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1화. 암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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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악문 한립은 온몸의 땀이 증발해 하얀 김을 뿜으면서 느릿하게 앞으로 나아갔다.
그의 손이 하얀 불구슬에 가까워지는데 궁전 대문에 돌풍이 일고 누군가 등장했다.
의식으로 살핀 한립은 웅산이 쫓아 온 것을 알고 인상을 찡그렸다.
“웅산…….”
도저히 입을 열 수 없는 상황이라 한립은 전음으로 소리쳤다.
“구경이나 하러 온 것이니 신경 쓰지 마시지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겠습니다.”
웅산이 손을 저으며 해명했다.
“지켜보는 건 상관없지만 허튼짓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당장 그를 어찌할 여력이 없던 한립은 경고만 남겼다.
사실 웅산이 진짜 딴짓을 하면 그를 몇 초 만에 죽일 자신도 있었다. 그 말을 들은 웅산은 대전 문가에서 한 걸음도 더 움직이지 않았다.
칠색 화염의 비호를 받은 그의 손이 하얀 불구슬에 닿기 전, 구슬 안에서 주술문자 같기도 하고 화염의 령(靈) 같기도 한 하얀 그림자가 스쳐 지나갔다
반짝인 불구슬에서 하얀 화염이 쏟아져 나와 주위에 빛의 장막을 치고 그의 손을 밀어냈다.
손바닥이 빛의 장막에 닿은 한립은 기이한 힘에 사로잡혀 하얀 불길과 칠색 불길의 상호작용으로 앞으로 나아갈수록 물러날 수도 없는 갑갑한 처지에 놓이고 말았다.
그가 진령혈맥을 발동해 괴력으로 빛의 장막을 깨려는데 이변이 발생했다.
문가에 서 있던 웅산이 느닷없이 손을 뻗은 것이다.
쉭!
그의 손을 빠져나온 은색 영패가 제단 밖으로 날아올라 강렬한 공간 파동을 방출했다.
등 뒤의 변화를 감지한 한립은 급히 몸을 빼내려 해도 쉽지 않아, 정염불새를 몸에서 분리하고 맨몸으로 제단의 화염을 견디면서 하얀빛의 장막의 힘에서 벗어나려 했다.
그가 뜨거운 열기에 오장육부가 구워지는 고통을 견디면서 맹렬히 제단 밖으로 벗어난 순간 은색 광선이 모여 만들어낸 붉은 인영이 공간을 뛰어넘어 전송되자마자 그의 심장을 노리고 손가락을 뻗어왔다.
‘저건!’
교활하게 웃고 있는 자는 바로 기마자였다.
안색이 달라진 한립은 역전진륜 신통으로 벗어나고자 했으나 진작 금색 횃불이 그의 앞에서 활활 타오르며 그를 붙들어 두었다.
기마자의 손이 쑥 한립의 가슴을 관통했다 튀어나와 그의 목을 틀어쥐었다.
“이제 어찌 달아날 것이냐!”
번번이 한립에게 당해 원한이 사무쳤던 기마자는 그의 목을 틀어쥐자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느꼈다.
가슴이 뚫린 한립은 축 늘어져서 두 눈의 빛이 꺼져가고 있었다.
그걸 본 기마자가 의심스러운 눈길로 두개골을 내리쳐 원영을 끄집어내려다 표정이 달라졌다.
그가 붙들고 있던 한립이 하얀빛 속에서 쪼그라들더니 흰색 괴뢰로 변하고 만 것이다.
하얀 짐승의 뼈로 제련한 괴뢰에는 다양한 부적들이 붙어 있었다.
한립이 동방백에게서 구한 체신괴뢰였다.
“체신괴뢰…….”
바로 괴뢰의 정체를 알아본 기마자가 중얼거렸다.
팟.
그의 등 뒤 허공에서 진언보륜 등 다섯 개의 시간보물을 불러낸 한립이 나타나 기마자의 금색 횃불에 저항하고 있었다.
한립의 미간에서 수정검이 번득 튀어나와 사라지며 기마자를 향해 쏘아져 나갔고, 기마자는 불의의 습격을 막지 못했다.
의식이 응결된 수정검이 기마자의 미간으로 들어가 의식세계에서 난동을 부려 그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게 했다.
한립이 때를 놓치지 않고 상대의 가슴에 <천살진옥공>을 운용하자 기마자가 피를 토하면서 제단으로 떨어졌다.
이 모든 일이 전광석화처럼 지나갔다.
웅산이 도우려 했을 때는 이미 기마자가 제단에 떨어졌다가 화염에 둘러싸여 고공으로 튀어 오른 뒤였다.
한립은 끝장을 보지 않고 제단의 불길이 기마자에게 몰려든 순간 제단 안으로 몸을 날렸다.
제단 중심에서 하얀 불길과 대치하던 정염불새가 바로 달라붙어 그에게 화염외투를 만들어주고, <천살진옥공>과 진령혈맥을 동시에 격발한 한립은 삼두육비의 마신 형상으로 변해 진룡화된 손에 칠색 화염을 두르고 하얀빛의 장막을 뚫고 들어갔다.
