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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2085화 (1,842/2,000)
  • 2085화. 격전

    *

    한림과 교삼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호삼이 류자재를 따라붙었다.

    류자재의 본명원패가 기마자의 손에 있었다.

    “그렇다면 돕겠습니다. 다른 물건은 상관없고, 세월신등은 제가 갖는 것으로 하지요.”

    한립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원수가 되어 버린 기마자를 이대로 보내는 게 그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하지만 윤회전에서 신분이 높은 교삼이 먼저 부탁하게 하는 것도 나쁜 선택은 아니었다.

    “약속할게요. 기마자가 지닌 나머지 물건들은 건들지 않는 겁니다?”

    교삼은 오래 고민하지 않고 수락했다.

    상의를 마치고 그녀가 먼저 둔광을 일으켰다.

    이때 대전 잔해에서 은빛이 반짝이고 정염불새가 돌아왔다. 오행인공대진을 구성하던 선기들 중 불구슬을 물고 있었다.

    “강력한 진법이라도 지키는 사람이 없으니 무용지물이구나.”

    한립은 불새를 거두고 흑천마조와 태세선존의 잔혼이 싸우는 곳에서 느껴지는 파동에 몸을 움츠렸다.

    떠나려는데 사람으로 변한 곡린과 말의 모습을 한 리기마가 대전 폐허 안을 뒤지고 있는 게 보였다.

    “두 분 다 그만하시고 저랑 같이 가서 신등 찾는 것을 도와주세요.”

    아래로 내려간 한립이 웃으며 말했다.

    “신등을 찾아달라고? 바쁘니 혼자 가서 놀거라.”

    푸른 연기 지팡이를 든 리기마는 그를 돌아보지도 않고 쫓으려 들었다.

    “곡 수사, 리기마 수사는 도와주시지 않겠다는데요? 저를 도와 적을 처리해 주겠다고 약속하시지 않았습니까. 지금이 그때입니다.”

    한립이 손을 들어 교삼 등 몇몇이 기마자를 가로막고 있는 곳을 가리켰다.

    “약속은 당연히 지키겠네만 지금은 더 중요한 일이 있어! 저기 사람이 저리 많은데 그놈 한 명을 못 잡겠나.”

    곡린은 망설임 없이 답했다.

    “두 분, 이걸 찾는 것 아니셨습니까?”

    빙긋 웃은 한립의 말에 곡린이 고개를 돌렸다.

    리기마도 연기 지팡이를 거두고 네 다리를 굴러 그가 있는 곳을 보았다.

    한립은 손에 핏빛 영패 두 개를 들고 흔들어 보였다. 원래는 지금 내주려 한 것이 아니었다.

    특히 곡린의 본명원패를 지니고 있으면 금동이 그를 상대할 때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감응을 피하기 위해 화지동천에 고이 모셔 두었던 것을 그들이 얌전히 도우려 하지 않자 꺼낸 것이다.

    “진작 찾았다고 말할 것이지. 본 노조를 대신해 본명원패를 찾아주면 후한 보상을 하겠다고 말했었다. 그 말을 지키마.”

    리기마가 입을 크게 벌리고 웃었다.

    “아……. 후한 보상은 일단 기마자나 잡고 이야기하시지요.”

    한립은 보여주기만 하고 손을 거두어 영패를 넣었다.

    “토기를 보지 않으면 매를 풀지 않는다더니, 네 녀석이 딱 그렇구나. 도와주면 될 게 아니냐.”

    리기마는 말하며 화가 난 것처럼 얼굴을 굳혔다.

    “가서 그놈이나 죽입시다.”

    미간을 좁힌 곡린이 말했다.

    리기마가 하얀 돌풍으로 변해 사라지고 한립과 곡린이 그 뒤를 따라갔다.

    통천검파 일행은 진작 수백 리 밖으로 달아나 있었다.

    뇌옥책이 내내 업고 다니던 도윤진인이 이때 눈을 떴다.

