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81화. 결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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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단 깊은 곳 지하 공간에는 시뻘건 용암이 가득했고, 용암이 모여 만들어진 붉은 용암호수에 검은 암석 기둥 여덟 개가 세워진 새까만 암석이 떠 있었다.
그 암석 기둥에 깊이 박힌 금색 사슬이 바닥에 엎드린 머리를 산발한 장작개비처럼 마른 사내의 가슴과 양팔 다리 등을 관통해 암석 중앙에 묶어 두고 있었다.
사내가 누운 바닥의 고대 주술문자도 강렬한 금제의 힘이 물씬 풍겼다.
한립은 새까만 동굴을 보면서 왠지 바닥이 없는 깊은 심연을 들여다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아 고개를 저었다.
뭔가 진법이 이상했는데 어디가 이상한지 집어낼 수가 없었다.
그때 마른 사내가 고개를 들어 그와 시선을 마주치고 씩 웃음 지었다.
한껏 이를 드러내고 웃는 모습이 어딘가 괴이했다.
깜짝 놀란 한립은 연신술을 발동했지만 이상한 점을 찾을 수 없어 조금 마음을 놓았다.
다들 한립의 광적인 행위에 놀라 아무도 검은 동굴 주변의 한 줄기 연기 가 뇌옥책 등이 있는 인근에서 사라진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골치 아프게 되었구나. 이렇게 된 것 끝장을 보자!”
제단을 본 도윤진인이 탄식하더니 서늘한 눈빛으로 손으로 들어 노란 인장을 불러들였다.
그의 손에서 핏빛이 번득 날아가 인으로 스며들고 짙은 흙 속성 법칙의 기운이 발산되었다.
다섯 개의 선기들이 줄줄이 떠올라 한번도 본적 없는 밝은 빛을 일으켜 옥기둥을 맡고 있던 다섯 수사들의 선령력을 미친 듯이 빨아들였다.
휘이이이.
동시에 오색 보호막이 수축해 망가진 제단을 가루로 만들고 지하로 뚫린 구멍에서 흘러나오는 검은 연기까지 흩어버리고 있었다.
“이게 오행인공대진의 진정한 위력이로구나. 만물을 다시 흙먼지로 되돌리고 있어.”
기마자가 중얼거렸다.
오색 빛은 서서히 동굴을 타고 내려가 용암 호수 위 새까만 암석과 그곳의 돌기둥에 묶여 있던 사내를 향해 접근했다.
빛의 장막 안에서 새까만 암석이 서서히 가루가 되어갔지만 금색 사슬이 온몸을 관통한 회백발 사내는 멸시하는 눈빛을 띠고 있었다.
한립이 속으로 머리카락을 흩날리면서도 즉시 가루로 돌아가지 않는 사내를 주시하자, 그도 느꼈는지 슬쩍 고개를 틀어 한립을 향해 괴상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도윤진인도 그가 사라지지 않는 것을 보고 체내의 선령력을 마구 부어 넣었다.
공중의 부적이 재로 변해 금색 불씨를 남기고 세월신등으로 떨어져 심지의 불길과 하나가 되었다.
쿠쿵!
오색 장막이 제단의 구멍을 더욱 짙게 채우며 어렴풋이 보이던 마른 사내가 자취를 감추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 구슬처럼 작아진 오색 보호막이 사라지고 모든 것이 가루로 변했다.
마지막으로 구슬마저 퐁 거품처럼 터지자 모든 것이 꿈결처럼 사라졌다.
“모든 것은 땅에서 태어나 땅으로 돌아가는 것이지. 드디어 마두를 죽였구나.”
도윤진인은 긴장된 얼굴을 풀고 길게 숨을 내쉬다 휘청거렸다. 뇌옥책 등 다섯 명도 헐떡거리며 급히 단약을 복용해 금제를 유지했다.
“봉인을 부수고 보물을 훔친 벌을 받을 차례다.”
몸을 가눈 도윤진인의 시선이 한립 무리에게 향했다.
대라경 수사인 도윤진인이 세월신등까지 손에 넣었으니 기력이 떨어졌다고 해도 그들이 이길 가능성은 없었다.
기마자가 가라앉은 눈빛으로 도윤진인과 한립을 번갈아 보며 어떻게 하면 도윤진인과 충돌하지 않고 한립을 죽여 후환을 없앨지 생각했다.
교삼은 호삼과 서서 근심 가득한 눈빛을 했다.
각기 다른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이변이 발생했다.
푹!
한 발 앞으로 나서 뇌옥책 등과 함께 모이려던 도윤진인의 배를 뚫고 기다란 장도의 칼날이 삐져나온 것이다.
노한 도윤진인 등 뒤로 손을 뻗어 후려쳤으나 누군가 손길을 피해 물러섰다.
갑작스러운 사태에 다들 어안이 벙벙해했다.
