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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2063화 (1,820/2,000)
  • 2063화. 내통

    *

    “석 수사가 한립이었다고? 홀로 금원선궁에 쳐들어갔다가 유유히 빠져나갔다는…….”

    소안천이 기억을 더듬고 중얼거렸다.

    한립을 보는 근류의 눈빛이 복잡해졌다.

    뇌옥책은 문중을 보면서 작게 고개를 저었고 후자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둘은 입을 다물고 이 일에 끼어들지 않기로 한 것이다.

    놀란 기색이 가신 소안천도 평소의 냉랭한 표정으로 돌아가 입을 열지 않았다. 교삼과 호삼이야 말할 것도 없었다.

    사섬이 그런 그들을 하나씩 훑다 마지막으로 남원자 오누이를 쳐다보았다.

    “정말 죄송합니다, 장로님. 저희 오누이는 세월탑 비경 안에서만큼은 절대 한 수사를 공격하지 않겠다고 맹세했습니다. 저희의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이곳을 떠나는 대로 돕겠습니다.”

    남원자는 난처한 얼굴로 포권을 했다.

    “이런 멍청한 것들! 큰일을 앞두고 어찌 사사로운 맹세를 들먹이는 것이야. 저자를 잡아가야 하는 ‘이유’를 잊은 것이냐!”

    사섬은 ‘이유’를 강조했지만 남원자는 머뭇거리면서도 포권을 취하고 움직이지 않았다.

    남안도 그걸 보고 얼른 고개를 숙이고 포권을 해보였다.

    “그래, 그렇게 나오겠단 말이지……. 내 돌아가 이 일을 노조께 아뢰면 너희 스승이 뭐라고 변명하는지 보겠다.”

    노기 어린 웃음을 흘린 사섬의 말에 남안이 안색이 달라져 몸을 일으키려 했다.

    “돌아가 합당한 벌을 받으면 그만이다. 오늘 우리가 맹세를 어기고 돌아가면 사부님께서는 그걸 더 안타까워하실 것이야.”

    옆에서 남원자가 그녀의 소매를 잡아끌며 전음으로 설득했다.

    그제야 남안도 더는 몸을 일으키려 하지 않았다.

    남들은 몰라도 남 씨 오누이까지 나서지 않자 사섬은 면이 서지 않았다.

    “너희들은 오늘의 선택을 후회하지나 말거라.”

    사섬은 누가 들어도 협박인 말을 남겼다.

    팔짱을 끼고 그걸 지켜보던 근류는 재미난 구경을 한다는 얼굴이었다.

    사섬이 열 받을수록 한립을 잔인하게 짓밟을 테니 그가 바라던 바였다.

    뒷짐을 쥐고 제자리에선 한립은 사섬을 어떻게 상대하면 좋을지 머리를 굴리면서 여유롭게 미소 짓고 있었다.

    ‘네 놈이 언제까지 웃을 수 있을 것 같으냐?’

    근류가 그걸 보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다들 이 일에 끼어들지 않기로 했으면 구경은 하되 멀리 물러나는 게 좋을 것이네.”

    황포 추녀는 노란 광채만 남기고 그 자리에서 사라졌고, 그걸 본 수사들도 멀리 이동했다.

    휘잉.

    다음 순간 한립 뒤에서 노란 모래바람이 일어나 사방에서 그를 포위했다.

    대비하고 있던 한립이 체내의 진언보륜을 역전해 순식간에 사라졌기에 모래바람은 허공으로 떨어졌다.

    노란 모래가 바닥에 떨어져 흩어진 순간, 그 안에서 노란빛의 장막이 퍼져 주변 백 리를 감쌌다.

    그 안에서 몸이 묵직해진 한립은 갑자기 산에 깔린 듯 움직임이 불편해졌다.

    사섬의 영역 범위 안의 모래사막에서 환영이 일어나 굽이굽이 이어진 민둥산을 만들어냈다.

    한립 주변의 땅에서는 크고 작은 노란 늪지대가 생겨 부글부글 기포를 끓어 올리고 있었다.

    그 악취에 토악질이 날 것만 같았다.

    구륵, 구륵…….

    이때 미세한 두꺼비 울음소리 같은 것을 들은 한립은 서둘러 뒤를 돌아보고 안색이 달라졌다.

