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2067화 (1,824/2,000)

2067화. 흑천마신(黑天魔神)

*

반 시진이 지나 뇌옥책 등이 몸을 일으켰다.

“한 수사 덕분에 살았습니다. 수사가 아니었으면 이곳이 우리의 무덤이 되었을 거예요.”

뇌옥책은 여러 감정이 섞인 얼굴로 공수를 했다.

“아닙니다. 그런데 이곳에 왜 마족들이 갇혀 있던 것일까요. 아는 바가 있으시면 말씀을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한립은 의미심장하게 물었다.

그 말에 다들 뇌옥책을 보았으나 그는 대답하기에 앞서 제단이 있는 곳으로 날아올랐다.

검은빛의 문이 실종되고 부서진 돌들만 가득했다.

뇌옥책은 금빛을 뿜어 돌들을 치우고 원형의 금색 석판을 찾아다 거기 새겨진 복잡한 진법과 여덟 개의 돌기둥을 확인했다.

원형 석판이 갈라져 진법이 망가져 있었다.

뇌옥책은 심각한 얼굴로 표정이 서늘해졌다.

“웅 수사, 이게 다 수사가 멋대로 행동한 탓 아닙니까!”

“죄송합니다. 이런 일이 생길 줄은 몰랐습니다.”

웅산은 공수를 해 보였지만 미안하다는 말속에는 진심이 없었고, 오히려 희색을 감추면서 수시로 대황고검을 살폈다.

금색 수정실 2, 30개가 대황고검을 감고 금빛을 반짝이고 있었는데 검을 연화중인 듯했다.

남원자 등도 대황고검을 보고 부러운 기색이었다.

뇌옥책은 인상을 구겼으나 더는 뭐라 하지 못했다.

수행이 가장 낮았던 웅산이 대황고검을 취하고 실력이 크게 늘자 이제 한립을 제외하고는 그를 확실히 이길 수 있다고 자신하는 사람이 없어졌다.

“이렇게 된 것 다 말씀드리겠습니다. 세월탑은 다들 아시겠지만 수많은 죄수들을 가둬둔 곳이고, 7층도 마찬가지로 절세요마(絶世妖魔)가 갇혀 있습니다.”

뇌옥책이 웅산에게 시선을 거두고 입을 열었다.

“절세요마요?”

한립은 눈썹을 끌어올렸다.

“예, 앞서 마주쳤던 죄수들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존재입니다.”

“다른 층의 죄수들도 대라경 존재였는데 절세요마라니, 도조라도 갇혀 있단 말씀인가요?”

남안이 그럴 리 있냐는 듯 실소했다.

“통천검파의 창립조사께서 그 마두의 봉인에 참여하시고 관련 기록을 남겨 두었는데, 도조는 아니더라도 못지않은 실력을 지녔을 겁니다.”

뇌옥책의 신중한 답에 남안은 얼굴에서 미소를 거뒀다.

“창립조사께서 이곳에 오신 적이 있다고요? 그렇다면 세월탑을 건립한 태세선존과 아는 사이셨겠습니다.”

눈을 빛낸 한립이 또 물었다.

“그건 경전에 기록이 없어 저도 모르겠군요.”

뇌옥책은 고개를 저었다.

그 말이 사실인지 아니면 무언가를 숨기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뇌 수사, 그 마두가 설마 금원선역 전체에 혈제(血祭)를 지내려고 했던 흑천마신(黑天魔神)은 아니겠지요?”

침음하던 소안천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맞습니다. 소 수사께서도 흑천마신에 대해 잘 알고 계실 겁니다.”

“당시의 전란에 대해서는 저희 천수종 경전에도 기록이 남아 있으니까요.”

뇌옥책의 답변에 소안천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무슨 일이었는지 저희에게도 알려주시지요.”

