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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2090화 (1,847/2,000)

2090화. 윤회전 전주

*

입가에 피를 흘린 남안은 겁먹은 얼굴이었다.

교삼이 아예 끝을 보려는데 한립이 그 앞을 막아섰다.

“한 형, 저자는 구원관 제자예요. 여기서 죽여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죽을죄를 지은 건 아니라 생각합니다.”

“우리와 오랫동안 동행해서 어떤 정보를 알아냈는지 몰라요. 지금은 여인이라고 봐줄 때가 아니라고요.”

“……그녀와 오라비는 나와 한 약속을 지키는 신의를 보였고, 사섬이 협박을 하는데도 저를 공격하지 않았습니다. 우리에 관해 보고 들은 것을 사문에 전하지 않겠다, 맹세하면 목숨을 살려 보냅시다. 제가 직접 혼백 금제를 심어두지요.”

“성가시게 왜요? 그냥 죽이면 깔끔할 것을.”

교삼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교삼 수사, 저를 동료라 생각한다면 제 체면을 봐서 이번에는 그렇게 해주시지요.”

한립도 얼굴을 굳히고 부탁했다.

교삼이 그런 한립과 남안을 보다가 퍼뜩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알겠다는 얼굴을 했다.

“고맙습니다.”

한립은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충분히 짐작했지만 그냥 포권을 해보였다.

“남안 수사, 상황이 이러니 제가 의식에 금제를 심어두어야겠습니다. 약속을 어기고 우리의 일을 발설하지만 않으면 아무런 해도 없을 겁니다.”

다가오는 한립을 본 남안은 입술을 꾹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미간에서 수정 실 한 줄기를 뽑아내 그녀의 미간으로 서서히 밀어 넣었다.

한립이 금제를 심고 있을 때 교삼이 구덩이로 내려갔다.

불 구슬을 갖고 퍽 재미나게 놀고 있던 흑천마조는 허락도 받지 않고 누가 따라 내려온 것에 화가나 손을 저으려 했다.

“석 선배님, 중요하게 상의드릴 일이 있습니다.”

놀란 교삼이 급히 외쳤다.

“열쇠가 있느냐? 있으면 꺼내 보고.”

뜻 모를 소리를 하는 석공묵이 손을 거두었다.

“부인과 공자를 찾지 않으셨습니까? 제가 도움이 될까 하여 이렇게 왔습니다.”

안심한 교삼이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 말에 석공묵도 급히 물었다.

“어디 있지? 어디 있는지 아는 것이야? 부인이 어디 있단 말이냐!”

“당장 어디 계신지는 모르지만 선배님을 위해 찾아드릴 수는 있습니다.”

“문태세가 그런 말로 나를 속였었다. 또다시 내게 거짓말을 하면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석공묵은 냉랭한 눈빛으로 한 자 한 자 힘주어 말했다.

“제가 감히 그럴 리 있겠습니까.”

“그래, 감히 그러지 말아야지. 하하하…….”

“선배님……. 저를 따라 윤회전으로 일단 가시는 것이 어떨지요?”

“가자면 가야지! 부인을 찾아야 해.”

교삼의 말에 석공묵이 웃음 지었다.

두 사람이 돌아오자 류자재가 맞이하며 교삼에게 말했다.

“날 구해주었으니 윤회전으로 따라가는 것이 맞겠지만 급한 일이 있어 다녀오겠네.”

“호삼 수사와 만황계역으로 가실 생각이시군요?”

“그렇네.”

“그렇게 하시지요. 이 일은 전주께 제가 말씀 올리겠습니다.”

교삼의 대답에 류자재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사라졌다.

“한 수사께서는 어떻게 하시겠어요?”

“교삼 수사가 먼저 돌아가 있으면 저도 볼일을 보고 가겠습니다. 윤회전에 들어가 다음 임무에 참가하겠다는 뜻은 변함이 없으니까요.”

한립이 미소를 짓자 교삼이 미간을 좁혔다 풀었다.

“그렇다면 가시는 일이 잘 되기를 바랄게요.”

인사를 나눈 교삼은 흑천마조와 회양자 등을 데리고 떠났다.

류자재는 리기마 그리고 호삼과 무언가를 상의하는 중이었다.

한립이 힐끔 곡린을 보았다.

“곡 수사, 어떻게 저와 가시겠습니까?”

