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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2096화 (1,853/2,000)
  • 2096화. 병령(甁靈) 현신

    *

    한립을 가둔 적몽이 고공에서 내려왔다.

    “생긴 건 평범한데? 도망칠 줄밖에 모르는 녀석에게 금원선궁 녀석들은 당하기나 하고 말이야. 천정의 체면만 깎아 먹었어.”

    반투명 장막 바깥에서 한립을 살핀 그녀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한립은 그녀가 뭐라든 개의치 않고 두 눈에 보랏빛을 일으켜 어떻게든 달아날 구멍이 없는지 빠르게 수색했다.

    “이 구룡신화조(九龍神火罩)는 4품 선기다. 대라경 수사도 벗어나지 못할 텐데, 하물며 네 녀석이야? 얌전히 잡혀가는 것이 네게 이로울 것이야.”

    적몽은 그가 포기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입을 열었다.

    둘러보니 그녀의 말대로 강대한 법칙의 힘이 물샐틈없이 막고 있었다.

    묘법선존이 한발 늦게 도착해 그걸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어머, 늦으셨네요. 제가 벌써 잡아두었는데.”

    적몽이 싱긋 웃어 보였다.

    “그런가요? 내 보기에는 저놈은 사슬에 묶여 있지도, 금제로 제압을 당하지도 않았는데 말입니다. 여기 발을 묶어두는 거야 저도 이미 했던 것 아닙니까?”

    묘법선존은 무표정하게 반박했다.

    “뭐 상의해서 될 일은 아닌 것 같은데. 그럼 아까 못다 한 싸움을 해볼까요? 이긴 사람이 저 녀석을 데려가는 겁니다.”

    “무슨 말이 그리 많은지!”

    적몽이 말을 끝맺기를 기다리지 않고 묘법선존이 먼저 날아올랐다.

    뒤따라가려던 적몽이 힐끗 한립을 돌아보며 말했다.

    “내 충고하는데, 이상한 짓은 안 하는 게 좋을 것이다. 구룡신화조 안에서 난리를 피우다가는 목숨을 잃기 딱 좋으니까. 난 묘법처럼 심보가 나쁘지는 않아서 네가 그리 빨리 죽길 바라지는 않거든.”

    할 말을 마친 그녀가 고공으로 올라가 천지가 다시 강력한 열기와 냉기에 휩싸여 요동쳤다.

    위쪽에서 쾅쾅거리는 소리를 들으면서 한립은 서둘러 생각을 정리했다.

    마음을 가라앉힌 그는 일단 허리춤의 현천호리병을 풀러 뒤집은 다음 구룡신화조와 지면이 맞닿는 부분을 향해 호리병박 입구를 조준했다.

    길게 숨을 내쉰 한립은 호리병박 밑 부분을 펑! 쳐서 그 안의 푸른빛 소용돌이 속에서 암녹색 광선을 분출했다.

    쿵!

    훼멸법칙을 함유한 암녹색 광선이 구룡신화조에 떨어져 녹색 구름을 만들어냈다.

    구룡신화조는 흔들렸지만 표면의 주술문자들은 잠시 반짝이고는 원상태로 돌아갔다.

    훅.

    더 최악은, 지붕의 붉은 수정 화룡 아홉 마리 중 다섯 마리가 눈에서 금빛을 반짝이고는 입을 쩍 벌려 모종의 진득한 불빛 같은 것을 장막에 흡수시켰다는 것이다.

    그 불길에 몸이 닿은 한립은 엄청난 고통에 참지 못하고 목이 찢어져라 비명을 내질러야 했다.

    그가 부를 것도 없이 정염불새가 알아서 나타나 은색 불길로 그의 전신을 감쌌지만 그래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열기가 스며들어 한립을 고통스럽게 하고 있었다.

    정염불새는 불길로 그를 보호하면서 거대한 새 머리를 응결해 부리에서 은색 화염을 분출했다.

    은색 화염과 장막을 타고 내린 붉은 화염이 충돌해 한립의 머리 위로 두 색이 섞인 불의 장막을 만들어냈다.

    그걸 본 한립은 더욱 마음이 급해졌다.

