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60화. 고백
*
그들이 떠나고 뇌옥책과 소안천 등만 남자 근류는 왠지 모르게 안심이 되었다.
속내를 알 수 없는 인물을 곁에 두는 게 마음이 편치 않았던 것이다.
남원자 오누이도 한숨을 돌렸다.
그를 죽이러 여기까지 와서 싸우기까지 했는데 동행하는 게 편했을 리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어디로 가죠?”
소안천이 남은 이들을 살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지요, 소 선자.”
뇌옥책이 여러 문양이 각인된 금속 원반을 꺼내 들고 수결을 맺은 손으로 몇 군데를 짚었다.
웅.
흐릿한 불씨가 원반 위에 나타나 무언가에 이끌리듯 한쪽으로 기울었다.
“여기로 가시면 되겠습니다.”
“이 원반은 뭐죠?”
소안천의 질문에 뇌옥책이 잠시 멈칫하다 설명했다.
“세월신등과 관련된 법보입니다. 이게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가면 헛걸음을 할 일은 없을 거예요.”
“그러면 석 수사는 완전히 틀린 방향으로 갔다는 이야기네요.”
“처음 비경에 들어왔을 때 갈림길을 기억하십니까.”
“그 말은, 길은 달라도 결국 같은 곳에 도착할 거란 소린가요?”
“석 수사가 제대로 된 길로 갔는지는 모르겠으나 결국에는 우리와 같은 곳으로 올 것 같다는 말입니다.”
뇌옥책이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 끌 것 없이 원반이 알려준 방향으로 갑시다.”
문중은 소안천이 수긍하는 것을 보고는 입을 열었다.
* * *
금색 사막은 의식 감지를 심하게 방해하고 둔술도 억제해서 적응하기가 어려웠다.
“웅산 수사, 무슨 목적으로 나를 따라오겠다고 한지는 모르겠으나 충고 한마디만 하겠습니다. 제가 당신을 또 한 번 죽이게 하지 마세요.”
한립은 힐끔 뒤따라오는 웅산을 보았다.
“우리가 다시 만나게 된 건 제 뜻이 아닙니다. 운명의 장난이라고 해야 할까요? 기마자 옥주가 하필 저를 지목하지 않았으면 태을 후기에 이르기 전까지는 결단코 출관하지 않았을 겁니다.”
“어째서 태을 후기입니까?”
“선궁의 지원을 받으면서 당신보다 먼저 태을 후기에 이르러 예전의 빚을 갚아줄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수사를 만나고 보니 영원히 그럴 기회는 없을 거란 판단이 서더군요.”
웅산은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날 어떻게 알아본 겁니까?”
“얼마 전 기마자 옥주와 싸우지 않았습니까?”
“그때 내게 무슨 표식이라도 남겼겠군요.”
눈을 번득인 한립이 중얼거렸다.
“머리 회전이 빠르십니다. 윤회전 가면으로 변신할 수 있다는 것을 안 기마자 옥주는 이후 추적을 쉽게 하도록 표식을 남겨 두었습니다.”
“어떤 표식인데 난 감지할 수 없는지 분명히 말하는 것이 좋을 겁니다.”
“영력 파동을 방출하지 않는 대신 멀리까지는 감지할 수 없는 표식입니다. 가까이 다가가야 이걸로 미약한 감응이 가능하지요.”
웅산은 버들잎 크기의 옥패를 꺼내 그에게 얌전히 건넸다.
옥패를 받아든 한립은 손끝이 뜨끈해지는 것을 느끼고 그의 말에 납득했다.
“내 정체를 알고도 피하기는커녕 따라온 이유는?”
“그거야 뭐……. 당신을 따라가야 더 안전할 것 같고, 혹시 남는 보물이라도 건질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해섭니다. 그리고 당신을 쫓아다녀야 나중에 기마자 옥주를 만나더라도 임무에 충실한 것처럼 보일 것 아닙니까.”
“내가 손을 쓸까 두렵지는 않은 겁니까?”
한립이 눈을 가늘게 뜨고 상대를 살폈다.
“나를 한 번 죽여 그 전의 은원은 해결된 것으로 압니다. 내가 먼저 당신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면 은원이 분명한 그 성격에 아무 이유 없이 나를 죽이려 할까요? 내 판단이 틀려서 당신의 손에 죽는다면 그건 스스로 책임질 일이겠지만, 이런 정체 모를 탑에서 이유도 모른 채 죽고 싶지는 않습니다.”
웅산은 등골이 서늘해졌지만 꿋꿋하게 답했다.
“웅산 수사, 그렇다면 내가 한 말만 명심하세요. 이상한 짓을 했다가는 봐주지 않을 겁니다.”
다른 때였다면 결코 웅산을 뒤따르게 하지 않았겠으나 지금은 기마자의 행적을 알 수 없었다.
그를 남겨 두어 무슨 음모를 꾸미는 것인지 알아보고, 거꾸로 기마자를 불러들여 후환을 제거할 생각이었다.
