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3화. 허를 찌르다
*
같은 시각, 금연성 모처의 비밀 장원에 녹발 소녀가 서서 작은 화단을 감상하고 있었다.
바로 묘법선존이었다.
그때 걸음 소리가 들리고 녹의 시녀가 들어왔다.
“성사 대인, 소식이 왔습니다.”
“이번에는 진짜 한립에 대한 소식이겠지?”
묘법선존은 분홍 꽃의 향기를 맡으며 물었다.
“천정에 은밀히 심어둔 자가 전해온 소식이고, 교전하는 장면까지 보냈다니 사실일 것입니다만 그자가 대인께 청이 있답니다.”
“그래? 들게 하라.”
그제야 손에 쥔 꽃을 꺾어 버린 묘법선존이 몸을 돌렸다.
빠른 걸음으로 나간 녹의 시녀가 흑포 사내를 데려오는데 바로 아까 한립에게 당했던 둥근 얼굴 중년인이었다.
원기를 크게 상한 듯 혈색은 좋지 않은데 눈빛이 격동하고 있었다.
“묘법선존을 뵙습니다.”
“한립의 소식을 알고 있다고?”
“예.”
묘범선존의 눈길에 마음을 가다듬은 그는 한립이 이상하다는 것을 금탑 안에서 발견했을 때부터 선잔까지 따라가 추적을 했던 일을 소상히 고했다.
“저와 교전했던 장면입니다.”
사내는 검은 구슬을 꺼내 그와 한립이 싸우던 모습을 보였다.
“진언보륜! 뇌전법칙! 그래, 얼굴을 다르지만 한립이 분명하다.”
묘법선존도 그걸 보고는 눈을 빛냈다.
한립의 신분을 명확히 밝히기 위해 무거운 대가를 치른 중년인은 마음속 깊이 기뻐했다.
“이 자는 어디 있느냐?”
“열혼술(裂魂術)을 사용해 분신을 이곳에 남겨 두고 금연성에서는 진짜 본체가 그와 겨루다 죽게 했습니다. 상대는 제가 죽은 줄 알고 극단적인 방법을 써서 멀리 달아나지도 않았을 테지요. 아직 반 각이 지나지 않았으니 대인의 능력으로 쫓으시면 잡으실 수 있을 겁니다.”
둥근 얼굴 중년인은 금연성 인근 지도를 꺼내 한립과 교전한 위치를 짚었다.
“잘했다. 정말 주도면밀하게 움직였어. 녹예, 데리고 나가 상을 내리거라.”
흡족한 기색을 보인 묘법선존이 시녀에게 말했다.
둥근 얼굴 중년인은 기쁜 마음에 선존에게 인사를 하고 녹의 시녀를 따라나섰다.
묘법선존 옆에 푸른 그림자 두 개가 나타나 열여섯쯤 되어 보이는 청수한 시녀들로 변했다.
똑같은 초록 치마를 입고 똑같이 생긴 쌍둥이 자매였다.
“성사 대인, 이미 한립의 위치도 파악했겠다. 정보가 새기 전에 저자를…….”
그중 한 명이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아니다. 재물 욕심에 눈이 먼 저런 자를 뭐 하러. 그냥 며칠 가둬두었다 풀어주면 소식이 새나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게다. 다들 내가 약속을 지키지 않고 심지어 살인멸구를 하는 인물이라 생각하면 누가 우리 구원관을 위해 일하겠더냐.”
“역시 대인께서 생각이 깊으십니다.”
“그런 자는 되었고 지금 중요한 것은 한립이야. 지금은 한립을 잡는 것이 최우선이다.”
손을 저은 묘법선존은 시녀들을 남색빛으로 휘감아 날아올랐다.
* * *
묘법선존이 있는 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주루 안.
홍발 여인이 고즈넉한 방 안에 앉아 있었는데, 바로 적몽이었다.
앞에 놓인 열댓 개의 술병은 거의 다 텅텅 비어 있었다.
“묘법 그 말라깽이가 한립을 잡았나 보네.”
창가에 기댄 적몽은 술잔을 기울이며 묘법선존이 변한 남색 둔광이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적몽 대인의 예상대로입니다. 양발이 구원관 첩자인 것을 어찌 알고 역이용하신 것입니까?”
방 안에 서 있는 또 다른 사람은 금탑 책임자 매부리코 사내였다.
“나도 몰랐다. 허나 이곳은 구원관의 앞마당인 금원선역이니 분명 그들이 손을 쓸 거라 짐작한 것이지. 이제 묘법만 잘 지켜보면 나를 대신해 한립이란 자를 찾아줄 것 아니냐.”
술잔을 비운 적몽이 담담히 말했다.
“현명하십니다. 허나 그러다 묘법성사가 먼저 한립을 잡아버리면 일이 틀어지지 않겠습니까?”
“걱정 말거라. 이리 오래 천정의 추격을 피했고 기마자의 육신을 없앤 자가 어찌 그리 간단히 잡히겠느냐.”
“예.”
매부리코 사내는 이렇게 답하긴 했어도 여전히 걱정이 되었다.
