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3화. 신등 부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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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
일단 흰둥이는 누각 꼭대기 층에 내려두고 방어 금제를 펼쳐둔 한립은 3층 누각을 가득 채운 태세선부에서 가져온 각종 광물과 재료, 선기와 보물들 그리고 누각 바깥에 쌓인 영초와 영약들을 보았다.
태세선부에서 빠져나온 후 계속 바빠 이것들을 제대로 살펴볼 여유도 없었다.
수많은 영약과 영초까지 진귀한 보물이 많아 처리하려면 복잡하기는 하겠지만 전부 처분할 수 있으면 얼마나 많은 선원석을 구할 수 있을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하얀 옥간을 꺼내든 한립은 시간이 난 김에 꼼꼼하게 누각 안의 각종 보물을 분류해 쌓아두고 기록하느라 한나절을 보냈다.
정리를 마치고 누각 옆에 주저앉은 그는 소매 속에서 다양한 저물법기들을 쏟아냈다.
태세선부에서 죽은 각파 제자들의 것이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값나가는 것은 사섬과 남원자의 저물법기였다.
촤르륵.
우선 사섬의 저물법기에서 대량의 물건을 꺼내 보았다.
대충 살폈는데도 입꼬리가 올라가는 물건들이었다.
대라경 존재답게 그를 실망시키지 않고 각종 재료에 선기가 넘쳐났고 선원석만 해도 이천만 개는 되었다.
그중에 삼사십 개는 특수한 선원석으로 중품 선원석보다도 크기가 크고 불꽃처럼 밝은 빛을 뿜어냈다.
“이게 상품 선원석?”
눈이 번쩍 뜨인 한립은 그중 하나를 만져보았다.
정순하고 바다처럼 넓은 선령력 파동이 온천에 들어간 듯 그의 몸을 편안하게 해주었다.
한립은 어찌나 좋은지 선원석에서 손을 떼지 못했다.
한 번도 본 적은 없지만 이건 상품 선원석이 확실했다.
그가 품은 선령력보다 더 짙고 정순한 선령력를 품고 있어 이걸로 기운을 회복하면 몇 초도 걸리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렇게 귀한 상품 선원석을 선령력 회복용으로 사용하는 것은 너무 사치스러운 일이었다.
경전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상품 선원석은 고계 선기를 제련하고, 경지를 돌파하고 심지어 삼시를 참하는 등 각 방면에서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었다.
상품 선원석을 잠시 갖고 놀던 한립은 소중하게 챙겨두고 나머지 물건들을 종류별로 분류한 다음 남원자의 저물법기로 시선을 옮겼다.
세월탑에서 남원자를 제압한 다음 저물법기는 따로 챙겨두었다.
남원자는 선원석이 600만 개 정도로 중품은 있었지만 상품 선원석은 한 개도 없었다.
다른 이들의 저물법기는 역시 수행이 부족한 만큼 그 내용물도 사섬이나 남원자에게 비할 바가 아니었다.
다른 저물법기를 다 털었는데도 선원석 400만 개정도 찾았을 뿐이었다.
선원석을 전부 자신의 저물법기 안에 쓸어 담은 한립은 씩 웃음 지었다.
도처를 돌아다니며 적들을 죽이고 모은 선원석이 천만 개가 안 되었는데 갑자기 재산이 훌쩍 늘어났다.
한립은 누각 안의 보물 중에 쓸모가 없는 것을 추려 윤회전 가면을 쓰고 일일이 등록해두었다.
팔 게 너무 많아서 한 달 넘게 바삐 손을 놀린 덕에 물건 대부분을 처분하고 선원석 3천 만개를 더 얻을 수 있었다.
급매로 내놓은 탓에 가격을 저렴하게 책정해 이 정도지, 제대로 팔았으면 훨씬 더 많은 재산을 불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남은 물건들은 찾는 사람이 많이 없는 생소한 것들이 많아 일단 윤회전에 이름을 올려놓고 천천히 살 사람을 기다려볼 생각이었다.
이미 선원석을 칠천만 여 개나 얻어 한동안 쓸 선원석이 남아돌았다.
이 정도면 태을경 수사가 아니라 대라경 수사 혹은 작은 선역의 이름난 종문도 누리지 못할 양이었다.
그래서 예전에는 감히 사지 못했던 시간법칙 재료들도 사려고 했는데 아쉽게도 시간법칙 재료 자체가 드물어서 기다려 봐야 했다.
이때, 한립은 기척을 느끼고 화지공간을 나섰다.
“석목 선배님.”
장막 바깥에서 상도가 들어오지 않고 그를 부르고 있었다.
그 밖에 운표와 다른 족인 열댓 명도 함께였다.
그 뒤로 날개 달린 호랑이 요수가 끄는 뼈로 만든 배와 그보다 훨씬 작지만 화물이 가득가득 실린 배나 마차가 줄지어 서 있었다.
