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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2094화 (1,851/2,000)

2094화. 피할 수 없는 고난

*

침음하던 한립은 지난 과정을 곱씹다 아무래도 시간정사에 문제가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모든 게 잘 풀리고 있었는데 이백여 개의 시간정사들이 갑자기 뒤엉켜 체내의 선령력 흐름에 문제가 생기면서 대라경에 이르는 데 실패한 것이다.

“설마 법칙정사가 부족한 건가?”

시간정사에 문제가 있다면 수가 적다는 것 외에 다른 이유를 생각할 수가 없었다.

이게 유일한 문제라면 해결하기 어렵지 않았다.

시간법칙의 힘을 지닌 보물들을 찾아 <대오행환세결>로 실을 뽑아내면 그만이었다.

그저 시간법칙의 힘을 지닌 보물은 찾기 어려웠고, 이백여 가닥으로도 부족하면 얼마나 더 필요한지 알 수 없었다.

“그렇지, 세월신등! 대량의 시간법칙을 함유하고 있으니 일부만 뽑아 써도 될 것이야.”

머리를 쥐어짜던 한립은 부서진 세월신등을 꺼내 들었다.

심지의 불길은 여전히 꺼져 있었다.

오는 길에 여러 번 다시 불을 붙이려고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한립은 <대오행환세결>을 운용해 진언보륜 등을 띄워놓고 시간법칙의 힘 다섯 줄기를 모아 굵직한 금색 고리를 만들어냈다.

쿠쿵.

굵직한 금빛 고리가 수축해 빙글빙글 돌며 강력한 흡입력을 발생시켰다.

세월신등을 흡입력으로 감싸 시간법칙을 빼내기만 하면 되었다.

그런데 <대오행환세결>이 이번에는 통하지 않는지 금색 고리가 계속 법칙의 힘을 흡수하려 하는데도 세월신등이 내주지 않았다.

‘세월신등의 품계가 너무 높아서?’

잠시 고민하던 한립은 술법을 거두고 이런 추측을 했다.

진언문 유적에서 가지고 나온 금색 원반도 이랬었기에 그리 놀랍지 않았다.

세월신등은 그래도 간신히 조종할 수 있지만 금색 원반은 움직이게도 할 수 없다는 점에서 후자가 더 품계가 높은 것 같았다.

세월신등을 만지작거리다 넣어둔 그는 윤회전 가면을 꺼내 높은 금액을 걸고 시간법칙 보물을 거래한다는 임무를 등록했다.

눈을 감고 잠시 안정을 취한 한립은 다시 <대오행환세결>을 운용해 다른 이상은 없는지 찾으며 밝은 금빛에 휩싸였다.

그렇게 반년이 빠르게 지나갔다.

밀실 안,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한립 주변에 시간법칙 보물들이 줄줄이 떠서 파동을 내뿜고 있었다.

이때, 눈을 번쩍 뜬 그의 얼굴에 긴장감이 어렸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시간법칙 보물들을 번득 체내로 돌려놓고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다음 순간, 한립은 밀실 바깥 남안 뒤에 서 있었다.

놀란 남안의 목을 틀어쥐고 금색 주술문자들이 뱀처럼 그녀의 몸을 감싸게 하자 순식간에 몸이 굳은 여인은 움직이지 못하게 되었다.

“실례를 좀 하겠습니다.”

한립이 입을 열었을 때 바깥에서 격렬한 폭음이 울려 퍼졌다.

동부가 있는 산 전체가 충격을 받아 절반 정도가 떨어져 나가고 동부 안으로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다.

남안의 목을 틀어쥔 채 고공을 올려다본 한립은 연꽃의 형태를 한 거대한 수정왕좌에 녹색 치마를 입은 여인이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그를 추적하던 묘법선존이었다.

한 손으로 왼뺨을 괴고 그를 내려다보는 그녀의 얼굴에는 짜증이 가득했다.

대라 중기의 기운을 감지한 한립은 동공을 수축했다.

나른하게 앉아만 있는데 기마자보다 더 강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그녀 뒤로 푸른 치마를 입은 청수한 외모의 쌍둥이 시녀들이 우산과 깃털 부채를 들고 시중을 들고 있었는데 그들만 해도 태을경 초기 수사들이었다.

“하하, 사섬을 쓰러트렸다기에 얼마나 대단한 녀석인가 했더니 연약한 여인을 방패막이로 삼는 비열한 놈이었구나? 정말 실망이야…….”

묘법선존이 비웃음을 흘렸다.

“그리 말씀하시는 것은 아니라 생각합니다. 남 수사는 결코 연약한 여인이 아니거든요. 제가 어떻게 협박을 하든 굴복하지 않기에 어쩔 수 없이 금제를 걸어 놓은 것이고, 지금은 어쩔 수 없어 이런 상황이 된 것입니다.”

한립은 태연하게 답했다.

그 말을 들은 남안은 그가 자신이 배신자 낙인이 찍히지 않게 배려해 주는 것을 알고 미안함을 느꼈다.