“다들 금원선역 출신이 아니라 잘 모르실 거예요. 몇만 년 전 마역과 전쟁이 벌어졌을 때 금원선역은 흑천마신이라는 강력한 마족에 의해 큰 화를 입었습니다. 절세마진을 발동해 금원선역 전역에 혈제를 지내려 했으니까요. 당시 금원선역의 수많은 생령들이 마진에 의해 목숨을 잃었고, 후에 천정 도조가 나서서야 마진을 없앨 수 있었으나 지금까지도 그때 입은 피해를 다 회복하지 못했다고 하더군요. 흑천마신이라는 이름은 금원선역에서 금기시되어 있고요.”

한립의 질문을 들은 소안천이 탄식을 하듯 설명했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 한립은 생각에 잠겼다.

선마대전과 연관된 마두라면 야양왕조와 무슨 관계가 있는 것 아닐까?

“소 선자의 설명대로입니다. 이번 태세선부의 출현은 우연이 아니라 이곳에 갇힌 마두가 봉인을 뚫고 나오려는 징조일 겁니다. 그래서 저와 문중은 봉인을 강화하기 위해 여기까지 온 것이고요. 마두를 봉인한 거대 진법은 총 다섯 개의 진법 중추가 있어 각각 금목수화토(金木水火土)의 속성을 지닙니다. 각 진안마다 마역의 요마들이 봉인되어 있는데 저기 금색 제단이 바로 금 속성 진안이었습니다.”

뇌옥책이 그녀의 말을 받아 설명했다.

“제단이 허물어졌으니 이미 진안 중 하나가 뚫렸다는 말이네요?”

남안은 불안해 보였고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렇습니다. 다섯 개의 진안만 온전하면 흑천마신이 탈출할 일은 없을 텐데 이제 금 속성 진안이 망가졌으니 일이 잘못될 가능성이 커졌어요. 그렇게 되면 우리가 몰살당하는 것은 물론 금원선역 전체가 또다시 곤경에 처하게 될 것입니다. 다들 얼마나 심각한 일인지 아셨으면 다른 진안은 절대 건들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뇌옥책은 진지하게 당부했고 다른 이들이 분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어쩌죠? 계속 가볼 생각인가요?”

“가보기는 하되 잠시 이곳의 진법을 복구할 수 있는지 보겠습니다. 원기가 아직 흩어지지 않았으니 대충이라도 복구를 해두면 도움이 될 겁니다.”

남안의 물음에 이렇게 답한 뇌옥책은 진법을 살피기 시작했다.

문중도 그를 따라가 상의를 한 뒤 여러 진법 도구들을 꺼내 도왔다.

다른 이들은 이 진법에 대해 잘 알지 못했기에 한쪽으로 비켜서 기다려야 했다.

반나절 뒤, 강렬한 진법 파동을 감지한 이들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웅웅!

금색 진법에서 빛이 솟아올라 벽과 지붕으로 흘러들고 있었다.

“그럭저럭 되살려두었습니다.”

일을 마친 뇌옥책이 그들을 향해 미소 지었다.

“이렇게 해 둔다고 제 능력을 발휘할까요?”

남안은 흑천마신 이야기에 단단히 겁을 먹었는지 확인하듯 물었다.

“그러기를 바라야겠지요. 갑시다, 여기서 시간을 많이 낭비했습니다.”

* * *

산 동굴을 따라 바깥쪽으로 한참을 걸어간 일행은 그곳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동굴 밖에는 수백 장 너비의 평평한 땅이 있었고, 주위로 기암괴석들이 비죽비죽 튀어나와 있어 거대한 산의 중턱 같았다.

주변을 살피려 해도 회색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 있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웅산이 미간을 좁히고 손에 들고 있던 금색 장검으로 허공을 베었다.

훙!

거대한 금색 검기가 터져 나와 수백 리를 날아가다 무언가 벽에 부딪힌 것처럼 쾅, 소리를 내고 흩어졌다.

“역시 금제가 있었군요…….”

“산봉우리 바깥의 금제는 세월탑의 근간과 연결되어 있어 탑 전체를 무력화시키지 못하면 뚫고 나갈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뇌옥책이 웅산을 힐끗 보고 모두에게 말했다.