심지어 뇌옥책은 제 눈으로 본 장면을 믿을 수 없었다.
“문중, 뭐 하는 것인가!”
도윤진인 뒤에 멀찍이 떨어져 선 문중이 그의 꾸짖음에 울분 가득한 눈빛을 보냈다.
방금 공격은 정말 허를 찌르는 기습이었고 살기나 기운이 새어 나오지 않아 도윤진인도 막을 수 없었다.
막 오행인공대진으로 마두를 죽인 도윤진인이 긴장을 풀고 방심을 한 탓도 있었다.
“크하하하, 뭐 하냐고요? 내가 뭐 하는 것 같습니까! 사형만 편애하는 저 뻔뻔스러운 늙은이를 죽이려 했지요!”
문중은 광기에 휩싸여 웃음을 터트렸다.
“아니, 대체 왜! 자네 정신이 나간 건가! 저분은 장문인이자 우리의 은사님일세!”
뇌옥책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어 버럭 화를 냈다.
“나나 사형이나 다 같은 제자인데 왜 통천검진은 사형만 전수를 해주는데요? 사형, 아니 당신 뇌옥책만 영원히 빛나고 나는 그 그림자 속에서 영원히 고통스럽게 살아야 한단 법이라도 있는 겁니까? 이건 너무 불공평합니다! 억울해요! 너무 억울해…….”
억울하다고 외치는 문중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문중, 자네…….”
뇌옥책이 고통스러운 얼굴로 말을 잇지 못했고, 도윤진인은 배에 박힌 수정 장도를 빼내며 격렬히 피가 섞인 기침을 내뱉었다.
중상을 입은 장문인을 보고 뇌옥책이 문중을 욕하려는데 도윤진인이 막았다.
“문중이 원망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따로 이야기를 나누어 마음의 매듭을 푼 줄 알았건만 그렇지 못했던 게야. 그 한이 마두가 문중을 집어삼킬 빌미가 될 줄이야…….”
입가의 피를 닦아낸 도윤진인은 침착하게 말했다.
“사존,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뇌옥책이 놀라 물었다.
“마두는 심마 법칙을 익혀 능수능란하게 사람의 마음을 조종한다. 어떤 틈이든 놓치지 않고 파고들지. 문중도 그 자에게 당한 것이다.”
도윤진인의 설명에 한립이 가슴이 서늘해졌다.
“우하하! 하하하하! 시원해, 아주 속이 시원하구나! 오랜 세월 꽉 막혔던 가슴이 탁 트이는 기분이야!”
문중은 그러거나 말거나 미친 사람처럼 웃고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상태가 더 나빠지는 듯했다.
금색 단약을 먹어 대충 부상을 억누른 도윤진인이 문중을 쳐다보았다.
강직한 성격에 평소 사소한 잘못도 보아 넘기지 못하던 그가 오히려 지금은 가련하다는 듯 실성한 제자를 보고 있었다.
바로 그때 문중의 신형이 흐릿해지더니 도윤진인의 심장을 향해 손톱을 뻗으며 달려들었다.
퍽!
도윤진인은 손등으로 문중의 팔을 내리쳐 아래로 고꾸라트린 다음, 다른 손으로 뒷덜미를 찍어 바늘처럼 가느다란 수정빛을 주입했다.
헉, 숨을 들이마신 문중은 그대로 기절해 버렸다.
뇌옥책은 사존도 무사하고 사제도 죽지 않은 것에 겨우 안도했다.
그런데 긴장을 풀려던 그가 갑자기 화들짝 놀라 진작 가루가 된 제단 쪽을 쳐다보았다.
느닷없이 검은 연기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그는 물론 강대한 의식을 지닌 한립도 검은 연기가 언제 어디서 나타난 것인지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휘잉!
휘몰아치던 검은 연기가 뭉쳐 약간 구부정한 자세의 사내로 변했다.
먹처럼 까만 피부의 구부정한 사내는 보랏빛 왼쪽 눈동자 안에서는 보라색 별들이 떼 지어 움직이고 푸른 오른쪽 눈동자는 아주 탁했다.
콧대는 높고 입술은 아주 얇아 제대로 단장만 하면 준수한 외모를 지녔을 중년인은 회백발을 어깨까지 늘어트리고 턱수염을 기르고 있어 언뜻 보면 반백 살 노인 같기도 했다.
사내는 나타나자마자 몸을 웅크리고 두 팔로 무릎을 감싼 채 무어라 중얼거렸는데 뭐라고 하는지는 잘 들리지 않았다.
다들 이게 뭔 일인지 궁금해 하고 있을 때 중년인의 등에서 검은 소용돌이가 나타났다.
곧 대전 내에 있던 사람들의 안색이 싹 달라지며 하나같이 눈을 부릅떴다.
한 명도 빠짐없이 이마에서 검은 수정실이 빠져나와 사내 등 뒤에 생긴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간 것이다.