    보통 정염불새는 어떤 불 속성 공격이든 꿀꺽꿀꺽 삼켰는데 이번에는 그러지 못하고 겨우 밀어내고만 있었다.

    이대로 얼마나 더 버틸 수 있단 말인가?

    불새와의 의식연계로 정염불새가 붉은 화염을 삼키지 못하는 것은 물론 점점 압도당하고 있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그가 어쩔 줄 모르고 있는데 구룡신화조가 정염불새의 공격에 격노했는지 나머지 네 마리 화룡도 슬슬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머지 네 마리 화룡이 뿜은 붉은 화염이 장막에 흡수되어 순식간에 한립을 집어삼켰다.

    정염불새가 날카롭게 울며 은빛을 방출해 저항하던 새 머리까지 녹여 그를 필사적으로 보호했다.

    하지만 아홉 화룡이 내뿜는 불길은 이전과는 비할 바가 아니었기에 정염불새가 최선을 다하는데도 막을 수가 없었다.

    더욱 걱정스러운 것은 이 구룡신화조가 불 속성 공격의 힘을 흡수하는 능력이 있는지 정염불새가 붉은 불길에 대항하면서 힘을 잃고 있다는 것이었다.

    정염불새가 화룡과 대치하는 동안 한립도 놀고 있을 수만은 없어 청죽봉운검 36자루를 불러내 주변의 장막을 갈랐다.

    불똥과 뇌전이 팍팍 사방으로 튀었지만 어떻게 해도 장막을 뚫을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정염불새의 은색 화염이 소모되어, 구룡신화조의 불길에 한립은 혼백마저 타들어 가는 기분을 느꼈다.

    이때, 정염불새가 돌연 입에서 하얀 불 구슬을 뱉어 그의 머리에 두고 눈부신 하얀 광선을 뿜게 했다.

    하얀 광선의 보조하에 정염불새의 은색 화염이 힘을 얻어 붉은 화염을 슬슬 밀어냈다.

    세월탑에서 얻은 불 속성 보물인 흰 구슬은 정염불새가 진작 흡수한 줄 알았는데 아직도 남아 있었을 줄 몰랐다.

    하지만 슬슬 밀리던 붉은 화염은 금방 기운을 차렸고, 아홉 화룡들이 마치 구슬을 물려는 것처럼 몰려들어 입을 쩍 벌렸다.

    오행인공대진을 발동하느라 힘을 소모하고, 정염불새에게 거의 흡수당한 구슬은 화룡들의 불길에 금방 광선이 약해졌다.

    이제 붉은 화염들은 응축해 붉은 반딧불이처럼 변하며 한립에게 달라붙고 있었다.

    그 온도가 어찌나 높은지 단단한 한립의 피부가 거북이 등처럼 쩍쩍 갈라져 언제라도 터져 버릴 것 같이 변했다.

    정염불새가 이를 보고 칠색 화염 중 붉은빛과 주황색 빛을 분리해 머리 위의 하얀 구슬에 녹여 넣었다.

    팟.

    하얀 구슬이 다시 밝은 빛을 뿜어 하얀 반딧불이들을 만들어 붉은 반딧불이들에 대항했다.

    숨을 헐떡인 한립은 정염불새가 자신을 위해 칠채화단사에서 두 기운을 희생한 것을 보고 마음에 가책을 느꼈지만 이 난국을 어떻게 타파해야 할지 길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그때, 좀 열 받은 듯한 목소리가 가슴팍에서 들려왔다.

    “네 녀석은 바보냐? 못 이기겠으면 달아나야지. 시공간초월 같은 초절정 신통을 두고 왜 안 쓰는 것이야? 보고 있자니 열불이 나서…….”

    “누구십니까?”

    한립은 깜짝 놀랐다.

    마치 아주 멀리서 들려오는 것처럼 희미한 목소리가 어딘가 낯익었다. 기억을 더듬어본 그는 재빨리 앞섶에 숨겨둔 장천병을 꺼내 들었다.

    병 표면에 암녹색 빛이 모여 콩알만 한 눈으로 변하더니 힐끗 그를 쳐다보았다.