    수백 장 밖 늪 속에 집채만 한 두꺼비가 머리를 내밀고 황금색 눈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털이 쭈뼛 선 한립은 손목을 돌려 서른여섯 자루의 청죽봉운검들을 날려 보냈다.

    쉬쉬쉬쉭!

    검 끝에서 뇌전이 빠져나와 흙 속성 법칙의 힘에 대항하며 날아갔다.

    비검들이 늪에 가까워져 검기와 뇌전들을 잔뜩 모았을 때 두꺼비가 돌연 늪으로 들어가 자취를 감추었다.

    연신술을 운용해 의식으로 사섬을 찾던 한립은 주위에 퍼진 법칙의 힘의 방해 때문에 기운을 감지할 수 없었다.

    “영역과 완전히 뒤섞여 감지하기 힘들겠구나.”

    미간을 좁힌 그가 중얼거리는데 서 있던 땅이 급격히 치솟았다.

    땅속에서 튀어나온 노란 거대 두꺼비의 머리에 떠밀린 것이다.

    한립은 당황하는 기색 없이 수결을 맺었고 청죽봉운검들이 그를 보호하려고 돌아왔다.

    그러나 비검들이 도착하기도 전에 머리 위가 어두워지면서 산봉우리가 떨어졌다.

    진짜 산봉우리였으면 걱정할 것이 없겠으나 사섬의 조물경 영역에서 만들어진 물건이라 흙 속성 법칙의 힘을 품고 있었다.

    인상을 찡그린 한립이 손을 뻗자 청죽봉운검들이 방향을 틀어 고공으로 치솟았다.

    콰콰쾅!

    날카로운 검명을 내며 산봉우리 아래로 찔러 들어간 비검들이 눈부신 뇌전을 터트렸다.

    금색 뇌전빛이 바다를 이루어 산봉우리의 낙하를 막고 있었다.

    <천살진옥공>을 펼쳐 몸을 뒤집은 한립은 수직으로 떨어져 내리며 주먹을 뻗었다.

    무너져내린 지면의 거대한 구덩이 속에서 노란 거대 두꺼비가 입을 벌리고 그를 삼키려 하고 있었다.

    서늘하게 눈을 번득인 거대 두꺼비가 입을 다물어 그를 삼키려는 순간 한립이 주먹 끝에 별빛을 모아 일격을 날렸다.

    쿠아앙!

    불똥이 팍팍 튄 사섬의 입이 엄청난 권풍에 찢겨나가고 한립이 별빛 속에서 나타났다.

    노란 두꺼비의 죽음에 주변 환경이 달라져 영역이 10분의 1로 줄어들고 노란빛이 옅어졌다.

    동시에 고공의 산봉우리도 녹아 진흙 비가 되어 내렸다.

    피할 틈도 없이 진흙 비에 몸이 젖은 한립은 청죽봉운검들을 체내로 불러들였다.

    “어떻게!”

    멀리 자리를 피했던 사람들은 믿기지 않았다.

    대라경 존재인 사섬이 이렇게 허무하게 졌단 말인가?

    흥미롭게 싸움을 지켜보던 근류도 얼굴이 실망과 분노로 범벅이 되었다.

    이때 이변이 발생했다.

    공중의 한립이 갑자기 뻣뻣하게 굳어 쿵, 하고 바닥에 떨어진 것이다.

    “이런!”

    인상을 찡그린 교삼이 즉시 수십 리를 튀어 나갔다.

    “뭐 하는 겁니까! 우리 임무를 잊은 거예요?”

    그걸 본 호삼이 서둘러 따라가 붙들자 교삼이 둔술을 멈추고 먼 곳을 응시했다.

    한립이 뒤집어쓴 진흙물이 딱딱한 외투가 되어 그를 가두었고, 마치 노란 진흙 인형이 된 것만 같았다.

    평범한 진흙 인형과 다른 점은 표면이 기괴한 문양들이 새겨져 강력한 흙 속성 법칙의 힘과 구금력을 내뿜는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한립도 반항을 해보았으나 진흙 외투의 색이 진하게 변하자 정말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그때 지면의 다른 늪에서 손바닥 크기의 두꺼비가 펄쩍 뛰어올라 황포 추녀로 변했다.

