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2072화 (1,829/2,000)

2072화. 세월신등

*

정염불새의 두 눈에는 고통이 어렸지만 그보다 확연한 것은 기쁨이었다.

한립이 그걸 보고 멈칫할 때 한줄기 하얀 불기둥이 불새의 몸에서 솟아올라 머리부터 꼬리까지 훑고 내려갔다.

정염불새의 몸에서 일곱 빛깔 화염들이 사라지고 칠채화단사의 힘이 철저히 몸 안으로 녹아들고 있었다.

그뿐 아니라 정염불새 체내의 화염의 힘도 한번 정련이 된 것처럼 더욱 정순해져서 혼잡하던 느낌이 싹 사라졌다.

이 불길은 하얀 불구슬의 기운이 아니라 한 단계 고명한 불의 법칙의 힘이었다.

변화를 느낀 한립이 정염불새를 유심히 살폈다.

정염불새는 다른 화염을 잡아먹으면서 부단히 성장했으나 체내에 진정한 법칙의 힘은 탄생시키지 못했는데, 하얀 불구슬의 힘으로 다른 기운들을 녹여냄으로써 매우 높은 수준의 불의 법칙을 품게 되었다.

환희에 찬 정염불새가 날갯짓을 하면서 산만한 거대 새로 변해 하늘을 날아다녔다.

머리에 불길로 이루어진 볏이 자라난 정염불새는 꼬리에 아홉 가닥의 기다란 깃털이 자라나 한층 우아해 보였다.

무시무시한 화염이 은색 거대 새에게서 새어 나와 허공이 다 부들부들 떨리면서 연소하려 하고 있었다.

퍼퍼퍼펑…….

흥분한 정염불새는 점점 더 크게 울면서 두 날개를 활짝 펼치고 은색 은하수처럼 열댓 개의 산봉우리들을 관통했다.

산맥이 통째로 뚫려 끝이 보이지 않는 구멍이 뚫리고 그 안에 은색 불바다가 펼쳐졌다.

그 어마어마한 열기에 열댓 개의 산이 녹아 푸른 연기를 내면서 사라져갔다. 순식간에 산맥 하나가 거대한 구덩이로 변해 사라진 것이다.

한립도 기쁨에 눈을 반짝였다.

하지만 금방 화원궁과 거리가 멀지 않아 이렇게 소란을 피우면 기마자에게 들킬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의식연계를 통해 그가 그만두라는 뜻을 전했는데 정염불새는 마치 새로운 놀이에 푹 빠진 것처럼 아직 남아있는 더 거대한 산봉우리를 보면서 눈을 가늘게 뜨고 있었다.

키학!

고성을 내지른 정염불새가 입에서 은색 화염을 뱉어냈다.

불새의 입을 빠져나온 하얀 불구슬이 바람을 타고 커져만 갔다.

겨우 엄지손가락만 하던 구슬이 사람처럼 커지더니 이제는 산만해지고 있었다.

별안간 직경이 삼천 장에 달하게 된 거대 구슬이 진짜 태양처럼 떠올라 천 리를 작열하는 하얀 빛으로 채우고 산봉우리를 녹여 내렸다.

치지직…….

하늘과 땅이 녹을 것 같은 열기에 풍경이 흐릿해지고 수많은 크고 작은 공간균열들이 발생하는 중이었다.

한립은 날아올라 직접 정염불새를 말리려다 갑자기 나타난 공간균열들에 가로막혔다.

얼굴을 굳힌 그는 진언보륜을 불러내 금색 파문으로 백 장 범위의 시간을 늦추었지만, 공간균열이 지닌 힘이 막강해서 금색 파문 영역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더욱 진언보륜에 힘을 불어넣은 그는 놀란 눈으로 정염불새와 하얀 거대 구슬을 바라보았다.

그가 전력을 다했을 때 겨우 내뿜게 한 불의 혀는 눈앞의 초대형 구슬에 비하면 새 발의 피도 되지 않았다.

웅산의 대황고검이나 남안의 남색 보따리도 하얀 구슬의 위력과 비교할 수 없을 듯했다.