상도와 운표가 팔황산으로 가져가 팔려는 것인지 어쩌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들어오거라.”
한립은 이제 출발할 때인 것을 알고 말했다.
“다름이 아니라, 양 종족이 출발준비를 마쳤습니다. 언제 출발하면 좋겠습니까?”
상도가 공손히 물었다.
“바로 출발한다.”
“예!”
한립은 장막에서 나와 상도와 운표가 이끄는 대로 배에 올라 그들이 준비한 가장 좋은 방으로 들어갔다.
번쩍이며 날아오른 배를 날개 달린 호랑이 요수 두 마리가 끌었는데, 요수들의 수행은 금선의 경지였으나 속도만은 태을경 수사 못지않았다.
한립은 쓸 만한 비행법기로 빠르게 이동할 수 있고 가는 동안 그의 신분이 폭로될 일도 없어 만족했다.
“바깥일은 너희에게 맡기겠다. 나는 폐관을 해야 하니 중요한 일이 아니면 방해하지 말거라.”
“예.”
한립의 명령에 상도와 운표가 얌전히 답하고 방을 나갔다.
즉시 방 곳곳에 금제를 펼치고 화지공간으로 들어간 한립은 3층 누각에 자리를 잡았다.
귀한 물건들을 많이 팔아치웠지만 태세선부에서 그가 얻은 가장 큰 수확은 다른 것들이었다.
조용히 앉아 평정을 찾은 그는 손을 저어 네 가지 물건을 꺼내 두었다.
첫 번째는 세월신등 옆에 있던 금실로 묶여 있는 금색 두루마리이고, 두 번째는 흑천마조가 준 <오뢰정법진경>이라고 적힌 보라색 옥간이었다.
세 번째는 금색 등잔인 세월신등 그리고 마지막 물건은 통천검진의 진법도였다.
이 네 가지에 더해 정염불새의 하얀 불구슬이야 말로 태세선부에서 얻은 가장 큰 수확이라 할 수 있었다.
한립은 다른 물건들을 한쪽에 밀어두고 금색 두루마리부터 들었다. 세월신등과 함께 보관되었던 걸 보면 범상치 않은 물건이 분명했다.
기대감을 품고 금색 실을 풀어 두루마리를 펴자 맨 위 <세월진경(歲月眞經)>이라는 고어가 보였다.
글씨가 얼룩덜룩 번진 게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기록이었다.
이름만으로도 내용이 짐작이 간 한립은 얼른 나머지를 읽어 내려갔다.
과연 일종의 시간법칙 수련법으로 어떻게 만물을 세월의 불길 속에 쇠하고 시들게 할 수 있는지 적혀 있었다.
꼼꼼하게 두루마리를 읽느라 반나절을 보낸 한립은 한껏 밝아진 얼굴로 곁의 세월신등을 만져보았다.
<세월진경>은 <대오행환세결>보다는 못했지만 진언문에서도 절정의 시간공법으로 꼽히는 공법이었다.
그러나 그를 더욱 기쁘게 한 것은 마지막에 기록된 세월신등을 제련하는 방법이었다.
세월탑이 붕괴되면서 세월신등의 불꽃이 꺼져 더는 쓸 수가 없었는데 제대로 된 제련법을 찾았으니 희망이 보였다.
한립은 <오뢰정법진경>과 통천검진 진법도를 넣어두었다.
시간이 났을 때 연구해두려고 꺼냈는데 세월신등을 제련할 방법을 찾았으니 우선순위가 뒤로 밀렸다.
세월신등을 제련하는 방법은 복잡하지 않아 <세월진경>을 수련해온 수사라면 간단히 <세월진경>으로 수련한 시간법칙의 힘으로 서서히 배양하면 되었다.
하지만 한립은 <대오행환세결>을 익혀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미라노조의 가르침으로 시간법칙에 대한 이해도가 상승한 한립은 그가 경솔하게 <세월진경>까지 익혔을 때의 폐해를 알았다.
<대오행환세결>을 대성하기 전에 다른 시간공법을 익히면 오히려 앞길이 막힐 수 있었다.
미라노조가 한립이 이미 익힌 시간법칙 신통들을 제외한 다른 것들은 전수하지 않은 것도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선기 하나를 제련하려다 앞길이 막힐 수는 없지 않겠는가.
그렇지만 달리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한립은 정신을 집중해 단시횃불과 금색 화염 한 덩이를 불러냈다.
화염 덩어리는 세월탑 제단에서 얻은 세월화염이었다.
그가 양손으로 빠르게 수결을 맺자 미간에서 의식이 뭉친 수정실들이 빠져나와 단시횃불의 법칙의 힘과 어우러졌다.
수정실과 단시법칙이 동시에 세월화염 속으로 들어가 화륵, 불길을 북돋웠다.
