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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2087화 (1,844/2,000)

2087화. 천인경(天人境)

*

흑천마조의 검빛 속에 수많은 비명과 애원, 광소와 노호성이 들려와 사람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검빛들이 호선을 그리면서 금빛의 강을 때려 그야말로 하늘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서 빠져나갑시다! 대라경 최고봉의 존재들이 싸우는데 말려들었다가는 언제 목숨을 잃을지 몰라요!”

류자재는 회백색 빛으로 호삼을 감아 튀어 나갔다.

한립은 멀리 금빛의 강에서 시간법칙의 새로운 경지를 느끼며 자신이 익힌 <대오행환세결>과 비교해 보았다.

많은 것을 깨달은 뒤 마지막으로 세월신등을 본 그는 단호하게 시선을 거두고 둔광을 일으켰다.

교삼, 리기마, 곡린도 이곳을 벗어나려 각기 다른 신통을 펼치고 있었다.

그때 금색 잔혼이 두 손으로 수결을 맺어 이전보다 10배는 강렬한 금빛을 방출했다.

그걸 본 흑천마조도 놀란 얼굴이었다.

잔혼에 이런 힘이 남아 있을 줄 몰랐다.

이때 금빛 강이 검은 검빛들을 모조리 부수고 흑천마조를 휩쓸었다.

눈썹을 꿈틀한 흑천마조는 당황하는 기색 없이 손에 든 새까만 검으로 주변을 난도질했다.

검빛이 검은 연꽃들을 피워 금색 강줄기를 막아섰다.

그걸 본 금색 잔혼은 무표정하게 수결을 바꾸었다.

퍼펑!

잔혼의 육체가 갑자기 폭발하면서 눈을 찌르는 듯한 금빛이 흑천마조를 포함한 인근 십만 리를 감싸고 하나의 세계를 이루었다.

“너…….”

흑천마조가 표정이 달라졌을 때 널리 퍼져나갔던 금빛이 급속도로 뭉쳐지더니 타원형의 거대 구슬로 변해 떠올랐다.

인근의 검은빛은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이게 영역이라고?”

달아나던 한립은 뒤의 상황을 감지하고 자기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았다.

“천인경 영역일세! 허상을 실체로 만드는 경지라 화령경, 조물경과는 비교할 수도 없지. 이걸 겨우 잔혼이 발휘하다니! ……안 되겠군, 영역을 자폭해 흑천마조와 동귀어진하려 하고 있어!”

그 옆에 있던 리기마가 한립에게 설명해주다 소리쳤다.

리기마는 하얀빛으로 한립과 교삼을 감싸고 속도를 몇 배로 높였다.

곡린과 류자재도 무언가를 감지했는지 안색이 굳어 강렬한 빛을 터트렸다.

백 장 길이의 빛줄기로 변한 곡린은 흐릿하게 서금충 허상을 만들어냈고, 류자재는 회백색 빛의 문을 불러내 공간의 힘을 발산했다.

호삼을 데리고 빛의 문으로 들어간 그는 번득 사라졌다.

세 사람이 사라지고 똑바로 쳐다볼 수조차 없는 요란한 빛이 금색 구슬에서 방출되었다.

금빛 광채에 7층 전체가 허물어져 더없이 거대한 공간균열로 변했을 때 한립 무리는 이미 아주 멀리까지 이동해 있었지만 금빛이 확산되는 속도를 이길 수는 없었다.

히힝!

리기마가 괴성을 지르며 등 뒤로 두 장의 깃털 날개를 펼쳐 속도를 높였다.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 7층 공간 곳곳에는 공간균열 천지라 어쩔 수 없이 이리저리 피하면서 가는데 곡린과 류자재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이대로는 안 되겠습니다, 리기마 수사. 제가 공간 전송술을 써서 일단 6층으로 이동하겠습니다.”

한립이 리기마의 등 위에 올라 수결을 맺었다.

콰릉.

금색 뇌전이 폭발적으로 일어나 뇌전진법을 이루고 세 사람을 감쌌다.

진법이 막 방출되어 전송이 이루어지기 직전 인근 공간이 쾅, 터지면서 허물어졌다.

뇌전진법은 방어기능이 없어 세 사람은 몸이 쑥 꺼지면서 공간 난류 속으로 떨어졌다.

뇌전진법은 크고 작은 공간 파편에 진작 부서진 뒤였다.

휘이이.

한립은 공간 난류에 휩쓸려 어쩔 수 없이 리기마에게서 떨어져 나왔다.

리기마와 교삼도 공간 난류 속에서 흩어져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낮게 기합을 넣은 한립은 오색 빛을 일으키며 공중제비를 돌았다.

맑은 울음소리와 함께 오색 봉황으로 변한 그는 겨우 균형을 잡아 공간 난류의 흐름을 타기 시작했다.