한립은 의식을 펼쳐 사방을 살피고 있었는데 이곳의 금제도 강력해서 강대한 그의 의식도 그리 멀리까지 뻗어 나가지는 못했다.

어쩔 수 없이 다들 산 절벽을 따라 위쪽으로 날아올랐다.

천장 정도를 올라가던 중, 교삼이 멈칫하며 멈추었다.

그걸 본 다른 사람들도 멈춰서 그녀의 시선을 따라 절벽에서 튀어나온 또 다른 평평한 대를 쳐다보았다.

누군가 인공적으로 만들어 놓은 돌계단이 그곳에서부터 위쪽으로 굽이굽이 이어져 있었다.

“올라가 봅시다.”

뇌옥책을 시작으로 문중과 소안천, 한립 등이 그곳으로 날아갔다.

이곳에는 동굴 같은 것은 없고 돌계단이 다여서 일행은 차례대로 계단을 따라 정상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수백 장을 올라 또 다른 더 큰 면적의 평평한 곳에 도착한 그들은 산세를 따라 지어진 고풍스럽고 거대한 물빛 대전을 발견했다.

대전 앞 광장에는 호수가 있어 거울처럼 빛을 반사하고 옅은 남색 물안개를 피어 올렸다.

남원자가 그 물안개를 보고 의아한 눈빛을 했다.

“오라버니?”

“넘실거리는 물빛 속에 물 속성 법칙 파동이 섞여 있다. 아무래도 물 속성 환진인 것 같아.”

남안이 부르는 소리에 남원자가 중얼거렸다.

‘물 속성 환진.’

그 말을 들은 한립이 미간을 좁히다 두 눈에 보랏빛을 일으켰다.

구유마동을 발휘하자 물안개 속의 물방울들이 소용돌이를 이루며 군데군데 뭉쳐 서로를 밀어내거나 끌어당기면서 특수한 파장을 만들어 내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순간 눈가가 축축해져서 마치 시야로 물기가 차오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은 그는 어느새 뇌옥책 등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쓴웃음을 흘린 그는 그들이 마지막 계단을 밟았을 때 이미 환진에 빠져들었다는 것을 인지했다.

신중한 얼굴로 전력을 다해 연신술을 발동한 그는 의식의 힘으로 환상을 깨려 했다.

다행히 금방 주변 풍경이 달라지고 물방울이 이룬 소용돌이들이 자극을 받은 듯 더욱 난폭하게 움직이면서 서로 충돌하기 시작했다.

쏴아아-

곧 도처에서 물소리가 들리고 한립은 놀랍게도 새까만 해역 위에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해역 상공에서 그는 사방을 돌아보았다.

머리 위에는 먹구름이 가득하고, 거대한 폭풍이 몰아쳐 만장 수룡(水龍)들의 모습으로 서로 충돌하고 융합하며 그를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숨 막히는 압박감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콰르르…….

귀청이 떨어질 것 같은 소리와 함께 물줄기들이 뭉쳐 거대한 수룡으로 변해 그를 집어삼켰다.

물에 잠긴 한립은 극통 속에서 의식을 잃을 것 같았다.

콰릉!

이때 전신에서 뇌전을 일으킨 한립은 태양처럼 밝은 금색 뇌전을 사방으로 터트려 거대 수룡을 갈기갈기 찢어 놓았다.

압박감에서 벗어나 바닷속으로 추락한 한립은 문득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은 부력이라고는 없는 것처럼 그를 끊임없이 해저로 빨아 당기고 있었다.

한립이 물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 다른 이들도 각기 다른 환영 속에 갇혀 있었다.

예를 들어 교삼은 핏빛 강 속에 흉살기와 음혼의 공격을 받으며 힘없는 풀잎처럼 떠내려가고 있었다.

실제로 그들은 몸이 제자리에 고정된 것처럼 꼼짝을 안 하면서 얼굴만 일그러져 환영 속에서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드러내고 있었다.

퐁!

그런데 남원자와 남안의 어깨에서 물방울 모양의 문양이 떠오르더니 두 사람의 남색빛이 연결되어 환한 빛을 터트렸다.

