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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2073화 (1,830/2,000)
  • 2073화. 검진(劍陣)

    *

    “이럴 수가…….”

    안색이 달라진 거마 모습의 한립은 열댓 걸음을 쿵쿵쿵 밀려나 어안이 벙벙한 얼굴을 했다.

    이 정도 힘으로도 부술 수 없다면 어쩌면 좋단 말인가?

    다른 수단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데 함부로 힘을 낭비할 수 없었다.

    삑!

    정염동자가 갑자기 날카롭게 울면서 불새로 변해 날아올랐다.

    뒤쪽 하얀 안개의 바다가 출렁거리면서 쿵, 하는 소리가 전해졌다.

    불새의 몸에서 하얀 구슬이 또 한 번 날아올라 공명했다.

    ‘다른 진안마저 파괴되었구나.’

    생각보다 너무 빨랐다.

    눈앞의 빛의 장막을 어서 해결하지 못하면 어떤 변수가 생길지 몰랐다.

    한립이 빛의 장막으로 시선을 돌렸을 때 깜짝 놀랄 일이 벌어졌다.

    펑!

    단단하기 그지없던 빛의 장막이 느닷없이 번쩍번쩍 빛나더니 그의 눈앞에서 깨져버린 것이다.

    한립은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설마 다섯 개의 진안을 전부 무력화시키면 자연적으로 사라지게 되어 있었던 건가?”

    * * *

    그 시각, 하늘 높이 솟은 거산의 낮은 봉우리에 뇌옥책과 소안천이 바위 뒤에 숨어 있었다.

    그들을 가린 하얀 보호막은 퍽 현묘해 보였다.

    그들과 백 리 떨어진 곳의 녹색 궁전이 막 허물어지고 남원자와 남안이 빠져나오는 중이었다.

    둔광을 결합한 그들은 빠른 속도로 사라졌다.

    그들이 떠나고 마기를 풀풀 풍기는 검은 인영들이 날아올라 환호하다 어딘가로 떠나갔다.

    팟.

    수결을 맺어 하얀 보호막을 거둔 뇌옥책이 흰색 고리를 소매 속에 집어넣었다.

    “뇌옥책 수사, 왜 저들을 말리지 않은 거죠? 우리가 힘을 합치면 이곳은 지킬 수 있었을지 모르잖아요!”

    소안천이 그를 쳐다보았다.

    “그렇게는 안 됐을 겁니다. 그들의 실력은 원래도 우리보다 못하지 않았는데 이제는 남색 보따리까지 지니고 있습니다. 싸워봤자 우리만 당할 텐데 왜 무모한 짓을 한단 말입니까. 만일 저 혼자였다면 그래도 시도는 해봤겠으나 당신을 위험에 처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뇌옥책의 말에 소안천이 입술을 달싹이다 말았다.

    “……목(木)의 진안도 뚫렸어요. 진안 다섯 개가 전부 파훼된 거라고요. 이제 어쩔 거죠?”

    “방법이 있으니 걱정하지 말고 가시죠. 일단 저곳을 수리해 두어야겠습니다.”

    * * *

    거대 산의 정상, 한립은 더는 가만히 있지 않고 몸을 날렸다.

    파란 하늘에 하얀 구름들이 떠있는 산정상에는 금빛이 드리워 있었고 위풍당당한 거대 금빛 궁전이 눈에 들어왔다.

    눈을 빛낸 그가 궁전으로 다가가자, 갑자기 공기가 심상치 않게 바뀌면서 하얀 구름이 뭉쳐 조금 전 빛의 장막과 같은 형상을 갖추었다.

    요동치는 천지원기 속에 뭉친 하얀 구름은 하늘이 노하기라도 한 듯 흰색 뇌전을 파칙, 파칙 품고 있었다.

    휘잉.

    구름 아래로는 광풍이 몰아쳐 산 정상의 바위를 부수고 나무들이 뽑혀 날아올랐다.

