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8화. 진언문의 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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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립은 딴생각을 지우고 정좌를 한 채 계속 설법을 들었고, 미라노조의 설법은 반나절이 지나서야 끝났다.
산 아래 진언문 제자들이 공경스럽게 절을 하고 떠나고 기마자, 목연 등이 떠난 후에 이제 정상에는 미라노조뿐이었다.
“나오거라.”
미라노조의 말에 뒤쪽 허공에서 한립이 나타났다.
“미라 선배님을 뵙습니다!”
한립은 그에게 공수를 해보였다.
천천히 몸을 돌린 미라노조는 그를 아래위로 훑고 미소 지었다.
“훌륭하구나.”
“선배님의 현묘한 말씀을 듣고자 무례를 무릅쓰고 은신을 하였습니다.”
“괜찮다. <대오행환세결>을 익혔으면 우리 진언문 제자인데 내 설법을 듣는 것이 왜 아니되겠느냐.”
미라노조는 웃으며 반문했다.
한립은 상대가 자신의 공법을 알아본 것에 그리 놀라지도 않았고 그저 적의를 보이지 않는 것에 걱정을 덜었다.
“아까 숨어서 보던 것도 너겠지? 이곳에 있지만 이곳 사람은 아니구나. 세상에 시공간초월을 할 수 있는 보물이 있었다니.”
미라노조가 탄식하듯 말했다.
한립은 미라노조가 모든 것을 한눈에 꿰뚫어 보는 것에 당황해 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의 가장 큰 비밀인 장천병에 대해 말할 수도 없었다.
“걱정하지 말거라. 네 보물을 빼앗을 생각은 없으니. 대단한 보물이니 잘 지니고 다니거라.”
미라노조가 그의 걱정을 읽고 웃음 지었다.
“아닙니다.”
“이름이 무엇이냐?”
작게 답하는 한립을 보는 미라노조의 눈에 자애로운 기색이 떠올랐다.
“한립이라 합니다.”
“한립……. 좋은 이름이구나. 내 문하로 들어올 마음이 있느냐?”
너무 갑작스러운 말에 한립은 그야말로 그 자리에서 굳어 버렸다.
“제자를 들이는데 신중해 평생 6명의 제자를 들였는데. 어느 고인이 점을 보아 말해주기를 내 생에 7명의 제자가 있을 것이라 했다. 마지막 제자가 내 의발을 이어받아 나를 제외하고 유일하게 <대오행환세결>을 익히는 인물이 될 거라 했으니 네가 바로 그 일곱째 제자가 아니면 누구겠느냐.”
미라노조는 과거를 회상하며 말했다.
눈을 크게 뜨고 있던 한립은 금방 원래 표정으로 돌아왔지만 선뜻 답하지는 못했다.
미라노조가 강하고 그와 인연이 깊은 것은 알지만 누군가의 제자가 되는 일을 쉽게 결정할 수는 없었다.
“바로 결정하지 못할 것 같으니 나를 따라 진언문을 돌아보면 어떻겠느냐?”
미라노조가 그의 마음을 읽고 가볍게 웃음 지었다.
“선배님의 명에 따르겠습니다.”
한립이 고개를 숙였다.
그의 공손한 태도에 만족한 미라노조가 손에서 뿜어낸 금빛으로 허공에 길을 만들었다.
“길에 오르거라.”
미라노조를 따라 금빛 길에 발을 들인 한립은 두 발이 닿자마자 기이한 시간법칙에 휩싸여 수많은 광경이 양옆으로 스쳐 지나갔다.
공간통로와 비슷한 신통 같았다.
놀란 한립 주변으로 환영과 같은 장면들이 사라지고, 그는 금색 공간에 도착해 있었다.
<천살진옥공>에 진령혈맥을 융합해 수련하면서 진령혈맥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되었는데, 그중에서 천봉혈맥 덕에 공간의 힘이 더욱 예민해졌다.
느낌상 금색 공간은 관일봉에서 뇌광진법을 사용한 것을 훨씬 초월하는 거리에 있었다.
미라노조의 금빛 길이 순식간에 두 사람을 극히 먼 곳으로 전송한 것이다.
더 놀라운 일은 공간의 힘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이게 우리 진언문의 십방대도(十方大道) 신통이다. 공간이동을 할 수 있는데 공간의 힘이 아닌 시간의 힘을 이용하지.”
미라노조의 설명에 한립은 또 한 번 깜짝 놀랐다.
진선계 거대한 성이나 거대 종문은 공간 금제를 펼쳐 공간이동으로 적이 침입하는 것을 막았다.
그런데 신방대도 신통을 사용하면 그런 공간 금제들을 무력화시킬 수 있었다.