공간 난류 자체는 큰 문제가 아니었으나 그 속에 작은 공간균열인 공간 파편들이 위험했다.

기마자와의 전투로 시간법칙의 힘을 거의 다 써버린 그는 감히 파편들과 맞설 생각을 하지 않고 요리조리 피해 다녔다.

그때, 쿠쿠쿵 하는 소리와 함께 금색 광채가 밀려들었다.

깜짝 놀란 그는 검은빛을 일으켜 아까보다 작은 삼두육비 마신의 형태로 변했다.

세 개의 머리는 진룡, 거원과 같은 힘을 쓰는 진령들이 아니라 청란, 뇌붕, 천봉처럼 속도가 빠른 진령들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쉭!

푸른 기류와 은색 뇌전 오색 광채를 동시에 품은 그는 놀라운 속도로 날아갔다.

리기마가 전속력으로 날 때보다 더 빨라 보였다.

이제 공간 파편도 큼지막한 것만 피하고 자잘한 것은 그냥 몸으로 뚫고 지나가야 했다.

펑! 펑! 펑…….

폭음이 들릴 때마다 그의 몸에서 핏줄기가 터졌다.

거마 변신으로 몸이 더 단단해지고 진극막으로 보호해 그리 큰 상처는 입지 않고 지나갈 수 있었다.

금색 광채와 겨우 거리를 벌린 그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때 묵직한 충돌음이 뒤에서 울려 퍼졌다.

금색 광채도 무언가에 밀려 더욱 속도가 빨라지고 있었다.

순간 금색 광채에 따라잡혀 버린 한립은 기겁해 <천살진옥공>을 극성으로 발동하면서 동시에 방어 법기 열댓 개를 방출해 겹겹이 보호막을 쳤다.

그러나 이번에 퍼진 금색 광채는 파괴력은 거의 없고 바깥으로 밀어내는 힘이 강했다.

주변의 공간 파편까지 그 힘에 밀려나 그에게 해를 끼치지 못했고, 금색 광채는 그를 멀리 보내고는 사라졌다.

한시름을 놓은 한립은 살았다는 생각에 희색을 드러내고, 삼색 빛을 일으켜 번개처럼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그런데 어딘가를 본 그가 멈칫하다 살짝 방향을 틀었고, 곧 공간 난류 속에서 남안을 발견했다.

전신에 부상이 가득하고 왼쪽 팔이 너덜거리는 그녀는 머리는 산발이 되고 얼굴은 창백해 꼴이 말이 아니었다.

또한 선령력을 거의 다 소진했는지 보호막도 간신히 유지하면서 공간 난류의 충돌에서 버티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전방에서 기류를 타고 문짝 크기의 공간 파편이 빠르게 접근하고 있었다.

남안은 간신히 남색 빛을 일으켜 피하려 했지만 파편의 속도가 워낙 빨라 완전히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런데 공간 파편에 충돌하기 전 검은빛이 번득 그녀를 데리고 피했다.

수백 장 바깥에서 한립이 변한 거마(巨魔)가 한 손에 남안을 쥐고 있었다.

“한 수사십니까?”

남안은 놀랐다는 눈으로 그를 보았다.

한립이 고개를 끄덕이고 다른 손으로 수결을 맺어 초록빛을 불어넣어 주었다.

파앗.

초록빛 속에서 남안은 새살이 돋아나고 보호막이 훨씬 밝아졌다.

안색이 나아진 그녀는 거마의 손에서 내려서 단약을 복용했다.

“목숨을 구해주신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지나는 길에 우연히 구한 겁니다. 몸을 회복했으니 앞으로 갈 길을 스스로 찾으시지요.”

한립은 담담히 말하고 전방으로 날아갔다.

그는 남안의 성품을 좋게 보고 있었기에 지척에서 그냥 죽게 두고 볼 수 없었던 것뿐이다.

게다가 흑천마조의 심마법칙으로 마음에 그림자가 드리워 이상한 짓을 벌였던 것을 생각하면 앞으로는 마음을 깨끗이 하기 위해서 선한 쪽으로 행동하는 편이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안은 한립의 둔광이 사라지는 것을 보고는 고민하다 남색빛을 일으켜 주변 난류를 밀어내면서 날아올랐다.

빠르게 날아간 한립은 앞을 가로막은 광활한 공간 난류와 그 안의 공간 파편들을 보았다.

그 사이로 희미하게 바깥의 풍경이 보였다.

‘찾았다!’

바깥으로 나갈 길을 찾은 그는 검은빛으로 거마의 몸을 감싸고 다시 변신했다.

세 개의 머리가 진룡, 거원, 곤붕으로 변해 몸이 더 크고 두꺼워졌다.

쿠릉!

구백여 개의 현규에 빛을 발해 마기와 융합한 그는 강렬한 힘을 퍼트려 주변 난류를 몰아내 공터를 만들고 마구 주먹질을 했다.

