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83화. 금색 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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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무슨 하잘것없는 질문들이냐. 어려운 것을 좀 물어봐야지!”
“어려운 것이요?”
“뭐, 수행에 관한 것이나……. 하긴 그것도 어려울 것은 없지. 그럼…….”
흑천마조는 자신이 말해놓고도 어떤 질문이 좋을지 떠올리지 못하고 있었다.
“송구스럽지만 그럼 구유마동에 대해 여쭙겠습니다. 공법에는 분명 ‘위로는 구중천 아래로는 저승까지 볼 수 있다’라고 적혀 있었는데 어째서 탑 안의 환진 금제들은 구유마동으로 꿰뚫어 볼 수 없는 것입니까?”
눈썹을 끌어올린 한립은 어디 한 번 시험해 보자는 마음으로 궁금하던 것을 물었다.
“그리 어려운 질문은 아니지만 그럭저럭 답해줄 만하구나. 구유마동을 수련할 때 마기를 끌어들인 적이 있느냐?”
“기본적으로 마기로 눈을 씻어내야 하는 신통이라 그렇게 했었습니다.”
“그럼 답 나왔네. 마족의 공법을 수련해 체내의 마기를 끌어다 썼을 테니 외부의 마기를 이용했을 때처럼 마기가 정순하고 정순하지 않고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문제는 이전에 수련했던 다른 영목신통에 있겠지.”
흑천마조는 진지하게 설명해주었다.
“제가 이전에 다른 영목신통을 수련했다는 것도 알아보시는군요. 모르시는 게 없는 분 같습니다.”
한립은 생각을 정리하며 재차 그를 칭찬했다.
상대의 말에 따르면 명청령안을 수련했던 것이 현재의 영목신통과 충돌을 빚는 듯했다.
“속성이 다르고 수련방법이 다른 두 영목신통을 익혔으니 충돌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지. 그럴 때는…….”
흑천마조는 간단명료하게 한립의 의문을 풀어주었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한 가지 더 궁금한 것이 있는데, 이곳을 봉쇄해 저희를 여기 남겨두신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지요?”
대화가 통하자 한립은 떠보듯 물었다.
그런데 그 말을 들은 흑천마조가 갑자기 멍해져서는 자신의 턱을 괴고 깊은 고뇌에 잠길 줄 누가 알았겠는가.
“내가 왜 그랬지? 내가 뭘 하려고 했더라, 내가 그러니까…….”
‘뭐라고?’
그가 아예 엉덩이를 붙이고 바닥에 내려앉아 중얼거리는 것을 본 이들은 어이가 없어 할 말을 잃었다.
“생각났다, 생각이 났어……. 난 부인과 아들을 찾고 있었다. 내 처와 아들을 본 적이 있느냐? 어디 있는지 아느냐?”
한참 만에 고개를 든 그가 갑자기 급히 물었다.
한립은 산발한 사내를 보며 무슨 생각이 들었으나 고개를 저었다.
“죄송합니다, 선배님.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모른다고? 네가 어찌 모를 수 있어!”
흑천마조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제가 압니다!”
이때 기마자가 웃으며 걸어왔다.
한립 앞에 검은 그림자가 번득 지나가고, 흑천마조가 귀신처럼 기마자 앞에 나타나 그의 어깨를 붙들었다.
엄청난 힘에 대라경 수행을 지닌 기마자도 꼼짝하지 못한 채 미소가 굳었다.
그제야 다른 사람들도 놀라 무의식중에 흑천마조에게서 거리를 벌렸다.
한립도 교삼, 호삼을 따라 멀찍이 물러났다.
흑천마조에게서 벗어나 안심이 되면서도 기마자의 돌발 행동이 마음에 걸렸다.
미라노조의 제자였던 기마자는 남의 뒤통수를 치는데 전문가였고 정신이 온전치 못한 흑천마조를 어떻게 구슬릴지 몰랐다.
“내 처와 아들이 어디 있는지 어서 말해, 어서!”
