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1화. 진령왕 혈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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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을 가로막은 핏빛들을 본 한립은 물러서지 않고 푸른빛을 강하게 일으켜 돌파했다.
다들 그가 도끼날 허상들에 갈기갈기 잘려 죽을 거라 예상했는데 한립의 단단한 몸에 부딪힌 허상들이 가루가 되어 버렸다.
은각 코뿔소는 갑자기 나타난 인족의 몸이 생각보다 단단한 것에 당황했지만 풍기는 기운이 강하지 않은 것을 보고 두려움 없이 도끼를 휘둘렀다.
한립의 발이 도끼날에 닿아 성신지력을 폭발했다.
파삭!
거대한 도끼가 쫙쫙 갈라져 바닥으로 흩날렸고 도끼를 들고 있던 은각 코뿔소는 온몸이 저릿해져서 엄청난 힘을 이기지 못하고 무릎을 꿇었다.
한립은 그 김에 기습에 실패해 옆으로 스쳐 지나가는 운문 표범의 목덜미를 잡아다가 일어서려는 은각 코뿔소 어깨 위로 내리꽂았다.
눈깜짝 할 사이에 일어난 일에 다른 족인들은 그저 두 우두머리가 그에게 제압당한 것만 볼 수 있었다.
산등성이로 달려가던 두 종족의 족인들이 몰려와 한립을 에워싸고 우두머리들을 내놓으라 아우성쳤다.
한립은 그들을 상대하지 않고 운문 표범을 들어 올려 물었다.
“너희는 무슨 부족이고 왜 싸우고 있던 것이냐.”
온몸에 힘이 빠진 운문 표범은 철천지원수라도 보는 것처럼 한립을 노려보며 입을 열지 않았다.
“추혼술이 뭔지는 알겠지? 강제로 추혼술을 당하면 썩 기분이 좋지는 않을 것이야.”
한립의 어투가 싸늘해졌다.
이에 운문 표범도 바르르 몸을 떨었지만 그렇다고 대답을 하지는 않았다.
“관을 봐야 눈물을 흘릴 놈이로구나.”
냉소를 흘린 한립이 손에서 수정실을 뿜어 운문표범의 미간으로 쏘아 보내려는데 밑에 깔려 있던 은각 코뿔소가 급히 외쳤다.
“저희는 은각서(銀角犀) 부족이고, 저들은 운문호(雲紋虎) 부족입니다. 저희가 여기서 싸운 건 대대로 원수지간이라서 이고요.”
“대대로 원수지간이라 싸운다면서, 너는 이 녀석이 추혼술을 당해 죽는 것이 보기 싫어 대신 답을 하였다. 그건 네가 거짓말을 한다는 뜻이지…….”
한립은 은각 코뿔소를 내려다보며 웃음 지었고, 은각 코뿔소는 두려워하면서도 인족은 역시 교활하고 음험한 족속들이라고 속으로 욕을 해댔다.
더는 기다려 주지 않고 한립은 손끝에서 뻗어 나간 은빛 실들이 운문표범의 미간에 스며들게 했다.
크아악!
은각 코뿔소가 포효하자 방금까지 맞붙어 싸우던 두 부족은 이제 우두머리의 안위는 개의치 않고 한립을 향해 달려들었다.
이에 한립은 흥미로워하며 청죽봉운검을 불러내 금색 뇌전 기둥으로 주변을 둘러쌌다.
만황 이종족들은 천뢰나 지화를 특히 두려워했기에 두 종족의 족인들도 뇌전장벽에 더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쩔쩔맸다.
‘흠…….’
그 틈에 운문 표범의 기억을 살핀 한립이 묘한 표정으로 천천히 손길을 거두었다.
운문표범의 기억을 통해 두 종족이 충돌한 진짜 이유를 찾아냈는데, 은각 코뿔소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두 종족은 조상 대대로 원수지간이라 수백만 년을 싸워왔는데 이번에 싸움이 난 직접적인 원인은 따로 있었다.
30년 전 만황의 각 종족이 모시던 진령왕이 돌연 팔황산(八荒山) 만황성전(蠻荒聖殿)에서 혈사대회(血祀大會)를 열겠다 선포한 것이다. 원고시대 진령 팔왕(八王)의 혈맥을 지닌 부락들은 팔황산으로 모이라는 명이었다.
원고팔왕이라 불리는, 아주 오랜 옛날 만황계역을 통치하던 여덟 진령왕들은 무슨 변고가 있었는지 전부 쇠퇴하고 현재는 단 한 명의 진령왕 밖에 남지 않았다.
다른 진령왕의 피를 이어받은 후손들은 만황계역 곳곳에 퍼져 혈맥이 정순한 이들은 일방의 패주로 군림하기도 했고 그렇지 못한 이들은 그저 강한 세력을 일구고 있었다.
물론 아예 대가 끊겨 종적을 찾을 수 없는 경우도 있었다.
