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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2089화 (1,846/2,000)

2089화. 붙들린 금동

*

반나절 뒤.

대혼란에 빠졌던 금원산맥이 차차 안정을 찾아갔다.

수십만 리를 벗어난 도윤진인 무리는 표정이 어두워 보였다.

그들이 있는 아래쪽 산맥은 아직 생명력이 가득했지만 오른쪽으로 눈을 돌리면 산과 강이 끊기고 만물이 목숨을 잃어 눈 뜨고는 볼 수 없이 망가져 있었다.

“수많은 생령이 도탄에 빠졌구나! 이 죄업을 어찌할꼬!”

도윤진인은 가슴이 아픈지 길게 탄식했다.

“사존, 이건 저희 탓이 아닙니다. 천정의 명이 있었는데 어찌 따르지 않겠습니까. 저희는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게 최선을 다했습니다.”

진천이 그를 위로했다.

이때 아주 멀리서 먼지를 가득 품고 빛줄기가 날아들었다.

“뇌 사형!”

기쁨에 눈을 크게 뜬 진천이 뇌옥책을 알아보고 이름을 불렀다.

먼지를 뒤집어쓰고 날아든 뇌옥책은 반갑게 인사할 경황이 없어 보였다.

다들 그 이유를 알 것 같아 긴말하지 않았고, 소안천도 그의 옆에 서서 아무 소리도 하지 않았다.

* * *

이때 청사요 상공에 공간 파동이 일고 허공이 길게 갈라지면서 사십여 명이 빠져나왔다.

제일 먼저 나타난 흑천마조는 나오자마자 성을 냈다.

“늙은이가 잔혼만 남아서도 이리 난리를 피우니!”

그 뒤로 하나같이 먼지를 수북하게 뒤집어쓴 이들이 주르르 빠져나왔다.

“드디어, 드디어 탈출했어!”

“자유다! 자유야!”

한립 일행이 무슨 말을 하기 전에 태을경 수사 서른 명 정도가 격동해 흐느꼈다.

“저희를 구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누군가를 시작으로 그들은 교삼에게 고개를 조아리고 감사를 표했다.

“다들 이러지들 마세요. 이제 어떻게 하실 생각이신가요?”

손을 내저은 교삼은 그들에게 앞으로의 계획을 물었다.

“너무 오래 갇혀 있던 터라 세상이 어떻게 변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몸담고 있던 종문도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을 것 같고요. 딱히 갈 데가 있겠습니까.”

홍발 사내가 쓴웃음을 지었다.

“갈 데가 있는 분들은 가셔도 좋고, 마땅한 곳이 떠오르지 않는 분들은 저를 따라오세요. 제가 머물 곳을 마련해 드릴 테니까요.”

교삼의 말에 여덟 명이 인사를 하고 떠나고 이십여 명이 남았다.

한립은 죄수들과 교삼의 대화를 귀담아듣지 않고 고공으로 날아올라 폐허가 된 산맥을 보았다.

산맥이라고 할 수 있는 지형이 남아 있지 않아 그냥 수백 리에 이르는 거대한 구덩이라고 봐야 했다.

옆에 선 남안도 이제야 자신이 어떤 재난에서 살아남았는지 자각해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비경과 산맥까지 날려버리다니 누구 짓일까요?”

교삼이 호삼과 함께 다가와 폐허를 보고 물었다.

“통천검파의 소행일 가능성이 큽니다. 그들이 왜 이런 짓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요.”

“금원산맥에 터를 잡은 통천검파가 말입니까? 설마요.”

한립의 중얼거림에 호삼이 고개를 저었다.

“통천검파와 천수종이 금원선역에서 세력을 키울 수 있었던 건 천정에 충성을 다한 덕이기도 해요. 금원선역과 같은 중형 선역을 겨우 태을경 최고봉의 동방백에게만 맡겨 두었을 리 없죠.”

눈을 빛낸 교삼이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이번 일과 천정이 연관이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한립은 침음했다.