쿠쿵!
하얀 불구슬이 제단을 빠져나오자 제단의 진법이 더는 유지되지 못하고 열기가 사그라들었다.
“크악!”
고공에서 노기 어린 포효를 한 기마자가 수직으로 낙하하며 그를 공격하려 했다.
제단에서 물러나자마자 은색 뇌진을 응결한 한립은 콰릉, 소리를 남기고 종적을 감추었다.
그대로 허공을 갈라 바닥에 쿵, 떨어진 기마자 때문에 제단이 쩍쩍 갈라졌다.
천천히 몸을 일으킨 그는 큰 손으로 다른 주먹을 감싸고 으득으득 관절을 풀었다.
웅산이 옆에서 머뭇거리다 포권을 하고 고개를 조아렸다.
“제가 무능해 한립이 가짜인 것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대인을 모셨습니다. 벌해 주십시오.”
그 말에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지던 기마자가 한참 만에 한숨을 내쉬었다.
“네 탓이 아니다. 백조산에서 만든 체신괴뢰는 나도 진짜와 구별하기 어려운 것을 어쩌겠느냐. 게다가 한립같이 영악한 놈은 진작 너를 경계하고 있었을 것이야.”
“어쨌든 제 실수입니다. 그의 손에 한 번 죽기까지 해놓고 이리 발전이 없다니 부끄럽습니다.”
“착각인지 모르겠으나 지난번 겨뤘을 때보다 강해진 것 같아. 무시무시한 적이 아닌가…….”
눈썹을 끌어올린 기마자가 웅산에게 하는 말인지 아니면 자신에게 하는 말인지 모를 소리를 중얼거렸다.
골치가 아프다는 듯 관자놀이를 문지른 기마자가 고개를 돌려 제단에 남은 금색 화염 덩어리를 보았다.
“일단 저것들부터 풀어줘야겠지.”
기마자는 수결을 맺어 시간법칙의 힘으로 금색 거대 손을 만들었다.
“좋은 물건이야!”
금색 화염을 끌어온 기마자는 그것을 얼른 넣어두었다.
제단이 더는 버티지 못하고 완전히 무너져 내려 새까만 동굴이 드러나고 그 안에서 수십 마리의 흉악한 요마들이 날아올랐다.
그 맨 앞에 거구에 머리에 거대한 산양 뿔이 달린 요마가 있었는데 등 뒤로는 하얀 날개를 접고 있고 양쪽 어깨에는 뾰족하게 뼈가 튀어나온 핏빛 팔이 달려있어 눈길을 끌었다.
혈수(血手) 요마는 눈앞의 두 사람, 특히 기마자를 보고 그의 기운이 강한 것에 조금 고민했지만 오랫동안 살생을 하지 못했던 터라 금방 결정을 내렸다.
“흐흐, 네놈들을 죽여 오랜만에 피맛을 봐야겠다…….”
음산한 웃음을 흘린 혈수 요마가 쩌렁쩌렁 외치는 소리가 너무 듣기 싫어서 웅산은 자신의 귀를 막았다.
다른 요마들이 신이 나서 다양한 짐승의 소리를 내며 달려들었다.
이맛살을 찌푸린 기마자도 약간 혐오스럽다는 얼굴로 손을 저어 금색 빛의 장막을 쳤다.
빠르게 날아들던 요마 몇 마리가 금색 빛의 장막에 부딪히자 처절하게 울부짖으며 생명력을 빼앗긴 듯 비틀어지다 재로 변해 흩날렸다.
그걸 본 다른 요마들이 대경실색해 물러서고 있었다.
분노한 혈수요마가 손바닥에 핏빛을 일으켜 진득하고 비린내 나는 기운을 퍼트렸고, 그 안에서 눈이 핏빛으로 충혈된 요마들이 두려움을 잊고 다시 기마자와 웅산을 향해 달려들었다.
웅산은 기마자 뒤에 서서 핏빛 손바닥과 비교적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심장이 쿵쿵 빠르게 뛰고 머릿속에 시체가 산을 이룬 잔혹한 광경이 떠올라 마음을 다스리기 어려웠다.
“정신 차리거라!”
기마자의 외침이 웅산의 머리에 번개처럼 꽂혀 그의 의식을 맑게 해주었다.
쿵!
기마자는 앞으로 한 발 나서서 손바닥에 금빛을 일으켜 혈수요마의 핏빛 손바닥을 강타했고, 손을 거둔 혈수 요마는 몸을 격렬히 떨었다.
“혈수 수사, 난 적은 아닙니다만 이렇게 다짜고짜 공격을 계속하면 전부 내 손에 죽을 겁니다.”
“나를 압니까? 당신은 누굽니까?”
기마자의 말에 경계하는 기색이 떠오른 혈수요마가 물었다.
“이건 알아보겠지요?”