    그는 마른기침을 토해내며 뒤를 돌아 하늘과 땅이 아예 색이 달라진 난장판이 된 공간을 보았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게냐?”

    도윤진인의 목소리가 떨렸다.

    “사존, 깨어나신 겁니까?”

    뇌옥책이 기뻐하며 그를 내려주고 그가 기절한 다음 있었던 일을 대략 설명했다.

    “노조의 잔혼이……. 세월신등을 되찾지 못한 것이 죄로다. 세월탑의 구금력이 사라졌으니 탑 안의 요마들이 바깥으로 나와 우리 금원선역에 어떤 해를 끼칠지 알 수 없게 되었구나.”

    도윤진인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장문인, 이런 상황에서 살아서 빠져나가는 것만으로도 운이 좋은 겁니다.”

    다른 장로가 그를 위로했다.

    “안 될 말이네. 노부의 대에서 통천검파가 신망을 잃게 둘 순 없어. 선존께서는 잔혼으로나마 남아 최선을 다해 흑천노마와 격전을 펼치고 계시네. 이 늙은이의 목숨을 바치더라도 신등을 꼭 빼앗아 다시 탑의 요마들을 봉인해야 해!”

    “사존, 신등이 진법을 벗어난 지 오래라 탑 안의 요마들은 벌써 달아났을 겁니다. 탑 바깥에서 각 문파의 제자들이 그들을 잠시 막아줄지 모르니, 지금 해야 할 일은 한시라도 빨리 세월탑을 나서 유적 공간 자체에서 빠져나간 다음 선존께서 남겨두신 마지막 방법을 쓰는 겁니다.”

    뇌옥책이 급히 만류했다.

    “세월탑과 유적 공간 전체를 없애잔 소리냐?”

    “그러면 유적 안에 남아 있는 다른 문파 제자들도 죽을 거 아니에요?”

    소안천이 듣고 있다 물었다.

    “탑 안의 요마들이 탈출하면 더 많은 사상자가 날 겁니다. 다른 방법이 없으니 경중을 따져 선택할 밖에요.”

    뇌옥책은 그녀를 마주 보지 않고 말했다.

    “그래, 어차피 보물에 눈이 멀어 유적에 들어온 자들이니 죽는다 해도 할 말은 없을 것이다. 신등을 되찾으면 종문의 영광도 되찾을 수 있을 것이야!”

    도윤진인이 엄숙하게 결정을 내리자 소안천은 입을 달싹거리다 말았다.

    7층 공간 끝까지 날아간 그들은 이제 금제가 없었기에 그대로 탑을 벗어날 수 있었다.

    그들이 떠나고 검은 바위를 밀고 누군가 그 아래 땅속에서 기어 나왔다.

    웅산이었다.

    미간에 금색 부적을 붙이고 있던 그는 오래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통천검파 녀석들이 유적 전체를 없애려 하고 있어. 어서 떠나야 해.”

    손을 뒤집은 그는 금색 장검과 황토색 인장을 불러냈다.

    오행인공대진의 주축을 이루던 선기 중 두 개를 챙겨온 것이다.

    두 선기 모두 이전보다 빛이 많이 줄어 있었다.

    “이것들이라도 건졌으니 목숨을 건 보람은 있구나.”

    입가에 웃음을 걸고 보물을 챙긴 그는 한창 싸우고 있는 이들을 힐끗 돌아보았다.

    “잘들 놀아봐라. 이 몸은 갈 테니!”

    그때 위쪽으로 남색 둔광이 지나갔다.

    남안이라는 여자가 먼 곳으로 날아가는 중인 듯했다.

    * * *

    세월탑 바깥도 혼란스러웠다.

    탑이 눈에 보이게 쩍쩍 갈라져 강렬한 공간 파동이 은빛과 함께 새어 나왔고, 그 틈에서 인족, 요족 그리고 마족까지 각양각색의 인물들이 쏟아져 나와 하늘을 가렸다.