“손만 까딱해도 저를 죽일 수 있는 능력이 된다는 것을 압니다. 어리석은 짓은 않겠습니다.”
냉소를 흘리는 한립을 향해 웅산이 서둘러 답했다.
짧은 대화가 오가는 사이 교삼과 호삼이 따라붙었다.
“한 형, 이제 똑바로 말씀해 주세요. 저기 뭐가 있다는 거죠?”
교삼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러니까 말입니다! 아니, 이유라도 알고 따라가야 우리도 마음이 놓일 것 아닙니까. 무슨 일이 생기면 대처하기도 편하고요.”
모르는 사람도 없기에 호삼은 편히 불평을 늘어놓았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기운을 감지해서 조사를 해보려던 것이니 굳이 따라나서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차피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르는데 그냥 따라갈게요.”
교삼이 결정을 내리고 한립을 따라 무리가 이동했다.
금색 모래 곳곳에 커다란 금색 뼈들이 묻혀 있었지만 의식으로 훑고 지나쳤다.
“저기쯤인데…….”
두 시진을 날아간 한립은 위풍당당한 궁전 건물의 흐릿한 윤곽을 볼 수 있었다.
그가 감지하고 쫓아온 기운도 명확해졌다.
백여 리를 더 날아간 그들은 금색 모래로 지은 거대한 대전 위에 금색 뿔들로 장식이 되어 있고, 그 지붕에 금색 장포를 입은 청년이 등을 기대고 누워있는 것을 발견했다.
퍽 잘생긴 외모의 청년은 금색 해골을 던졌다 받았다 하며 지루하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종족의 해골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금색 해골은 어찌나 오랫동안 갖고 놀았는지 반질반질하게 닳아있었다.
탁.
금색 해골을 높이 던져 받아든 청년은 상체를 일으켜 수십 리 거리로 접근한 한립 무리를 보고 혀를 날름거렸다.
그의 옷깃에서 손바닥 크기의 금색 도마뱀도 기어 나와 어깨에서 그들을 주시했다.
“역시.”
“아는 자인가요?”
교삼이 한립을 보았다.
“아는 사이라고 하기는 그렇지요. 그 유명한 서금선이라 알아본 겁니다.”
“예? 대라경의 기운이 느껴지는데, 서금선이라면……. 평범한 대라경 수사들도 꺼리는 상대가 아닙니까.”
호삼이 듣고 있다 깜짝 놀라 말했다.
“휴! 한 수사, 진작 말해줬으면 저는 따라오지 않았을 겁니다.”
웅산도 탄식했다.
한립이 뭐라 답하기 전에 청년이 번득 공중으로 떠올라 그들을 마주 보았다.
“긴장할 것 없다. 당장 죽일 생각은 없으니까…….”
긴장한 그들을 보고 청년이 헤죽 웃고는 어깨의 금색 도마뱀을 떼어내서 손바닥에 올려두었다.
“여기 갇혀 있는 동안 너무너무 지루했어. 근 백만 년 동안은 이 금몽석(金朦蜥) 밖에는 곁에 없었으니까.”
그는 말을 하며 금색 도마뱀을 교삼 면전에 던졌다.
교삼 앞에 순식간에 암홍색 빛의 장막이 펼쳐졌고, 금몽석은 마치 화살처럼 장막을 움푹하게 밀고 들어와 그녀의 코앞에서 멈추었다.
암홍색 장막에 물결이 치고 반탄력으로 금몽석을 튕겨내려 할 때 한립이 소리를 쳤다.
“조심…….”
그의 경고에 무심코 한 걸음 물러난 그녀를 누군가 어깨를 휘감아 날아올랐다.
막 튕겨 나가던 금몽석이 급속도로 부풀어 펑, 하고 폭발했다.
쉬쉬쉬쉭!
금빛이 작열하는 가운데 소용돌이가 나타나 칼날 같은 금빛들을 터트렸다.
금속 속성 법칙의 힘이 담긴 칼날들은 허공을 찢어발겼다.
교삼을 뒤쪽으로 밀쳐낸 한립은 <대오행환세결>과 <천살진옥공>을 동시에 운용해 전신을 별빛으로 감싸고 주먹을 내질렀다.
그러자 주먹 끝에 금빛이 뭉쳐져 튀어 나가 소용돌이와 충돌했다.
쿠왕!
소용돌이 속에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금빛 칼날들이 사방팔방으로 뻗어 나갔다.
금빛이 채 가시기도 전에 청년은 한립을 향해 달려들었다.
한립은 속으로 탄식했다.
누가 서금선 아니랄까 봐, 제대로 대화도 해보지 않고 다짜고짜 죽이려 달려드는 성격이 금동과 판박이였다.
서금선을 앞에 두고 방심할 수 없어 한립은 체내의 진언보륜을 역전해 거리를 벌렸다.