쿠쿠쿠쿠쿠!

하늘과 땅을 잇는 것처럼 우뚝 서 있던 산봉우리가 들이닥친 구슬의 충돌로 흔들리면서 수많은 바위가 비처럼 떨어졌다.

그 안으로 파고든 구슬은 불의 혀를 날름거리면서 암석을 녹여 기어코 거대한 산을 뚫으려 들고 있었다.

그때, 요란한 금빛이 퍼져 하얀 구슬을 휘감았다.

팟.

시간법칙의 힘에 속도가 열 배는 느려지고 한립이 나타나 손을 뻗었다.

이백여 개의 시간정사가 날아가 시간영역 안에서 거대 손을 이루고 하얀 초대형 구슬을 붙들었다.

구슬의 불길이 미친 듯이 타올라도 금색 거대 손은 꼼짝하지 않았다.

“그만하면 됐다고 하지 않더냐!”

한립은 정염불새를 보며 일갈했다.

그의 서늘한 눈빛에 정염불새도 흥분이 가라앉았는지 겁먹은 얼굴로 몸집을 줄여 정염동자의 모습으로 변했다.

이에 따라 구슬도 순식간에 작아져 동자의 옆으로 돌아왔고, 은색 불바다도 번득하고 꺼져버렸다.

정염동자는 불의 법칙이 탄생하자마자 너무 힘을 써대는 바람에 은색 불길이 어둑해져 있었다.

잘못을 아는 건지 동자가 한립의 옆으로 쪼르르 다가와서 혼나는 아이처럼 그의 눈치를 보며 고개를 푹 숙였다.

“괜찮으니, 앞으론 때를 가려가며 놀아야 할 것이야.”

그 모습에 빙긋 웃음을 지은 한립이 정염동자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시간정사와 시간영역을 거두었다.

바로 기운을 차린 정염동자가 신이나 재잘거리면서 그의 어깨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하얀 구슬을 삼켰다.

구슬이 몸 안으로 돌아간 동자는 화염이 조금 왕성해졌고, 주변에서 불의 원기를 슬슬 끌어와 기력을 보충했다.

놀라운 일이었다.

이전에는 원기를 소모하면 화염의 힘을 삼켜서 회복해야 했는데 하얀 불구슬이 생긴 뒤로는 직접 허공의 불 속성 원기를 흡수하고 있었다.

사실 조금 전 하얀 불구슬의 공격력이 너무 강해서 그라도 정면으로 받아낼 수 있다는 확신이 들지 않았다.

거대 산봉우리를 뚫느라 대부분 힘이 상쇄되지 않았으면 정말 힘들었을 것이다.

게다가 정염동자의 활기찬 모습을 보니 조금 전 같은 공격을 두 번은 할 수 있을 듯했다.

정염동자의 급성장으로 이후 기마자를 상대할 때 승산이 늘어난 셈이었다. 한립은 마음속 흥분을 가라앉히고 금빛으로 변해 날아갔다.

세월탑 곳곳에 풀려난 요마들이 돌아다니고 있을 텐데 정염동자가 소란을 피운 곳에서 오래 머물 수 없었다.

그가 떠나고 채 반 각도 되지 않아 같은 장소에 기마자와 웅산이 도착했다.

기마자는 일대를 둘러보면서 눈빛이 가라앉았다.

“전투가 벌어졌던 것 같고 쌍방의 실력이 대단한 듯합니다.”

웅산이 헛바람을 들이마셨다.

“시간법칙의 기운이 남아있다. 이화천주(離火天珠)를 지니고 불의 법칙을 지닌 자가 한립과 겨룬 듯싶구나.”

“이화천주는 한립이 가져가지 않았습니까? 도중에 누군가에게 빼앗기기라도 한 걸까요?”

웅산이 놀라 물었으나 기마자는 말없이 주문을 외며 손을 놀렸다.

웅!

금빛 거울이 떠올라 파동을 수십 리까지 퍼트렸다가 끌어왔다.

