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2화. 흰둥이?
*
상도가 훌쩍 뛰어내리고 한립도 따라 내려가 거대한 지하 용암호에 다다랐다.
용암호는 흐르지 않고 검은 판처럼 굳어 있었는데 틈새 사이로 붉은빛이 보이는 것이 아래에 액체 상태의 용암이 고여 있는 듯했다.
한립은 그 사이에서 거무튀튀한 돌덩이 같은 웅크린 까만 개의 모양을 한 것을 보고 날아갔다.
가까이 갈수록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상도 등은 검은 돌덩이 쪽을 보면 자연스럽게 고개가 숙어졌다.
그들이 말한 태생적인 혈맥의 억압이 영향을 미치는 듯했다.
의식을 집중해 까만 돌덩이를 살핀 한립의 의혹이 커져만 갔다.
“뭔가 이상합니다. 지난번에 왔을 때만 해도 용암호수가 이렇게 굳어 있지는 않았어요.”
상도가 다가와 중얼거렸다.
“이전에도 이런 색이었더냐?”
“지난번에도 검은빛이 돌기는 했는데 이렇게 진하지는 않았습니다.”
한립이 내려가 돌덩이를 만져보았다.
손끝에서 서늘한 느낌이 전해졌다.
“얼음 속성 법칙의 힘에 공격을 당해 중상을 입었구나.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스스로를 용암호에 봉인하고 지열을 끌어들여 한기를 밀어내고 있던 것이야.”
“그렇다면 용암호의 열기가 다했으니!”
상도는 깜짝 놀라 입을 벌렸다.
“그래도 찾아냈으니 데리고 돌아가자꾸나.”
“안 됩니다.”
한립의 말에 운표가 반대하고 나섰다.
운표는 한립의 시선에 두려움을 느꼈지만 그래도 해야 할 말은 했다.
“이곳에서 부상을 치유하는 중이었는데 우리가 무턱대고 옮겼다가 더 큰 위험에 처하면 어찌합니까?”
“틀린 말은 아니나, 내가 방법이 있으니 걱정하지 말거라.”
한립은 고개를 끄덕여 주고 손을 펼쳐 은색 화염 한 덩이를 불러냈다.
그 열기가 용암호의 백 배 이상이라 상도를 비롯한 만황 족인들이 자기도 모르게 뒤로 물러섰다.
“이제 마음이 놓이느냐?”
“제가 괜한 걱정을 했습니다.”
운표는 한 손으로 가슴을 가로지르며 사죄했다.
“가자. 일단 은각서 부족으로 갈 것이다.”
한립의 말에 상도가 소리 없이 기뻐했고 운표는 눈꼬리를 떨었다.
그게 빤히 보였지만 한립은 아무 소리도 하지 않았다.
대대로 원수지간인 두 종족 사이가 하루아침에 좋아질 수 없었기에 운표의 걱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었다.
반 시진이 지나 그들은 용암호가 있는 동굴을 떠나 평원 깊은 곳으로 이동했다.
* * *
은각서 부락은 평원 왼쪽의 거대한 강 옆에 짐승 가죽과 목재로 지은 수많은 장막을 펼쳐두고 있어 장관을 이루었다.
한립 일행이 돌아오자 장막에서 쏟아져 나온 은각서부족 족인들은 돌덩이의 혈맥의 힘을 느끼고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조아렸다.
은각서 족인들은 운표 등 운문호부족 족인들을 발견하고는 눈이 핏빛으로 물들어 살기를 드러냈지만 상도가 나서지 말라 명하였기에 다행히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대다수의 은각서 부족인들은 친지나 벗을 운표 등에게 잃은 경험이 있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상도는 그들을 자신의 장막으로 안내하고 족인들을 시켜 검은 돌덩이를 짐승 가죽이 깔린 자신의 나무 침상에 올려두게 했다.
한립이 손을 저어 은염 소인을 불러내자 장막 안의 온도가 껑충 뛰어 그 작열하는 열기에 상도 등은 참지 못하고 물러섰다.
은염소인의 머리에 오색 화염밖에 남아 있지 않은 것을 보고 한립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구룡신화조에 갇혀 있을 때 정염불새가 칠채화단사 중 두 가지 화염을 희생해 그를 보호해 주지 않았으면 병령과 소통해 시공간초월을 할 때까지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그것 때문에 한립이 마음을 쓰는데 정염불새는 별생각이 없는지 그의 손바닥 위에서 깡충깡충 뛰면서 즐거워했다.
“네가 잃은 것들은 반드시 보상해줄 것이다.”
한립은 의식연계를 통해 정염불새에게 뜻을 전했다. 정염소인은 그의 손바닥 위에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화르르.
한립이 검은 돌덩이를 가볍게 공중으로 띄우고 정염불새가 스스로 날아올라 은색 화염으로 변해 돌덩이를 감쌌다.
은색 불길이 검은 돌덩이를 겹겹이 감싸고 표면을 얼음처럼 녹이기 시작했다.