“시간법칙?”
텅 빈 허공을 덮친 청년은 불만스럽게 중얼거리고 몸에서 파문을 일으켜 이동했다.
이때 눈앞이 번쩍인 한립은 청년이 옆으로 다가와 목을 틀어쥐려 손을 뻗고 있는 것을 보았다.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속도였다.
이때 여인의 기합 소리가 들리고 검빛이 좌측에서 청년의 머리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그러나 청년은 피하려 하지도 않고 한립만을 노렸다.
챙!
검빛이 터지고도 청년은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사내의 손끝이 한립의 목에 닿으려는 찰나, 금빛이 한립의 등 뒤에서 퍼져 나왔다.
금색보륜이 떠올라 찬란한 빛을 발산했다.
청년이 시간 유속이 느려진 공중에 멈추었을 때 한립은 손가락을 까딱였다.
쉬쉬쉬쉭.
청죽봉운검 36자루가 떠올라 금색 뇌전을 방출했다.
36줄기의 뇌전 교룡이 청년의 급소를 향해 떨어질 때마다 채채채챙, 하는 금속성의 충돌음이 들렸다.
콰르릉!
뇌전에 휩싸여 자취를 감춘 청년 주위로 타는 냄새가 퍼져나갔다.
그러나 뇌전이 걷힌 자리에는 청년이 멀쩡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금색 장포 끝이 조금 타들어간 것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변화도 찾아볼 수 없었다.
미간을 좁힌 한립은 수결을 맺어 청죽봉운검들을 하나로 합친 장검을 쥐고 팔을 뻗었다.
모래사막에 돌풍이 일고 금색 뇌전 기둥이 떨어져 내렸다.
쿠콰콰쾅…….
천지가 우렁차게 울부짖고 금색 뇌전이 일대를 뒤덮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전부 뇌전뿐이었다.
진작 멀리 물러선 교삼 등은 그걸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건 해도 너무하는 것 아닌가. 휴, 괜히 비교해봐야 속만 상하지…….”
복잡한 심경으로 웅산은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잠시 후, 뇌전 연못이 가시고 청년의 머리카락 한 올 자르지 못하고 정수리 위에서 멈춰선 청죽봉운검이 나타났다.
대라급 서금선의 몸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단단했다.
“크큭, 다 한 것이냐? 더 없으면 내가 공격을 해야겠지…….”
진언보륜의 광선에 구금된 줄 알았던 청년이 독자적인 법칙 파동을 내뿜어 금빛을 밀어냈다.
한립의 눈에도 이채가 어렸다.
벌집들을 연화해 대량의 시간법칙의 실을 뽑아낸 덕에 다른 이들은 상상도 못 할 법칙의 힘을 품고 있었는데, 대라급 서금선은 붙들어 둘 수가 없었다.
웃음기가 짙어진 청년은 등 뒤로 거의 투명한 날개를 펼치고 신속하게 날갯짓을 했다.
진언보륜의 광선이 물러나는 영역이 커지면서 청년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다.
손으로 칼끝이 박혔던 정수리를 만져본 그는 한 손으로 주먹을 감싸고 문질렀다.
간단한 동작에도 폭발적인 기세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조심하세요!”
교삼이 놀라 도우려 다가오는데 한립이 손을 들어 말렸다.
그녀의 의아한 시선을 받으며 한립은 아예 진언보륜을 거두어 버렸다.
“한 형, 왜 그러는 겁니까?”
호삼은 어리둥절했고, 맞은편 청년도 멍한 얼굴을 했다.
“서금선 수사, 제가 어떻게 불러드리면 좋겠습니까?”
한립은 청년을 향해 대화를 시도하고 있었다.
“이제 와 친한 척한다고 이게 해결이 될 상황입니까?”
호삼이 멀리서 아연한 웃음을 지었다.
서금선 청년 역시 인상을 찌푸리고 대답이 없었다.
“당신도 다른 층에 갇힌 분들과 마찬가지로 태세선존에 의해 이곳에 붙잡혀 있었던 것일 테지요. 굳이 저희를 적으로 돌릴 이유가 없을 텐데요?”
“아하하.”
한립의 말에 청년은 우스운 소리라도 들은 것 마냥 웃어젖혔다.
“저희를 공격하지 않겠다면 이곳의 금제를 풀어 당신이 탑을 떠날 수 있게 해드리겠습니다. 어떠십니까?”
“나도 못 이기는 것들이 내가 탑을 떠날 수 있게 해주겠다고? 7층에 어떤 괴물이 있는 줄 아느냐? 내가 너희를 보내준다고 네 뜻대로 될 것 같냔 말이다. 괜히 어렵게 얻은 장난감을 위층 미친 늙은이에게 상납하는 꼴이지!”
“당신을 설득할 수 있다면 당연히 7층의 존재를 상대할 방법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협조하실 건지 아닌지만 말해 주세요.”
한립은 동요하지 않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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