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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2100화 (1,857/2,000)
  • 2100화. 만황으로

    *

    한립은 미라노조의 표정 변화를 보면서 그간 수련하며 느꼈던 곤란함과 대라경 돌파에 실패한 과정을 말한 다음 공손히 공수했다.

    “사존께 가르침을 청합니다.”

    “시간법칙은 3대 지존법칙 중에 하나라 다른 삼천대도를 능가하고 만물만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오행은 세상 만물의 근간으로 <대오행환세결>은 가장 기초적인 오행의 도리를 이용해 시간법칙이라는 지존의 도리를 서술하고 있지.”

    한립은 눈도 깜빡이지 않고 미라노조의 말에 집중했다.

    “오행의 원리는 오행법칙에 국한되지 않고 다른 법칙에서도 나타나는데 시간법칙도 그러하다. 오행은 순환하며 서로를 북돋기도 하고 억제하기도 하며 영생불멸하지. <대오행환세결>도 만물이 시간이 흘러 사라지고 부활하며 순환해 기나긴 시간의 강에서 불멸하는 대도를 지향한다.”

    여기까지 들은 한립은 마음속에 등불이 켜진 것 같았다.

    이제껏 <대오행환세결>이 하나의 시간공법이면서 진언보륜 등 다섯 개의 오행신통을 품고 있는 것이 의문이었는데 이제야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리하여 <대오행환세결>을 수련하는데 가장 중점을 두어야 하는 바가 균형이고, 오행의 상생과 상극이다. 균형을 이루지 못하면 높은 수행이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는데. 너의 단시횃불은 시간정사가 너무 많고 광음정병, 환진사루, 동일신목은 시간정사는 너무 적으니 이런 불균형을 안고 어찌 대라경에 이를 수 있단 말이냐?”

    “모든 게 불균형 때문이었군요. 그러나 광음정병, 환진사루, 동을신목의 법칙정사를 늘리려면 상성이 맞는 시간보물을 찾아야 하는데, 그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다른 방법이 있는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대오행환세결>은 외부 시간법칙의 힘으로 시간정사를 만들어낼 수 있는 대단한 신통이다. 다른 시간공법을 익히는 수사들은 법칙 수련을 통해 수행이 쌓일 때마다 천천히 시간정사를 늘리는 수밖에 없는데 말이지. 다른 사람보다 훨씬 빠르게 수행이 늘고 있으면서도 아직 만족할 줄 모르는구나.”

    미라노조는 한립을 책망했다.

    “제자가 생각이 부족했습니다. 제가 사는 시공에서 천정에게 쫓기고 있다 보니 하루빨리 실력을 늘려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나 봅니다. 수미금산 같은 진귀한 보물들을 지닌 진언문이니, 사존께서 제자를 위해 시간법칙의 힘이 담긴 재료를 내려주실 수는 없는지요?”

    한립이 빙긋 웃으며 물었다.

    “녀석, 벌써 꾀를 부리는구나. 내 내줄 재료가 없는 것은 아니나, 시공간초월은 그 제약이 클 테니 네가 있는 시대로 가지고 갈 수 있을지 모르겠구나.”

    미라노조의 말에 한립이 멈칫했다.

    확실히 맞는 말이었다.

    “허나 가져가려 시도는 해볼 수 있겠지.”

    미라노조는 손을 저어 세 가지 물건을 내놓았다.

    녹색 고목과 낡은 남색 창 그리고 황토색 돌멩이에서 강렬한 시간법칙 파동이 느껴졌다.

    화세형충 벌집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 파동이었다.

    “감사합니다, 사존!”

    아직 미라노조가 한 말이 머리를 맴돌았지만 눈앞에 세 가지 보물을 보자 기쁜 마음이 드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너무 조급하게 생각지 말고 차근차근 수련하거라. 네 체내의 시간법칙의 힘이 자연스레 섞이지 못하는 것은 급격히 수행이 늘어서이니. 앞으로는 힘을 안정시키는데 더욱 공을 들여 보완해야 할 것이다.”

