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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2091화 (1,848/2,000)

2091화. 풍운(風雲)

*

한립과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모를 중토선역, 천정.

천정 모처의 하얀 안개가 수천수만 마리의 용과 말을 이룬 운해 위에 거대한 궁전이 보였다.

그 주위를 지키고 선 병사들의 하얀 갑옷에는 하얀 구름 문양이 가득 들어가 있었고 그들은 태을경 수사에 맞먹는 기운을 내뿜으며 법칙 파동을 머금은 선기를 들고 있었다.

수백 장 높이의 궁전 문에는 ‘백운도궁(白雲道宮)’이라 적힌 금색 편액이 붙어 현묘한 느낌을 주었다.

도궁의 대전 안에서 기마자가 금색 불꽃 모양의 허상으로 서 있었다.

“세월신등 안에 문태세가 남겨 놓은 잔혼을 발동해 석공묵과 동귀어진하게 하고, 세월탑은 이미 붕괴하였습니다. 제 명을 받은 통천검파가 태세선부 전체를 폭발시켜 나머지 사람들도 빠져나오지 못했을 테고요. 그저 한립, 류자재 같은 존재들은 실력이 범상치 않고 석공묵도 대라경 최고봉 존재라 특수한 방법을 써서 살아남았을지도 모릅니다. 대인께서 어서 금원석역으로 사람을 보내 그들의 생사를 확인하고 앞으로 어떻게 그들을 처리할지 논의해야 할 줄로 압니다.”

기마자는 아주 공손하게 상석에 앉은 하얀 인영을 향해 보고했다.

“통천검파에서 보고를 받았다. 그들도 알지 못하는 부분이 있던데 그렇게 된 것이었군. 넌 우연히 태세선부로 들어간 것이라고?”

아득한 목소리에는 희노애락이 느껴지지 않았다.

“예. 장천병은 지존대인께서 회수하라 명하신 물건이라 그것을 찾기 위해 한립을 추격하던 중 태세선부가 세상에 나와 이 일에 말려들게 되었습니다. 태세선부가 어째서 소금원선역에 나타난 것인지 그 안에 얼마나 많은 죄수가 갇혀 있었는지 등은 저도 알지 못합니다. 당시 문태세는…….”

“문태세의 일은 더 물을 것이 없다.”

하얀 인영이 기마자의 말을 끊었다.

“예, 제가 실언을 하였습니다.”

“한립은 겨우 태을 후기의 수행을 지녔는데 어째서 장천병을 뺏어오지 못한 거지?”

“한립이 태을경이기는 하나 <대오행환세결>을 익혀 제 <단시류화집> 공법을 누를 수 있고, 오행환세(五行幻世) 신통까지 깨우쳤습니다. 게다가 태세선부 안에 윤회전, 만황계역 등 다른 세력들이 모여들어 장천병을 회수하지 못하고 육신까지 잃고 말았습니다. 제가 무능한 탓이니 벌을 내려주십시오!”

“그리 강하다고? 네가 다른 목적이 있어 딴짓을 하다 기회를 놓친 것은 아니고? 줄곧 <대오행환세결>을 찾던 걸 알고 있다.”

느릿한 하얀 인영의 말에 대전 안 분위기가 서늘해졌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한립의 <대오행환세결>공법을 얻으려 했던 것은 사실이나 절대 제 사익을 위해 지존대인의 대업을 그르친 것은 아닙니다. 제가 실패한 것은 상대의 실력이 예상보다 강해서이니 용서해 주십시오!”

안색이 달라진 기마자가 털썩 꿇어앉아 겁에 질린 얼굴을 했다.

하얀 인영은 손끝으로 의자를 톡톡, 치며 말이 없었다.

그 위압감에 대전 안에 무형의 괴수가 도사리는 것 같아 기마자의 얼굴이 더 창백해졌다.

“석공묵 그 미치광이 때문에라도 네가 실패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장천병은 지존께서 원하시는 물건이고 천정은 보제성연(菩提聖宴)을 위해 힘을 비축하고 있으니 다른 인원을 배치할 수는 없다. 금원선역에는 구원관 세력도 있으니 말이다. 이 일은 네 선옥에서 해결해야 할 것이고, 두 번의 실패는 용서치 않을 것이다. 알겠느냐?”

침묵하던 하얀 인영이 아까보다 부드러운 말투로 명했다.

“예, 알아들었습니다! 바로 모든 감찰선사를 풀어 금원선역의 소식을 알아 오고, 이번에야말로 장천병을 찾아오겠습니다.”

기마자는 자신이 계속 한립을 쫓을 수 있게 된 것에 기뻐했다.

“대놓고 들쑤시고 다니지 말고 암암리에 찾는 것이 나을 것이야. 육신을 잃었으니 천화성련(天火聖蓮) 한 송이를 보내 새로운 육체를 만들 수 있게 도와주겠다.”

“대인의 은혜에 감사 올립니다!”

하얀 인영이 하는 소리에 기마자가 넙죽 예를 올렸다.