흑천마조가 기마자의 어깨를 붙잡고 세게 흔들었다.
“당신의 이름은 석공묵이고 부인 되시는 분은 금령부인이 맞으시지요?”
기마자는 어깨가 으스러질 것 같은 걸 참고 웃음을 지어 보였다.
‘석공묵…….’
한립은 그 이름을 귀 기울여 들어두었다.
“그래, 다 맞다! 네가 정말 아는구나! 어서 날 그들에게 데려다줘!”
흥분한 흑천마조는 두 손에 더 힘을 주었다.
“힘이, 힘이 넘치셔서 제 몸으로 견딜 수 없을 것 같으니 일단 놓고 말씀하시지요.”
식은땀을 흘린 기마자가 급히 말했다.
“아, 미안하네. 이제 안내 해주게.”
흑천마조는 두 손을 놓고 그를 풀어주었다.
“석 수사, 금령부인이 어디 있는 줄은 알지만 지금 모셔다드릴 수는 없겠습니다.”
“뭐라고! 감히 싫다고!”
기마자의 한숨 섞인 말에 흑천마조가 흉흉한 눈빛으로 그의 목을 틀어쥐었다.
살기가 형체를 갖춘 것처럼 퍼져 한립과 다른 사람들도 물에 빠져 허우적대는 것처럼 고통을 느껴야 했다.
“오, 오해십니다. 저야 모셔다드리고 싶은데, 부인과 귀댁 공자가 융천선역(融天仙域) 적융도조에게 붙들려 있는 것을 어쩌겠습니까. 석 수사가 대라경 수사들 중에서는 적수가 없겠으나 도조를 상대로는 무리시지 않겠습니까?”
“뭐라, 적융도조 그 할망구가! 불의 본원 도조인 할망구라…… 도조들 중에서도 실력이 열 손가락 안에 꼽힐 텐데, 지금 내 실력으로 맞붙을 수는 없지.”
흑천마조는 노기를 가라앉히고 기마자를 놓아주었다.
“걱정하실 것 하나 없습니다. 제가 노력 끝에 적융도조와 협의를 맺어 두 가지 물건만 가져가면 금령부인과 공자를 풀어주기로 다 이야기를 끝내 놨으니까요.”
조심스럽게 그를 살피던 기마자가 본론을 꺼냈다.
“뭔가? 두 개가 아닌 스무 개라도 찾아다 주지!”
흑천마조가 좋아하며 답하는데 한립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세월신등과 <대오행환세결>입니다! 태세선부에 제가 온 것도 그것을 구하기 위해서였는데 마침 공법을 가진 자가 이곳에 있으니 하늘이 금령부인과 공자가 하루빨리 적융도조의 손에서 벗어날 수 있게 돕고 계신 셈이지요.”
기마자의 말에 한립의 안색이 급변했다.
교삼과 나머지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흠, 세월신등은 어차피 짜증 나는 물건이니 없애든 가져다 줘버리든 상관없다.”
흑천마조는 흐릿하게 사라져 오색 제단이 사라진 뒤 공중에 둥실 떠있던 신등 앞으로 이동했다.
“신등을 취할 방법이 있으십니까?”
“그게 뭐 어렵다고!”
기마자의 말에 코웃음을 친 흑천마조가 다섯 개의 검은 그림자로 갈라져 세월신등을 중간에 두고 자리를 잡았다.
다섯 흑천마조가 동시에 손을 뻗어 검은빛을 일으켰다.
촤악!
허공이 종이처럼 찢어져 세월신등을 중심으로 원형의 공간 균열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공간 균열 속에서 막대한 흡입력이 발생해 주변 사물을 끌어당겼고, 다른 수사들은 혹시나 휘말릴까 봐 최대한 그곳에서 멀어졌다.
웅웅웅.
그 흡입력 속에서 금색 사슬 형태의 주술문자들이 떠올라 거대한 그물을 만들어냈다.
그물의 중심이 세월신등을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저건…….”
한립이 금색 그물을 보고 신기해했다.
