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6화. 도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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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계단을 올라 문 앞에 이른 한립이 미간을 좁혔다.
대전의 벽돌 하나하나에 빼곡하게 새겨진 문양들이 서로 호응하면서 거대한 진법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리 복잡하지 않은 진법은 대전을 강화하는 용도로 세월전 자체가 거대한 법보나 마찬가지였다.
대전 문에는 반대로 어떤 금제도 펼쳐져 있지 않아 손으로 육중한 문을 양쪽으로 열어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문턱을 넘은 한립은 생각했던 것보다 넓은 공간 정면에 뒤집어 놓은 오각뿔 형태의 돌 받침이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돌 받침의 다섯 면에는 각각 금색, 푸른색, 남색, 붉은색, 노란색이 칠해져 있고 이상한 문양들이 새겨져 있어 제단의 용도로 쓰이는 듯했다.
한립은 멀리서 그 오색 제단 위에 놓인 고풍스러운 양식의 금색 등잔을 바라보았다.
등잔 기둥은 살짝 구부러져 연 줄기 같았고, 기둥에 걸린 등잔은 연꽃처럼 활짝 피어 가운데 꽃술 같은 심지에서 유유히 금빛을 발했다.
그 신등의 금빛이 반구형의 보호막을 펼쳐 제단 전체를 보호하고 있었다.
한립은 멀리서도 물씬 느껴지는 시간법칙 파동에 마음이 요동쳤다.
“저게 세월신등이로구나. 이런 강대한 법칙파동이라니…….”
그가 감탄하고 있을 때 교삼 등이 도착해 대전 안으로 들어왔다.
기마자도 웅산과 요마 다섯 명을 대동하고 들어오고 있었다.
세월전에 들어서자마자 기마자는 세월신등에서 눈을 떼지 못했으나 응비요마 등은 오색 제단을 두려운 기색으로 쳐다보았다.
다들 제단과 신등에 정신이 팔려있을 때 가느다란 흑백 빛줄기가 대전 밖 바닥에서 나타나 소리 없이 대전 안의 바닥으로 숨어들었다.
한립은 기마자 등을 보고 눈빛이 가라앉았다.
“한 수사, 세월전 안에서만은 잠시 싸움을 미루는 것이 어떻겠나?”
기마자는 전음으로 휴전을 제안했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한립은 기마자의 제안을 믿지는 않았지만 상대가 먼저 공격하지 않으면 건들지 않으리라 마음먹었다.
대전 안은 온갖 꿍꿍이를 가진 이들로 넘쳐나서 그와 기마자가 충돌하면 다른 이들 좋은 일만 시켜주는 꼴이었다.
한립은 기마자와의 원한이나 세월신등보다도 자신의 안위가 가장 중요했다.
“본명패가 저기 있습니다.”
교삼과 같이 한립 곁으로 온 호삼이 말했다.
세월신등의 금빛 아래 생긴 그림자 속에는 손바닥 크기의 핏빛 영패 세 개가 놓여 있었다.
오래 생각할 것도 없이 리기마, 곡린 그리고 류 가 중년인의 본명패였다.
세 명패 옆에는 사각형의 검은색 철패도 하나 놓여 있었는데 무엇이 새겨져 있는지는 잘 보이지 않았다.
한립은 교삼이 세월신등과 그 철패를 눈여겨보는 것을 보고 뭐냐고 물으려다 말을 삼켰다.
제단 위에는 그것들 외에 금색 두루마리도 금실로 감겨 있었는데 뇌옥책이 그걸 보고 눈을 반짝이다가 문중과 시선을 교환했다.
통천검진에 이은 또 다른 통천검파의 중요한 보물인 듯했다.
찬찬히 모두의 기색을 살피던 한립은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먼저 7층에 이른 곡린은 대체 어디 있단 말인가?
그가 이런 의혹을 품고 있을 때 기마자가 입을 열었다.
“모두…….”
그 순간, 진동한 대전의 문이 스스로 닫히고 사방에서 눈을 찌르는 금빛이 뿜어져 나와 강렬한 시간법칙 파동으로 공간을 왜곡했다.
금색 공간에 갇힌 무리는 시간의 흐름이 느려진 탓에 행동은 물론 사고까지 제약을 받았다.
한립은 즉시 수결을 맺어 금빛으로 뇌옥책을 포함한 일행을 감쌌고, 기마자도 진작 영역을 펼쳐 웅산과 요마 다섯을 보호했다.
한립과 기마자의 시간영역 안에서 다들 겨우 정상적인 사고가 가능해졌지만 움직임은 제약을 받아 평소처럼 민첩하게 이동할 수 없었다.
파파파팡!
그들 앞, 바닥에서 원형 빛 방울이 터지면서 흐릿한 인영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바닥에서 튀어나온 대나무처럼 마른 인영들은 몸에 맞지 않는 금색 갑옷을 입고 절그럭절그럭 움직였다.
놀랍게도 전부 도병(道兵)이었다.