물 속성 법칙 파동이 그들을 감싸고 보호막이 되어주고 있었다.

그 안에서 남원자와 남안이 밭은 숨을 내뱉으며 눈을 떴다.

“정말 강력한 수원환진(水元幻陣)이네요…….”

남안은 가슴을 부여잡고 숨을 헐떡였다.

“스승님께서 심어두신 임계수령부(壬癸水靈符)가 여기서 우리를 도울 줄은 몰랐구나. 모든 게 스승님의 은혜인 것이야…….”

남원자도 길게 숨을 내쉬었다.

“우리 둘이 같이 있어서 다행이지 따로 떨어져 있었으면 각자의 부적만으로는 환진에서 깨어나지 못했을 거예요.”

“그래, 어서 대전으로 들어가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보자꾸나.”

“그럼 저들은…….”

남안이 아직도 제자리에서 멍하니 서 있는 일행들을 돌아보았다.

“환진에서 벗어나고 말고는 각자의 능력에 달린 일이다.”

고개를 저은 남원자는 보호막의 비호를 받으며 물안개가 짙게 깔린 광장을 지나 대전의 처마 아래로 들어섰다.

조사를 마치고 금제가 없는 문을 밀어 열자 농염한 물 속성 법칙 파동이 흘러나왔다.

기분이 한결 상쾌해진 그들은 그 안에 이전에 보았던 것과 비슷한 양식의 남색 제단이 있는 것을 확인했다.

제단은 좌우에 손상된 부분이 있었고, 그 위로 손바닥 크기의 남색 보따리와 금색 화염이 떠있었다.

실로 짜서 만든 것 같은 보따리에는 물방울 문양이 수놓아져 있었고 특수한 물빛 광택이 좌르륵 흘러 극도로 강력한 물 속성 법칙을 품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시선을 마주친 두 사람이 몇 걸음 다가서니 콰르릉, 하는 소리가 들렸다. 둑이 터져 물이 흘러나오는 것 같은 엄청난 물소리였다.

눈을 빛낸 남원자가 남안과 희색 어린 시선을 교환했다.

“사매, 잠시만 기다리면 내가 보물을 가지고 돌아오마.”

일순 이채를 띤 남원자는 남안의 손을 놓고 활짝 웃음 지었다.

“오라버니, 우리가 저걸 취했다가 뇌옥책이 말했던 것처럼 절세요마가 풀려나는 거 아닐까요?”

남안도 보물이 탐나기는 했지만 걱정스럽게 물었다.

“걱정 말거라. 뇌옥책의 말이 어디까지 진실일지는 모를 일이고, 진짜 마두가 풀려난다고 해도 우린 금원선역을 떠나 구원관으로 돌아가면 그만이다. 우리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이야.”

“그래도…….”

“잘 생각해야 한다. 한립을 잡는 데 실패하고 사섬과도 원수를 졌는데 이대로 종문으로 돌아가면 어떻게 될 것 같으냐?”

그 말에는 남안도 안색이 어두워졌다.

“우리가 벌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이 일로 스승님께 폐를 끼치게 될 것이야……. 허나 저 보물을 가지고 돌아가면 그 공으로 벌을 일부 면할 수 있고 스승님께 부담을 드리지 않아도 될 것이다.”

“오라버니 결정에 따를게요. 조심해야 해요!”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남원자가 몸을 돌려 제단으로 걸어가다 고개를 돌렸다.

“제단의 금제가 무척 강하니 이전처럼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른다. 넌 일단 물러나 있거라.”

“그럴수록 같이 가야죠! 융합비술을 펼쳐서 시도해 봐요. 보물을 취하는 데 실패하더라도 그렇게 하면 중상은 피할 수 있을 거예요.”

“……그래, 나 혼자 힘으로는 성공하지 못할 수도 있으니.”

생각 끝에 남원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를 향해 활짝 웃음 지은 남안이 남원자와 함께 제단으로 다가섰다.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