다들 세월신등 뒤에 그런 진법이 펼쳐져 있는 줄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스스슥.
한 손으로 공간 균열을 만든 다섯 흑천마조들은 다른 손을 칼처럼 세워 새까만 빛을 뿜었다.
검은빛이 공간을 가를 때마다 원기의 파동과 법칙의 힘, 아니 모든 것들이 침식되어 사라져 갔다.
“만물을 침식하다니……. 마기를 저 정도까지 운영할 줄이야!”
눈을 빛낸 기마자가 중얼거렸다.
한립도 검은 손바닥 다섯 개가 벌인 일을 보고 가슴이 뛰었다.
<천살진옥공>, <구유마동>도 마역의 신통이었지만 흑천마조의 허무장(虛無掌)에 비하면 보름달 앞의 반딧불과 같았다.
다섯 흑천마조들이 막 손을 뻗자마자 까만 손바닥 허상들이 금색 그물에 구멍을 내고 부르르 몸을 떤 세월신등은 다시 금색 불길을 분출했다.
안타깝게도 이때는 이미 늦어 구멍 난 금색 그물들이 손바닥 허상의 검은 빛에 침식된 후였다.
쿠쿠쿵.
금색 그물이 터져 금색 빛으로 흩어지자 세월전 바깥 하늘에 금빛 광채가 떠올라 강렬한 시간법칙 파동을 내뿜었다.
천지원기가 요동치고 수많은 오색 빛방울이 떠올라 시야 끝까지 이어졌다가 빠르게 빛을 잃고 사라졌다.
세월탑 7층에 가득하던 시간법칙의 힘이 그 순간 모두 소실되었다.
이와 동시에 다른 여섯 개의 층에서도 하늘에 금색 광채가 나타났다가 어두워지며 공간의 시간법칙 파동을 거두어갔다.
세월탑 바깥에서 보이던 탑 꼭대기의 불꽃마저 깜빡이다가 훅, 꺼져버렸다.
세원전 잔해 속에서 금색 그물이 망가진 세월신등은 더는 버티지 못하고 흑천마조의 검은빛에 끌려 나왔다.
이 모든 일은 흑천마조가 나서고 두세 호흡 만에 지나갔다.
대라경 최고봉의 수행을 지닌 마족 수사의 진정한 실력을 보여준 것이다.
한립은 이전에 실성해 독백하던 사람과 그가 동일인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고 멀지 않은 곳의 뇌옥책 등은 얼굴빛이 흙색이 되었다.
다섯 흑천마조가 번득 하나로 합쳐져 세월신등을 손에 들고 하하, 웃음을 흘렸다.
노마두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그걸 휙 던져주었고, 세월신등을 받은 기마자는 흥분을 애써 감추었다.
“너는 <대오행환세결> 공법을 1부 복제해서 내게 다오. 미라노조 그 까까머리 중놈하고는 내가 친구이니, 후배 벌 되는 네 녀석이 손해 보게는 하지 않을 것이야. 태고 유적에서 우연히 얻은 <오뢰정법진경(五雷正法眞經)>이 있는데, 그게 한 세계의 뇌전공법을 모두 정리한 경전이라 무상의 뇌도법칙을 담고 있어 <대오행환세결> 못지않을 것이다.”
흑천마조는 보라색 옥간을 꺼내 한립에게 던졌다. 태연한 얼굴로 옥간을 받으며 한립은 대책을 마련 중이었다.
정신이 오락가락해서 순간순간 기분이 달라지는 흑천마조가 기마자의 말을 믿고 있으니 한립은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 고민 중이었다.
“석 선배님, 저자의 말을 믿으셔선 안 됩니다. 기마자는 천정 사람으로 현 선옥의 옥주라 방금 한 말은 대부분 거짓일 겁니다. 선배님을 속여 천정으로 데리고 가서 다른 도조들, 심지어 시간도조가 상대하도록 만들 속셈일지도 모르고요. 저와 한 수사는 전부 윤회전 사람으로 저희야말로 선배님의 사람입니다.”