“그럴 생각이었는데 마음이 바뀌었네.”

곡린은 실실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십니까? 이유를 여쭈어도 될지요.”

“이제야 수사가 금원선궁을 엉망으로 만들고 천정과 적이 되었다는 걸 알았거든. 함께 다녀봐야 좋을 일이 있겠나.”

“일리가 있는 말씀입니다.”

한립도 고개를 끄덕이고 찬성했다.

“그러면 여기서 인사를 드려야겠습니다. 세상이 넓다지만 언젠가 다시 뵐 날이 있겠지요.”

한립의 인사에 곡린이 짧게 답하고 멀리 사라졌다.

“남 수사, 구원관으로 돌아가십니까?”

다들 갈 길이 정해지자 한립은 남안에게 전음을 보냈다.

그 말에 남안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대 금원선역까지 안내를 좀 부탁드립니다.”

“이해가 가지 않네요. 천정은 수사를 눈엣가시처럼 여기는데 어째서 대금원선역으로 가려는 건가요?”

남안은 한립의 생각을 이해할 수 없었다.

“수사가 생각지 못한 일은 천정도 생각지 못할 겁니다. 원래 가장 위험한 곳이 가장 안전한 곳이 되기도 하고요.”

한립이 웃으며 답했다.

이때 리기마가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어려움을 함께 이겨내기도 했고, 네 녀석이 마음에 차는구나. 우리와 같이 만황계역으로 가는 게 어떻겠느냐?”

“좋게 봐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저는 중요한 일이 있어 동행이 어려울 것 같습니다.”

한립은 미소를 띠고 포권을 해보였다.

“이걸 줄 테니 만황계역에 오면 날 찾게.”

리기마가 앞발을 들어 올려 하얀빛을 보냈다. 한립이 받아보니 손바닥 크기의 둥그런 비늘이었다.

새하얀 물결문양이 겹겹이 나타나는 것이 만황의 기상이 느껴졌다.

“감사합니다.”

한립은 이상한 점은 없는지 확인하고는 그걸 품에 넣었다. 그리고 남안을 데리고 호삼 등과 작별인사를 하고 그곳을 떠났다.

그들이 하늘 끝으로 완전히 사라진 후에 리기마는 돌연 새하얀 빛을 일으켰다.

곁에 있던 호삼이 놀라 의아한 얼굴을 했다.

리기마는 하얀 기운 속에서 뜻밖에도 사람으로 변했는데 영준한 외모에 보석과 옥이 박힌 관을 쓰고, 새하얀 머리카락을 관에 올려 묶은 모습이 퍽 품위 있어 보였다.

“제가 분수에 맞지 않게 군 점, 용서를 빕니다. 소주.”

그 옆에 류자재가 나타나 공손히 허리를 굽혔다.

“류 숙, 제가 그러자고 한 것이니 이러실 것 없습니다.”

리기마가 변한 영준한 청년은 그를 직접 일으켜 세웠다.

“이, 이게 어떻게 된 것입니까?”

호삼이 얼떨떨하게 물었다.

“가세. 가면서 이야기 해주겠네.”

신비롭게 웃음 지은 리기마가 새하얀 3층 선박을 불러내 모두를 태우고 출발했다.

* * *

시간이 흘러, 3년여 후.

금원산맥 북쪽 기슭, 길게 뻗은 강 위를 암홍색 배가 날아가고 있었다.

2층으로 된 선박의 위층에서 푸른 치마를 입은 교삼이 먼 곳을 바라보았다.

“회양자 선배님, 금원산맥을 벗어나면 앞으로는 선배님께서 선박을 조종해 주셔야겠습니다. 저는 한동안 폐관 수련을 해야 할 것 같아서요.”

“안심하고 수련하게.”

갑판에 나와 있던 회양자가 바로 답했다.

“감사합니다.”

포권을 하고 선실 안으로 들어간 그녀는 암홍색 영패를 불러내 법결을 던져 넣었다.

휘릭.

영패가 빙글빙글 돌며 선실 전체를 감사고 기운을 봉쇄했다.

그제야 자리를 잡은 교삼은 수결을 맺고 주문을 외웠다.

복잡한 주술문자들이 흘러나와 그녀의 주변을 도는 가운데 흐릿한 환영들이 연회법칙의 힘을 받아 주위를 감쌌다.

