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88화. 또 다른 보수
*
도윤진인이 미간을 좁히고 물었다.
“용아월멸진(龍牙鈅滅陣)을 발동하면 10초 내로 연쇄 폭발이 일어날 것이다. 그 여파로 천만리 선역이 파괴될 텐데 지금 네 상태로 빠져나올 수 있겠느냐?”
“제자를 믿어주십시오. 제 목숨은 지킬 힘이 있으니 먼저 떠나시고요.”
뇌옥책은 옅게 미소 짓다 소안천을 보았다.
“도윤 선배님, 진법을 발동하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은 없을까요? 저희 천수종과 통천검파도 금원산맥에 터를 잡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분명 영향이 갈 텐데요. 게다가 산맥 인근에 사는 천만 생령들은 어찌합니까? 그들에게는 날벼락이 떨어진 것과 같을 텐데…….”
소안천은 꾹 참았던 말을 했다.
그 말에 진천을 비롯한 통천검파 사람들도 얼굴이 어두워졌다.
“이미 호랑이 등에 탄 형세라 그리할 수밖에 없구나…….”
“제가 설명하겠습니다. 용아월멸진은 천정이 원해서 설치해 둔 겁니다. 금원선궁이 아닌 천정에서 직접 명이 떨어졌고요. 그들은 우리가 바로 비경을 없애기를 원했는데 금원산맥을 지키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비경 안으로 들어가 흑천마두만 죽일 수 있을지 시도해 본 겁니다.”
뇌옥책이 도윤진인의 말을 받아 이야기했다.
그 말에 소안천도 상황을 파악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세월신등을 얻어 그 힘으로 세월탑의 죄수들을 제압했겠지만, 계획이 실패했으니 다른 수가 없습니다.”
“세월탑이 더는 버티지 못할 것 같다. 어서 움직여야 해!”
그때 도윤진인의 안색이 달라져 말했다.
“사존, 그리고 다른 분들은 모두 이곳을 떠나세요. 여기는 제가 맡겠습니다.”
뇌옥책은 포권을 해보였다.
“그래, 네게 맡기마. 반드시 무사히 돌아와야 한다.”
도윤진인도 더는 머뭇거리지 않고 결연히 용아월을 넘겨주었다.
“몸조심해요.”
떠나기 전 소안천이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뇌옥책을 뒤로 하고 그들은 백수곡을 빠져나갔다.
그들이 멀리 사라질 때까지 기다리던 뇌옥책이 용아월을 손에 쥐고 중얼중얼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십, 구, 팔…….”
핏빛 반달과 같은 옥패가 깨져 주변 돌기둥 위로 빛을 뿌리자 뇌옥책은 미친 듯이 골짜기 바깥으로 달아났다.
거의 동시에 골짜기 안에서 웅산의 둔광이 금색 장검을 타고 다른 방향으로 뻗어나가고 있었다.
“사, 삼…….”
“이, 일!”
쿠콰콰콰쾅.
청사요 중앙에 반달 모양의 빛기둥들이 빼곡하게 치솟아 주변 천 리 안에 있는 모든 것을 가루로 만들었다.
여량촌 촌민들은 물론이고 금원산맥 절반이 연쇄반응을 일으켜 무너져 내리면서 수많은 마을과 선가 종문들이 사라지고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은 사상자가 나왔다.
* * *
세월탑 인근.
리기마와 곡린은 금방 안색이 나아졌다.
“한 수사, 도와달라는 일은 해결을 해주었네. 내 본명원패를 내주게.”
곡린이 일어나 한립에게 말했다.
“물론입니다.”
한립은 바로 곡린의 본명원패를 꺼내 던져 주었다.
“이보게, 내 것은? 내 것도 돌려줘야지.”
리기마는 자기 것은 꺼내지 않자 얼굴을 굳혔다.
“리기마 수사, 일전에 본명원패를 돌려주기만 하면 섭섭지 않게 보상을 하신다고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자네가 말하지 않았으면 잊을 뻔했군. 보상을 원했으면 그냥 말하면 될 것을.”
한립의 말에 리기마는 바람의 법칙 파동이 강렬한 하얀 깃발을 꺼내 들었다.
“내가 정성을 들여 제련한 조풍기(造風旗)일세. 5품 선기라 속도를 높일 수 있어 나도 자주 쓰던 거라고. 이걸 보상으로 주지.”
리기마는 깃발을 내주면서도 아까운 눈빛이었다.
“대단한 선기처럼 보이지만 저는 바람 속성 법칙을 익히지 못해 제대로 쓰지 못할 듯합니다. 그건 리기마 수사께서 쓰시고 괜찮으시면 다른 것을 보수로 받고 싶습니다.”
“뭘 원하는 것인가?”
“보물은 되었고, 제게 한 가지만 약속해 주시면 됩니다.”
“무엇을?”
“진령혈맥을 타고난 진령 일족인 것을 알아보았습니다. 패하(覇下)와 주염(朱魘)이라는 다른 진령에 대해서도 들어보셨겠지요?”