한립이 말을 꺼내기 전에 물러나 있던 교삼이 앞으로 나서서 말하며 얼굴에 쓴 윤회전 가면을 드러냈다.
“시간도조, 고혹금!”
흑천도조는 미쳐 날뛰지 않았고, 오히려 시간도조란 소리에 정신이 좀 든 것 같았다.
“내가 천정 사람이라고? 헛소리! 석 선배님께서는 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보실 겁니다. 너희 윤회전 것들은 금령부인과 석 공자를 구하는 것을 방해할 속셈이냐!”
기마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올 줄 알았는지 당당하게 말했다.
“진언문 <단시류화집>을 수련했으니 천정 출신은 아닐 터.”
흑천마조가 기마자를 힐끗 보고 혼잣말을 했다.
“역시 현명하십니다.”
기마자는 교삼과 한립이 끼어들 틈을 주지 않고 손을 저어 응비요마를 비롯한 요마들의 말라비틀어진 시체를 불러냈다.
“석 수사를 모시던 창산오마가 배신해서 여기에 갇히게 된 것으로 압니다. 제가 이 셋을 죽이고 나머지 둘은 오행인공대진 안에서 죽었으니 분이 좀 풀리셨는지요.”
“그 은혜도 모르던 것들! 불쌍해서 거둬주었더니 중요한 순간에 노부를 배신했었지!”
흑천마조는 세 구의 시체를 보고 손바닥에서 검은빛을 반짝였다. 시체들이 폭발해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한립과 교삼은 기마자가 흑천마조의 비위를 맞추는 것을 보고 마음이 급해졌다.
“어서 <대오행환세결> 공법을 내놓거라. 그럼 방금 전 일은 없던 것으로 해주마.”
시체를 부숴서 화를 푼 흑천마조가 한립을 보았다.
“선배님께서 제 공법을 원하신다니 드려야겠으나 제가 지닌 <대오행환세결>은 완전하지가 않습니다. 사존께서 앞부분만 전수해 주셔서 내어드려도 소용이 없으실 텐데요.”
“뭐라?”
“허나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게는 없어도 <대오행환세결> 공법 전체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으니까요. 진언문은 천정에 의해 무너졌지만 사존께서 본문 공법이 실전될까 다른 곳에 봉인해두셨습니다. 특별한 곳이라 강력한 시간선기의 도움이 있어야 들어갈 수 있기에 세월신등을 구하기 위해 태세선부에 들어온 것입니다. 석 선배님, 저를 믿어주신다면 신등을 제게 빌려주시지요. 10년 내로 <대오행환세결> 공법 전부를 가져다드릴 것을 약속드리고, 선배님의 부인과 아드님을 구하는 것도 돕겠습니다. 마음이 놓이지 않으시면 선배님께서 저와 동행하셔도 되고요.”
한립은 공손한 어투로 기마자가 끼어들 틈을 주지 않고 줄줄 말했다. 그 말에 기마자는 한립의 교활함을 욕했다.
흑천마조의 기색도 누그러들었다.
“한립, 내 두 눈으로 사존께서 <대오행환세결> 전부를 네게 전수하시는 것을 보았다. 석 수사 앞에서 거짓말을 하다니! 석 수사, 교활한 놈이니 믿으시면 안 됩니다. 공법은 분명 저물법기 안에 있을 테니 조사해 보시지요.”
기마자가 그걸 보고 입을 열었다.
“내 저물법기를 확인하고 싶으면 그렇게 하세요, 기마자 수사. 허나 기마자 수사도 지니고 있는 저물법기를 전부 석 수사에게 보여야 할 겁니다. 내 장담컨대 그 안에 당신의 신분을 증명할 수 있는 물건이 있을 거예요.”
한립은 그 말에 기뻐하며 자신의 저물법기를 내놓으려 했다.
움찔한 기마자는 괜한 말을 한 것을 후회했다.
저물법기 안에 천정 물건이 한두 개가 아니고 선옥 옥주임을 나타내는 신분 영패도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 물러서면 다 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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