기마자는 자신을 소개하는 대신 해골 손 모양의 하얀 골패를 던져주었다.
눈을 반짝인 혈수요마가 그걸 받아들고 골패에 새겨진 악귀 도안을 확인했다.
“둘째 형님의 수골요패(手骨腰牌)…….”
“백골 수사와 동사 수사도 봉인에서 벗어났습니다. 내가 여기까지 온 것도 그들을 대신해 당신을 탈출시키기 위해서고요.”
“내 질문에 답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누구라고요?”
“쓸데없는 걸 궁금해하십니다. 형제들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만 알아두세요…….”
코웃음을 친 기마자가 웅산을 손짓해 흐릿하게 사라져 버렸다.
수골요패를 들고 곰곰이 생각에 잠겼던 혈수 요마는 곧 명을 내려 나머지 요마들을 데리고 날아올랐다.
엉망이 된 광장과 대전이 안정을 찾을 무렵 문중이 멀리서 도착했다.
“이런, 제기랄!”
아주 난장판이 된 화원궁과 제단을 본 그는 누군가에게 악담을 퍼붓고는 진법 복구에 돌입했다.
* * *
화원궁을 떠난 한립은 계속해서 날아가다 기마자가 쫓아오지 않자 하얀 구슬을 꺼내 보았다.
구슬은 표면의 불길이 사라지고 은은하게 빛나기만 해 그를 기쁘게 했다.
보통 선기들은 발동하지 않아도 영력 파동과 법칙의 힘을 발산했는데 이건 그렇지 않았다.
이렇게 스스로 기운을 갈무리할 수 있는 선기일수록 품계가 높았기에 자연히 위력도 기대가 되었다.
그가 지닌 많은 선기들 가운데서도 장천병과 금색 원반만이 이런 현상을 보였다.
묵묵히 공법을 운용한 한립은 입에서 푸른빛을 품어 구슬에 융합시키고 수결을 맺어 법결을 던져넣었다.
훅!
무시무시한 고온의 백색 화염이 치솟아 주변 수십 장 허공을 이글이글 태우고 있었다.
고온의 열기 속에 강력한 불의 법칙의 힘이 담겨 있어 공기 중에서 수분이 증발해 사라졌다.
구슬을 발동하기 전에 준비하고 있던 한립은 시간법칙의 힘으로 몸을 완벽하게 감싸 불의 법칙을 차단했다.
이때 맑은 새 울음소리와 함께 정염불새가 그의 소매에서 날아올라 어깨에 내려앉았다.
하얀 구슬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정염불새는 군침이 돈다는 표정이었다.
불새의 등장에 사납던 하얀 화염의 기세가 반으로 꺾였다.
한립은 빠르게 수결을 바꾸어 이제 미약하게 의식연계가 된 불구슬의 화력을 키워보았다.
“가라!”
불구슬 안에서 하얀 불의 혀가 빠져나가 측면의 어느 산봉우리를 휙, 감았다.
금속성 원기 파동이 느껴지는 고동색 봉우리였다.
세월탑 7층은 천기원기가 농염해서 이 안에서 수천 년간 기운을 배양한 토양이나 수목들조차 좋은 재료로 거듭나기 마련이었다.
이 산봉우리도 그래서 전체가 단단한 현동석(玄銅石)으로 변해 있었는데 하얀 불의 혀가 소리 없이 산 정상을 스쳐 지나갔다.
쿠릉.
당장 삐뚜름하게 기울어진 산봉우리 위쪽이 미끄러지듯 떨어져 내려 거울처럼 매끄러운 표면이 드러났다.
마치 칼로 베어낸 듯한 표면을 보고 한립은 기뻐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불구슬의 위력은 그의 상상 이상이었다.
불 속성 공법을 수련하지 않아 상성이 맞는 비술을 쓰지도 않았는데 이런 위력을 낸 것이다.
옆에서 정염불새가 무어라 지저귀면서 한립에게 구슬을 달라는 뜻을 표했다.
“난 불 속성 공법을 익히지 않아 제 위력을 발휘할 수 없으니 어차피 저건 네 것이다. 허나 위력이 너무 강하니 신중하게 사용해야 한다.”
한립은 힐끔 정염불새를 보고는 손짓해 하얀 불구슬을 보내주었다.
정염불새는 무척 좋아하며 은색 화염을 입에서 뿜어 단번에 구슬을 삼켰다.
불구슬이 몸속으로 들어가자 정염불새의 기운이 한층 강해져 은색 화염 외에 칠색 화염도 흘러나왔다.
그간 수많은 화염의 힘을 흡수했지만 칠채화단사는 삼킨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제대로 연화를 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덟 종류의 화염이 정염불새의 몸 안에서 서로 경합해 펑펑, 터지고 난리도 아니었다.
불새의 피부가 불룩불룩해지며 언제라도 퍼질 것처럼 기운이 불안정해진 것을 보고 한립이 얼른 둔광을 멈추고 금빛과 의식을 방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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