새까맣던 색깔이 점차 옅어지면서 돌덩이의 표면이 한층 한층 벗겨질 때마다 한립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바깥의 석화된 껍질이 벗겨지고 나타난 것은 몸을 잔뜩 웅크리고 있는 하얀 털이 보송보송 난 작은 동물이었다.
작은 짐승의 모습을 알아본 한립이 자기도 모르게 이름을 불러보았다.
“흰둥이…….”
수정 얼음 속에 웅크리고 있는 어린 짐승은 금동과 대금원선역으로 떠났던 비휴 흰둥이였다!
한립이 어린 짐승과 아는 사이인 것처럼 보이자 상도 등의 안색이 달라졌다.
그들은 신경 쓰지 않고 한립은 정염불새가 수정 얼음 마저 녹였을 때 흰둥이를 품에 안았다.
눈을 감은 흰둥이는 생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아 시체처럼 보였다.
한립이 의식으로 면밀하게 관찰하자 흰둥이의 의식이 깊은 잠에 빠져 혈맥의 힘으로 스스로를 봉쇄하고 있는 것을 알아냈다.
일종의 자기 방어기제라는 것을 알고 걱정이 가시기는 했지만 어떻게 깨워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정염불새는 한립이 궁리하는 모양을 보고 방해하지 않으려 어깨에 내려앉아 사라졌다.
잠시 고민하던 한립은 연신술을 운용해 흰둥이의 의식을 깨워보려 했지만 흰둥이의 의식은 칠흑처럼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 어둠 속에서 기이한 힘이 자신의 의식 줄기를 끌어당기는 것을 느낀 한립은 긴장해 얼른 비술을 거두었다.
‘그게 뭐였을까?’
고민하던 그가 다시 비술을 펼쳐 이번에는 의식을 흰둥이의 의식세계에 불어넣지 않고 미약한 의식연계를 통해 흰둥이를 불러보았다.
그런데 갑자기 주변이 흰둥이의 의식세계처럼 새까맣게 변하더니 암흑 속에서 유리알 같은 거대 눈알 두 개가 서늘하게 그를 쳐다보았다.
무슨 일인지 파악하기도 전에 의식세계가 막힌 듯한 답답한 느낌을 받은 그는 급히 연신술을 중단하고 깨어났다.
“어찌 된 일이란 말인가…….”
예기치 못한 일이었다.
“깨울 수 있겠습니까?”
상도가 기다렸다는 듯 물었다.
“이 아이는 오래전부터 나와 인연이 있다. 허나 의식세계로 들어가 깨우려 하니 암흑 공간에 유리알 같은 눈알이 주시해 뜻을 전할 수가 없더구나.”
고개를 저은 한립은 대충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암흑 공간, 유리 눈알……. 설마 원고 만황팔왕 중에 하나인 묵안비휴(墨眼豼貅)의 후예인 겁니까?”
듣고 있던 운표가 안색이 달라져 외쳤다.
상도도 놀란 얼굴이었다.
“묵안비휴?”
“전설 중에 묵안비휴 일족은 절세의 영목신통을 지니고 있어 한 쌍의 유리묵안(琉璃墨眼)으로 온갖 환상의 근원과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고, 온 세상의 진귀한 보물을 찾는 능력을 타고 난다고 합니다. 심지어는 유리묵안으로 윤회와 사람의 명운을 알아낼 수 있다는 소리도 있고요.”
의아해하는 한립에게 운표가 설명했다.
확실히 흰둥이도 비경이며 숨겨진 보물을 찾는 능력이 있기는 했지만 환술을 꿰뚫어 본다거나 무슨 윤회와 명운을 알아내는 능력까지는 아니었다.
“그뿐 아니라 묵안비휴의 두 눈은 기이한 이공간과 연결되어 있어 수행이 충분히 쌓이면 눈짓 한 번에 적을 이공간으로 빨아들일 수 있답니다. 아무리 수행이 높은 상대라도 일단 이공간에 빠지면 다시 빠져나올 수 없고요.”
운표가 설명을 계속했다.
“흰둥이 뱃속에 특수한 공간이 있어 외부 세계와 격리가 가능하기는 하지만 그게 눈하고 연관된 공간인지는 모르겠구나.”
“휴, 아무래도 진정한 묵안비휴 일족의 신통이 그렇다는 것이니까요. 진령왕이셨던 묵안비휴 대인께서 실종된 후로 전족이 멸족을 당해서 그 피를 이어받은 존재를 거의 볼 수 없습니다. 우리가 팔황산으로 이분을 데려가기만 하면 진령왕 대인께서 꼭 구해주실 겁니다!”
상도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한립은 침음했다.
원래는 조용한 곳을 찾아 일단 시간도문을 회복하고 대라 초기에 이른 다음 대금원선역에 잠복해 윤회전의 작전을 기다릴 생각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흰둥이를 마주쳐 모든 것을 다시 생각해 봐야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립은 그래도 우선 흰둥이를 구하기로 마음먹었다.
깨어난 흰둥이에게 구원관에 관해 물어보면 윤회전 작전을 따라가 금동을 구할 수 있는 희망도 커질 것이다.