“적에게 잡혀 놓고도 뻔뻔스럽게 살아있는 것이냐?”

천천히 몸을 일으킨 묘법선존이 무표정하게 남안을 훑었다.

남안의 하얀 뺨에 서리가 맺히고 옅은 남색 얼음층이 생기기 시작했다.

손끝에서 살짝 은빛 화염을 불러내 남색 얼음이 퍼지는 것을 막은 한립은 곧장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백 장을 벗어나기 전에 머리 위가 어둑해지며 보석으로 뒤덮인 우산이 어느새 그를 덮으려 하고 있었다.

발끝으로 허공을 박찬 한립은 펑, 소리를 내면서 빠르게 피했으나 우산을 들고 있던 시녀가 우산 위쪽에서 표표히 춤을 추며 보물을 조종하고 있었다.

보석이 박힌 우산의 교묘한 이동에 우산이 한립에게 떨어졌을 때, 또 다른 부채를 들고 있던 청의 시녀가 남안 옆에 나타나 남색 얼음을 녹여주고 그녀를 낚아채 묘법선존 쪽으로 던졌다.

“묘법선존을 뵙습니다.”

남안은 몸을 가누자마자 허리를 숙였다.

“남원자는? 죽은 것이냐?”

묘법선존은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고 대충 물었다.

“오라버니는…….”

남원자를 떠올린 남안은 코끝이 찡해졌다.

“됐다. 네 사부가 아니었으면 진작 네 목숨을 취했을 것이다. 그래도 기개가 있어 적에게 붙들리고도 구원관의 이름에 먹칠을 하지 않았으니……. 저리 가서 서 있거라.”

묘법선존이 그걸 보고 낮게 질책했다.

즉시 몸을 일으킨 남안은 수정왕좌 뒤로 가서 고개를 조아리고 섰다.

한립을 살피는 그녀의 눈에 희미하게 걱정하는 기색이 숨겨져 있었다.

한편 부채를 든 시녀는 남안을 던져 버리고 공작 깃털로 된 부채를 맹렬히 펄럭여 푸른 돌풍으로 한립을 휩쓸었다.

우산을 피하느라 쉼 없이 발을 놀리던 한립은 갑자기 날아든 돌풍을 피하지 않고 달려들었다.

체내의 진언보륜을 역전한 그는 바람의 기세를 빌려 속히 이곳을 떠날 생각이었다.

그가 알아차리지 못하게 지척까지 접근한 적은 결코 지금의 그가 대적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목숨을 걸고 싸우느니 조금이라도 빨리 벗어나는 것이 상책이었다.

‘뭔가 이상한데.’

그런데 푸른 돌풍에 가까워졌을 때 무언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몸이 붕 뜬 한립은 마치 몸에 힘이 풀린 것처럼 돌풍을 지나치지 못하고 바람에 들려 상공으로 치솟고 있었다.

동시에 위쪽의 우산이 강력한 힘으로 그를 빨아들였다.

그의 몸이 가까워지자 우산에서 주술문자들이 엮인 사슬이 나와 그를 우산대에 묶고, 우산이 접히면서 한립이 종적을 감추었다.

그 안에서 선령력이 봉쇄되고 뼈가 사라진 것처럼 온몸의 힘이 풀린 한립은 전혀 힘을 쓰지 못했다.

손짓으로 우산을 절반 크기로 줄인 첫 번째 시녀는 부채를 든 시녀와 묘법선존 쪽으로 향했다.

“저렇게 간단히…….”

그걸 본 남안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렸다.

“겨우 태을경 좀도둑에 불과하다. 저런 놈에게 사로잡힌 너의 오누이나, 패한 사섬이 부족한 것이지.”

묘법선존이 그걸 듣고 비웃었다.

남안은 무슨 말을 하고 싶었지만 결국에는 입을 다물었다.

그때 품에 우산을 들고 있던 시녀가 인상을 찡그렸다.

우산의 파동이 들쑥날쑥한 게 그 안에서 한립이 반항을 하는 듯했다.

“선존의 진원나천산(鎭元羅天傘) 안에서는 대라 선인도 탈출하지 못하는데 네까짓 것이 빠져나오려 하느냐?”

그녀는 조소를 참지 못했다.

그런데 갑자기 비명을 지른 시녀가 우산을 놓아 버렸고 푸른 연기가 피어오른 진원나천산에 손가락만 한 작은 구멍이 뚫려 칠색 화염이 줄줄 새어 나왔다.

화륵!

구멍 안에서 튀어나온 은염 소인이 두 팔을 펼치며 날아올라 거대한 불새로 변하더니 불똥을 비처럼 쏟아냈다.

두 번째 시녀가 깃털 부채를 펄럭여 불똥들을 날려 보내는 동안 한립도 우산에서 빠져나와 달아나기 시작했고 은염 불새가 은빛으로 변해 그 뒤를 따랐다.