    안색이 달라져 멈춘 한립은 구름 속 뇌전에서 막대한 뇌전 법칙을 느끼고 깜짝 놀랐다.

    이전에 보았던 천벌신뢰와 비슷하면서 그 위력은 백 배 이상 강했다.

    한립이 이를 보고 급히 거마 변신을 거두고 피하려 했으나 열댓 개의 굵직한 뇌전이 하늘을 가르면서 떨어진 후였다.

    진득한 살의가 담긴 하늘의 벌이 엄청난 위압감을 품고 떨어졌다.

    하늘이 너를 죽이려 하는데 어찌 반항하냐고 묻는 듯했다.

    크항!

    위압감 속에서 방대한 의식의 힘으로 정신을 차린 한립은 흰색 벼락이 지척에 이른 걸 알고 거마의 입으로 포효하며 아래쪽으로 이동해 시간을 벌었다.

    동시에 여섯 개의 팔에서 검은빛이 일어나 열댓 개의 흰색 벼락을 난타했다.

    콰콰콰콰.

    츠즈즈즛.

    굉음이 울리고 검은 주먹허상들은 불을 만난 얼음처럼 검은 연기를 내면서 흩어졌다.

    눈을 부릅뜬 거마의 몸으로 벼락들이 고스란히 떨어져 한립은 뼈가 드러나는 깊은 상처를 입은 채 거산 위로 호되게 추락했다.

    아직도 거마의 마기가 천적이라도 만난 듯 하얀 뇌전에 의해 흩어지고 있었다.

    마기가 사라지자 <천살진옥공>의 거마 변신이 유지되지 못하고 한립은 본체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창백한 얼굴로 몸이 갈기갈기 갈라져 피를 뿜고 있기는 했지만 다행히 치명적인 부상은 없었다.

    다급히 혈홍색 단약을 꺼내 삼킨 한립의 몸은 빠르게 회복되었다.

    쿠르릉.

    하늘의 흰 구름은 벼락을 내리고 나서 뇌전의 기운이 약간 줄어들었지만 거의 시간차를 두지 않고 더 많은 뇌전을 모으고 있었다.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한 한립이 금색 뇌전으로 온몸을 두르고 진언보륜을 불러내 수많은 금새 파문으로 주위를 채웠다.

    예고도 없이 떨어진 천벌신뢰에 처음에는 당했지만 두 번째는 만반의 준비를 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두 번째 천벌신뢰는 그가 아닌 산의 정상을 향해 떨어졌고, 어디선가 아주 작지만 처량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혹시 뇌전이 오직 마기를 지닌 존재만 공격하는 것일까? 태세선존이 다섯 진안이 파괴될 때를 대비해 대책을 마련해 놓은 것이로구나. 그래서 <천살진옥공>을 발동한 나를 공격한 거였어.”

    그가 태세선존의 방법에 탄복하면서 경거망동하지 않고 추이를 지켜보는 동안 흰 구름은 세 번째에 이어 네 번째 벼락을 떨구었다.

    다섯 번째, 여섯 번째 벼락이 떨어지고는 흰 구름의 역량이 대부분 사라지고 있었다.

    언제 그랬냐는 듯 하늘이 맑아진 것을 올려다본 한립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진언보륜을 거두었다.

    궁전 쪽으로 날아가다 내려선 한립은 대문 위에 ‘세월전’이라 적힌 거대 편액을 보았다.

    문틈 사이로 요란한 금빛과 시간법칙 파동이 새어 나와 강력한 보물이 있는 것이 틀림없어 보였지만 섣불리 다가가지는 않았다.

    궁전 앞 작은 광장에 황토색 석검들이 서서 하늘을 향해 검을 겨냥하고 있어서였다.

    36자루의 석검들은 광장 위에서 검진을 형성하고 세월전을 지키고 있었다.

    정염불새가 뭐라고 지저귀더니 날개를 퍼덕여 세월전으로 날아가려는 것을 한립이 금빛을 방출해 잡아다 화지공간으로 보내버렸다.

