해서, 대대로 뇌붕족의 어린 족인들이 무슨 일을 당하면 족장이 직접 나서서 상대의 종문까지 찾아가는 일도 허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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