눈에서 붉은빛을 반짝인 교삼이 눈이 풀려 마치 혼백이 날아가 버린 빈껍데기처럼 변했다가 눈동자가 다시 검은색으로 돌아와 눈을 감았다.

그녀가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잿빛의 기괴한 공간 안이었다.

공간 안에는 아무것도 없이 기다란 강만 흐르고 있었다.

교삼은 물새처럼 물살을 가르며 상류로 올라가 다섯 줄기의 색깔이 다른 강줄기에 접어들었다.

그중 은색 강은 물살이 느리고 꽤 안정되어 있었는데 교삼이 힐끔 볼 때마다 무형의 흡입력 같은 게 느껴졌다.

암홍색 강물을 따라 얼마나 위로 올라갔을까 점점 물길이 좁아지면서 모든 강이 하나로 합쳐졌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돌로 만든 무지개다리가 보였고, 그 아래 모래톱에 고운 자태의 흑의 여인이 앉아 맨발을 강물에서 거두는 중이었다.

여인은 몸을 돌리고 있어 교삼은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교삼이 그녀를 제대로 살필 수 없는 또 다른 이유는 돌다리 위에 또 다른 사람이 걸터앉아 있어서였다.

약간 등이 굽고 커다란 삿갓을 쓴 사람은 두꺼운 갈옷을 걸치고 있었다.

사내는 끝에 암홍색 수정실이 나풀거리는 하얀 반점이 있는 푸른 대나무 장대를 들고 있어 마치 낚시를 하는 듯했다.

“전주를 뵙습니다.”

무지개다리로 다가간 교삼은 엄숙하게 예를 올렸다.

삿갓을 쓴 갈옷 차림의 사내는 명성이 자자한 윤회전 전주였다.

“벌써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것이냐. 내 예상보다 빨랐구나.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보거라.”

윤회전 전주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지도 않고 말했다.

“존명! 문태세가…….”

교삼이 세월탑에서 겪은 일을 늘어놓았다.

“석공묵은 만만히 볼 자가 아니니 조심하거라.”

“전주께서 보시기에, 제정신이 아닌 척하고 있는 것 같으십니까?”

“제정신이든 아니든 그건 상관없고, 그자가 발광하는 대상이 우리만 아니면 되는 것이다. 물론 그의 처자식을 찾는 일도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야.”

“예!”

“그걸 찾았다니 되었다. 천정을 한동안 바쁘게 만들 수 있겠어.”

“돌아가는 대로 바로 처리하겠습니다.”

교삼이 대답을 하고 두 사람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그자는 어떤 것 같더냐”

“여러 차례 접촉해본 결과, 머리며 실력 어느 것 하나 빠지지 않아 후에 크게 쓰일 수 있을 듯합니다. 다음번 임무에 그자를 끌어들이려 하고요.”

윤회전 전주의 갑작스러운 물음에 교삼이 답했다.

“네가 알아서 하거라.”

“예.”

“윤회전 비술을 이용해 나를 찾느라 법칙정사가 상당히 줄었겠지. 이걸로 보완하거라.”

촷!

윤회전 전주가 들고 있던 대나무 장대가 움직이면서 물 안에 가라앉아 있던 수정실이 암홍색 구슬을 건져 올렸다.

구슬이 교삼의 미간으로 들어가 사라졌다.

마치 기습이라도 받은 것처럼 그대로 뒤로 고꾸라져 쓰러진 교삼은 선박 2층 선실에 가부좌를 튼 채로 눈을 떴다.

마치 한바탕 꿈이라도 꾼 듯 땀에 젖어 가쁜 숨을 내쉬었다.

혼백 파동을 안정시킨 교삼은 미간에 손을 대고 윤회법칙의 힘을 느껴보고는 마음이 가벼워졌다.

그런데 그 여인은 누구였을까? 전주와는 또 어떤 관계이고?

* * *

금원선역 모처, 암녹색 선박이 하늘을 가르고 있었다.

용의 형태를 띤 선박은 수만 리를 순식간에 지날 만큼 빠르게 움직여 수행이 낮은 수사들은 아예 볼 수도 없었다.

그 안에 한립과 남안이 용모를 바꾸고 앉아 있었다.