    “예.”

    한립은 뜨끔하며 답했다.

    “한 가지 더 질문드릴 것이 있습니다. 저는 영역을 수련한 지 오래인데 아직까지 기초적인 경지를 넘어서지 못해 조물경이나 화령경에 이르지 못하였습니다. 어째서 그런 것일까요?”

    “시간법칙은 지존법칙으로 위력이 큰 만큼 다른 지존법칙을 제외한 모든 법칙을 압도한다. 하늘의 도란 원래 공평한 것이라, 그런 시간법칙에서 진전이 있으려면 당연히 다른 법칙보다 어려움이 따르게 된다. 영역수련도 마찬가지이다. 그 문제는 스스로 시간법칙을 깨우치며 해결해나가야지, 나는 도울 수가 없구나.”

    미라노조의 답변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 한립은 <대오행환세결>을 수련하며 궁금했던 점이나 다른 선기에 관련한 질문들을 던졌다.

    수행이 높은 미라노조는 법칙, 신통, 선기 각 방면에 모르는 바가 없어 그가 오랫동안 끙끙 앓던 문제들을 줄줄 풀어 설명해줘 마치 구름이 가득하던 하늘에 한 줄기 햇살이 드는 것 같은 경험을 하게 해주었다.

    어느덧 금색 고리의 시간도문이 몇 개 남지 않게 되었다.

    그 길지 않은 시간 동안 한립은 <대오행환세결>, 시간법칙 그리고 수련에 대한 틀을 잡을 수 있었다.

    한립은 여전히 가부좌를 틀고 미라노조와 마주 앉아 있었는데, 그가 더는 질문을 하지 않자 미라노조도 떠날 시간이 임박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사존의 지도에 깨우친 바가 큽니다.”

    한립은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

    “스승으로서 당연한 일이다만 시간이 부족해 아쉬움이 남는구나. 넌 시공간초월을 할 수 있으니 이후 기회가 되면 다시 찾아오거라. 아직 <대오행환세결>을 수련하는데 필요한 가르침이 많다.”

    미라노조가 탄식했다.

    “저도 다시 찾아뵙고 사존께 가르침을 구하고 싶습니다. 그저 시공간초월의 방법을 아직 완전히 장악하지 못하였고 매번 시공간초월을 할 때마다 막대한 대가를 치러야 해서 언제 다시 돌아올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한립은 씁쓸하게 답했다.

    “그렇단 말이냐?”

    미라노조가 그 말을 듣고 품에서 금색 옥책을 꺼내 주며 당부했다.

    “내가 시간법칙을 수련하며 얻은 깨달음을 적어둔 것이니 가져가거라.”

    “감사합니다, 사존.”

    한립은 기쁜 마음으로 옥책을 받아 넣었다.

    “내가 준 물건들을 가지고 갈 수 있다면 가장 좋겠지만. 그럴 수 없다면, 네가 있는 시공으로 간 다음 염라부(閻羅府)라는 곳을 찾아가 보거라.”

    “염라부요? 그게 어딘지요? 거기로 가서 무엇을 하라는 말씀이신지…….”

    “나중에 가게 되면 알 것이다.”

    미소를 지은 미라노조는 답을 주지 않았다.

    한립은 자신이 스승으로 모신 미라노조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사람이라 생각했다.

    “사존, 청이 하나 있습니다. 바깥의 ‘광음천선대진’의 진법도를 한 부 받아갈 수 있을 지요?”

    “된다마다. 진법도가 그리 복잡하지 않으니 외워갈 수도 있을 것이다.”

    미라노조는 옥간을 꺼내 건네주었다.

    눈을 반짝인 한립은 옥간을 받아 의식을 주입하고 내용을 외워나갔다.

    미라노조의 말대로 진법도 자체는 복잡하지 않아 기억해 두기 어렵지 않았다.