“가보거라.”

손을 젓는 하얀 인영을 향해 인사를 한 기마자가 뒤돌아 나가려는데, 바깥에서 붉은 구름이 날아들어 통보도 하지 않고 대전 안으로 들어섰다.

붉은 머리카락의 여인은 스무 살 정도로 그림으로 그린 것 같은 이목구비에 사람의 혼을 쏙 빼놓는 분위기를 지녔다. 게다가 딱 붙는 붉은 치마가 아주 잘 어울렸다.

홍발 여인은 아름다운 얼굴에 오만한 표정을 숨기지 않아 활짝 핀 장미처럼 매력적이지만 가까이 다가갈 수 없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오, 기마자 옥주? 이번에 처참하게 임무에 실패하고 몸까지 잃었다면서요? 천정에서 공인된 천재 대라경 수사께서 이런 일을 당하실 줄은 몰랐네요.”

홍발 여인은 기마자를 대놓고 훑어보더니 재미있다는 듯 웃음 지었다.

기마자는 화가 났지만 티는 내지는 않았다.

“백운 대인을 뵙습니다.”

그녀는 더는 그를 상대하지 않고 상석의 하얀 인영에게 예를 올렸다.

대충 고개만 숙이는 것이 기마자처럼 상대에게 주눅 든 모습이 아니었다.

“하하, 적몽이 왔구나. 녹림선역에 갔던 일은 순조로웠느냐?”

백운은 홍발 여인에게 한결 부드러운 태도를 보였다.

“순조로웠습니다. 대인의 분부대로 녹심선실 3천 개, 지모반도 6천 개, 홍라옥과 1만 개를 거두어 백진사(百珍司)에 가져다 두었습니다.”

“그래, 보제성연에 쓰일 물건들이니 차질이 있어서는 안 되지.”

“안심하십시오. 제가 일일이 점검을 한 결과 모두 품질이 좋았습니다.”

“적몽, 네 일 처리가 꼼꼼해 큰 걱정하지 않았다. 녹림선역에 다녀오느라 피곤할 테니 물러가 쉬거라.”

고개를 끄덕인 백운이 말했다.

“겨우 이런 일로 피곤은요. 조금 멀리서 들으니 장천명에 대해 이야기하시던데, 구원관에서 오래전에 잃어버린 보물이 아닙니까?”

적몽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그녀와 그다지 사이가 좋지 않던 기마자는 떠나려다 걸음을 멈추었다.

“그래, 지존이 꼭 찾아와야 한다고 엄명을 내리신 물건이지. 흥미가 있더냐?”

“지존대인께서 찾으시는 물건인데 당연히 흥미가 가지요. 게다가 오는 길에 조모께서도 그 일에 관해 물으시는 전신을 보내셨습니다.”

적몽은 씩 웃음 지었다.

“적융 수사께서? 출관하신 것이냐?”

그 말에 백운이 놀라 물었다.

기마자는 이름만 들어도 식겁했는지 몸을 떨었다.

“몇 해 전에 막 출관을 하셨는데 제게 백운 대인의 안부를 물으셨습니다.”

적몽은 그런 기마자를 가소롭다는 듯 힐끔 보고 백운에게 말했다.

“그간 지존대인의 명을 받아 천정의 여러 일을 도맡아 처리했지만 내 부족함이 많았지. 적융 수사께서 출관했다니 내일이라도 지존께 청해 이 자리를 적융 수사에게 주십사 해야겠구나. 나도 한동안 마음 편히 쉴 수 있게 말이야.”

백운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백운 대인. 대인께서 천정을 관장하시는 동안 각 선역간의 충돌이 줄고 얼마나 많은 선역이 번창하였는데요. 다른 어떤 도조께서 맡으셨어도 대인보다는 잘 해내지 못하셨을 겁니다. 조모께서도 천정의 수많은 도조 중에 백운 대인만큼 관리를 잘하는 분은 없다고 하셨는걸요.”

“하하, 적융 수사께서 과찬을 하셨구나.”

빙긋 웃는 적몽의 찬사에 백운도조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적융 수사께서 장천병에 흥미가 있다니. 기마자 너는 관련된 사안에 대해 적몽에게 자세히 일러주거라.”

백운도조는 별 것 아니라는 듯 기마자에게 명했다.

“예…….”

기마자는 어쩔 수 없이 한립에 대한 정보를 낱낱이 말해야 했다.

“와, 진짜 재미있는 인물이네요! 하계에서 비승한지 겨우 2, 3만 년 만에 그런 경지에 이르다니. 전대미문의 수련속도예요.”

적몽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적몽, 네가 장천병이 얼마나 대단한 보물인지 몰라 그런다. 그런 보물을 곁에 두고 있는 자이니 수행이 빨리 늘었다고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지.”

백운도조가 느긋이 말했다.

“그렇군요. 백운대인, 기마자 수사는 육체가 망가져서 단시간 내로 회복이 어렵고 임무에 한 번 실패했습니다. 한립을 잡는 일을 제게 맡겨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반드시 한립과 장천병을 가지고 돌아오겠습니다.”