    법칙의 힘을 지니게 된 정염불새는 성격이 너무 활발해서 단속하기가 점점 더 까다로워졌다.

    고개를 저은 한립은 석검 검진을 보며 초조해했다.

    평소였으면 천천히 연구해서 검진의 현묘한 점을 익혔겠으나 지금은 누가 나타날지 모르는데 한발 앞서가는 것이 중요했다.

    쉭!

    한립은 사람보다 훌쩍 큰 금색 검기를 뿜어 석검 중 하나를 갈라보았다.

    그 결과 석검이 웅, 노란빛을 드리우더니 금색 검기를 빨아들여 흡수해 버렸다.

    잔머리를 굴려서는 진법을 파훼할 수 없겠다는 판단이 서자 한립은 마음을 다잡고 양손으로 수결을 맺었다.

    전신에서 금빛을 방출한 한립은 진언보륜을 불러내 금색 파문을 방출했다.

    전언보륜의 힘을 믿고 대뜸 석검 검진 안으로 들어선 그의 앞에 별안간 노란 모래사막이 펼쳐지고 있었다.

    “이건…….”

    평범한 환진과는 달리 전혀 진짜 사막과 다른 점을 찾을 수 없는 매우 안정된 풍경이었고, 다른 천지원기라고는 없이 흙 속성 원기만 가득해서 그의 법칙이 제 힘을 발휘할 수 없게 했다.

    가슴이 서늘해진 그는 석검 검진에 대한 평가를 상향 조정하고 구유마동을 펼쳤다.

    보랏빛 눈으로 보니 노란 사막 사이사이로 36자루의 석검들이 그를 둘러싸고 있는 게 보였다.

    각각의 석검들은 눈부신 노란빛을 머금고 굵직한 빛기둥을 하늘 높이 쏘아 올렸다.

    동시에 노란 검기가 석검들에서 튀어나와 36송이의 화려한 꽃을 피우고 파공음이 터져 나왔다.

    노란 검기들이 층층이 한립을 둘러싸고 미친 듯이 그를 베고 있었다.

    한립은 침착하게 두 손을 움직여 진언보륜이 급속도로 회전하게 했다.

    그러자 금색 파문 구역이 짙어지고 그 주위로 노란 검기의 벽이 생겨 그를 가두게 되었다.

    쿠르릉!

    검기는 멈추지 않고 밀려들어 어떻게든 안으로 찔러 들어오려고 온 힘을 다하고 있었다.

    한립마저 긴장하게 할 만한 압력이 검기의 장벽에서 새어 나와 금색 파문 공간이 끼익끼익 불길한 소리를 냈다.

    표정이 달라진 한립은 슬쩍 거검들을 보았다.

    36자루 거검들이 방출한 빛기둥이 공중에서 뭉쳐 황토색 구름을 형성하고 그 안에서 수많은 주술문자가 요동치는 중이었다.

    눈꼬리를 꿈틀한 그가 양손의 수결을 변화시켰다.

    크항!

    삽시간에 산만한 삼두육비 거마로 변신한 그는 구백여 개의 현규를 밝히고 여섯 주먹으로 주위의 검기 장벽을 두들겼다.

    쿠쿠쿵!

    검기 장벽이 부서지자 거마는 진언보륜을 거두고 검은 그림자로 변해 가장 가까이 있는 석검으로 쇄도했다.

    석검들도 그의 의도를 읽은 듯 사방팔방에서 검기를 날려 보냈다.

    하지만 별빛 보호막을 두른 거마의 몸은 날카로운 검기를 펑펑, 막아내면서 석검 중 하나에 접근해 주먹을 날릴 수 있었다.

    콰릉!

    석검이 터져나가 노란빛으로 흩어졌다.

    거마의 다른 주먹들은 각기 다른 방향의 석검들을 향해 날아가 다섯 개의 석검이 더 깨졌다.

    “……!”

    얼핏 미소를 지으려던 한립의 얼굴이 굳었다.