“묘법이 꽤 멀리까지 갔으니 우리도 따라붙자꾸나.”
적몽은 손을 저어 붉은빛으로 사내를 감싸고 묘법선존을 쫓았다.
* * *
콰릉!
금원선역의 어느 푸른 산맥 위에 금색 뇌전 진법이 나타나 한립과 남안을 불러왔다.
금연성을 떠난 그들은 흑룡비주를 타고 한동안 달리다 비행 법기를 거두고 만규공적술로 선령력과 기운을 감춘 채 현선의 방법으로 한참을 달아났다.
금원선역의 공간압력은 적린공경 안보다 훨씬 약해서 둔술 못지않은 속도로 움직일 수 있었다.
그런 후에야 뇌광진법을 연달아 열댓 번이나 사용해 여기까지 도착한 것이다.
한립은 금연성 방향을 돌아보며 생각에 잠겼다.
천정이 그에 대한 추적에 박차를 가하고 있어 과역전송진을 이용해 대금원선역으로 가는 것은 어려울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이 교삼의 충고대로 폐관 수련을 하면서 세월을 좀 보내는 게 나을 듯싶었다.
태을경 최고봉의 그는 대라경에 도전할 준비도 마쳐서 이제 시도를 해볼 때였다.
실력을 키워야 구원관에 있는 금동을 구할 가능성도 커질 것이다.
그간 금원선역 지도를 자세히 관찰한 결과, 이곳은 금원산맥 서북쪽의 청사산맥(靑紗山脈)일 터였다.
외지고 산맥 안에 특수한 재료나 요수가 사는 것도 아니라서 오가는 사람이 드물었다.
한립은 산봉우리에서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내려가 손을 놀렸다.
검기들이 날아가 즉시 동굴을 뚫고 간단히 다듬어 그럴듯한 동부가 완성되었다.
동부 곳곳과 주변 수십 리까지 법칙의 힘을 함유한 금제를 겹겹이 펼쳐두었으니 대라경 존재가 침입하려 해도 잠시 시간을 끌 수 있을 것이었다.
“남 수사, 저는 여기서 폐관 수련을 할 생각입니다. 수사도 그동안 이곳에서 요양하시지요.”
“알겠어요.”
한립의 말에 남안은 잠시 멈칫하다 답했다.
고개를 끄덕인 한립은 홀로 밀실로 들어갔고, 남안은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다 다른 방으로 향했다.
밀실에도 붉은 금제를 펼쳐 봉인한 한립은 소매 속에서 정염동자를 불러냈다.
아직 은색이 대부분이기는 한데 군데군데가 하얗게 변한 정염동자는 이전보다 화염법칙 파동이 강해져 있었다.
지난 몇 년간 하얀 불 구슬을 제련한 덕이었다.
그걸 보고 기뻐하던 한립은 미소를 거두고 명을 내렸다.
“앞으로 여기서 폐관수련을 하다 갈 생각이다. 바깥의 남안을 신경 쓸 수 없을 테니 네가 잘 지켜보다가 이상한 짓을 하면 바로 없애거라.”
고개를 끄덕인 정염동자는 옹알옹알 뜻 모를 말을 하곤 은빛으로 변해 붉은 금제 속으로 스며들었다.
남안이 딴마음을 품을 거라 여기지는 않았지만 대라의 경지에 관련된 일이라 방심할 수 없었다.
제혼이 오소귀왕의 힘을 흡수하느라 화지공간에서 폐관수련 중이 아니었다면 그녀를 불러다 지키게 했을 텐데 아쉬웠다.
그래도 정염동자에게 감시를 시켜놓고 마음이 한결 편해진 그는 자리를 잡고 눈을 감았다.
시간이 흘러 반나절 후 눈을 떴을 때는 몸 상태가 최상이었다.
한립은 손을 저어 손가락만 한 은색 향이 꽂힌 향로를 불러냈다.
향에 불을 붙이자 마치 새벽 산골짜기에 깔린 하얀 안개처럼 연기가 퍼져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었다.
의식을 가다듬는 데 도움이 되는 응혼향(凝魂香)이었다.
한립은 또 세 개의 옥병을 옆에 꺼내두었다.
그중 하나는 해 도인이 주었던 하얀 단약, 현진단이 들어있었고, 나머지 두 개의 병에는 각각 금색 액체와 세 알의 푸른 단약이 들어있었다.
현진단이 가장 중요했지만 하나같이 대라경에 이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보물들이었다.
일단 금색 액체가 담긴 병을 들어 입안으로 몇 방울을 떨구었다.
후웅!
눈부신 금빛을 머금은 몸에서 시간법칙이 물처럼 흘러나와 진언보륜, 단시횃불, 광음정병, 동을신목, 환진사루를 모조리 불러냈다.
눈을 반짝인 한립이 푸른 단약이 든 병에서 단약을 하나 꺼내 복용하고 <대오행환세결>을 운용하기 시작했다.
현진단은 마지막을 위해 아껴둘 작정이었다.
눈을 감은 그의 몸에서 더 강한 금빛이 새어 나와 주위를 감싸고 밀실이 웅웅, 진동했다.