흑천마조는 그들이 뭐라고 떠들든 신기하다는 듯 이곳저곳을 보다가 턱을 긁적이고 아래로 내려갔다.

구덩이 깊은 곳에 커다란 불 구슬이 놓여 있었는데, 그것에 관심이 가는지 불길을 쪼는 것처럼 손을 내밀어 보고 있었다.

웅!

그때 한립 일행과 멀지 않은 곳에서 공간 파동이 일고 낯선 사람 셋이 비틀거리며 나타났다.

갑자기 나타난 낯선 무리에 한립 무리는 서둘러 선령력을 일으켰고, 이에 놀란 세 사람도 싸울 준비를 했다.

동전 크기의 비늘이 온몸에 따닥따닥 붙은 푸른 피부 노인은 하얀 수정 조각들을 떠올리고, 녹색 피부를 지닌 키 크고 마른 남자는 발밑으로 뿌리와 같은 녹색 수염을 늘어뜨렸다.

마지막 회색 장포를 입은 노인이 그나마 평범한 모습으로 금색 파문을 일으켰다.

긴장감이 흐르는데 류자재가 누군가를 알아보았다.

“회양자! 회양자 수사 아닙니까?”

그의 물음에 쌍방은 모두 당황했다.

회포 노인은 눈을 찡그리고 류자재를 살펴보다 깜짝 놀란듯했다.

“류자재! 정말 류 수사가…….”

“납니다. 여기서 다시 만나게 될 줄은 몰랐군요.”

“이렇게 신기할 데가.”

류자재와 회포 노인 회양자가 반가워하는 걸 보고도 다른 이들은 긴장을 풀지 않고 일단 기다렸다.

“다들 긴장할 것 없습니다. 회양자 수사는 내 오랜 친구입니다.”

류자재가 먼저 일행에게 말하고 회포 노인도 손을 저어 나머지 두 사람에게 신호를 보냈다.

“이게 얼마 만입니까!”

앞으로 나선 회양자의 목소리에 회한이 묻어났다.

“흑해선역에서 수사가 실종되어 찾으러 갔었는데 수백 년이 지나도 소식을 접할 수 없더군요. 망진해(妄塵海) 비경을 찾으러 간다더니 어찌 된 겁니까?”

“흑해선궁의 벗이 함께 적교해구(赤蛟海丘)로 비경을 찾으러 가자고 해서 갔다가 그놈이 배신하는 바람에 선궁에 잡혀 들어갔습니다. 그것들은 내게 온갖 죄목을 가져다 붙이더니 그대로 선옥에 처넣었지요. 후에 어쩌다 세월탑에 봉인되어 오늘에서야 빠져나온 겁니다.”

“나도 세월탑에 갇혀 있었는데, 수사가 같이 있는 줄은 전혀 몰랐습니다.”

“류 수사도요?”

회양자는 이상하다는 듯 류자재를 훑었다.

“내 말을 못 믿으시는 겁니까?”

류자재가 인상을 찌푸렸다.

“못 믿는 게 아니라. 수사는 어째서 법칙의 힘을 추출 당하지 않은 겁니까?”

회양자 뿐만 아니라 곁의 푸른 피부 노인과 고목 사내도 의아한 얼굴이었다.

“법칙의 힘을 추출한다고요? 천정에서 당신들에게 그런 극악무도한 짓을……. 어쩐지 수행은 여전한데, 텅 빈 누각처럼 기운이 없어 보인다 했습니다.”

“나뿐이 아니라 선옥에 있던 많은 수사가 그 짓을 당했습니다. 법칙정사까지 전부 빼앗기고 세월탑 안에 던져 넣어졌지요.”

회양자가 분을 이기지 못하고 씩씩댔다.

“아니, 수사는 천정의 휘하에 들어가지는 않았어도 그들과 잘 지내던 분이 아닙니까. 천정이 왜 그런 짓을 한 겁니까? 법칙정사에 무슨 특별한 점이라도 있던 것입니까?”