    부서진 석검 파편 속에서 노란 빛기둥이 흩어지지 않고 하늘로 솟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저 그 색깔이 조금 옅어진 것뿐이었다.

    그리고 흙 속성 원기들이 모여들어 빛기둥 안에 석검 허상을 만들어냈다.

    한립은 어이없는 상황에 시간영역을 퍼트린 다음 여섯 손으로 수결을 맺었다.

    이백여 개의 법칙정사가 시간영역 안에서 둘로 나뉘어 십여 리 길이의 거검으로 뭉쳐 좌우를 갈랐다.

    노한 파도와 같은 시간법칙의 힘은 대단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36자루의 청죽봉운검이 날아올라 수천 장 규모의 거검으로 뭉쳐진 다음 뇌전 법칙을 고공의 노란 구름으로 뿜었다.

    쿠콰콰쾅!

    금색 빛의 검 두 자루에 석검들 대부분이 부서졌으나 노란 빛기둥은 없어지지 않았다.

    시간법칙도 빛기둥은 어쩔 수 없는 듯했다.

    그때 고공에서 굉음이 들려왔다.

    노란 구름은 아주 약해 보였으나 실제로는 무척 단단해서 뇌전 거검의 엄청난 일격을 막아냈다.

    한립은 난색을 표했다.

    노란 구름이 흙 속성 원기를 썰물처럼 빨아들이고 아래쪽 36개 석검의 빛기둥이 쾌속으로 빨려 들어가 하늘이 거의 노랗게 변하고 있었다.

    신속하게 영역을 넓혀가던 노란 구름 깊은 곳에 노란 문이 나타나 사나운 검기의 파동과 흙 속성 법칙의 기운을 발산했다.

    쿠쿵.

    공간의 압력이 느닷없이 백 배로 늘어나 거마로 변신한 한립도 몸을 수그리며 걸음걸이가 이상해졌다.

    눈을 부릅뜬 거마 한립이 괴성을 내지르며 여섯 주먹에서 눈부신 별빛을 터트렸다.

    후훅!

    실체화된 여섯 개의 주먹 허상이 그의 손을 떠나 공중의 노란 구름으로 날아들었다.

    시간법칙 정사가 변한 두 자루의 금색 빛의 검과 청죽봉운검이 변한 뇌전거검도 세 줄기 금빛으로 변해 노란 구름을 향해 쇄도하고 있었다.

    쿠콰콰콰쾅!

    허공에서 경천동지할 폭음들이 연달아 들려왔다.

    여섯 주먹 허상들은 터지며 흑백이 교차하는 거대한 빛구슬을 형성했고, 나머지 빛의 검과 뇌전 검이 뒤따라 노란 구름의 중앙을 베었다.

    노란 구름이 단단하다고 해도 쏟아지는 강력한 공격에 일렁이면서 속에 숨겨진 노란 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한립은 빛의 검과 뇌전 검을 이용해 노란 문을 공격하려 했으나, 느닷없이 문에서 번쩍 노란 파동이 터져 나와 검들을 튕겨냈다.

    그 충격으로 한립도 몸을 떨면서 두 걸음을 물러서야 했다.

    이어서 천천히 노란 빛의 문에 틈이 벌어졌다.

    쿠쿵.

    수없이 많은 노란 빛들이 그 문틈에서 은하수처럼 떨어져 내렸고, 문 안쪽으로 광활한 황토색 공간이 보였다.

    정순한 흙 속성 법칙을 품은 노란 빛이 마치 액체처럼 흘러내려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노란 문 표면의 문양들이 정신없이 번쩍거리고 쏟아져 내리던 노란빛이 황토색 석검으로 변해 한립을 향해 몰려들었다.

    거기에 더해져 흙 속성 법칙 파동이 공간의 압력을 더욱 가중시키고 있었다.

    놀란 한립은 빠르게 수결을 맺어 산만하던 거마의 몸을 거목 크기로 줄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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