“시간법칙으로 이런 신통을 펼칠 수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오랜 세월 시간법칙을 연구해온 진언문이기에 수많은 신통을 보유하고 있지. 이런 신통에 관심이 있다면 나를 따라오너라.”
웃으며 대충 손을 저어 금빛으로 한립을 감싼 미라노조가 전방으로 날아갔다.
한립은 미라노조가 이끄는 대로 가면서 금색 공간을 둘러보았다.
태세선부와 비슷한 비경에는 웅장한 건물들이 들어차 있어 진언문 산문이 있는 곳보다 오히려 더 규모가 있어 보였고, 수많은 진언문 제자들이 이곳에서 수련 중이었다.
“이곳은 진언현묘계(眞言玄妙界)이다. 역대 진언문 선배들이 고심해서 만든 공간 계면으로, 우리 진언문의 근본이라 할 수 있다.”
미라노조의 말에 자부심이 느껴졌다.
“과연 웅장합니다.”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라 어마어마한 공간에 세심한 배치가 놀라웠다.
이곳의 시간파동은 태세선부와 세월탑처럼 충만했는데, 세월탑과 달리 구금하는 힘이 아니라 이곳의 시간의 흐름을 바깥과 5할 정도 차이가 나게 만들고 있었다.
미라노조를 따라 어딘가로 향할수록 시간 유속은 점점 달라져서 그 차이가 두 배, 세 배 그리고 열 배로 늘어가고 있었다.
한립보다 훨씬 빠른 속도의 미라노조는 금방 수천만 리를 이동했는데 금색 공간은 어찌나 넓은지 아직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미라노조는 어느 금색 거대 봉우리로 내려갔다.
우뚝 솟은 산이 하늘을 절반을 가려 거대한 금색 짐승이 웅크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금색 빛을 번쩍거리는 산의 바위들은 시간법칙의 힘을 발산해 하늘과 땅을 법칙의 힘으로 이었다.
미라노조를 따라 내려선 한립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법칙의 힘의 압박감에 쿵쿵 뒤로 물러나며 헛바람을 들이켰다.
“이건 수미현성석(須彌玄星石)!”
시간법칙을 수련하는 그에게는 익숙한 이름의 시간 재료로 거대한 산 전체가 그것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진귀한 시간재료인 수미현성석은 구천외역의 별이 가득한 하늘에서 만들어진다는 전설이 있는 천문학적인 가격의 재료였다.
“수미금산(須彌金山)은 진언문 11대 장문인 천시진인(天時眞人)께서 구천외역에서 찾아와 진언현묘계의 중심에 놓은 것이다.”
“진언문의 저력은 대단하군요. 천정과 필적할 만합니다.”
한립은 마음에서 우러난 찬사를 했다.
이곳의 시간 유속은 이제 바깥과 수백 배 차이가 났다.
진언문에서는 어떤 신통을 익히든 바깥보다 수백 배의 시간이 주어진다는 뜻이었다.
그걸 생각하자 마음이 끌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과찬이군. 이리로 가보지.”
가볍게 웃음 미라노조가 앞으로 걸어갔다.
금색 거대 산봉우리에는 산에 기대 지어진 거대한 궁전만 덩그러니 있었는데 그 궁전도 수미현성석으로 지어져서 휘황찬란하게 금빛을 내뿜었다.
꽉 닫힌 궁전 대문의 좌우에는 만(卍)자 형의 도안이 보였다.
미라노조가 금빛을 일으킨 손으로 도안을 누르자 만발하는 금빛 속에서 네 명의 금색 천지신명 허상들이 나타났다.
첫 번째 신령은 우람한 금갑 사내로 네모난 얼굴에 양손에 거대한 도끼와 방패를 들고 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두 번째 신령은 금색 부리에 8장의 금색 날개가 달리고 세 발 솥처럼 발이 3개였다.
세 번째 신령은 등에 작은 날개가 달린 통통하고 귀여운 어린 소녀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소녀는 작은 활과 화살을 들고 있었는데, 화살촉이 심장의 모양을 하고 있어 어린아이 장난감 같았다.
네 번째 신령은 6개의 팔이 달린 아름다운 여인으로 각각 금, 편종(編鐘), 퉁소, 비파, 방울, 북 여섯 개의 악기를 들고 감미로운 음악을 연주했다.
네 번째 신령은 나타나자마자 미라노조를 향해 살기를 품고 달려들었다.
주문을 왼 미라노조는 입에서 금색 주술문자를 뿜어 네 신령 허상들에게 흡수시켜 물러나게 하고는 대문을 열었다.
“들어가자꾸나.”
한립에게 눈짓을 한 미라노조가 먼저 안으로 들어섰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넓은 대청 바닥에 빼곡하게 펼쳐진 금색 도안들이 보였다.