“법칙의 힘이란 것이 한 뿌리에서 자라난 줄기와 같아서 각각이 특별한 점이 있지요. 잡아들인 수사가 적지 않은 것으로 보아 천정은 그런 것에 개의치 않는 듯했습니다. 인족은 물론 요족, 마족 심지어 초목 정령까지 잡아들였으니까요.”

“회양자 선배님, 천정이 선배님의 법칙정사를 뽑아다 어디에 쓰는 거죠?”

듣고 있던 교삼이 끼어들었다.

“모르겠네. 우리는 내내 갇혀 있었으니까. 그보다 나는 어째서 류 수사가 멀쩡한 것인지 궁금할 따름이야.”

회양자가 고개를 저으며 류자재를 보았다.

“그건 나도 모르겠습니다. 선옥에 갇힌 지 얼마 되지 않아 문태세에게 속아 세월탑으로 들어가 갇히게 되었으니까요. 아, 수사는 세월탑 어디에 있었던 겁니까?”

류자재가 물었다.

“나와 여기 수사들은 전부 세월탑 7층에 있었습니다. 그나마 지하에서 반수면 상태로요. 몇 년 사이 탑의 힘이 허술해져 차차 힘을 되찾았지만 움직일 수는 없더군요.”

“난 5층에 있었어요! 그래서, 만나질 못했군요. 하하, 오랜 세월 한 곳에 있으면서도 만나질 못하다니. 오늘 이렇게 마주치지 않았으면 언제 다시 보게 되었을지 모르겠습니다.”

류자재는 여전히 구덩이에서 불 구슬을 가지고 노는 흑천마조를 힐끔 살폈다.

다들 말은 없었지만 마음은 복잡했다.

진선계 최고의 세력이라는 천정이 겉으로는 광명정대하게 선역을 다스리는 척하면서 수사들의 법칙의 힘을 추출하고 있다는 소리가 아닌가!

“제가 끼어들 자리가 아닌 것을 압니다만. 이곳에 오래 머물러 좋을 건 없을 듯합니다.”

“맞습니다. 소란이 있었으니 천정에서 조사를 나올 거예요.”

생각을 마친 한립이 입을 떼고 교삼이 거들었다.

“이제 어쩔 생각입니까?”

류자재는 회양자의 의중을 물었다.

“휴, 이렇게 된 것 어쩔 수 없지요. 당시 윤회전에서 날 보호해 주겠다며 포섭하려고 했는데 거절했었습니다. 이제 딱히 갈 곳도 없고 지금 윤회전은 어떤지 알아봐야지요. 아직도 날 받아줄지는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회양자가 한숨을 내쉬었다.

“선배님께서 윤회전에 뜻이 있으시면 제가 추천을 해드리겠습니다.”

교삼이 회양자 수사의 말을 듣고 활짝 웃으며 포권을 했다. 그 말에 그녀를 따라가려던 스무여 명의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자네가 윤회전 사람이란 소린가?”

회양자가 교삼을 보고 놀라 물었다.

교삼은 작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럼세! 어차피 이곳에서 벗어나는데 덕을 보았으니 자네를 따라 윤회전으로 가겠네.”

결정을 내린 회양자가 다른 두 사람을 돌아보았다.

“묵수 수사와 무계 수사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수사와 같이 고난을 헤쳐 나왔고, 어차피 천정이 우리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니 윤회전으로 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습니다.”

무계라 불린 푸른 피부 노인이 온화하게 웃음 지었다.

고목 사내는 말이 많은 편이 아닌지 작게 그러겠다고만 답했다.

“한 형은 어떻게 하실 생각이세요? 윤회전으로 가실 건가요?”

교삼이 한립을 돌아보았다.

“이제 확실히 알겠습니다. 천정과는 골이 깊어져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요. 언제고 윤회전에 의탁하게 되겠지만 이전처럼 윤회자라는 허울뿐인 이름만 받고 싶지는 않습니다.”