“팔황산에 가야만 흰둥이를 구할 수 있다면 너희와 같이 가주겠다.”
한립이 이렇게 말했는데 상도와 운표의 표정이 좋지 못했다.
“저희 은각서 일족만으로도 충분히 호송할 수 있습니다.”
상도가 먼저 이렇게 말했고 운표는 코웃음을 치고 아무 소리도 하지 않았다.
어쨌든 흰둥이는 은각서족에서 찾았고 여기도 은각서족이었기 때문이다.
“상도 족장, 내 한 가지만 묻지. 이번에 모든 족인을 데리고 흰둥이를 팔황산으로 호송할 생각이냐?”
한립은 무표정하게 물었다.
“그건……아닙니다, 정예병만을 데리고 움직일 겁니다.”
상도가 머뭇거리다 답했다.
“그렇다면 은각서족의 주요 전력이 빠져나간단 소린데 나머지 족인들은 이후 어떻게 될 줄 알고? 운문호족의 주요 전력은 여기 남아 있는데 말이야.”
한립이 씩 웃으며 하는 말에 상도도 자신이 무슨 짓을 하려던 건지 깨닫고 이마에 굵은 땀방울이 맺혔다.
“운문호족과 함께 흰둥이 수사를 팔황산까지 호송하겠습니다!”
상도가 진심을 담아 외쳤다.
운표는 이런 결정에 한립을 향해 고맙다는 눈빛을 보냈다.
“어찌 되었든 너희가 떠나면 두 부락은 우두머리를 잃은 짐승이 되고 만다. 시일이 길어지면 어떻게든 그 소식이 새어나갈 테고 다른 부족들이 그 틈을 노리겠지. 그러니 일단 예전의 원한은 묻어두고 두 종족이 서로 침략하지 않으며, 또 다른 종족이 위기에 처했을 때 도움을 주어야 두 종족 모두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야.”
한립의 충고에 상도와 운표는 난감한 얼굴이 되었다.
장막 안의 다른 족인들도 마찬가지였다.
만년 가까이 축적된 악감정을 갑자기 어쩐단 말인가.
“그리 난처해할 것 없다. 영원히 그러라는 것이 아니라 두 종족이 팔활산 혈사대회에 참석했다 돌아올 때까지만 그리 해보라는 것이니.”
한립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선배님의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전부 선배님의 뜻대로 하겠습니다.”
한참 침묵을 지키던 상도와 운표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선배라 할 것 없다. 난 석목이라 하니, 석 수사라 부르면 될 것이야. 그래서 너희가 말하는 혈사대회는 언제 개최되는 것이냐?”
“30년 전에 백 년 후에 개최될 거라 했으니 70년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팔황산까지 갈 길이 멀어 조만간 출발해야 합니다.”
상도가 답했다.
“그래, 곧 출발해야 하니 너희는 속히 부락으로 돌아가 급한 일을 처리하고 호송 인원을 선발하거라.”
“예!”
상도와 장막을 나선 운표는 족인들을 시켜 앞으로 이곳에 한립이 머문다는 것을 알리고 허락받지 않은 자는 접근을 금했다.
홀로 장막에 남은 한립은 화지동천을 열어 흰둥이와 함께 빛의 문 안 죽루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이상하다고 느낀 한립이 미간을 좁혔다.
쿠르릉.
오래 생각할 것도 없이 굉음과 함께 마음 깊은 곳을 건드리는 귀곡성이 몰아쳤다.
연신술을 발동해 마음을 가라앉힌 한립은 소리가 들려온 곳을 바라보았다.
예상대로 제혼이 폐관 중인 누각에서 귀곡성이 들려오고 있었고, 먹처럼 진한 검은 기운이 그곳을 중심으로 회오리치면서 누각의 금제를 뚫으려는 귀물 허상들이 언뜻언뜻 보였다.
한립이 시간법칙의 힘을 함유해 직접 펼쳐 놓은 금제라 아직까지 검은 기운을 막아낼 수 있었다.
“어찌 된 일이지?”
급히 날아오른 한립은 의식 한 줄기를 금제 안쪽으로 흘려보냈으나 검은 소용돌이에 진입한 의식에 강력한 흡입력이 작동해 의식을 타고 그의 뇌리까지 침입하려 했다.
맹렬히 의식을 거둬드린 한립은 소용돌이의 기이한 흡입력을 차단하며 희색을 드러냈다.
누각 안의 제혼 때문에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거라면 오소귀왕의 원기를 흡수한 그녀가 또 다른 경지로 넘어서고 있다는 소리였다.
이런 상황은 그가 참견할 수도 없었고 제혼의 참을성이면 충분히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한립이 개입하는 대신 열댓 줄기의 금빛을 날려 누각 인근에 더 두꺼운 금색 보호막을 펼쳐두었다.
안쪽 보호막과 바깥쪽 보호막의 시간법칙의 힘이 호응하면서 두 보호막에서 빛이 만발했다.
안에서 들려오던 귀곡성이 거의 차단되어 한립에게까지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인 한립은 약재원 옆에 새로 지은 누각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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