해와 달, 별을 뜻하는 문양 등이 복잡하게 섞여 거대한 진법을 이루었다.
밝은 금빛과 주술문자들이 진법 곳곳에서 날아올라 일정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고 흘러 다녔다.
그 거대 진법 양옆에는 하얀색과 금색 돌기둥이 새워져 있었다.
금색 기둥은 수미현성석으로 만들어져 바닥의 진법과 연결된 불꽃 모양의 금색 문양이 가득했고, 은색 문양이 가득한 하얀 기둥의 끝에는 검은 구멍이 뚫려 은은하게 검은빛이 반짝였다.
은색 기둥에 박힌 수많은 선원석에서 부단히 정순한 선령력이 흘러나와 진법으로 흘러들고, 금색 기둥에서는 불꽃 모양의 금빛이 짙은 시간 파동을 내며 진법으로 스며들었다.
금색 진법 위에 둥실 떠있는 금색 원반에 금빛이 모여들어 원반의 금색 바늘을 빠르게 돌게 했다.
놀라운 광경에 한립은 다시 눈을 부릅떴다.
진언현묘계의 시간 유속이 달라진 원인이 바로 이 진법 때문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시곗바늘처럼 바늘이 돌고 있는 저 원반이 원인이었다.
그건 그가 진언문 유적에서 얻은 원반이었고 말이다.
“진언현묘계의 시간 유속이 바깥과 다름을 느꼈을 것이야. 저 균천일귀(鈞天日晷)가 시간 유속을 바꿔주는 보물이다. 바깥에서의 하루가 진언현묘계의 한 달, 혹은 일 년과도 같지. 균천일귀 덕에 우리 진언문이 오늘의 세력을 갖추게 된 것이고.”
미라노조도 금색 원반을 보고 있었다.
힐끗 그런 미라노조를 본 한립은 감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보다 수련할 시간이 수십 배 혹은 수백 배가 더 있으면 강해지지 않을 수가 없다.
“균천일귀는 신묘하지만 이걸 발동하려면 대량의 선원석과 시간법칙의 힘이 필요하군요. 진법 자체도 보기 드문 것이고요.”
한립은 금색과 흰색 돌기둥 그리고 진법을 차례로 훑었다.
“어린 친구가 보는 눈이 있구만. 광음천선대진(光陰天璿大陣)이라는 진법이야. 상고시대 10대 절진 중에 하나로, 이게 있어야 균천일귀를 발동할 수 있지. 막대한 선원석은 그간 본문이 모은 자원으로 충당을 한다지만 시간법칙의 힘은 수미금산이 아니었으면 감당하지 못했을 것이야.”
미리노조가 잔잔히 웃으며 하는 말에 한립은 마음이 가라앉았다.
그가 균천일귀를 가지고 있다 한들 그걸 발동할 날은 아득히 멀었기 때문이다.
“물론 균천일귀를 발동하는데 들어가는 대가는 그 영향 범위에 따라 다르다. 진언현묘계는 너무 넓어서 이렇다지만 아주 협소한 공간의 시간 유속을 바꾸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야.”
미라조노가 그를 한 번 보더니 이렇게 일러주었다.
한립은 자기도 모르게 표정이 뻣뻣해졌다.
마치 자신이 균천일귀를 지닌 것을 알고 해주는 말 같지 않은가?
“이곳의 보물은 균천일귀만이 아니니 저리로 가보지.”
미라노조가 성큼성큼 대전 깊은 곳으로 향하자 한립은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 따라갔다.
진법이 펼쳐진 대청을 돌아 긴 회랑을 지나 왼쪽, 오른쪽으로 두 개의 통로가 나타났다.
오른쪽에는 휘황찬란한 빛과 시간법칙의 기운이 흘러나오는 게 강력한 시간선기들이 있는 것 같았고 왼쪽은 어떤 다른 현상도 나타나지 않았다.
“오른쪽이 진언문의 장보전(藏寶殿)이다. 선기들을 두고 배양하지. 일단 왼쪽의 장공전으로 가서 비술과 신통들을 담은 경전들을 보자꾸나.”
미라노조는 한립을 데리고 왼쪽 길로 가서 또 다른 금색 대청으로 들어섰다.
장방형의 천장이 높은 거대 대청 양쪽에 격자 형식으로 구멍이 파여 서책 혹은 옥간이 들어있었고, 각각 구멍마다 금색 금제가 드리워 있었다.
격자 공간 위쪽에 작게 명패들이 있고 경전의 이름이 적혀 있는 듯했다.
<일월건곤공(日月乾坤功)>, <사계현광보(四季玄光譜)>, <무극천음결(舞劇天陰訣)>, <진언대수인(眞言大手印)>, <멸시신광(滅時神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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