거울의 표면에 곧 금색, 하얀색, 붉은색 기운이 떠올랐는데 금색 기운은 시간법칙 파동, 하얀색과 붉은색 기운은 불의 법칙 파동이었다.

특히 붉은 빛이 하얀빛 속의 법칙을 완벽히 억누르고 있었다.

“고명한 불의 법칙이 이화천주의 기운을 감싸고 있군요.”

웅산은 처음 보는 광경에 중얼거렸다.

“당연히 고명하겠지! 전설 속에 전해지는 불의 본원법칙인데 이화천주를 제압하지 못할 리 있더냐.”

기마자가 입을 열었다.

“불의 본원법칙! 그런데 세월탑 안에 이런 강자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불의 법칙을 익힌 인물 자체를 본 적이 없는데요.”

웅산의 말에 기마자의 낯빛도 어두워졌다.

그가 걸리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천만 가지 법칙 중에 3대 지존법칙이 말 그대로 지존이라지만 본원법칙은 그에 버금가는 힘으로 극히 소수의 사람만이 깨우칠 수 있었다.

세월탑 안의 인물들을 모두 아는데 불의 본원법칙을 익힌 자가 등장하다니 걱정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한립 무리 말고 다른 이들이 세월탑 안에 들어와 있는 걸까?

“어떤 추측도 직접 확인해 보는 것만 못하겠지.”

고개를 저은 기마자는 웅산을 데리고 날아올랐다.

* * *

한립은 정염동자와 같이 날아가고 있었다.

주위의 하얀 안개가 가면 갈수록 짙어져서 둔광에 달라붙어 속도를 늦추어서 이제는 평소의 절반밖에 안 되는 속도로 날아가는 중이었다.

갑자기 둔광을 멈춘 한립이 망망대해와 같은 하얀 안개를 응시하면서 생각에 잠겼다.

정염동자는 그런 그를 향해 입을 뻐끔거리며 작은 손을 허공에 휘적거려 왜 멈추냐고 묻고 있었다.

한립은 그런 정염동자를 신경 쓰지 않고 전방만 바라보았다. 전방에서 강대한 시간법칙 파동이 선명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 시간법칙은 진안의 금색 화염과 기운이 비슷해 그 근원이 되는 물건이 아닐까 싶었다.

그렇다면 말로만 듣던 세월신등일 가능성도 있었다.

뇌옥책에게 흑천마신을 봉인했던 일에 대해 자세히 들은 결과 다섯 곳의 진법 중추 중에서 흑천마신이 봉인된 가장 핵심적인 진법에 세월신등이 보관되어 있다고 했다.

세월신등의 기운이 느껴진다는 것은 흑천마신이 그곳에 있다는 뜻이었다.

물론 그는 뇌옥책 등 금원선역 수사들처럼 흑천마신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크지 않았지만 도조와 맞먹는 급의 마신과 정면충돌할 생각은 없었다.

세월탑에 들어와 얻은 화세형충의 벌집 세 개로 시간법칙정사의 수를 대폭 늘릴 수 있었고, 나중에는 불구슬까지 얻어 정염동자가 성장했으니 이득은 취할 만큼 취했다.

무턱대고 흑천마신이 봉인된 곳으로 갔다가 무슨 일이 생길지 몰랐다.

쿠쿵!

그때 어느 방향에서 들려오는지 분간할 수 없게 엄청나게 큰 소리가 울려 하얀 안개의 바다를 출렁이게 했다.

“무슨 소리지?”

눈썹을 끌어올린 한립의 어깨에서 정염동자가 불현듯 하얀빛을 터트리고 불구슬이 동자의 체내에서 날아올랐다.

하얀 불구슬은 웅웅, 무언가와 공명하고 있었다.

이런 현상은 오래 지속되지 않고 몇 초 만에 잠잠해졌다.

서둘러 불구슬을 입속으로 집어넣은 정염동자는 다시 불구슬이 도망갈까 걱정이 되는 듯 작은 두 손으로 자신의 배를 꼭 부여잡았다.

