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7화. 익숙한 장면
*
얼마나 지났을까.
눈을 뜬 한립은 자신이 평범한 방 안에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작은 창이 2개 난 방안에는 탁자 위에 다기류가 올라와 있고, 반대편에는 침상 3개가 놓여 있었다.
침상과 마주 보는 벽에 귀 큰 승려, 미라노조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진언문 제자들이 공동으로 쓰는 방인 것 같았다.
머리 위에 뜬 흐릿한 금색 고리에는 천육백 개의 도문들이 빼곡하게 빛나고 있었고 그 가운데 병령은 보이지 않고 장천병만 흐릿하게 떠 있었다.
한립은 문을 열고 바깥으로 걸어 나갔다.
사합원 형태의 집에는 수백 개의 작은 방이 나뉘어 있고, 그 옆으로는 거대한 하얀 산이 보였다.
산을 타고 백옥 궁전들이 건설되어 있고 허공에 뜬 산봉우리들에도 궁전 양식의 건물들이 있었다.
이전에 혼백으로 시공간초월을 한 적 있어 낯설지 않은 진언문 종문이 있는 장소였다.
지난번에는 천정이 진언문을 공격해 연기가 풀풀 피어오르고 망가지지 않은 곳이 없었는데 오늘 보니 거대 종문의 기품이 느껴졌다.
하얀 진언문 복장을 한 제자들이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게 활력이 넘쳐 보였다.
들키지 않기 위해 수결을 맺어 허상화한 한립은 위험을 무릅쓰고 의식을 분출했다.
잠시 후 희색을 드러낸 그는 하얀 봉우리 꼭대기로 날아가며 만규공적술로 기운을 거두었다.
얼마 되지 않아 정상의 하얀 2층 누각 앞에 이른 그는 푸른 비석에 적힌 장공각(藏功閣)이란 세 글자를 확인했다.
누각의 문 앞에는 백발노인만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지키고 있었는데 태을 중기의 수행을 지닌 사람이었다.
한립이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떨어졌는데 백발노인은 뭔가를 느낀 듯 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한립의 만규공적술에는 법언천지의 오묘함이 섞여 지척의 거리에서도 노인은 그를 찾아낼 수 없었다.
그는 이상하다는 표정을 짓는 노인을 보고 수결을 맺어 수정 사슬 몇 개를 손끝에서 날렸다.
어디선가 날아든 수정 사슬을 본 백발노인은 펄쩍 뛰어오르며 하얀 영패를 꺼내 장공각 금제를 펼치려 했다.
안타깝게도 수정 사슬이 워낙 빨라 먼저 노인의 미간으로 사라졌다.
백발노인은 엉거주춤 일어나다 만 상태로 굳었고, 한립은 주위에 이상이 없는지 살핀 다음 한숨을 돌렸다.
은신술을 풀지 않은 그는 백발노인의 손에서 하얀 영패를 뺏어와 어떻게 작동하는 것인지 살핀 다음 수결을 맺었다.
영패에서 뿜어져 나간 하얀빛이 대문의 빛의 장막으로 들어가 끼익, 하고 문을 열어주었다.
미소를 지은 한립은 그대로 들어가려다 멈춰있는 백발노인에게 손을 뻗었다.
가느다란 검은빛 다섯 줄기가 그의 손끝을 떠나 노인의 몸속으로 스며들었다.
뻣뻣하게 굳어 있던 노인은 정상인과 다를 바 없는 표정으로 자연스럽게 가부좌를 틀었다.
적린공경에 있을 때 해 도인에게 배웠던 괴뢰 비술이었다.
괴뢰법칙을 활용한 진정한 신통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이미 제압한 백발노인을 자연스럽게 보이게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의복을 단정히 한 한립은 누각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그리 넓지 않은 누각 1층은 고풍스러운 나무 책장 2, 30여 개에 경전과 옥간들이 잘 정리되어 있었고 전부 공법이나 비술 이름이 적혀 있었다.
이런 경전들 위에도 흐릿하게 하얀빛이 덮여 있어 누각 문처럼 금제가 걸려 있는 듯했다.
짐작대로 이곳이 종문의 경전들을 모아둔 곳으로 보이자 한립은 마음이 가벼워졌다.
진선계로 돌아가고 진언문에 대해 알아보고는 깜짝 놀랐었다.
진언문은 그리 크지 않은 흑토선역에 있었지만 시간법칙에 대해서만은 아주 정통했고, 시간법칙의 깨달음이 깊은 미라노조가 있어 진선계 전체에서의 위상이 높았다.
시간정사 50가닥을 희생해 여기까지 온 김에 뭔가 얻어가야 속이 풀릴 듯했다.
지존법칙 중 하나인 시간법칙을 홀로 수행하며 장천병 등 기연 덕에 남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빨리 수행이 늘었지만 진언문에서 수행을 쌓던 선배들이 남긴 심득(心得)이라도 구할 수 있으면 수련에 도움이 될 터였다.
