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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2095화 (1,852/2,000)
  • 2095화. 단 한 번의 기회

    *

    한립은 묘법선존의 말을 못 들은 척하면서 몸속으로 파고드는 추위에 저항하며 여섯 개의 거울을 꼼꼼하게 관찰했다.

    그러다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손을 들어 칠색 화염 속에서 슬쩍 은염 소인을 불러내 보았다.

    과연 자신의 투영은 있는데 거울에 정염불새의 투영은 보이지 않았다.

    ‘얼음 속성 법칙의 힘으로 응결한 것이라, 불 속성 투영을 만들 수 없는 거야.’

    펑!

    그와 의식이 연계되어 있는 은염소인이 그의 손바닥에서 뛰어내려 송곳처럼 거울을 향해 뚫고 들어갔다.

    어떻게 해도 부술 수 없던 거울이 녹아 표면이 출렁이고 있었다.

    “듣던 대로 정염불새가 대단하기는 하구나. 하지만 네 놈이 거길 빠져나올 수 있을 것 같으냐?”

    묘법선존이 눈썹을 끌어올리고 빙봉환경에서 내려서려는데 갑자기 북동쪽에서 온기가 어린 바람이 불어왔다.

    내려가려던 묘법선존은 그대로 몸을 띄워 빙벽 위로 올라가 하늘 끝을 주시했다.

    동북 쪽에서 붉은 구름을 타고 누군가 접근하고 있었는데 그녀가 오자 주변 공기가 지글지글 끓는 것 같았다.

    상대의 기운을 알아챈 묘법선존의 얼굴에 싫은 기색이 스쳤다.

    천 장 거리를 두고 멈춘 붉은 신형은 불 구름을 타고 묘법선존과 마주 보았다.

    “누군가 했더니 묘법선존이었네요? 주선방에 이름이 올라가 죄인을 쫓아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데 혹시 보셨는지요?”

    불 구름 위 신형은 짐짓 놀란 척하며 입을 가리고 물었다.

    “이곳에는 구원관에서 쫓는 죄인이 있을 뿐이고, 이미 잡았으니 적몽 선자는 다른 곳에서 찾아보시지요.”

    그 말을 들은 묘법선존이 서늘하게 대꾸했다.

    붉은 신형은 다름 아닌 한립을 쫓던 적몽이었다.

    “일이 공교롭게 되었습니다. 저자는 천정 주선방에 이름이 올라가 있는 죄인이라서요. 선존께서 잡아두셨다니 제게 넘겨주시지요. 제가 천정에 공을 알려 선존과 구원관에 상을 내리게 하겠습니다.”

    적몽은 힐끗 빙봉환경 속을 보고 빙긋 웃음 지었다.

    “내가 먼저 붙잡았으니 당연히 구원관으로 데려가 심문을 받게 할 겁니다. 우리 쪽에서 볼일이 끝나면 넘겨 드리지요. 천정은 원래 이런 규정에 엄격한 곳 아닙니까?”

    “먼저 잡았으면 그러는 것이 맞겠으나……. 잡은 것이 맞기는 한 것입니까?”

    물러서지 않는 묘법선존을 보고 적몽이 실소했다.

    그걸 본 묘법이 안색이 달라졌다.

    빙벽 뒤쪽 땅에서 붉은 불개미들이 뚫고 나와 한립을 감싼 빙봉환경을 뚫고 있었다.

    몸에 불길을 두른 개미들이 지나는 곳마다 작열하는 열기에 땅이 깊게 파였고, 극한(劇寒)의 성질을 지닌 빙봉환경도 얼음과 불의 대결에 힘을 빼앗기고 있었다.

    불개미들은 몸에 붙은 불길을 소모하며 빙봉환경을 오르다 수정처럼 얼어붙었지만, 그 수가 워낙 많아 얕볼 수 없었다.

    안에 갇힌 한립은 바깥에서도 뚫고 들어오려는 것을 모르고 여전히 정염불새의 힘을 이용해 탈출하려 시도하고 있었다.

    한기가 침투해 손발이 굳기 시작할 때쯤 드디어 퐁,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빙봉환경에 구멍이 뚫린 것이다!

    기쁜 마음에 한립은 전력을 다한 일격으로 구멍이 뚫린 부분을 부수었다.

    카카캉…….

    얼음 거울 여섯 개가 부서지면서 한립은 바깥으로 튀어나올 수 있었다.

    ‘이것들은 또 뭐란 말인가!’

    그런데 얼음 조각들이 다 녹기도 전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불개미가 달라붙어 어찌 된 일인지도 모른 채 둔광을 일으켜야 했다.

    곁눈질로 보니 묘법선준이 눈보라를 이끌고 그를 쫓고 있었다.

    간담이 서늘해진 한립이 진언보륜을 역전해 피하려는데 묘법선존 뒤쪽으로 붉은 신영이 따라붙어 소리 높여 웃음을 터트렸다.

    “선존이 아직 잡지 못했으니 이제는 각자 실력껏 움직이면 되겠지요? 누가 먼저 저자를 잡는지 봅시다.”