“칠염화단사를 삼킨 정염불새라……. 예상 밖의 한 수이기는 하나 그걸로 내 손에서 달아날 수 있을까?”

그가 달아나는 것을 보면서도 묘법선존은 조급해하지 않고 고운 손을 합장해 수정빛을 반짝였다.

“뭉쳐라.”

달싹인 입술 사이로 실처럼 하얀 기운이 흘러나와 삽시간에 수만 리를 퍼져나가면서 허공의 모든 것을 얼렸다.

벌써 만 리를 달아나 있던 한립은 변화를 감지하고 서둘러 정염불새를 불러들인 다음 속도를 배로 높으나 느닷없이 솟아오른 얼음 장벽에 더는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

천살진옥공을 전력으로 운용한 그는 전신의 현규에서 별빛을 반짝이며 빙벽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쿵!

주먹 끝에서 하얀빛이 태양처럼 터져 얼음 속성 법칙의 힘을 함유한 빙벽을 강타했다.

빙벽은 격렬히 떨려 그의 주먹이 닿은 곳부터 균열이 퍼졌지만 무너지지는 않았다.

마음이 급해진 한립은 다음 주먹을 날리려다 안색이 달라졌다.

마른하늘에 갑자기 함박눈이 내리기 시작하더니 번득 묘법선존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발끝으로 빙벽을 디디고 선 그녀는 갈라진 부분을 하얀빛으로 빠르게 복구했다.

“넌 내 영역 안에서 절대 달아날 수 없다.”

묘법선존은 냉랭히 한립을 내려다보았다.

한립은 그녀가 뭐라든 진언보륜을 극히 빠르게 역전해 뒤로 물러서는 동시에 양손으로 수결을 맺어 뇌진을 만들려고 했다.

그러나 그가 뇌전빛을 뿜기 전에 머리 위에서 육각형 모양의 거대 눈송이가 내려와 녹색 빛을 반짝였다.

눈송이의 각 면에서 퍼진 녹색 빛이 여섯 개의 빙벽이 되어 한립을 중앙에 두고 가두고 있었다.

끔찍한 추위에 뇌전빛이 나오려다 사그라지고 주위 공간이 얼어붙어 한립과 천지원기가 단절되었다.

수정벽은 반짝이며 은빛 거울처럼 작용해 한립의 모습을 비추었는데 여섯 개의 투영이 각기 다른 표정으로 냉랭히 그를 주시하거나, 웃거나, 팔짱을 끼고 서 있는 등 각양각색의 행동을 보였다.

그걸 본 한립은 급히 구유마동 신통을 펼쳐 주위의 투영들이 환영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마음을 다잡았다.

체내의 천살진옥공을 일으킨 그가 거울 중 하나를 향해 주먹을 날리는데 주위의 여섯 개의 투영들이 똑같이 주먹을 날려 그와 대적하려 했다.

“겨우 환영들 따위가 날 막겠다?”

소리를 친 한립은 주먹에 힘을 풀지 않고 정면을 향해 뻗었다.

쿠쿵.

굉음과 함께 한립도 몸을 떨었다.

그의 주먹이 거울 표면에 닿은 순간, 거울 속 투영들의 여섯 주먹도 그의 몸 곳곳을 때린 것이다.

뼈가 부러진 것 같은 고통이 느껴지고 주위의 얼음 거울에서 뿜어져 나오는 한기에 선령력의 흐름도 느려지고 있었다.

한립은 천살진옥공과 진령혈맥을 동시에 운용해 체형을 배로 키우며 삼두육비 마신으로 변했다.

“비키거라!”

세 개의 마신의 머리가 동시에 소리쳤다.

휘릭! 팽이처럼 몸을 돌린 그는 여섯 개의 주먹으로 얼음 거울들을 공격했다.

퍼퍼퍼퍼퍼펑…….

이제야 여섯 개의 거울들도 실금이 가고 있었다.

한립이 기뻐하며 계속해서 공격을 이어나가려는데, 돌연 위쪽에서 남색 빛이 흘러내려 거울 표면을 복구시켰다.

그리고 거울에 여섯 마리의 마신 형상이 투영되어 그를 향해 똑같이 수많은 주먹을 휘둘렀다.

그야말로 주먹이 빗물처럼 쏟아졌다.

괴력에 연타를 당한 한립은 뼈가 산산조각이 나는 느낌이었고, 머리까지 맞아 멍해졌다.

미친 듯한 주먹질이 끝나고 거울 속 투영들도 주먹을 거두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온 한립은 바닥에 쓰러져 꼼짝하지 못했다.

흠씬 두들겨 맞은 그는 함부로 다시 공격하지 못했고 구유마동으로 거울들을 살폈지만 아무 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헛고생 말거라. 네 알량한 수행으로 내 빙봉환경(氷封幻境)을 부술 수는 없으니까. 얌전히 나와 구원관에서 벌을 받거라.”

묘법선존은 한립이 무얼 하는지 지켜보다 의미 없는 저항이 웃기기라도 한 듯 웃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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