허약해 보이는 도병들은 기운은 약하지 않았고 바로 몰려들어 그들을 공격하기보다는 질서정연하게 대열을 맞추어 포위망을 형성했다.
“저것들이 지금…….”
“진법을 펼치는 겁니다.”
남원자가 인상을 찡그리고 의아해하자 한립이 말했다.
다른 일행들도 놀라고 있을 때 특수한 배열을 갖춘 도병들이 그들을 중앙으로 몰고 달려들었다.
진법이 완성되자 각각의 도병들은 갑옷에서 눈을 찌르는 금빛을 방출해서 한립도 눈이 아파 구유마동을 발동해야 했다.
눈동자에 보랏빛이 어리자 금빛 속을 꿰뚫어 보는 게 이전처럼 고통스럽지 않았다.
그걸 본 다른 사람들도 각자 영목신통을 발휘하거나 법보나 보물로 장막을 치고 그 너머로 금빛을 보았다.
금빛 속에서 빼빼 마른 금갑 도병들은 갑옷에서 각기 다른 주술문자를 흡수하고 있었다.
녹색 빛을 흡수한 도병들은 몸이 배로 부풀어 오르며 푸른 장검을 손에 쥐었고 노란빛을 흡수한 도병들은 세 배로 부풀어 금강석이 덕지덕지 붙은 석인(石人)이 되어 돌망치를 쥐었다.
남색 빛을 흡수한 도병들은 갑옷이 물처럼 녹아 금속 액체가 몸에서 줄줄 흐르고 붉은빛을 흡수한 도병은 갑옷 틈틈이 불꽃이 일고 화염 장도를 응결해냈다.
금색 빛이 스며든 도병만이 신체 변화 없이 창끝에 금빛 소용돌이가 치는 금색 장창을 만들어 들었다.
“진법을 펼치는 것은 그렇다 치고 각기 다른 속성의 도병을 이렇게나 많이 만들 수 있는 건가요?”
교삼은 불가사의하다는 표정이었다.
“각각은 금선급 밖에 안 되나 5백 마리가 넘어 보입니다. 게다가 각각 오행속성의 법칙의 힘으로 유지가 되니, 이건 뭐…….”
호삼도 놀라 중얼거렸다.
“예전엔 내가 태세 그 늙은이를 제대로 보지 못했구나.”
한쪽에서 기마자가 옛 생각을 하며 탄식하고 있었다.
“뇌 수사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남원자는 뇌옥책에게 물었다.
“이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일행 중에서 그가 세월탑에 대해 가장 많이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속속들이 다 아는 것은 아니었다.
“이 도병들은 본래 같은 종류이나 그들이 펼친 진법이 저기 오행제단(五行祭壇)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어 이런 변화가 나타난 겁니다.”
침착하게 도병들을 훑은 한립이 입을 열었다.
“수사의 말은 오행제단의 영향을 받아 도병들이 이런 속성을 지니게 되었다는 건가요?”
교삼이 눈썹을 끌어올렸다.
“그보다는 도병들이 오행제단의 힘을 빌려 변신을 했다고 보는 게 더 정확할 겁니다.”
한립이 말하는 사이 눈부신 금빛이 가시고 오색 도병들이 각자의 무기를 들고 그들을 죽이러 달려들었다.
불과 나무 속성을 지닌 두 종류의 도병들을 기마자가 데려온 요마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도병들은 마구잡이로 공격하는 게 아니라 여전히 서로 잘 짜인 판 안에서 허점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뇌옥책 등도 그걸 발견하고 방어용 보물이나 신통을 발휘해 대비하기 시작했다.
“나머지는 알아서들 하지.”
금빛을 일으킨 기마자는 요마들을 훌쩍 뛰어넘어서 불 속성 도병들을 향해 접근했다.
금색 횃불이 그의 앞에 떠서 도병들을 제자리에 묶어두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도병들에게 시간법칙이 통하지 않는다는 걸 깨닫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그를 뒤 따르던 웅산만 횃불의 불빛이 고정되고 도병들은 잘만 움직였다.
“그렇군.”
제단 위의 금색 등잔을 본 기마자는 알겠다는 얼굴이었다.
제단의 힘을 빌려 쓰는 도병들은 신등의 힘을 이용해 시간법칙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있었다.
횃불을 거둔 기마자는 대신 검은 도끼를 꺼내 불갑옷을 걸친 도병들을 내리찍었다.
촤악!
반달 모양의 검은 빛이 날아갔다.
화갑(火甲) 도병들은 마치 검은 빛이 위험한 걸 아는 것처럼 돌진을 멈추고 빠르게 진형을 변화시켜 갑옷의 불길을 서로 연결하고 최전방의 도병들만 장도를 뻗었다.
쿵.
화갑 도병들 앞 허공이 진동하고 불의 장벽이 솟아올라 기마자의 공격을 밀어냈다.