    바깥에서 지키고 서 있던 각 문파의 제자들이 깜짝 놀라 물러나려다가 적잖은 이들이 탑을 빠져나온 수사들과 맞붙어 약속이라도 한 듯이 방어선을 구축했다.

    처음에는 잔뜩 모여 있던 바깥사람들이 우위를 점했지만 탑 안에서 수도 없이 새로운 존재들이 쏟아져 나오며, 전투 소리와 함성이 하늘을 찌르고 쌍방에서 수많은 사상자가 나오고 있었다.

    * * *

    한편 열심히 날아간 한립과 곡린은 교삼이 벌써 윤회영역을 펼쳐 일대를 감싸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녀의 암홍색 영역 안에는 기마자의 시간영역인 금색 영역이 펼쳐져 있었다.

    두 영역에 뛰어든 리기마는 움직임이 느릿해졌다가 네 다리를 미친 듯이 움직여 말굽 밑에서 하얀 돌풍을 일으켜 원래 속도를 되찾았다.

    한립은 곡린과 그 안으로 들어간 순간 시간영역을 펼쳤다.

    그들이 다가갔을 때 기마자는 멈춰서서 다른 사람들과 대치하고 있었다.

    “제단에서 얻은 물건들만 내놓으면 보내주겠어요.”

    수결을 맺은 교삼은 공격을 지속하지 않고 말했다.

    “세월신등이 내 손 안에 있는데 너희를 두려워할 것 같으냐?”

    기마자가 차갑게 웃음 지었다.

    “우리까지 나선다면?”

    한립이 나타나 끼어들었다.

    리기마에 곡린까지 데리고 등장한 한립을 본 기마자는 안색이 달라졌다.

    교삼 일행만으로도 골치가 아팠는데 곡린과 류자재 그리고 리기마는 전부 대라경 수사라 세월신등을 지녔다고 해도 쪽수에서 밀렸다.

    번뜩 무언가를 떠올린 기마자가 핏빛 영패를 꺼내 들었다.

    “이건 당신 거겠지요? 본명원패가 부서지는 걸 보기 싫으면 저놈을 죽여야 할 겁니다.”

    기마자는 영패의 기운을 느끼고 류자재를 향해 명령했다.

    류자재는 그의 손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한립을 보고 망설였다.

    “선택의 여지가 있는 것 같습니까?”

    입꼬리를 끌어올린 기마자가 소리쳤다.

    “미안하게 되었다…….”

    노기가 스친 류자재는 한립을 향해 번득 이동했다.

    “나도 미안하지만, 이 녀석을 죽게 둘 수는 없습니다.”

    한립이 긴말하기 전에 곡린이 나서서 그를 막았다.

    어떻게 할까 생각하던 리기마는 거대한 돌풍으로 변해 곡린과 류자재를 품고 세 명의 영역이 중첩된 영역 바깥으로 나가버렸다.

    “흐흐, 저들도 갔는데 이제 어쩔 것이냐?”

    가소롭다는 기마자의 웃음에 한립, 교삼 그리고 호삼이 시선을 마주치곤 삼각구도를 이룬 채 기마자를 포위했다.

    “그래, 그 용기는 가상하다만 세월신등의 진정한 위력을 몰라 그러는 것이지!”

    기마자는 말을 하다 말고 두 손을 뻗었다.

    연꽃 모양 금색 등불이 날아올라 빙글빙글 회전했고, 바람도 없이 펄럭이던 그의 소매에서 금색 횃불이 날아올랐다.

    “시간과 공간을 가르고 불이 흐르지 않는 곳에 세월도 끝이 없으리. 신등이여, 빛나라!”

    연꽃 모양 등불의 심지에서 금빛이 만발하더니 금색 태양처럼 고공으로 떠올라 구름처럼 파문을 일으켰다.

    “이건……. 막아야 합니다!”