시간법칙은 세상의 근원이 되는 기초 법칙이었다.
범인 혹은 개미라 해도 일생동안 시간법칙과 동떨어져 살 수 없었고, 생령이 태어나 죽고 산과 강이 변화는 모든 것에서 시간법칙의 힘이 닿지 않는 곳이 없었다.
시간법칙을 공부했던 선인들이 남긴 말 한마디가 어떤 깨달음을 줄지 알 수 없었다.
경전의 금제들이 누각 문의 금제와 똑같은 것을 본 한립은 책장을 돌면서 대략적으로 살펴보았다.
금선경, 진선경을 위한 좋은 공법과 비술들이 많았고, 시간법칙에 관해 서술한 책도 간혹 보였지만 깊이 있게 연구된 것은 찾을 수 없었다.
“고계공법과 비술은 다른 곳을 찾아봐야겠어.”
그는 몇 권을 더 들춰보고는 계단을 올라 2층으로 향했다.
2층은 책장이 열댓 개뿐이고 그 위에 수많은 경전과 옥간들이 보였다.
시간이 금인 터라 한립은 빠르게 그것들을 들춰보았지만 역시 금선경 수사가 볼 법한 것이고 태을경 수사를 위한 서책 두 권을 찾았을 뿐이었다.
그런 서책을 훑어보아도 별 수확이 없자 한숨을 내쉰 그는 걸음을 돌리려 했다.
벌써 머리 위 금색 고리의 시간도문이 열에 한둘은 꺼져서 시간이 없었다.
계단으로 가려던 그는 벽에 가까이 붙은 책장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급히 둘러보느라 잘 몰랐는데 책장의 위치가 좀 이상했다.
벽과 겨우 팔뚝 하나가 들어갈 틈을 두고 떨어져 있었다.
의식으로 근방을 살핀 한립의 얼굴에 희색이 돌았다.
책장을 조심스럽게 밀자 벽이 열리면서 안에 작은 공간이 드러났다.
깊이 손을 넣어 안에 든 것을 꺼내니 금색 옥함이었다.
‘혹시…….’
옥함의 금색 금제를 보고 침음하던 한립은 양손에 금빛을 일으켜 그것을 잡아보았다.
금제가 금빛에 흩어지고 옥함이 달칵 열려 안에 담겨 있던 금색 옥간이 드러났다.
<불후금운(不朽金雲)>이란 신통이 적힌 옥간이었는데 설명에 따르면 시간법칙에 기초한 방어 신통이라 했다.
진언문의 유명한 신통 중에서 방어력으로는 으뜸으로 온갖 사악한 힘은 침투하지 못하고 어떤 방법으로도 뚫을 수 없다 강조하고 있었다.
그저 익힐 수 있는 조건이 까다로워서 시간공법을 상당한 수준까지 익히지 않으면 불후금운도 익힐 수 없고, 그 공법이 강력해야 신통의 강력한 위력을 감당할 수 있었다.
신통을 펼치는데 필요한 시간법칙정사만 해도 3백여 가닥이었다.
그걸 본 한립은 쓴웃음을 지었다.
첫 번째, 두 번째 조건이야 <대오행환세결>을 심도있게 익혀 그럭저럭 되겠으나 시간법칙 정사 3백 가닥의 법칙의 힘은 무리였다.
이제 150여 가닥 밖에 시간정사가 넘지 않은 그는 불후금운 신통을 펼치는데 필요한 양의 절반밖에 충족하지 못한 셈이었다.
그러나 이런 시간 신통을 얻은 것만으로도 흡족했다.
옥간과 금색 옥함만 거두고 책장을 밀어둔 그는 누각을 나서려 했다.
휙!
그때 금색 둔광이 날아들어 큼지막한 체구의 태을 중기 거한으로 변했다.
“강 수사, 홀로 장공각을 지키려니 적적하지 않으십니까?”
거칠게 생긴 거한이 웃음 지었다.
안색이 달라진 한립은 서둘러 괴뢰 비술을 발동했다.
“원래도 별로 찾는 사람이 없는 곳 아닙니까.”
백발노인이 고개를 들어 거한을 보고 담담히 답했다.
“수사를 비웃으려던 것이 아니니 기분 상해하지 마세요. 천정이 나날이 압박을 가해 와서 제가 있는 천성전(天星殿)도 요즘 제자들의 걸음이 뜸해졌습니다. 이래서야 언제 공적을 쌓을 수 있을지! 그래도 바깥으로 파견 나간 장로들이 공적을 좀 쌓았다던데 그들도 적잖은 인원이 목숨을 잃었다더군요.”
거한은 노인의 반응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고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평소에 친분이 있는 사이 같았다.
“그렇군요, 그래서 진 수사께서 오늘은 여기까지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안심한 한립은 백발노인을 조종해 화제를 돌렸다.