‘다른 진안들이 깨진 건가?’

한립은 웃으며 정염동자를 쓰다듬어주고는 이렇게 짐작했다.

다섯 진안은 서로 연결되어 있고 불구슬은 그중 하나를 지키고 있었으니 공명을 한다고 해서 이상할 건 없었다.

잠시 고민하기는 했으나 여기서 그냥 돌아가는 것은 아쉽기도 했고, 호삼 등과 힘을 합치기로 해놓고 홀로 떠나는 것은 약속을 저버리는 짓이었다.

슁!

가볍게 숨을 내쉰 한립은 더는 멈춰 서있지 않고 거대한 금색 검 허상을 불러내 앞세우고 안개를 뚫고 나갔다.

날카로운 검기 앞에 하얀 안개들이 잘리면서 이전보다 속도가 빨라졌다.

그러나 갈수록 안개가 진해지고 질겨져서 금색 검 허상의 효과가 오래가지는 못했다.

그걸 본 정염불새가 입을 비죽이다가 하얀 불구슬을 내뿜어 한립의 검 허상에 깃들게 했다.

화르르.

하얀 화염이 금색 검의 뇌전과 합쳐지면서 파죽지세로 안개를 갈랐다.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힘을 아끼거라.”

인상을 찡그린 한립이 당부했으나 정염동자는 헤헤 웃으면서 괜찮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한립이 느끼기에도 정염동자가 그리 힘들어하는 것 같지 않아 그대로 안개를 돌파했다.

잠시 후 안개가 희박해지고 끝이 보였다.

아래쪽 산봉우리는 보이지 않았지만 거대한 산의 정상 구역에 이른 듯했다.

한립이 기뻐하며 가속을 하려는데 펑! 하고 무언가 단단한 물건에 부딪혀 검 허상이 부서졌다.

몸이 단단한 그는 부상을 입지는 않았고 정염동자는 불구슬이 잘못될까 허겁지겁 구슬을 삼켜버렸다.

“어떻게 된 거지?”

몸을 가눈 한립은 하얀빛의 장막이 펼쳐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의 의식으로도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거대한 규모라 하늘과 땅을 잇는 벽 같아 보였고 반투명한 장막 깊은 곳에 희미하게 화려한 금빛이 보였다.

“저건…….”

한립은 눈을 크게 뜨고 안의 상황을 살피려 했으나 빛의 장막 때문에 보이지 않았다.

시선을 거둔 그는 손으로 하얀빛의 장막을 쓸어내려 보았다.

살짝 눌리는 게 부드러우면서도 또 아주 견고해서 절대 뚫릴 것 같지 않은 느낌을 주었다.

미간을 좁힌 한립이 기합을 넣으며 구백여 곳의 현규를 밝혀 주먹을 날렸다.

쾅!

주먹이 깊이 박혀 장막 표면이 물처럼 출렁였으나 깨지지는 않고 강력한 반탄력을 보였다.

한참을 튕겨 나갔다가 멈춰선 그는 강력한 반탄력에 오장육부가 뒤집히는 느낌에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가 돌아왔다.

표정이 가라앉은 한립이 <천살진옥공>을 운용해 눈부신 별빛을 휘감고 삼두육비의 거마 형상으로 변했다.

세 개의 머리는 각각 산악거원, 진령 천룡 그리고 유천곤붕의 모양을 하고 있었다.

세 가지 진령혈맥의 힘이 혈관을 따라 흐르면서 압도적인 힘을 발산했다.

빛의 장막 뒤쪽의 금빛이 돌연 미약하게 흔들리다 안정을 찾았는데 <천살진옥공>에 온 정신을 집중하고 있던 한립은 알아차리지 못하고 거마의 모습으로 여섯 개의 주먹을 날렸다.

쿠아앙!

여섯 개의 주먹이 처음의 열 배에 달하는 힘으로 빛의 장막을 때렸다.

그러나 빛의 장막은 여전히 끈질기게 버티면서 내부에서 흘러나온 하얀빛이 주먹의 힘을 상쇄하고 있었다.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