    막 광음천선대진의 진법도를 다 외웠을 때 금색 고리의 마지막 시간도문이 번득 빛을 잃었다.

    쿠쿠쿵!

    금색 고리가 삽시간에 몇 배로 커져 검은빛의 소용돌이를 일으켜 머리 위에서 그를 빨아들였다.

    “한립, <대오행환세결>은 천하를 뒤흔들만한 공법으로 시간도조는 물론 다른 도조들도 욕심을 내왔다. 그들을 조심…….”

    미라노조가 일어서며 하는 말을 끝까지 듣지 못하고 한립은 눈앞에 까맣게 변해 의식을 잃었다.

    * * *

    하늘과 땅이 빙글빙글 돌고 눈앞이 확 밝아지면서 한립의 두 발이 땅에 닿았다.

    장천병도 떠올라 서서히 그의 품속으로 떨어졌다.

    몸을 가눈 그는 주위를 살펴봤지만 눈앞이 흐릿해서 풍경이 선명하게 들어오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제자리에 앉은 그는 기운을 다스린 다음에야 다시 눈을 떴다.

    이번에는 주변 풍경이 선명하게 잘 보였다.

    뜻밖에도 절벽에 툭 튀어나온 곳이라 푸른 하늘과 둥실둥실 떠다니는 구름을 볼 수 있었다.

    퍼뜩 오른손을 들어보았지만 미라노조가 내준 광음천선대진 진법도가 괴이한 힘에 싸여 차차 흐려지더니 허공에 녹아들고 있었다.

    안색이 달라진 한립은 다른 세 가지 시간 재료와 금색 옥책 그리고 장공각에서 가져온 금색 함까지 꺼내 보았지만 마찬가지였다.

    시공간초월로 가져온 물건들은 몇 초 만에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사존의 말씀이 맞았구나.”

    그래도 진언문에서 얻은 수확이 커서 물건들을 잃었다고 해서 상심할 것은 없었다.

    미라노조가 가보라 이른 염라부는 들어본 적은 없었지만 조사해 보면 상대가 무슨 뜻으로 그리 말했는지 알 수 있을 것이었다.

    “녀석아, 육신을 가지고 오래 시공간 초월을 한 데다 장천병을 좌표 삼아 돌아온 것이 아니라서 혼백이 잠시 불안정할 것이다. 휴식을 취하면 괜찮아질 것이야.”

    한립이 의식을 퍼트려 주변을 살피려는데 병령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든 게 병령 선배님 덕입니다. 감사드립니다.”

    한립은 품에서 장천병을 꺼내 들고 답했다.

    “그런 입바른 소리는 되었다. 나는 한동안 휴식을 취하며 깊은 잠에 빠질 테니 앞으로는 네가 알아서 해야 할 게야. 죽지 않게 조심 좀 하고.”

    눈을 깜빡인 병령이 성가시다는 듯 말했다.

    “혹시 이곳이 어딘지 아십니까?”

    “너도 느꼈겠지만 주변 기운과 천지원기가 다른 선역과는 다르다. 만황계역일 가능성이 크겠지. 구체적으로 만황 어디인지야 낸들 아나. 만황계역은 매우 넓어 널리 알려진 삼천선역보다 더 넓을지도 모르고, 그 속에 사는 진령과 요물의 종류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니 죽지 않게 조심하라 이른 것이야.”

    병령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다 마지막에는 사라져 버렸다.

    그의 말소리와 함께 병 표면의 눈도 없어졌다.

    병을 다시 품속에 집어넣은 한립은 자리에서 일어나 아래를 살폈다.

    시야의 끝까지 노란 모래가 펼쳐져 있고 군데군데 언덕과 붉은 사막이 보이기는 했는데 녹음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일단 안전한 곳을 찾아 폐관 수련을 한 다음에 생각해 보자.”

    가볍게 한숨을 내쉰 한립은 기다란 푸른 빛줄기로 변해 날아올랐다.