죽은 요마들의 시체에서도 검은 수정실이 빠져나갔다.
한립은 미간에서 수정실이 날아오른 순간 잡으려 했지만 마치 허상인 것처럼 그의 손을 빠져나갔다.
그 시각, 세월탑 바깥의 각 문파 제자들과 장로들은 바글바글 모여서 진을 치고 안으로 들어간 자신의 문파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뇌옥책 등이 들어간 지도 상당한 시간이 지났기에 자리 문제로 몇 번 다툼이 일어났다가 각 문파 장로들이 합의해 겨우 소란이 잦아들은 직후였다.
“흠?”
갑자기 황혼이 드리운 탑 바깥에서 가부좌를 틀고 휴식이나 취하고 있던 각파 제자들의 머리 위로 한 줄기 검은 수정실이 빠져나왔다.
검은 수정실들은 하늘 위로 떠올라 먹구름처럼 뭉쳤다가 세월탑으로 흘러들어 사라졌다.
다들 무슨 일인지 알아내고 싶었지만 실마리도 찾을 수 없었다.
세월탑 내부 각층에 잡혀 있던 요마들의 몸에서도 검은 수정실이 날아올라 허공으로 녹아들었다.
어디서 왔든 간에 모든 수정실의 목적지는 세월전 안에 있는 중년 사내의 검은 소용돌이였다.
검은 수정실들이 공간을 넘어 부단히 중년 사내 등 뒤의 소용돌이로 빨려 들어가는 것을 본 한립은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의식의 바다 깊은 곳에 오래도록 도사리고 있던 무언가를 빼앗긴 기분이었는데 언제부터 의식에 검은 수정실 한 줄기를 가지고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다른 사람들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흐하암.”
의혹이 가득한 가운데 등 뒤의 소용돌이를 거둔 중년인이 오랜 잠에서 깨어나 사람처럼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폈다.
기운이 폭증해 대라경 최고봉 수준에 이른 그는 팔을 내리면서 기운을 갈무리해 처음 봤을 때의 정신 나간 늙은이처럼 보였다.
그의 얼굴을 본 도윤진인이 입을 열었다.
“흑천노마…….”
그 말에 뇌옥책 등의 표정이 극히 어두워졌다.
“너희는 누구…….”
쿵!
도윤진인이 흑천노마라 부른 중년인은 이 한 마디를 다하지 못하고 하늘에서 뚝 떨어진 금색 불기둥에 깔려 지하 깊은 곳으로 사라졌다.
불기둥은 천근만근의 힘으로 흑천노마를 짓이기면서 이글이글 타올랐다.
한립이 보니 도윤진인이 세월신등에 자신의 정혈 한 줄기를 보내 벌인 짓이었다.
쿠쿠쿠…….
도윤진인의 핏방울이 다 탈 때까지 무지막지하게 땅 속으로 파고들던 불기둥이 차차 가시고 뜨거운 연기가 깊은 구덩이 속에서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아이고, 허리야…….”
다들 숨죽이고 있는데 구덩이 깊은 곳에서 귀신처럼 이상한 자세의 신영이 튀어 올라 도윤진인 앞에 섰다.
정신을 집중하고 있던 도윤진인은 미리 맺고 있던 법결을 던졌다.
바르르 떨린 세월신등에서 연꽃 모양의 금빛이 나타나 꽃잎처럼 불꽃을 떨구었다.
흑천마조가 이를 보고 피하지 않고 두 주먹에 검은빛을 맺어 쿵쿵쿵, 불꽃을 쳐냈는데 불꽃이 가신 뒤에는 오행인공대진이 일으킨 오색 빛이 날아들었다.
“비켜…….”
탁한 목소리로 성가시다는 듯 말한 흑천마조는 주먹으로 오색 빛을 때려 검은 연기로 만들고 아무렇지 않게 도윤진인의 가슴팍을 밀어냈다.
쿠앙!
신음을 흘린 도윤진인이 날아가고 검은 연기 같은 신형이 또렷하게 흑천마조로 변했다.
기운도 다 써버리고 거듭 중상을 입은 도윤진인은 땅에 떨어지자마자 왈칵 피를 토하고 죽은 듯 기절해 버렸다.
지켜보던 다른 사람들은 기절초풍할 지경이었다.
흑천마조가 신등의 불길 따위 개의치 않는 것은 그렇다 치고 오행인공대진의 공격도 애들 장난처럼 막아버렸다.
도윤진인이 기절한 후에도 흑천마조는 따라가 죽일 생각은 하지 않고 몸을 돌려 오랜 세월 그를 억누르던 세월신등을 내려다보면서 머리를 긁적였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뇌옥책은 도윤진인을 구하러 가고 싶었지만 흑천마조의 시선을 끌까 식은 땀을 줄줄 흘리면서 가만히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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