퍼퍼퍼퍼펑!

검은 주먹 허상들이 공간 파편들을 미리 퍼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흑천마조가 마기를 운용하는 방법이 너무 정교해서 그걸 살짝 따라서 했는데 효과가 좋았다.

한립은 앞으로 나아가면서 여섯 개의 주먹을 날려 공간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균열 앞에 이를 수 있었다.

쿠앙!

기합을 넣은 거마가 여섯 개의 주먹으로 동시에 두들기자 균열에 구멍이 뚫렸다.

수결을 맺은 한립은 거마의 몸을 보통 사람처럼 줄여 그 구멍으로 빠져나갔다.

안개가 가득한 드넓은 협곡 지대는 세월탑이 있던 곳이었다.

구름을 뚫고 선 세월탑은 여전했지만 7층이 무너져 공간 폭풍 지대로 바뀌고 인근을 둘러싼 인파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소수만이 멀리서 배회하며 무슨 일인지 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쉭!

이때 남색 빛으로 변한 남안이 빠져나왔다.

몸에 새로운 상처들이 생기고 둔광이 약해진 그녀가 숨을 헐떡이며 부적을 붙였다.

“아까는 제대로 감사드리지 못했는데, 누차 도움을 받았으니 후에 필히 보답하겠습니다.”

남안은 정중하게 인사했다.

“별일 아니니 마음에 담아두지 마세요.”

대답을 하며 그는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한 수사에게는 별일 아니겠으나 제게는 아닙니다.”

“그럼 마음대로 하시지요.”

한립은 더는 말하지 않고 단약을 하나 삼킨 다음 교삼과 다른 사람들의 행방을 찾아보았다.

그런 그를 지긋이 보던 남안이 협곡 먼 곳으로 내려가 가부좌를 틀고 운공을 시작했다.

한립은 의식을 퍼트려보고는 미간을 좁혔다.

다른 사람들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들의 실력에 무슨 일이 난 것은 아니겠지?”

그때 세월탑 쪽에 새로운 공간구멍이 뚫리고 교삼, 리기마, 곡린이 튀어나왔다.

셋 다 부상을 입었고 교삼은 거의 피범벅이었으나 목숨이 위태로울 정도는 아니었다.

“한 수사, 무사해서 다행입니다. 흩어지게 되어 걱정했는데 이제 보니 괜한 걱정을 했네요.”

교삼이 그를 발견하고 반갑게 말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운이 좋아 먼저 빠져나와 있었습니다. 허나 오래 머물 곳이 아니니 어서 기운을 추스르고 떠나는 게 좋겠습니다.”

* * *

금원산맥 청사요.

“아이고, 이렇게 계속 시끄러워서야 우리는 어떻게 살라고.”

마을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리자 촌장이 떨어질 듯 비틀거리는 술동이를 잡으며 투덜댔다.

“신선들은 왜 여기까지 와서 저럴까요?”

그 앞에 마주 앉은 새까만 노인이 말했다.

“숙부님, 무슨 보물이 나타났는지 엄청나게 많은 신선들이 몰려들었잖아요.”

또 다른 중년인이 중얼거렸다.

“다 좋은데, 우리 샘물이나 망치지 말았으면 좋겠구나.”

촌장의 걱정 섞인 말과 함께 또 멀리서 콰릉!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 * *

백수곡 안.

지진이 빈번해지고 인(人)자형으로 바위가 둘러싼 곳에 통천검파 수사들이 모여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웅.

은빛 파동이 나타나 그 안에서 여섯 명이 나타난 것을 보고서야 기다리던 이들은 긴장을 풀었다.

“무사히 귀환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공간 파동 속에서 나타난 이들은 뇌옥책 무리였다.

도윤진인의 안색은 창백했고, 뇌옥책 등도 그리 편한 얼굴이 아니었다.

“진천, 내가 일러두었던 일은 어찌 되었느냐?”

도윤진인이 그들을 훑고 그중 한 명에게 말했다.

“사존의 분부대로 보름 전에 설치를 마쳤습니다. 제가 두 번은 확인했으니 확실합니다.”

검은 수염을 기른 사내가 걸어 나와 포권을 했다.

“용아월(龍牙鈅)을 내게 주고 다들 물러가거라.”

스승의 말에 미간을 좁힌 진천이 명을 어기지 못하고 반달 모양의 핏빛 옥조각을 두 손으로 바쳤다.

“사존께서는 중상을 입으셨습니다. 이 일은 제게 맡겨 주십시오.”

뇌옥책이 심각한 얼굴로 나섰다.

“사형 정말 이걸 쓰게 된 겁니까?”

진천이 뇌옥책에게 물었다.

“마두를 죽이는 데 실패했고 신등도 회수하지 못했다. 세월탑이 통제를 잃었으니 더 시간을 끌다가는 죄수들이 빠져나가 금원선역을 휩쓸고 말게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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