“적몽 수사, 장천병에 관한 임무는 대인께서 이미 내게 맡기셨습니다. 지난번에는 방심해 이렇게 되었지만 이번에는 멸시금륜(滅時金輪)까지 가지고 갈 생각이에요. 제가 이번 일은 마무리 지을 수 있습니다.”

적몽의 청에 기마자가 마음이 급해져 끼어들었다.

“기마자 수사, 몸도 성치 않으면서 무슨 일을 마무리한다고 그러죠? 육신을 새로 만드는 게 쉬운 일도 아니고, 수사가 준비를 다 마칠 때에는 어디 가서 한립을 찾겠어요?”

적몽은 피식 실소했다.

“기마자, 적몽의 말이 일리가 있다. 몸도 성치 않은데 천정에서 잠시 요양하거라.”

기마자가 반박하기도 전에 백운도조가 결정을 내렸다

“네.”

원치 않는 일이었지만 백운도조가 보고 있으니 알겠다고 하는 수밖에 없었다.

“적몽, 네가 나서고 싶다고 하니 한립 일을 맡기마. 그러나 기마자가 이미 한 번 실패한 일을 네가 또 그르쳐서는 안 될 것이야.”

“마음 놓고 계세요. 제가 누구도 아니고요. 좋은 소식 기다려 주세요.”

적몽은 하하 웃으면서 그 ‘누구’를 스친 다음 붉은 구름으로 변해 날아갔다.

기마자도 급히 인사를 올리고 떠나 대전에는 백운도조만 남았다.

“적융 수사, 손이 안 닿는 곳이 없으십니다.”

자리에서 일어선 백운도조는 냉소를 흘리고 돌아섰다.

* * *

그 시각 천정의 또 다른 곳.

반투명한 분홍색 수정돌을 깎아 만든 궁전 안에 녹색 치마를 입은 묘법선존이 앉아 있었다.

어두운 얼굴로 그녀가 든 암홍색 옥패에 황토색 사섬 도안이 그려져 있었다.

문제는 옥패가 이미 갈라져 조각났다는 것이었다.

양쪽에 서서 시중을 들던 녹의 시녀들이 겁을 먹고 서 있었다.

“남원자와 남안의 본명패는 어떠하냐?”

“남원자의 본명패는 갈라졌지만 완전히 쪼개지지는 않았고 남안의 것은 이상이 없습니다. 하지만 연락이 닿지 않는 게 누군가에게 붙들린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묘법선존의 물음에 녹의 시녀 중 하나가 즉시 답했다.

눈을 가늘게 뜬 묘법선존은 잠시 말이 없었다.

“성사 대인, 관주께서 이 일을 들으시고 연락을 보내오셨습니다. 장천병을 회수하지 못한 것에 무척 노하셨다고요.”

같은 시녀가 망설이다가 조그맣게 말했다.

“알겠으니 물러가 보거라.”

얼굴을 찌푸린 묘법선존이 손을 저어 시녀들을 내보냈다.

“한립……. 널 얕본 것 같은데, 그렇다면 내 직접 가봐야겠다. 어디 얼마나 대단한 능력을 지녔는지 기대하마.”

자리에서 일어선 묘법선존이 사라졌다.

* * *

소금원선역 서북쪽 끝에는 비옥한 토양이 펼쳐져 있어 금원산맥 어느 곳보다 인구밀도가 높고 종문 세력도 많았다.

소금원선역 제1종문인 통천검파도 이곳에 있었다.

서북쪽으로 더 가면 끝없이 펼쳐진 바다가 있어 물의 기운이 짙었지만 항상 거센 바람이 불어 풍폭해(風暴海)라 불렸다.

풍폭해는 다양한 자원이 풍족해 많은 사람들이 보물을 찾아 몰려들었고 바다와 인접해 세워져 있는 거대 성인 금연성(金淵城)이 있었다.

광활한 영토와 번화한 시가지를 지닌 금연성은 소금원선역에서 제일로 꼽히는 성이기도 했다.

이렇게 사람이 북적거리는 데는 풍폭해 말고도 금연성 내에 대금원선역으로 통하는 과역전송진(跨域傳送陣)도 한몫했다.

금연성 바깥, 수십 리에 달하는 거대 광장에 수많은 사람이 바글바글 모여 시끄럽게 떠들고 시시때때로 둔광이 날아오르고 내려섰다.

멀리서 암녹색 선박이 날아들었는데, 그곳에는 십여 년 만에 금연성에 도착한 한립과 남안이 타고 있었다.

“소금원선역 제일의 성이라 할 만합니다. 장관이군요.”

한립은 끝이 보이지 않는 거대한 성을 보고 감탄했다.

“겨우 금연성이요? 대금원선역에 가서 구원성(九元城)을 보면 이게 진짜구나 싶을 거예요.”

남안이 작게 웃음 지었다.

“기대되는군요.”

담담히 답한 한립이 흑룡비주를 거두고 금연성으로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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