    “하하! 태을경 주제에 날 이길 수 있을 것 같더냐?”

    사섬은 곁의 진흙 인형을 보며 조소했다.

    뇌옥책 등은 한립이 사섬에게 잡힌 것을 보고 망설이다 분분히 날아돌아왔다.

    “꼴 좋다!”

    입꼬리를 끌어올린 근류도 날아들었다.

    남은 교삼과 호삼은 머뭇거리고 있었다.

    “너희, 이놈을 도우려던 것 같은데 윤회전 것들이냐 그렇다면 참지 말고 덤비거라. 이놈을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 않더냐.”

    사섬이 그들을 보고 도발했다.

    노기가 어린 교삼이 주먹을 쥐고 한 발 앞으로 나섰다.

    “과연 한패였어…….”

    말을 하다말고 사섬의 표정이 변하고 예기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한립을 가둔 진흙 인형에 금빛이 줄줄 흐르더니 금색 나무 허상이 자라나 덩굴을 늘어트렸다.

    강렬한 시간법칙의 힘에 딱딱하게 굳은 진흙을 녹여 흙탕물로 만들고, 그 안에서 청죽봉운검을 든 한립이 튀어나왔다.

    이 모든 일이 찰나의 순간에 일어났다.

    사섬이 깜짝 놀라 피하려는데 발밑에서 금색 모래가 나타나 그녀의 발목을 잡았다.

    괴이한 시간법칙 파동에 두 종아리까지 굳어 버린 그녀는 움직일 수 없었다.

    그러는 동안 금색 나무 허상의 덩굴이 다가와 상반신을 꽁꽁 묶고 있었고, 한립의 뒤에서는 진언보륜이 떠올라 그녀를 금빛으로 속박했다.

    또한 한립은 청죽봉운검을 뻗어 그대로 사섬의 심장을 찔렀다.

    워낙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이라 주변에 있던 수사들도 시간법칙의 영향에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카카캉!

    칼끝이 사섬의 가슴에 닿자 쇠붙이가 마찰하는 소리와 함께 금빛 불똥이 튀었다.

    놀랍게도 청죽봉운검이 그녀의 가슴을 뚫지 못한 것이다.

    미간을 좁힌 한립도 의외라는 눈빛이었다.

    이때 사섬의 몸에서 노란 부적 문자가 떠올라 흙 속성 법칙의 힘으로 겹겹이 파문을 일으켜 한립의 세 가지 법칙 보물이 발산하는 파문과 충돌했다.

    시간법칙이 3대지존법칙 중 하나라 우위를 점하기는 해도 한립과 사섬의 수행 차이가 있고, 사섬의 법칙에 대한 이해가 깊어 대치가 이어졌다.

    황토색 빛이 조금씩 밀려나자 사섬은 차차 몸을 움직일 수 있었다.

    미간의 주름이 깊어진 한립은 시간법칙 보물들의 영향권을 절반으로 줄여 사섬을 더욱 강력한 힘으로 속박했다.

    자신을 얕본 틈을 타 쉽게 사로잡았는데 일단 통제를 벗어나면 다시 제압하기는 힘들 것이다.

    시간법칙 보물들의 힘을 집중하자 사섬이 움직일 수 있는 영향이 줄어들었다.

    이에 안심한 한립은 36자루의 청죽봉운검을 불러내 겹겹이 푸른 검빛 허상을 만들고 그 안에 대량의 뇌전을 풀어놓았다.

    “가라!”

    검결을 맺은 그의 외침에 금색 뇌전이 용처럼 변해 사섬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 강력한 힘에 지나는 공간이 갈라져 작은 공간균열들이 생겨났다.

    금색 뇌전용이 사섬을 집어삼키려는 순간, 한립의 뒤쪽에서 남색 빛이 번득였다.

    금색 문양을 반짝이는 주먹 크기의 남색 구슬이 거대한 물의 소용돌이로 변해 그를 기습한 것이다.

    시간법칙 보물들과 청죽봉운검들을 동시에 조종하느라 정신을 집중하고 있던 한립은 등 뒤의 변고를 알아챘지만 조금 늦고 말았다.