한립은 전음으로 바꾸어 물었다.
“대충은. 보기 드문 강대한 진령인데 그건 왜 물어보는 건가?”
리기마는 호기심 반 의아함 반이었다.
“그들의 진령혈맥을 구해다 주시면 보수를 받은 셈 치겠습니다.”
진령혈맥 10가지를 모아 이제 남은 것은 패하와 주염의 것밖에 없었다.
“말은 쉽게 하네만, 이미 진선계에서 멸종된 두 진령을 어디서 찾는단 말인가? 게다가 찾았다고 쳐도 그들이 고분고분 혈맥을 내줄 것도 아니고.”
“저도 찾기 어려우리란 것을 압니다. 그냥 최선을 다해 주시면 되고, 찾은 다음 혈맥을 취할 때 저를 도와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한립은 전신원반과 본명원패를 함께 건네주었다.
“내가 이대로 본명원패만 챙겨 가버리면 어쩌려고?”
“제가 사람 보는 눈은 있어서요. 그럴 분이라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한립이 담담히 웃음 지었다.
사실 나머지 진령혈맥들을 찾는 건 당장 급한 일이 아니어서 리기마가 약속을 어겨도 그만이었다.
윤회전에 포상을 걸고 천천히 찾아보아도 되니 말이다.
“날 믿는다는 말이 듣기 나쁘지는 않구만. 그래, 노력은 해보겠네.”
눈을 빛낸 리기마가 전신원반, 본명원패 그리고 조풍기를 거두었다.
그때 쾅 소리가 들려오고 허공을 뚫고 류자재와 호삼이 빠져나왔다. 이런저런 상처가 보이기는 해도 심각한 상태는 아니었다.
“류 선배님, 류 수사 무사해서 다행입니다.”
교삼이 그들을 보고 기뻐했다.
그런데 교삼의 말이 끝나자마자 세월탑 6층이 내려앉아 공간 폭풍이 퍼져나갔다.
그들은 서둘러 피했고 멀리 떨어져 있던 남안도 그들을 향해 날아들어 함께 달아났다.
쿠쿠쿠쿠…….
대책을 상의하기 전에 5층이 내려앉고, 이어서 다른 층들이 연이어 내려앉았다.
세월탑이 사라진 자리에 기이한 공간의 힘이 넘실대며 밀려들고 있었다.
“무시무시한 공간의 힘입니다. 제때 탈출하지 못했으면 그냥 숨이 끊어졌겠어요.”
곡린이 간담이 서늘해져 중얼거렸다.
“독립적 공간으로 만들어진 세월탑은 그 자체로 공간선기라 할 만합니다. 그게 터졌으니 위력이야 알만하지요.”
류자재가 입을 열었다.
“석 수사가 아직 안에 있는데, 태세의 잔혼이 펼친 천인경 영역의 자폭에 이런 공간 폭풍까지 맞닥뜨렸을 테니 다시 볼 수 없겠습니다.”
리기마가 난폭한 기류를 보이는 공간 폭풍을 응시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천인경 영역의 자폭의 힘은 그렇지요. 석 수사는 더구나 막 봉인에서 벗어나 기력을 다 회복하지 못했을 테니…….”
류자재도 안타깝다는 듯 말했다.
그 말을 들은 교삼이 미간을 좁히면서 초조해했다.
“쳇, 그런 미친 늙은이야 죽으면 좋지요! 볼 때마다 얼마나 짜증이…….”
곡린이 코웃음을 쳤다.
“이 벌레 놈이 누구더러 죽으라 마라 하는 것이냐! 제대로 패주지 않았더니 몸이 근질근질한 것이야?”
불쑥 누군가의 목소리가 모두의 귓가에 울렸다.
딱 들어도 흑천마조의 목소리였다.
곡린은 덜덜 떨면서 주변을 살폈고, 모두가 보는 앞에서 검은빛이 모여 흑천마조로 변했다.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곡린은 그대로 굳어 움직이지 못했다.
“석 수사, 심마법칙을 이미 환마수심(幻魔隨心)의 경지까지 익히신 겁니까? 심마법칙을 그 정도 경지까지 익혀야 불사불멸한다 들었습니다. 육신과 혼백을 참살해도 다른 사람의 심마 속에서 다시 태어날 수 있다고요!”
류자재는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하하, 그야 당연하네! 문태세 그놈이 오래 가둬둔 탓에 할 일도 없었으니 심마법칙만 진일보했지!”
흑천마조가 거들먹거리며 말했다.
“석 선배님의 끝 모를 능력에 감탄스러울 뿐입니다.”
교삼 등이 그에게 찬사를 늘어놓자 흑천마조는 기분이 좋아져 하하 웃음 지었다.
그러나 한립은 눈썹을 끌어올렸다.
부활은 했다고 하나 기운이 예전만 못했다.
소위 부활이라는 것에는 그만한 대가가 따르는 것이 분명했다.