“하하, 별일은 아니고 조사께서 오늘 관일봉(觀日峰)에서 설법을 하신다기에 강 수사와 같이 가볼까 하고 왔습니다.”
거친 거한의 말에 누각 안 한립은 눈이 번쩍 뜨였다.
조사? 미라노조를 말하는 건가? 미라노조도 <대오행환세결>을 수련했는데 설법을 들으면 도움이 되겠지?
“호의는 감사합니다만 저는 중요하게 해야 할 일이 있어 자리를 뜰 수가 없겠습니다.”
“그렇다면, 저 혼자라도 가봐야겠습니다. 강 수사도 일을 마치는 대로 어서 오세요. 조사께서 익히신 공법이 우리와 달라도 들어두면 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내용 아닙니까.”
거한은 움찔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거한이 금빛 둔광으로 변해 사라지고 한립이 누각 문을 열고 나왔다.
노인을 장공전 안으로 들여보낸 한립은 수정빛을 날려 기절을 시키고는 하얀 영패를 다시 품에 잘 넣어주고 누각의 문을 닫았다.
혼백이 깊이 잠들어 닷새는 되어야 깨어날 터였다.
거친 사내가 사라진 방향에는 녹음이 우거지고, 기암괴석들이 박힌 푸른 산봉우리가 있었는데 눈에 익었다.
“저긴…….”
처음 장천병으로 미라노조의 설법을 엿들을 때 보았었고, 진언문 유적에 갔을 때 가봤고 오늘로 세 번째였다.
구름이 산 정상이 가려진 푸른 산은 기다란 돌계단이 구불구불 나 있었다.
계단에 가득 자리를 잡은 진언문 제자들은 진중한 표정으로 정상에서 웅장하게 울려 퍼지는 미라노조의 한 마디 한마디를 열과 성을 다해 듣고 있었다.
미라노조의 음성에 천지원기가 웅웅 진동하면서 하늘의 빛이 바람이 되었다가 비가 되었다가 하며 다채롭게 변화했다.
한립은 미라노조에게 들킬까 산 정상까지는 가지 않고 산허리쯤에 자리를 잡고 위쪽을 살폈다.
미라노조를 중심에 두고 기마자, 목연 등 다섯 명의 제자들이 앉아 있었다.
목연 옆에 기름기가 반지르르한 비대한 늙은 쥐도 뒷발로 서서 미라노조를 우러러보고 있었다.
한립은 더는 주변 광경을 살피지 않고 미라노조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표정이 점점 달라지더니 나중에는 푹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대오행환세결>에 대해 직접 설법하는 게 아님에도 한 구절 한 구절에 <대오행환세결>의 내용이 깔려 있었다.
시간이 흘러 반나절 뒤.
미라노조의 목소리가 갑자기 끊겨 한립이 정신을 차리고 산 정상을 쳐다보았다.
목연이 질문을 하고 있었다.
의혹을 직접 질문해 답을 들을 수 있는 목연이 부러워지는 순간이었다. 미라노조는 목연의 질문에 답을 주고 설법을 계속 이어나갔다.
그런데 미라노조가 얼마 지나지 않아 말을 멈추고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목연 등도 집중이 깨져 같은 곳을 보며 노기를 드러냈다.
미라노조가 입술을 달싹이고 무형의 힘이 허공을 쳐서 어딘가로 이어져 있을지 모를 통로 같은 것을 차단했다.
그걸 본 한립은 눈썹을 끌어올렸다.
이건 그가 설법을 훔쳐 듣다 미라노조에게 들켰던 장면이 아닌가!
손을 쳐서 깨진 공간을 봉합한 미라노조가 담담히 입을 열었다.
“별일 아니니 모두 앉거라.”
목연 등이 그 말에 진정하고 자리에 앉았다.
“사존, 방금은 누구였습니까? 천정의 짓일 까요?”
기마자가 미간을 좁히고 물었다.
고개를 저은 미라노조가 무슨 말을 하려다 시선이 산허리로 향했다.
산허리에 숨어 있던 한립으로서는 심장이 철렁할 일이었다.
만규공적술을 펼쳐 기운을 전혀 내뿜지 않았고, 미라노조의 시선은 찰나였지만 분명 자신을 본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미라노조가 날 보았다. 달아나야 하나?’
한립이 놀라 달아나려는데 미라노조가 설법을 이어나갔다.
둔광을 일으키려던 한립은 멈추었다.
미라노조의 진정한 실력을 알 방법은 없으나 그의 느낌으로는 흑천마조보다 훨씬 강한 존재 같았다.
그가 자신을 잡으려 한다면 어차피 무슨 수를 써도 빠져나갈 수 없었다.
게다가 <대오행환세결>을 익힌 그는 반쯤 진언문 제자나 다름없어 미라노조에게 잡힌다 한들 꼭 자신에게 해를 끼칠 거란 보장도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