기다렸다는 듯 다음 줄의 도병들이 장도를 뻗어 두 번째 불의 장벽을 만들고 이어서 세 번째 도병들이 나섰다…….
검은 도끼 허상이 첫 번째 불의 장벽을 찍을 때 주위에 십여 개의 공간 소용돌이가 발생했다.
쾅, 하고 첫 번째 장벽이 터지고 도끼 허상의 남은 힘이 두 번째 장벽과 세 번째 장벽을 부쉈다.
그 소리가 끊이기 전에 기마자의 손에서 검은 도끼가 붕붕 휘둘러져 검은 돌풍을 이루고 불의 장벽들을 지나 화갑 도병들을 죽였다.
백골과 동사 등 요마들은 몰려드는 나무 속성 도병들을 보고 응비 요마를 쳐다보았다.
“어떻게 처리할 건진 둘째가 알아서 정하되 너무 빨리 도병들을 죽일 필요는 없다. 저들이 길을 뚫게 해야 해.”
팔짱을 낀 응비요마가 말했다.
그는 나서지 않고 나머지 네 요마가 도병들을 상대하게 할 셈인 것 같았다.
“알겠습니다, 큰 형님!”
백골요마가 답하고 다른 요마들도 항상 이랬는지 불만이 없었다.
“우리는 몸도 풀 겸 사상부마진(四象附魔陣)을 펼쳐 싸우지!”
“좋습니다!”
“몸을 풀기에 딱 좋은 상대네요!”
백골요마의 말에 나머지가 힘차게 답했다.
검은 연기를 피워 몸을 감춘 네 요마는 이전보다 더욱 악취를 풍기면서 희미하게 흉수의 형상을 드러냈다.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동사와 백골이 앞과 뒤를 맡고 나머지 둘이 좌우에 선 그들은 죽이 척척 맞았다.
쿠쿠쿵.
달려들던 나무 속성 도병들도 두려움 없이 녹색빛을 터트리며 장검을 바닥에 박아 넣었다.
응비요마가 보니 바닥에 푸른빛이 번지면서 이끼와 덩굴들이 자라나고 있었다.
네 요마들의 발밑이 갈라지면서 수많은 푸른 덩굴들이 촉수처럼 치솟아 사상부마진을 파고들었다.
“재밌군. 어디 나도 함께 놀아보마.”
응비요마가 팔짱을 풀고 검은 화염에 휩싸여 싸움에 뛰어들었다.
기마자와 다섯 요마들이 도병들과 혼전을 펼치는 동안 한립 일행도 도병과 얽혀 싸우고 있었다.
남원자 오누이는 금속 액체가 줄줄 흐르는 도병들과 싸우려고 남색 빛을 결합해 모종의 비술로 선령력을 나눠 쓰는 듯했다.
그들의 손에서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물줄기가 금속 액체와 충돌했는데 그 사이에서 하얀 연기가 올라와 사람의 정신을 혼미하게 했다.
뇌옥책은 문중, 소안천과 함께 석인들을 상대로 비등비등한 전력을 보였다.
그리 까다로운 신통은 부리지 않았으나 몸이 너무 튼튼하고 진법의 보조로 부서트리기 바쁘게 원상 복귀되어 불사신과 싸우는 것 같았다.
한립은 호삼, 교삼과 같이 금색 장창을 든 도병과 싸우고 있었다.
이 도병들은 석인 도병과 비슷하게 몸이 단단했고 장창 끝의 소용돌이에서 화살처럼 쏘아대는 금빛이 특이했다.
십여 장 거리를 두고 싸워도 공간을 찢고 날아드는 것처럼 순식간에 그들의 급소를 노렸으니 말이다.
더 성가신 점은 마치 잘 훈련된 군인처럼 일부가 공격하면 일부는 후방에서 지원해서 한립 일행에게 틈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때 한립이 소리를 높였다.
“조심!”
화들짝 놀라 호삼은 두 장창에서 날아든 대량의 금빛을 피하려 몸을 비틀었지만 머리 위에서 또 다른 도병이 장창을 내리꽂으며 달려들고 있었다.
쏟아지는 공격에 제대로 피하지 못하고 어깨를 찔린 호삼은 피를 철철 흘렸다.
그리 심하지 않은 상처를 힐끗 본 그는 계속해서 도병과 싸웠는데 가면 갈수록 상처가 낫지는 않고 철을 부은 것처럼 무거워졌다.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에 그는 한립과 교삼에게 알리고 단약 여러 개를 꺼내 치료를 시작했다.
하지만 그래도 상처의 피가 멈추지 않는 게 아닌가!
한립도 그걸 보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 노란 호리병박을 꺼내 안의 콩알들을 쏟아냈다.
알알이 떨어진 노란 콩알들이 뇌갑(雷甲) 도병들도 변해 금갑 도병들과 맞붙어 싸웠다.
뇌갑도병들은 금갑도병보다 실력이 떨어졌지만 수가 많고 교삼도 있어 그에게 시간을 벌어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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