    무의식중에 병을 멀찍이 들려던 한립은 장천병의 두 눈이 화가나 그를 노려보자 얼른 팔을 굽혔다.

    “병령 선배님께서 방금 제게 말을 걸어준 것입니까?”

    “내가 아니면 또 누구란 말이냐? 대라경 수사가 겨우, 4품 선기를 가지고 와서 달려드는데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당하다니! 나 원 이렇게 망신스러울 데가 있나.”

    병령이 눈을 굴리며 웅웅 말했다.

    “시공간초월을 통해 달아날 생각을 안 한 것은 아닙니다만 제 몸만 빠져나가면 장천병은 여기 남을 것이 아닙니까?”

    뭐라 대꾸해야 할지 몰라 입을 뻐끔거리던 한립이 이렇게 말했다.

    “목숨이 중요하냐, 아니면 장천병이 중요하냐?”

    “목숨도 중요하지만 오랜 세월 함께한 장천병도 똑같이 중요합니다. 게다가 맨몸으로 달아나더라도 어차피 이곳으로 돌아와야 하니 근본적으로 적의 손에서 벗어날 수는 없을 테고요.”

    신중한 한립의 답변에 장천병은 침묵했다.

    그의 대답이 꽤 마음에 든 것 같았다.

    “그렇게 말을 하는 걸 보니, 내 너를 한 번은 구해 줄만 하구나. 네가 육신을 지닌 채 시공간초월을 할 때 장천병이 이곳에 남는 것은 네가 돌아올 수 있는 좌표 노릇을 하는 것이다. 장천병을 지니고 함께 시공간초월을 하면 그때부터 지나가는 시간과 외부의 시간이 똑같이 흘러가, 원래 그 자리 그 시간으로는 영영 돌아오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게 가능하단 말입니까? 그럼 얼른 술법을 펼쳐 주십시오.”

    장천병의 말에 한립은 더없이 기뻐했다.

    “일단 끝까지 듣거라. 병을 가지고 광음하(光陰河)로 가려면 30가닥의 시간정사를 소모해야 한다. 이 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하거라.”

    시간정사는 얻기도 힘들어 빛을 잃은 시간도문처럼 다시 회복할 수도 없다는 말에 속이 쓰렸다.

    그러나 최선을 다해 화룡들의 공격을 막고 있는 정염불새를 본 한립은 머뭇거릴 여유가 없었다.

    “제게 방법을 일러주십시오, 선배님.”

    “딱히 일러줄 것도 없다. 네가 수정 벽만 소환하면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하면 되니까.”

    병령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한립은 양손으로 수결을 맺어 <대오행환세결>을 발동했다.

    금빛 속에 시간법칙 파동을 내뿜는 다섯 개의 보물들이 떠올라 도문을 반짝였다.

    시간법칙의 힘이 응결한 거대한 금색 고리, 시간 고리가 만들어지고 시간도문들이 진언보륜 등 보물에서 떠올라 그 위로 달라붙었다.

    강대하기 짝이 없는 시간법칙 파동이 퍼져나갔다.

    고공에서 격렬하게 싸우던 묘법선존과 적몽이 그걸 감지하고 즉시 서로에게 떨어져 지면으로 낙하했다.

    멀리서 구룡신화조 속에 눈부신 암녹색 태양이 떠오르더니 거대한 빛의 소용돌이가 치는 것을 보았다.

    수정 벽 앞에 선 한립은 정염불새를 체내로 돌려놓고 붉은 화염을 참으며 그대로 수정 벽에 생긴 소용돌이 속으로 달려 들어갔다.

    묘법선존과 적몽은 그렇게 눈앞에서 한립이 소용돌이에 집어 삼켜지는 것을 보고 말았다.

    묘법선존이 점차 사라져 가는 녹색빛을 보고 속으로 탄성을 터트렸다.

    ‘장천병!’

    그녀는 속도를 높였지만 금색 고리 속에서 30개의 시간정사가 분리되어 가루로 변했고, 그걸 흡수한 녹색 빛이 장천병으로 변해 수정 장벽 안 소용돌이 속으로 함께 사라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안 돼…….”