    등 뒤의 강대한 힘이 진언보륜의 금빛에 약간 느릿해졌으나 완전히 막을 수는 없었다.

    쾅!

    한립이 충격으로 튕겨 나가고, 청죽봉운검이 만들어낸 뇌전용은 사섬을 코앞에 두고 흩어져 비검 본체들만 한립의 몸속으로 돌아왔다.

    수백 장을 튕겨 나가다 몸을 가눈 한립은 뇌옥책 등이 서 있는 방향을 보고 눈빛이 이글거렸다.

    다들 놀란 눈빛으로 무리중의 한 사람, 근류를 보고 있었다.

    조금 전 혼원명수주로 공격해 한립이 공들인 일격을 막은 것은 바로 근류였다.

    “사형, 왜…….”

    소안천도 생각하지 못했다는 얼굴이었다.

    “왜냐고? 천정에서 수배 중인 죄인은 마땅히 없애야 하는 것 아니더냐? 다들 금원선역 수사로서 본분을 다하지 않고 사 선배님을 돕지 않고 뭣들 하는 겁니까!”

    근류는 당당하게 외쳤다.

    “무턱대고 나섰다가 그 화가 천수종에 미칠 것은 걱정하지 않으세요? 천정한테는 밉보일 수 없고 윤회전은 밉보여도 되는 줄 아시냐고요?”

    “지금 천정의 죄인을 비호하려는…….”

    소안천의 말에 근류가 뭐라고 하고 있는데 사섬이 말을 끊었다.

    “흐흐, 전음으로 맺은 밀약에 따라 근 수사가 한립을 잡는 데 도움을 주면 내 확실히 소 선자를 차지할 수 있게 해주겠네!”

    사섬의 음흉한 목소리를 들은 근류는 민망함을 감출 수 없었다.

    “일단 한립이나 처리하시죠.”

    표정을 수습한 그가 한립에게 눈길을 돌렸다.

    사섬이 자신을 그녀와 한패로 만들려는 속셈인 줄은 알았지만 불만이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제 소안천 뿐 아니라 남원자 오누이 등 모두가 그를 멸시하는 시선으로 보고 있었고, 뇌옥책은 당장 때려죽이지 못해 한이라는 얼굴을 했다.

    혼원명수주의 위력이 강하기는 했으나 그의 공격을 방해해서 사섬을 풀어주었을 뿐 한립에게 큰 부상을 입힌 것은 아니었다.

    화를 억누른 한립은 청죽봉운검들을 융합해 장검으로 만들고 사섬을 향해 먼저 달려들었다.

    그걸 본 사섬도 이전보다 신중한 눈빛으로 손을 펼쳐 황토색 영역을 퍼트렸다.

    땅에서 산들이 치솟고 대량의 늪지가 조성되었다.

    날아오는 한립을 향해 늪에서 거대 손들이 날아들고 머리 위로는 산봉우리가 덮치려 하고 있었다.

    “한 수사, 제가 돕겠습니다.”

    교삼의 목소리가 들린 뒤 암홍색 영역이 퍼져 황토색 영역을 지탱했다. 그러자 사방에서 몰려들던 압박감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가 고맙다고 말하기 전에 호삼도 영역을 펼쳤다.

    “으휴, 도저히 보고만 있을 수가 없군요…….”

    호삼이 탄식했다.

    한립은 기뻐하며 <천살진옥공>과 진령혈맥을 동시에 운용해 진령 머리가 셋 달린 거마 형상으로 변신했다.

    “역시 윤회전 것들이었어! 너희들은 이래도 저들을 잡지 않을 것인가!”

    사섬이 호통을 쳤으나 뇌옥책 등은 아무 소리도 못 들은 것처럼 서 있었다.

    남원자 오누이조차 아예 몸을 돌리고 자신들은 끼어들지 않겠다는 태도를 분명히 보였다.

    대노한 사섬은 또 어쩔 수가 없이 한립을 향해 달려들었다.

    흙 속성 법칙의 힘을 가득 품은 거대한 낭아봉을 꺼내든 사섬과 성신지력, 진룡의 힘, 곤붕의 힘, 산악거원의 힘을 격발하고, 청죽봉운검 장검을 든 한립이 전속력으로 충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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