혈사대회는 고금 이래 만황계역에서 가장 성대한 집회였는데 팔왕의 후손들이 얼마 없어 수천만 년 동안 개최된 적이 없었다.
이번 진령왕의 혈사대회 개최 선언에 만황계역 각 부족은 대회에 참가하는 영광을 얻기 위해 격동하고 있었다.
은각서와 운문호 두 부족도 예외는 아니었는데, 만황 팔왕의 후손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고 16대 만황 종족은 물론 100대 종족에도 들지 못하는 보잘것없는 부족이라 혈사대회에 참가할 자격이 못 되었다.
그런데 은각서 부족이 자신의 영역 바깥에서 우연히 어린 짐승을 발견했는데, 놀랍게도 어린 짐승이 바로 만황팔왕의 피를 이어받은 후손이었던 것이다.
중상을 입었는지 깊은 잠에 빠진 어린 짐승을 은각서 부족이 보호하기 시작했고, 그 소문이 어떻게 새어나갔는지 원수 사이인 운문호 부족에 흘러 들어가면서 큰 싸움이 벌어지게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한립이 손을 풀자 운문 표범이 풀썩 바닥에 쓰러져 기절했다.
“너희가 구한 어린 짐승은 지금 어디 있느냐?”
한립은 고개를 숙여 아직 발밑에 깔려 있는 은각 코뿔소에게 물었다. 그런데 상대는 이를 악물더니 눈빛이 이상해졌다.
놀란 한립이 서둘러 손바닥으로 은각 코뿔소의 머리를 잡으며 꾸짖었다.
“내게 추혼술을 당할까 겁나 스스로 원신을 폭발하려 하다니, 목숨이 그리 우스운 것이냐!”
“내게서 어떤 정보도 얻을 수 없을 겁니다!”
입가에 피를 주르륵 흘린 은각 코뿔소가 버럭 소리쳤다.
한립은 손바닥에서 은빛을 흘려보내 상대의 의식 속 원신을 보호해 자폭을 면하게 했다.
“네 족인이 수만 명인데 너 홀로 자폭한들 무슨 소용이 있더냐. 내가 정보를 알아내려고 하면 누군들 막을 수 있느냐 말이다? 네 심지가 굳고, 목숨을 걸고 진령왕의 후손을 보호하려던 것을 보아 살려주는 줄 알거라.”
“교활한 인족의 말을 어떻게 믿으란 말입니까. 그냥 저를 죽이세요!”
“믿고 안 믿고는 네 마음이 다만, 나는 그 어린 짐승에게 악의가 없다. 내가 묻는 말에 성실히 답하면 너희를 풀어주마.”
은각 코뿔소는 한립이 운문 표범을 죽이지 않고, 자신이 자폭하려는 것도 막아주자 마음이 약간 흔들렸다.
“정말입니까?”
“너희 부족이 있는 곳은 만황계역의 어디쯤이냐.”
한립의 질문에 은각 코뿔소는 머뭇거렸다. 이런 질문을 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저희는 지룡족(地龍族)에서 다스리고 있는 땅의 서남쪽에 머물고 있습니다.”
한립은 대답을 듣고도 전혀 듣지 못한 것과 다를 바 없었다.
“너희 만황계역의 지역은 어떻게 구분이 되어 있지? 그리고 가까운 대선역은 어디가 있느냐?”
“만황계역은 끝없이 넓어 보통 거대 부락의 영토를 중심으로 구역을 나눕니다. 예를 들어 구미천호족(九尾天狐族)의 영토라던가 대명공작족(大明孔雀族)의 영토처럼 말입니다. 지룡족의 영토는 대충 금원선역와 영대선역(靈臺仙域) 중간쯤에 있을 겁니다.”
‘영대선역과 인접한 금원선역이면, 구원관이 있는 대금원선역일 텐데…….’
시공간초월을 해서 돌아왔더니 대금원선역 인근에 떨어지게 될 줄이야.
당장 대금원선역으로 향하고 싶은 충동이 들었지만 그런 마음을 억눌렀다.
대라 중기인 얼음 여인과 불 여인에게 쫓겨 죽다 살아난 마당에 대금원선역에 들어가 금동의 소식을 알아보는 것은 스스로 명을 단축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한립이 생각에 잠긴 것을 보고 은각 코뿔소가 슬쩍 몸을 움직여 보았다.
이에 눈을 가늘게 뜬 한립이 지긋이 발에 힘을 주어 태산과 같은 압력으로 은각 코뿔소를 땅속으로 푹 내리눌렀다.
“내 죽이지 않겠다고는 했다만, 목숨 귀한 줄 아는 것이 좋을 게야…….”
한립의 말에 몸을 떤 은각 코뿔소가 더는 딴짓을 하지 않았다.
“네가 보호하고 있다는 원고 진령왕의 핏줄은 어떤 종족이고 어떤 신통을 지니고 있더냐?”
“모릅니다.”
이번에는 은각 코뿔소가 바로 답했다.
“네 놈의 기억도 그냥 추혼술을 통해 살펴보는 게 낫겠구나.”