    오랜 세월 찾아 헤매던 무상의 보물이 눈앞에서 사라지는 것을 본 묘법선존도 평정을 잃고 소리쳤다.

    적몽도 난색을 표하며 구룡신화조를 거두고 수정 벽으로 다가서려 했지만 이미 수정 벽은 허상화되어 미약한 시간법칙 파동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머리끝까지 화가 치민 묘법선존은 적몽을 살벌하게 노려보았다.

    그녀가 끼어들지만 않았으면 진작 한립과 장천병을 가지고 종문으로 돌아갔을 테고, 근 천만년 만에 구원관 최고의 공적을 세울 수 있었을 텐데 모든 것이 수포가 되었다.

    “목표도 사라졌는데 싸워봤자 의미 없지 않나요? 그러지 말고…….”

    적몽이 미간을 좁히는데 벌써 얼음 화살들이 우수수 떨어지고 있었다.

    “좋게좋게 풀려니까 내가 돌부처로 보입니까?”

    안 그래도 오만한 적몽도 상대가 일언반구도 없이 공격하는 것에 열이 받아 곧장 묘법선존을 향해 달려들었다.

    하늘과 땅을 오가며 혼전이 펼쳐졌다.

    남안과 묘법선존의 시녀들은 수만 리 밖에서 굉음을 들으며 기다리고 있었다.

    ‘한 수사는 어찌 되었을지…….’

    남안은 이런 걱정을 하는 것이 종문에 미안해서 또 한숨을 내쉬었다.

    * * *

    한편 한립은 황원 위에 떠올라 있었다.

    그의 아래로 거대한 강이 하늘에서 떨어져 끝도 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물줄기 속의 물방울들은 정말 무궁무진했다.

    그가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는데 허공에서 금색과 녹색 빛이 날아들었다.

    금색 고리는 빙글 돌아 작은 반지로 변해 그의 손에 끼워졌고 녹색 빛은 그의 손에 떨어져 암녹색 작은 병으로 변했다.

    “아직도 여기서 뭐 하는 것이냐? 장천병을 들고 들어온 순간부터 시간도문의 힘을 급격하게 허비하게 된다. 어서 광음수적(光陰水滴) 중에 하나를 골라 시공간 초월을 하도록 해.”

    병령이 충고했다.

    하지만 얼떨결에 여기 온 터라 딱히 어디로 갈지 정해둔 곳이 없었다.

    <대오행환세결>이 진척이 없는데 다시 진언문으로 가서 미라노조의 설법을 들을 수 있다면…….

    “병령 선배님, 저를 멸망하기 전의 진언문으로 데려가 주실 수 있겠습니까?”

    “안 될 것 없지. 다만 장천병도 같이 가려면 시간법칙의 힘으로만은 지탱할 수 없고 시간정사도 소모하게 될 것이다.”

    “시간정사도요?”

    그 말에 한립은 너무 출혈이 심한 것 아닌가란 생각이 들었다.

    시간정사 30가닥을 잃은 것도 속이 쓰려 죽겠는데 더 없어진다니?

    “어디로 가는지에 따라 달렸지. 오래전으로 돌아갈수록 필요한 시간법칙의 힘이 많은 데 진언문은 진작 멸망해서 아마 스무 가닥은 없어질 것이다.”

    “가시죠!”

    “기다려 보거라.”

    망설이던 한립이 결정을 내리자 그의 손가락에 찬 금색 반지에서 시간정사 스무 가닥이 분리되어 가루로 변해 장천병에 흡수되었다.

    장천병이 녹색 파문들을 퍼트리고 거대한 광음하에서 물방울 하나가 떠올라 그를 향해 날아들었다.

    “저것이다.”

    병령의 말을 들은 한립은 한 줄기 의식을 뿜어 물방울 표면의 장면을 보려 했으나 의식이 접근하자 물방울에서 거대한 흡입력이 작동해 슉, 그를 빨아 당겼다.

    천지가 뒤집히고 눈앞이 새까맣게 변한 한립은 그렇게 정신을 잃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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