화염 속에서 단시법칙, 의식정사 그리고 세월화염의 법칙의 힘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돌면서 서로 격렬히 충돌했다.
진지한 얼굴로 한립은 단시법칙와 의식정사를 조종해 세월화염의 법칙의 힘과 계속해서 접촉했다.
신기하게도 시간이 지날수록 단시법칙이 세월화염의 법칙의 힘과 비슷하게 변해갔다.
이건 미라노조가 전수해준 ‘진언전령법(眞言轉靈法)’을 응용한 것이었다.
의식의 힘을 매개로 어떤 법칙의 힘이 다른 법칙의 힘을 모방하게 하는 비술로, 대부분 선기를 남에게 빼앗아 얻게 된 한립이 어떻게 하면 그걸 조종할 수 있는지 물어 얻은 답이었다.
시간이 흘러 5, 6년 후.
두 종족의 행렬은 평화롭게 이동하고 있었지만 상도와 운표는 감히 방심하지 못하고 교대로 주위를 살피며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했다.
그날은 상도와 은각서족의 은뿔 거한이 행렬 주위를 순찰하고 있었다.
“족장님, 석 선배님이 정말 우리를 도와주려는 걸까요? 아무리 생각해도 어린 비휴를 그에게 맡기는 게 마음이 놓이지 않습니다.”
은뿔 거한이 힐끗 한립이 있는 방을 보고 전음으로 물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게야! 석 선배님의 수행은 우리보다 훨씬 높아 전음도 들을 수 있을지 모른다!”
깜짝 놀란 상도가 전음으로 나무랐다.
은뿔 거한은 거기까지는 생각을 하지 못했는지 심장이 철렁했다.
두 사람은 주의 깊게 한립의 방을 살피다 아무런 움직임이 없자 한숨을 돌렸다.
“나라고 마음이 편하기만 하겠느냐. 허나 석 선배님과 같은 실력자에게 우리가 가타부타할 처지가 되느냔 말이다. 게다가 어린 비휴처럼 진귀한 존재를 우리나 운문호족의 힘만으로 팔황산까지 호송하려다가는 그 길에 화를 당하고 말 것이다. 석 선배님이 어떤 목적이든 우리는 그에게 기댈 수밖에 없단 소리다. 앞으로 이런 이야기는 절대 다시 꺼내지 말고, 사적으로라도 족인들이 떠들지 못하게 하거라!”
상도는 가능한 가장 작은 목소리로 전음을 보냈다.
“역시 족장님께서는 멀리 내다볼 줄 아십니다. 명심하겠습니다!”
은뿔 거한이 족장을 우러러보며 답했다.
상도가 고개를 끄덕이고 뭐라 덧붙이려는데 한립이 있는 방에서 무언가 쿵,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힉!”
“……!”
은뿔 거한과 화들짝 놀라 그곳을 쳐다본 상도는 전음으로 나눈 대화를 들킨 줄 알고 어떻게 해명할지 고민했지만 다행히 더는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 시각, 화지공간 안의 한립은 온몸이 잿빛에 흙색이었고 의복은 거의 다 불에 타서 거뭇거뭇 꼴이 말이 아니었다.
세월화염도 보이지 않았는데 한립은 부상 가득한 몸으로 희색이 만연했다.
6년의 노력 끝에 드디어 진언전령법으로 세월법칙을 모방하는 데 성공했다.
성공하는 순간, 너무 기쁜 나머지 법칙의 힘을 조종하는 데 소홀했더니 세월화염이 폭발해 조금 다치기는 했지만.
치유용 단약을 삼킨 한립은 몸을 회복하고 세월신등을 든 채 단시횃불을 불러냈다.
단시법칙이 횃불에서 튀어나와 금색 화염 덩어리로 변하더니 괴이한 파동을 내며 세월화염과 엇비슷해졌다.
한립의 손짓에 가짜 세월화염이 세월신등을 감싸고 천천히 녹아들었다.
세월신등 표면에 미약하게 금빛이 감돌기 시작하고 있었다.
수년의 노력이 헛고생이 아니었던 것을 알고 한립을 길게 숨을 토해냈다.
그렇게 가짜 세월화염을 네 덩이 더 만들어 서서히 제련술을 펼치자 세월신등의 금빛과 시간파동이 점점 뚜렷해졌다.
3달이 지난 후에는 신등의 심지에 금빛이 반짝이면서 금색 불씨가 살아났다.
쿠쿠쿠.
불씨가 살아난 순간 강대한 시간파동이 세월신등에서 터져 나와 파도처럼 화지공간의 천지원기를 휩쓸었다.
부활한 세월신등을 본 한립은 밝게 웃으며 수결을 맺은 손을 놀렸다.
화륵!
세월신등의 불씨가 커지며 길쭉하게 늘어나 금색 화룡으로 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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