이 흑룡비주(黑龍飛舟)는 사섬의 저물대에서 찾아낸 것으로, 사섬이 요단을 폭발해 재가 되기 전에 건진 것이다.

나무와 바람의 속성을 동시에 지닌 6품 선기는 이전에 지니고 있던 어떤 비행선기보다 빨랐다.

남안은 앞쪽에 앉아 선박을 조종하고 있었다.

이미 그녀의 몸에 금제를 심어 놓은 한립은 상대가 이상한 짓을 할까 걱정하지 않았다.

선박 끝부분에 앉은 그의 몸에서 시간법칙을 함유한 금빛이 넘실거렸다.

지난 3년간 시간법칙의 힘을 거의 회복해서 훨씬 마음이 든든했다.

몇 개의 옥간을 꺼내놓은 그는 윤회전을 통해 얻은 금원선역과 구원관에 대한 자료를 보고 있었다.

금원선역에 대해서는 많은 정보를 모았는데 구원관은 관리가 엄한지 정보가 거의 없었다.

“남안 수사, 가르침을 청하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그는 뱃머리의 남안을 불러들였다.

“무엇이 궁금하신가요?”

남안은 그에게 걸어와 얌전히 물었다.

이동하는 내내 그녀는 하지 말아야 할 말은 일절 하지 않고 그가 시키는 대로 따르고 있었다.

“구원관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알고 싶은 걸 물어보세요. 아는 것이라면 전부 대답해 드릴 테니.”

“구원관은 문규가 엄하다고 들었는데 쉽게 답하시는군요. 돌아가 중벌을 받을까 두렵지는 않으십니까?”

“한 수사는 저보다 훨씬 강하니까 알아내려고 마음만 먹으면 제가 말하지 않아도 알아낼 수 있잖아요. 그럴 바에야 그냥 말하는 게 낫죠. 협조하는 대신 수사도 이 정보를 제게서 들었단 말은 다른 이에게 하지 말아주세요.”

의아해하는 한립을 향해 남안이 목소리를 낮춰 답했다.

“수사의 사형과 성정이 비슷하십니다. 제 질문에 대답해 주시면 수사를 곤란하게 만들지는 않겠습니다.”

한립의 말에 남안의 얼굴에 슬픔이 지나갔다.

“구원관에 머무는 도조는 몇 분이나 됩니까?”

“도조 자체가 드물어서 구원관이 진선계의 거대 종파라 해도 딱 한 분 밖에 안 계세요. 그분이 구원관 창립조사이고요.”

“그럼 대라경 수사의 수는…….”

“전 수행이 낮은 편은 아니지만 구원관에서 직접 수련한 제자가 아니고 산수로 지내다 들어가게 된 경우예요. 그리고 비밀임무를 전문적으로 수행하는 영위(影衛)여서 지위도 그리 높지 않아 아는 게 많지 않아요. 제가 아는 바로 대라경 수사는 열다섯 분으로 구원관 관주, 부관주 두 분, 성사(聖使) 네 분, 존자(尊者)가 여덟 분인데 워낙 비밀이 많은 곳이라 아마 다른 대라경 수사가 더 있을 거예요.”

남안의 설명에 한립은 암암리에 헛바람을 들이켰다.

‘대라경만 열다섯 명이라고?’

“수사를 파견해 저를 잡으라 시킨 묘법선존의 실력과 지위는 어떻습니까?”

“묘법선존은 구원관 4대성사 중 한 분으로 이미 삼시 중 첫 번째 시(尸)를 잘라내고 대라 중기의 수행을 지니고 있어요.”

“대라 중기…….”

한립은 동공을 수축했다.

대라경에 이른 후 초기와 중기 그리고 중기와 후기 사이에는 하늘과 땅 차이의 변화가 있었다.

시간법칙의 힘을 지닌 그가 대라 초기 수사는 상대할 수 있어도 중기 수사는 그러기 어려웠다.

그가 어떤 질문을 하든 남안은 상세하게 설명을 해주어서 구원관에 대해 대략적인 이해를 할 수 있었다.

알면 알수록 섬뜩해졌다.

구원관 세력은 그의 상상 이상이라 금동을 홀로 구할 수는 없을 듯했다. 하지만 아무리 어려워도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 있었다.

문답을 마친 한립은 남안이 배를 조종하게 하고, <대오행환세결>을 운용해 시간법칙을 전력으로 회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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