“정말 모릅니다! 마치 돌처럼 굳어 깊은 잠에 빠져 있어 어떤 파동도 느껴지지 않는 상태란 말입니다. 저도 어떤 종족인지 알아낼 방법이 없었습니다.”
섬뜩한 한립의 경고에 은각 코뿔소가 급히 해명했다.
“그렇다면 진령왕 핏줄인 것은 어찌 알았단 말이냐?”
“원고진령팔왕의 후손은 태어날 때부터 만황의 다른 종족을 제약하는 힘이 있어서, 마치 늑대 무리가 늑대왕을 따르는 것처럼 복종하는 마음이 들게 됩니다. 저희 만황종족이 아니니 모르시겠지만요.”
은각 코뿔소가 설명했다.
사실 한립도 경험해 본 바가 있었다.
천봉의 힘을 지닌 그 앞에서 수많은 조류형 요수들이 본능적으로 위축되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어린 짐승을 보러 가야겠다.”
진령왕의 후손이라면 혈맥의 힘이 강할 터였다.
경칩십이결의 부족한 두 가지 진령 혈맥 중 한 가지이면 더할 나위 없이 좋고 아니더라도 더 강한 진령혈맥을 얻어 천살진옥공을 발전시킬 수 있을 테니 대금원선역으로 가기 전해 구해두는 게 좋았다.
“묻는 말에 대답하면 풀어준다더니, 어째서 이랬다저랬다 하는 겁니까! 역시 인족의 말은 믿을 수가 없군요!”
그 말을 듣자마자 은각 코뿔소는 화를 참지 못했다.
“누가 너에게 내가 인족이라 했더냐?”
“인족이 아니란 말입니까? 그럴 리가…….”
한립의 말에 혼란스러워진 은각 코뿔소가 그를 쳐다보았다.
한립은 체내의 진령혈맥은 운용해 은색 뇌전으로 몸을 뒤덮고 거대한 은색 뇌붕으로 변신했다.
동시에 청죽봉운검을 회수해 방대한 몸을 은각서와 운문호 부족민들에게 선보였다.
인족 신분으로는 결코 저들을 믿게 할 수 없을 것 같고 그렇다고 무고한 부족민들을 학살하고 싶지도 않아 이런 수를 낸 것이다.
“어, 어떻게!”
은각 코뿔소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을 했다.
“보는 그대로 난 진령혈맥을 지니고 있다. 네가 말한 어린 짐승을 해치려는 것이 아니고, 중상을 당해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니 도움을 주려는 것이다.”
뇌붕이 입을 열어 웅웅 말하며 날개를 펼쳐 날아올랐다.
“제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은각 코뿔소가 땅속에서 몸을 일으켜 고공을 올려다보며 대답했다.
그는 운문호 족장을 깨워 상의하기 시작했다.
은각서 부족 족장은 상도이고, 은문호 부족 족장은 운표였다.
그들의 목숨을 건 혈전은 한립의 개입으로 완전히 중단되었고 쌍방은 부상자들을 챙겨 물러났다.
일고여덟 명만이 남아 상도와 운표를 따라 한립을 어린 짐승이 있는 곳으로 안내했다.
그들이 싸우던 평원을 지나 낮은 산에 이르렀을 때 상도는 절반이 땅속으로 숨겨진 동굴 입구를 가리켰다.
유황 냄새가 섞인 뜨거운 열기가 구멍에서 솔솔 불어 나오고 있었다.
“여기란 말이냐?”
한립은 이리 물으면서 의식으로 별다른 게 없는지 살폈다.
“이 아래로 용암호가 있어 족인들을 이끌고 도끼를 만들기 위한 흑암석을 채취하러 오곤 했습니다. 원래는 너무 깊이까지 내려가지 않는데, 우연히 한 명이 아래로 떨어져 발견하게 되었지요.”
상도가 답했다.
“가보자꾸나.”
한립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상도가 먼저 동굴 안쪽에 놓인 돌계단을 따라 아래로 내려갔다.
은각서족은 전투 중일 때와 달리 체구가 작아져 그냥 덩치가 큰 평범한 거한 같아 보였고, 운문호족도 평소에는 두 발로 서서 걸으며 머리의 구름 문양도 줄어들어 훨씬 덜 야성적으로 보였다.
한립은 그들을 따라서 안으로 들어갔다. 동굴 내부는 바깥에서 보는 것과 달리 넓고 잘 다듬어져 있었다.
그렇게 아래로 기울어진 길이 천장 가까이 이어졌다.
가면 갈수록 통로가 점점 협소해지다가 아래로 뚫린 동그란 구멍이 나타났는데, 그 안은 불빛이 가득하고 코를 찌르는 유황 냄새가 흘러나왔다.
“족인이 여기로 떨어져 찾으려 내려갔다가 용암호에서 어린 짐승을 발견했습니다.”
상도가 말했다.
“들어가 보자꾸나.”
한립이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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