    한립이 크게 소리쳤다.

    천살진옥공을 전력으로 운용한 그는 맹렬히 손을 뻗어 청죽봉운검 36자루를 합쳐 짙은 뇌전을 기마자를 향해 뿌렸다.

    교삼도 팔각 영패를 뿜어 암홍색 연기를 품은 성벽처럼 기마자를 향해 나아가게 했고, 호삼도 천호화혈도에서 거대한 핏빛 칼날 수백 개를 방출해 하늘을 갈랐다.

    세 방향에서 하나같이 강력한 공격이 날아가자, 대라경 수사라해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러나 기마자는 그렇게 생각지 않는지 수결을 맺고 횃불과 세월신등을 발동하는 데만 집중했다.

    콰콰쾅!

    금색 뇌전을 품은 청죽봉운검과 암홍색 영패 장벽, 핏빛 칼날들이 막 도달하려는데 금색 횃불과 세월신등이 포개졌다.

    그 순간 날카로운 금빛이 터져 나와 한립 무리의 시야를 차단했다.

    굉음이 들리고 어쩔 수 없이 뒤로 물러선 한립은 청죽봉운검이 웅, 울며 돌아오는 것을 보았다.

    눈을 가늘게 뜨니 기마자가 있던 곳에 하늘을 받치는 기둥 같은 것이 보였다.

    차차 뿌연 연기가 가시고 그게 산만한 세월신등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저게, 세월신등이라고?”

    교삼의 목소리에 한립이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머리카락이 헝클어졌을 뿐 다친 것 같지는 않았다.

    “비술을 이용해 세월신등을 장악한 것 같습니다. 허나 오래 비술을 유지할 수는 없을 테니 조심해서 상대하지요.”

    미간을 좁힌 한립이 말했다.

    “그리 가볍게 볼 일이 아닙니다. 신등은 크기는 커졌지만 기운을 방출하지 않고 갈무리하고 있습니다. 정상이 아니에요.”

    이때 먼지를 뒤집어쓴 호삼이 날아들었다.

    눈을 감고 자세히 신등을 관찰하던 한립의 표정도 달라졌다.

    “호삼 수사의 말대로군요. 기마자가 세월신등을 자신의 영역과 융합해 역령처럼 부리려 하고 있습니다.”

    한립은 신등을 주시하며 말했다.

    이때 거대 신등에서 홀연히 기마자의 신영이 나타나 등잔의 연꽃잎 중 하나에 서더니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하하. 한 수사, 이래도 승산이 있겠는가?”

    기마자는 웃어젖히며 그가 대답할 시간을 주지 않고 신등을 가리켰다.

    웅웅 진동한 세원신등의 심지에서 화염이 폭발적으로 일어 무수히 많은 불똥이 사방팔방으로 튀었다.

    그걸 본 한립 무리는 서둘러 움직여 불똥들을 피하려 했다.

    불똥들은 흩어지지 않고 분분히 사람 크기의 금색 등잔으로 변해 세월신등이 분신술을 펼친 것만 같았다.

    한립은 세월신등 분신들의 출현에 기마자의 영역이 10배로 강해져 그의 시간영역과 힘을 겨루는 것을 느꼈다.

    “어디 이것도 당해 보거라…….”

    기마자가 소리쳤다.

    그의 소매에서 붉은 점들이 쏟아져 나와 하늘을 빨갛게 물들였다.

    “이런, 화세형충!”

    한립이 큰 소리로 경고했다.

    화세형충들은 세 무리로 나뉘어 한립, 교삼 그리고 호삼을 덮쳤다.

    경고를 들은 교삼과 호삼이 서둘러 각자의 신통을 펼쳐 몸을 보호했다.

    교삼의 법포에서 빼곡하게 주술문자가 떠올라 공간법칙의 힘을 품은 빛을 발산했고, 호삼은 은색 비늘 갑옷을 꺼내 입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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