    불 구름 속에서 금빛이 반짝이고 금색 꼬리들이 묘법선존을 추월해 한립을 향해 나란히 내달렸다.

    한립은 속으로 앓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대라 중기 수사 한 명도 골치였는데 어디서 또 다른 대라 중기 수사가 하나 더 나타난 것이다.

    적몽의 손짓에 금색 꼬리들이 화룡으로 변해 한립을 물어뜯으려 아가리를 벌렸다.

    화룡이 닿기도 전에 엄청난 열기로 주변이 왜곡되고 있었고, 한립은 질식할 것 같은 느낌에 속도가 느려졌다.

    화룡이 그를 삼키려는 순간 은색 화염이 그의 어깨에서 치솟았다.

    어깨에서 날아오른 거대한 불새가 부리를 벌리고 화룡의 머리 절반을 물어뜯자 튀어나왔던 화룡의 몸이 수축해 돌아갔다.

    그런데 화룡 머리가 불새의 입안에서 흡수되지 않고 살아있는 것처럼 난동을 부리면서 불똥을 날렸다.

    한립은 팔뚝 전체를 끓는 기름에 넣은 것처럼 고통스러웠지만 이를 악물고 참아야 했다.

    정염불새의 등장에 적몽은 오히려 좋아하며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정염불새가 아닌가! 그것도 칠채화단사를 삼친 녀석이야. 넌 내 것이다!”

    눈을 가늘게 뜬 그녀는 전신에 불길을 일으켜 순식간에 한립에게 접근했다.

    그녀가 다가오자 한립은 피부가 타다 못해 체내의 피가 다 펄펄 끓는 것 같았다.

    얼굴이 새빨갛게 변하고 눈이 출혈된 그는 체내의 선령력을 통제하기가 어려워져 금방이라도 미쳐 날뛸 것 같았다.

    “피 끓는 청춘이라는데, 어디 네 녀석도 그런지 볼까?”

    싱긋 웃음 지은 적몽은 수결을 맺었다.

    치지지직.

    주변 온도가 삽시간에 10배는 뜨거워진 한립은 금색 새 3마리가 뿜어내는 새하얀 불길에 휩싸여, 연단로에 들어간 단약 재료처럼 고아지고 있었다.

    정염불새가 진작 은색 외투로 변해 그를 둘러싸고 있지 않았으면 피가 끓고 살이 녹아 흐물흐물해 졌을 터였다.

    그러나 살아남았다고 해서 육신과 혼백의 고통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었다.

    키학!

    이때 맑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거대 빙봉이 느닷없이 끼어들어 극한의 눈보라로 불길을 뒤덮은 것이다.

    불길도 도전을 감지한 것처럼 화룡으로 변해 빙봉과 엉켜 싸웠다.

    만 리 하늘에 하얀 수증기가 뿌옇게 생겨 앞을 제대로 볼 수 없고 주변 온도는 뚝, 떨어졌다 확 치솟기를 반복했다.

    “묘법선존, 이걸 구원관이 천정과 반목하려는 것으로 해석해도 되겠습니까?”

    적몽은 묘법선존에게 눈을 치켜떴다.

    “내가 잡으려던 자를 탐낸 건 당신입니다. 그런 말장난은 그만두시죠.”

    묘법선존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차갑게 답했다.

    “좋습니다. 둘 다 양보는 못 할 것 같으니 우리 둘이 승부를 내서 이긴 사람이 데려가는 수밖에 없겠군요. 그러기를 바라는 겁니까?”

    적몽이 웃음 지었다.

    “제 뜻도 그러합니다.”

    묘법선존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들이 싸우는 사이, 한립은 열기의 압박에서 훨씬 편해질 수 있었다.

    몸이 편해졌지만 지금은 긴장을 풀 때는 아니었다.

    지금이야말로 그가 달아날 유일한 기회였다!

    한립은 천살진옥공과 진령혈맥을 발동해 검은빛 속에서 마기를 뿜었다.

    츠츠츳.

    은색 뇌전이 마기 속에서 그를 감싸고, 뇌붕의 은색 머리에 좌우로 천봉과 청란 머리가 달린 산만한 거대 새가 그 속에서 날개를 펼쳤다.

    머리 셋 달린 거대 새는 푸른색과 붉은색이 섞인 깃털 날개 끝에 칠색 화염이 휘날리는 꼬리 깃털이 자라있었고, 거대한 은색 발톱은 장검처럼 번득이며 은색 뇌전빛을 응결했다.

    거대 새의 날갯짓에 푸른 돌풍이 모여 위로 치솟은 순간 꼬리 깃털에서는 불꽃이, 전신의 다른 깃털에서는 은색 뇌전이 미친 듯이 분출되었다.

    거대 새는 은색 뇌전에 휩싸인 순간 만 리 바깥으로 이동했고 다시 번쩍이며 수만 리 밖으로 달아났다.