다른 방에 있던 남안이 눈을 뜨고 한립이 앉은 밀실을 향해 놀란 눈빛을 보내다 다시 눈을 감았다.
이때 금원산맥 모처의 습지 위.
남색 안개가 주변을 배회하다 묘법선존과 청의 시녀 두 명으로 변했다.
“성사대인, 한립이 여기까지 온 것은 확실한데 갑자기 영력 흔적이 끊겼습니다.”
푸른 수정판을 들고 주위를 살피던 청의 시녀 중 하나가 말했다.
“기운을 숨기고 다른 방법을 써서 이동했구나.”
묘법선존이 눈썹을 끌어올렸다.
“경수분(鏡水盆)으로는 더는 추적할 수 없을 듯합니다. 성사대인께서 직접 나서주셔야겠습니다.”
“너희는 일단 물러서거라.”
시녀들을 물린 묘법선존이 입에서 남색 빛 한 덩어리를 불러내고 양손으로 수결을 맺었다.
출렁이던 빛덩이에서 남색 수정실들이 떠올라 맷돌 크기의 눈으로 변해 주변을 살폈다.
남색 눈이 쳐다보는 곳마다 빛의 파랑이 일렁여서 무척 신비로워 보였다.
“이럴 리가? 동급의 대라 중기 존재가 은신술을 펼쳤다고 해도 내 수황신목(水皇神目)으로 못 찾아낼 리 없건만. 대체 어떤 고명한 은신술을 쓴 것이야!”
혼자 중얼거린 묘법선존은 남색 눈의 취력을 끌어올려 인근을 더 샅샅이 조사했다.
이건 그녀가 한립을 오해한 것이었다.
선령력을 이용해 은신술을 펼쳤다면 결코 묘법선존의 비술을 피할 수 없었겠지만, 남안은 화지공간에 들어가고 그는 만규공적술을 펼쳐 모든 기운을 몸속에 감추고 전혀 쓰지 않았으니 영력 흔적을 남겼을 리 없었다.
한립의 허를 찌르는 수법에 묘법선존의 비술도 한동안 성과를 내지 못했다.
시간이 지나 한 식경이 지나서야 묘법선존은 수황신목 신통으로 한립 체내의 선기들, 예를 들어 청죽봉운검 등이 남긴 희미한 영력 흔적을 찾아내 방향을 잡았다.
적몽이 아주 멀리서 매부리코 사내와 그들의 뒤를 쫓으며 ‘왜 저렇게 느린 거야’라고 불만스러워했지만, 어차피 그녀는 추적에 능하지 않아 묘법에게 의존하는 수밖에 없었다.
* * *
푸른 산맥의 동부 안, 한립은 여전히 대라경에 이르기 위해 폐관 수련 중이었고 시간은 화살처럼 빨리 지나가 어느덧 3년이 흘러있었다.
그가 앉은 밀실 안은 금빛이 점점 더 진해져서 시간법칙 파동을 품은 금빛이 바깥으로까지 새어나갔다.
시간법칙의 힘에 방해를 받아 진작 수련을 그만둔 남안은 조용히 그가 출관하기만을 기다렸다.
그가 어째서 이 시점에 폐관 수련에 들어갔는지 예측이 가는 바가 있어 마음이 심란했다.
한립이 성공적으로 대라경에 이르면 실력이 크게 늘 테고 무슨 목적으로 움직이는지는 몰라도 구원관에 불리할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그의 실력이 늘어 생명에 지장이 없어지면 그녀도 훨씬 안전해지는 것이었다.
또 대라경에 이르러 한립에게 그녀가 쓸모없어지면 그의 성격에 더 빨리 놓아줄지도 모른다.
반대로 실패하면 언제 그의 손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삶을 되찾을지 알 수 없었다.
남안은 한립이 대라경에 이르면 좋을지 아니면 실패하면 좋을지 도무지 마음을 정할 수 없었다.
그녀가 이런 고민을 할 때 쿵 하는 소리가 한립의 밀실에서 들려왔다.
거대한 법칙 파동이 노한 파도처럼 퍼져나가 동부 곳곳에 펼쳐둔 금제 중 절반 이상이 펑펑 터져나갔다.
밀실의 금빛이 사라진 것을 본 남안은 한립이 실패한 것을 알고 안타깝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보아하니, 마음 깊은 곳에서는 그가 성공하기를 바라고 있었구나…….”
그때 밀실 안의 한립은 표정이 어두웠다.
남안의 예상대로 그는 대라경 돌파에 실패했다.
몸에 무리가 간 것도 아니고 겨우 한 번 실패한 게 큰일도 아니라지만 실패의 원인을 모른다는 게 그를 답답하게 했다.
그는 체내에 이백여 개의 시간법칙 정사를 지니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대라경 수사라 해도 법칙정사의 수가 그 정도밖에 안 되었으니 법칙의 힘이 부족한 것은 아니었다.
선규를 359개나 뚫고 몸은 단단하기 그지없으며, 연신술을 수련해 의식도 어느 태을경 최고봉 수사보다 강했다.
심지어 <대오행환세결>도 무르익었는데 실패한다는 게 이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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