곡린은 흑천마조가 다른 이들과 떠드는 것을 보고 조용히 뒤로 빠져나가려 했다.
“쪼그만 벌레 녀석이 어딜 가려는 게야!”
느닷없이 곡린에게 고개를 돌린 흑천마조가 사라지고 겁먹은 곡린은 서금선의 형태로 변신했다.
변신을 마치자마자 흑천마조의 주먹과 발길질이 비처럼 쏟아져 제대로 비명을 지를 틈도 없었다.
이번에 곡린이 두들겨 맞는 것은 그가 입을 함부로 놀린 탓이라 아무도 말릴 생각을 하지 못했다.
세월탑이 있던 곳에서 불던 공간 폭풍은 약해지다가 결국 사라졌다.
모든 것이 잠잠해지고 바닥이 보이지 않는 깊은 구덩이만이 남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보여 주었다.
그것을 내려다보던 한립은 문득 무언가를 발견하고 몸을 날렸다.
얼마 후 세월신등을 든 그가 구덩이를 빠져나왔다.
공간 폭풍 세례에도 신등은 이가 나간 데 없이 불길이 꺼지고 기운만 줄어 있었다.
“세월신등을 되찾게 되셨네요. 그래도 기운이 좀 상한 것 같습니다.”
교삼이 공수하며 축하했다.
“신등을 손에 넣은 것만으로 만족합니다.”
한립은 세월신등을 거두었다.
곡린을 때릴 만큼 때린 흑천마조가 흡족한 얼굴로 돌아오고 옆에 얼굴이 팅팅 부은 곡린이 부루퉁한 얼굴로 따라왔다.
“모두 세월탑을 빠져나오기는 했지만 아직 태세선부 안입니다. 비경이 오래 버티지 못할 테니 그 전에 떠나는 것이 어떨지요?”
교삼이 입을 열었다.
“여기서 헤아릴 수 없는 세월을 축냈는데 일각도 더 머물고 싶지 않네. 그래서 어떻게 떠나자는 것인가? 자네들은 수행이 부족해 느끼지 못하겠지만 태세선부는 거대한 공간의 힘으로 싸여 있어 그걸 뚫고 나가기가 쉽지 않을 것이야.”
류자재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미소를 지은 교삼이 뭐라 답하려는데 멀리서 2, 30명의 사람들이 나타났다.
그 안에는 인족, 요족, 마족들이 섞여 앙상하게 마른 몸을 내놓고 후줄근한 차림을 하고 있었다.
얼마나 오래 굶었는지 모를 얼굴들이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태을경 수사에 맞먹는 기운을 지녔는데 이상하게도 법칙의 힘은 느껴지지 않았다.
“세월탑에 갇혀 있던 분들 같은데 무슨 용건입니까?”
교삼이 차분히 공수하며 물었다.
“이곳을 떠날 방법이 있으면 저희를 좀 데리고 나가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오랫동안 갇혀 있다 겨우 풀려났는데 이대로 죽고 싶지는 않습니다.”
붉은 머리카락을 지닌 인족 사내가 진심을 담아 청했고 다른 사람들도 애원했다.
“다들 안심하세요. 여기서 만나게 된 것도 인연인데 모두를 두고 가지는 않을 겁니다.”
교삼이 낭랑하게 답했다.
“정말이십니까? 감사드립니다!”
홍발 사내가 감격해 인사를 하고 다른 이들도 예를 올렸다.
“교삼 수사, 들어보니 이곳을 떠날 방법이 있는 것 같은데?”
류자재가 질문했다.
“윤회전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여기 온 터라 당연히 떠날 방법을 마련해 두었습니다. 진법을 펼치는데 잠시 시간이 필요하겠지만요.”
교삼은 강대한 공간의 힘을 품은 은색 깃발과 원반들을 꺼냈다.
“대나이전공진(大挪移轉空陣)! 윤회전이 씀씀이도 크구만.”
걱정이 사라졌다는 듯 류자재가 칭찬했다.
미소를 지은 교삼이 진법을 펼치려는데 선부 전체가 격렬히 흔들리면서 세월탑이 붕괴할 때보다 열 배는 빨리 무너져 내렸다.
“이럴 리가. 선부가 붕괴되려면 그래도 이삼일은 걸릴 텐데. 누가 바깥에서 손을 쓰고 있는 걸까요?”
안색이 달라진 교삼이 상황을 분석했다.
“이유는 따지지 말고 진법을 펼치는 데만 집중하게! 우리가 영향이 미치지 않게 주변을 지키지!”
류자재가 급히 소리쳤다.
“네!”
교삼이 서둘러 손을 놀려 은색 진법을 만들어갔다.
휘휘휙!
깃발과 원반들이 날아가 허공에 박혀 진법의 모양이 잡히자 굵직한 은색 빛기둥이 나타났고, 다른 사람들이 앞다투어 그곳으로 몰려들었다.
멀리 언뜻 세 명의 인영이 떠서 공간이 무너지는 와중에도 그들이 있는 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