“한 형 덕에 윤회전의 중요한 임무를 완수했어요. 윤회전과 인연이 깊은 분이란 걸 알 수 있었고요. 전주께서도 수사를 눈여겨보시고 있으니 윤회전에 들어오시면 핵심 인사가 되는 것은 물론 전주를 직접 뵐 수 있을지도 몰라요.”

“그렇게만 되면 좋겠군요. 그럼 이제 금동에 대해 말해 주실까요?”

한립은 전음으로 바꾸어 물었다.

“그 일은 당장 자세히 설명하기는 어렵고……. 일단 이렇게만 말씀드릴게요. 금동이 구원관에 잡혀 있어요.”

“금동이 어쩌다 말입니까?”

교삼의 말에 한립의 안색이 확 달라졌다.

“금동 수사도 대단하더군요. 스스로를 미끼 삼아 구원관에서 오랫동안 양성해온 서금선을 유인해 잡아먹었어요. 그런데 그걸 들켜서 대라경 수사 몇이 힘을 합쳐 잡아갔지요.”

교삼은 숨김없이 아는 바를 말해 주었다.

“…….”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서금선이란 귀한 보물은 누구든 탐을 낼만 하니까요. 구원관에서는 금동 수사를 괴롭히기는커녕 정성을 다해 봉양하고 있을 거예요. 그냥 자유롭게 나다닐 수 없을 뿐이죠. 어쨌든 윤회전의 다음 임무가 구원관에 관련된 거예요. 함께 하고 싶으시면 그 기회에 금동 수사도 구할 수 있을 겁니다.”

한립이 말이 없자 교삼이 줄줄 할 말을 마쳤다.

“어떤 임무입니까?”

“윤회전 규정에 대해 잘 모르니까, 이 일은 당장은 자세히 말해 줄 수 없어요. 어차피 임무를 시작하려면 시간이 많이 남았으니 그동안 수행을 높여 두시는 것을 추천드리죠.”

“교삼 수사, 금원선역 지도를 한 부 부탁해도 되겠습니까?”

“지도요? 바로 구원관으로 찾아가려는 건 아니지요?”

교삼이 미간을 찡그렸다.

“구원관이 마침 금원선역에 있으니 소식을 알아보려는 것뿐입니다. 바보 같은 짓은 하지 않을 테니 안심하세요.”

한립은 표정 변화 없이 답했다.

“아……. 무슨 오해를 하고 있는지 알겠어요. 금원선역이라고 다 같은 금원선역이 아니에요.”

교삼이 웃음을 흘렸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선계에 선역이 얼마나 많은데 똑같은 이름을 쓰는 선역도 적지 않아요. 아주 구석진 곳에 있는 작은 소역(小域)들은 다른 선역의 이름을 알기도 어렵고요. 금원선역은 특수하게 작은 선역이 큰 대역(大域)의 이름을 따라 쓴 것이긴 하지만요.”

“선역을 크기로 구분하는 것입니까?”

“북한선역 같은 소역들만 돌아다니셔서 모르시는 것도 당연해요. 진선계 중 대부분 수사의 일생은 그러니까요. 사실 선계는 36개의 ‘대역’, 5백 개의 ‘중역’ 그리고 삼천 개의 ‘소역’으로 이루어져 있어요. 여기서 삼천 소역은 어림잡아 말한 거고 실제로 얼마나 많은 소역이 있는지는 다 셀 수도 없지요.”

“대역이 36개라고요? 그럼 예전에 들은 중토선역도 대역 중에 하나겠군요.”

“맞아요. 중토선역도 그중 하나이고, 큰 금원선역도 유명해요. 구원관 산문이 거기 있으니까요. 우리가 있는 곳은 작은 금원선역이에요. 원래 큰 금원선역의 일부였다가 떨어져 나온 땅이라 그렇게 불리는 거고요.”

“그랬군요.”

한립은 처음 듣는 소리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교삼이 힐끔 남안을 보더니 번개처럼 그녀의 가슴에 일장을 날렸다.

죽다 살아나서 이제 겨우 회복한 남안은 피하지 못하고 피를 쏟으며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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