    거대 새는 천살진옥공에 뇌붕 등 세 마리 조류형 진령혈맥을 융합해 변신한 한립이었다.

    “칫, 도망쳤잖아…….”

    적몽이 그걸 보고 눈살을 찌푸렸고, 묘법선존도 몸을 허상화해 진눈깨비로 변해 사라졌다.

    “달아나는 능력은 제법이네! 이거 재미있겠어!”

    입꼬리를 끌어올린 적몽은 걱정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가볍게 허공을 디딘 그녀의 발아래로 불 구름이 나타나 쾌속으로 이동했다.

    한립은 그저 달아나는 데만 온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그의 속도는 상상을 초월해서 뇌광진법을 쓴 것에 못지않았고, 이 방법을 연속해서 펼치면 틈틈이 허점이 생기는 뇌광진법보다 안전했다.

    휘잉.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전방 허공에 바람이 일고 온도가 급하강해 눈보라가 몰아치기 시작했다.

    한립이 변한 머리 셋 달린 거대 새는 눈보라에 휘말린 듯 앞으로 나아가는 속도가 눈에 띄게 줄었다.

    적의 영역이 이렇게 광범위하게 적용될 줄 몰랐던 한립은 당황스러웠다. 게다가 빙벽이며 눈보라의 위력이 조물경 경지의 영역이었다.

    대라 중기 수사와 초기 수사의 격차가 얼마나 큰지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하지만 오래 생각할 틈도 없이 한립은 진령의 힘과 선령력을 끌어올리며 날카롭게 울었다.

    진령 머리 세 개가 입을 벌려 푸른 돌풍, 은색 뇌전 그리고 붉은 화염을 동시에 분출해 섞자, 찬란한 다채색 빛기둥이 되어 전방으로 쏘아져 나갔다.

    눈보라가 막고 있던 곳에 다채색 빛기둥이 시원하게 뚫려 수만 리 길이의 통로가 만들어졌다.

    한립은 거대한 육신으로 그 통로를 미친 듯이 지나쳤다.

    뿌연 눈보라를 거의 관통해 시야가 탁 트이려는데 아래쪽 땅이 얼어붙는 게 보였다.

    “한립, 겨우 태을경 수사 주제에 재주가 많기도 하구나?”

    묘법선존의 목소리가 들리고 한립은 땅속에서 빙벽이 치솟아 앞길을 가로막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마음이 급해진 그가 빙벽이 완성되기 전에 신속히 빠져나가려는데 얼음이 형성되는 속도가 너무 빨라 앞길이 완전히 막히기 직전이었다.

    이때 한립의 뇌붕 머리가 두 눈을 번쩍이고는 날카로운 두 발톱에 축적해 두었던 은색 뇌전 구슬 2개를 빙벽 하부에 떨구었다.

    일촉즉발 순간에 천뢰가 떨어진 것 같은 굉음이 터졌다.

    쿠콰쾅!

    아직 완성되지 않았던 빙벽에서 얼음 조각들이 튀어 오르며 커다란 구멍이 뚫려 그가 빠져나가게 해주었다.

    날개를 활짝 편친 머리 셋 달린 거대 새는 다시 전속력으로 하늘을 갈랐다.

    “어떻게…….”

    놀란 묘법선존의 얼굴에도 노기가 어렸다.

    그러나 그녀를 더 놀라게 한 것은 뒤따라온다고 생각했던 적몽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빙벽을 돌파한 한립은 더욱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진언보륜을 역전하며 선령력과 진령의 힘을 끌어올리고 법칙의 힘까지 격렬하게 소비해 최고 속력을 냈다.

    그렇게 하자 드디어 묘법선존과의 거리가 아주 조금씩 멀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기뻐하기 전에 전방 허공에 이변이 발생하고 말았다.

    쾌청하던 하늘에서 눈을 찌를 듯한 광선이 떨어지며 새빨간 치마를 입은 여인이 나타난 것이다.

    한립의 진령 머리 셋은 그 눈을 찌르는 빛 때문에 잠시 실눈을 떠야 했다.

    고공에서 거대한 종을 치는 것처럼 크게 불경소리가 울리고 반투명한 덮개가 떨어져 한립의 거대한 몸을 가둔 채 지면으로 떨어졌다.

    날개를 펄럭여 어디로든 빠져나가려 했지만 반투명한 장막은 뚫리지 않았다.

    웅-

    반투명 장막에서 주술문자들이 조밀하게 떠올라 반대로 그의 몸과 정신을 강타해 힘없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온 그의 변화에 따라 반투명한 장막도 작은 방만하게 몸집을 줄였다.

    주위를 둘러본 한립은 커다란 사발을 뒤집어 놓은 것 같은 장막에 갇힌 것을 알아차렸다.

    그 천장에 붉은 수정 화룡 9마리가 똬리를 틀고 불 구름 사이를 노닐고 있는데 빼곡하게 새겨진 주술문자들이 셀 수도 없이 많았다.

    진하게 느껴지는 불 속성 법칙의 힘으로 보아 5품 이상의 선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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