    * * *

    장장 한 달여 동안 아득한 모래 바다를 지난 한립은 드디어 푸른 목초지를 볼 수 있었다.

    오는 동안 사막 짐승들의 공격을 받기도 하며 쉬지 않고 이동한 탓에 푸른 언덕에 이르자 잠시 내려가 쉬어 갈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내려가 가부좌를 틀기 전 산언덕 반대쪽에서 격렬한 원기 파동이 느껴졌다.

    잠깐 망설이던 한립은 기운을 숨기고 그쪽으로 날아가 보았다.

    짐승들이 마구 뒤섞여 싸우는 것 같은 소리가 가까워지다 언덕을 넘어 다른 높은 산등성이로 향하니 두 만황 종족이 싸우는 것이 보였다.

    한 종족은 인족보다 두 세배 큰 체구에 코뿔소 머리가 달려 있었는데 새까만 몸에서 코에 난 뿔만 은색으로 반짝였고 그 수가 수만은 되었다.

    산이라도 쪼갤 것 같은 커다란 돌도끼를 든 족인들은 싸울 때 눈이 핏빛으로 물들어 고통도 느끼지 못하고 죽음도 불사한 채 달려들었다.

    다른 종족은 수가 더 많은 대신 체구가 작았는데 표범을 닮은 모습에 구름 모양 반점이 있고 손놀림이나 움직임이 바람처럼 빨랐다.

    이들은 병장기 대신 발톱을 칼처럼 휘두르면서 싸웠다.

    한쪽은 가죽이 두껍고 다른 한쪽은 바람처럼 빠르게 공격하니 치열한 공방이 이어져서 양쪽 다 사상자가 수없이 나오고 잘려나간 팔다리와 흘러내린 피가 강을 이루고 있었다.

    한립이 멀리 산등성이 위에 서서 내려다보니 두 종족은 전장의 중심을 텅 비워놓고 일부러 피해가며 싸우고 있었다.

    그곳에는 거목만 한 반인반수 코뿔소와 날렵한 체형의 구름 문양 표범이 일대일로 싸우고 있었고, 다른 족인들과 달리 술법이나 신통 같은 것을 사용하며 맞붙었다.

    그들이 두 만황종족의 우두머리인 듯했다.

    그가 전장의 상황을 살필 때 구름 모양 반점 표범이 코를 킁킁대고 한립이 있는 산등성이 쪽을 쳐다보았다.

    “천박한 인족의 냄새가 풍기는데…….”

    그 말에 격렬하게 싸우던 은각(銀角) 코뿔소도 공격을 멈추고 같은 곳을 돌아보았다.

    “그냥 무슨 일인지 구경이나 하려 했건만.”

    그걸 안 한립은 자신이 성가신 일에 끼어든 것을 알고 한숨을 내쉬었다.

    은각 코뿔소와 구름 모양 반점 표범이 쩌렁쩌렁하게 포효해 쌍방의 족인들을 물렸다.

    “저기 인족이 숨어있다! 죽여라!”

    두 부족들은 같은 명을 듣고 산등성이를 향해 내달렸다.

    “죽여!”

    “죽이자!”

    “죽여라!”

    한립은 그냥 몸을 돌려 떠나려다가 자신이 어디 있는지 아직 모른다는 생각에 훌쩍 고공으로 날아올랐다.

    그는 곧장 두 부락의 우두머리가 있는 곳으로 운석처럼 떨어져 내렸고, 은각 코뿔소와 구름 모양 반점 표범이 그걸 보고 각각 거대한 돌도끼를 휘둘러 핏빛들을 날리고 네 발로 달려 한립의 뒤를 노렸다.

    방금까지 죽어라 싸웠으면서 죽이 척척 맞아서 은각 코뿔소가 한립의 정면과 측면을 봉쇄하는 동안 구름 모양 반점 표범이 후방에서 공격하고 있었다.

    그걸 본 한립은 눈을 가늘게 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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