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2059화 (1,816/2,000)
  • 2059화. 6층

    *

    “주인님께서는 아직 죽지 않았습니다. 아직 살아계실 수도 있고요.”

    석경후가 뜻밖의 말을 했다.

    그 소리에 말머리를 돌린 청포 중년인이 눈을 부릅떴다.

    “그게 무슨 소리냐? 내 주인님께서 목숨을 잃으시는 걸 직접 보았거늘!”

    “주인님이 어떤 분인지 잊은 겁니까? 그렇게 죽은 걸 믿을 수 있냐는 말입니다. 우리가 목격한 게 전부 진실이 아닐지 모릅니다. 최근 실마리를 찾기도 했고요.”

    석경후는 자신 있게 말했다.

    “그랬군. 그래서 나를…….”

    청포 중년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무언가를 물으려다 한립과 흑의 여인을 힐끔 보고 말을 멈추었다.

    “맞습니다. 주인의 부활을 위해 도움을 구하는 겁니다.”

    “주인님을 위한 일이라면 당연히 나서야겠으나, 난 이곳에 갇혀 있고 본명원패가 7층에 있어 떠날 수도 없는 처지이네.”

    태도가 확 달라진 청포 중년인이 사정을 설명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여기까지 오면서 그런 준비도 하지 않았겠습니까? 본명원패를 찾아 이곳에서 나갈 수 있게 돕겠습니다!”

    석경후가 기뻐하며 장담했다.

    “그럼 부탁하겠네. 6층으로 가는 공간의 문은 저기에 있다. 6층에 누가 갇혀 있는지는 모르나 위층으로 갈수록 더 강력한 죄수들이 있을 테니 조심해야 할 것이야.”

    “뭐, 한 수사도 있는데 누가 우릴 막을 수 있겠습니까. 한 수사, 그렇지 않은가?”

    석경후가 돌연 고개를 돌려 한립을 보며 웃었다.

    “뭐라고요? 한 수사였다고요?”

    호삼은 눈을 크게 뜨고 한립을 보았다. 흑의 여인은 평온한 것이 진작 그의 신분을 짐작하고 있던 것 같았다.

    “오, 저 녀석도 일행인 것이야? 천호족이 그간 발전을 했구나. 이런 인재들을 모집하고.”

    청포 중년인은 한립과 흑의 여인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들은 호삼이 개인적으로 친분을 쌓은 것입니다. 천호족 그 늙은이들은 변한 게 없어요.”

    석경후가 그 소릴 듣고 말했다.

    “석 선배님, 호삼 수사 그리고 교삼 수사 다들 오래간만입니다.”

    한립이 앞으로 날아들어 석경후, 호삼 그리고 흑의 여인을 향해 차례로 시선을 주었다.

    “하하, 역시 한 형은 속일 수 없네요.”

    수결을 맺은 흑의 여인, 교삼도 익숙한 용모로 돌아왔다.

    “정말 한 수사가 맞습니까?”

    호삼은 여전히 의심스러운 눈초리였다.

    그도 그럴 만한 게 회계에서 헤어질 때만 해도 금선 최고봉 수준이었던 사람이 천년 만에 태을경 최고봉이 되어 나타났으니 쉽게 믿는 게 더 이상했다.

    “보아하니 세 분 다 제 본명을 알게 되셨군요. 천정의 추적을 피하고 곤란한 일을 면하기 위해 려 가라 속인 것이니 너무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는 말아 주세요.”

    한립은 미안한 마음을 담아 미소를 짓고는 원래 모습으로 돌아갔다.

    “이거 정말 한 수사 아닙니까! 이렇게 빨리 수행이 늘고 직접 보고도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회계에서 석천공 수사와 함께 사라진 뒤로 늘 걱정했는데, 무사한 것을 보니 마음이 놓입니다. 석 형은 잘 지내고 있고요?”

    기쁜 마음에 한달음에 다가온 호삼이 속사포처럼 질문을 늘어놓았다.

    “마역의 실력자가 공간을 넘어 저와 석형을 소환해 주었습니다. 석 형은 잘 지내고 있으니 마음 놓으셔도 될 겁니다.”

    한립이 웃음을 지어 보였다.

    “좋은 소식입니다!”

    “회포는 나중에 풀고 일단 세월탑을 빠져나갈 길을 찾아보자꾸나.”

    석경후가 나섰다.

    “석 선배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호삼은 그에게 무척 공손한 태도를 보였다.

    “한 수사, 우리가 회계에서 우연히 만난 뒤로 여기서 또 마주치다니 인연이 깊다 할 수 있네. 남은 길도 함께 가는 것이 어떻겠나?”

    “부끄럽습니다만, 아무것도 모르고 선부에 들어온 뒤로 떠밀리듯 이동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의 대화를 들으니 이곳에 대해 잘 아시는 것 같은데 설명을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한립은 석경후의 요청에 질문으로 답했다.

    “물론일세. 태세선부는 태세선존이라는 대라가 남긴 동부로, 태세선존은 한 수사와 같이 시간법칙을 익히고 천정 선옥의 주인이었지. 나중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천정을 배반하고 선옥에 갇힌 죄인들과 몇 가지 보물들을 가지고 달아났는데 그중 세월신등(歲月神燈)이 가장 유명한 시간법칙의 보물이었네. 천정에서 오랫동안 찾고 있던 태세선존이 중토선역과 가까운 금원선역에 이런 비밀 선부를 만들어 두었을 줄은 아무도 생각지 못했던 게지.”

    석경후는 망설이지 않고 줄줄이 아는 바를 이야기해 주었다.

    ‘세월신등!’

    세월탑에 들어온 뒤로 강대한 시간법칙의 힘을 느꼈는데, 아무래도 석경후가 말하는 세월신등이 그 근원인 듯했다.

    “감춰진 선부가 여기에 있다는 것은 어찌 알고 오신 겁니까?”

    “그건 교삼 수사에게 물어보게. 나와 호삼도 그녀를 따라 여기까지 온 것이니까.”

    석경후의 말에 한립이 교삼을 이상하다는 듯 보았다.

    “윤회전의 비밀과 연관된 일이라 한 형께서 윤회자가 되셨다고 해도 알려드릴 수 없는 사항입니다.”

    눈을 반짝인 교삼은 고개를 저었고, 한립은 캐묻지 않고 생각에 잠겼다.

    “태세선부에 대해 내가 아는 것은 이게 다일세. 그래서 힘을 합치자는 제안에 대해서는 답을 내렸는가?”

    석경후는 한립이 말이 없는 것을 보고 다시 물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본명원패를 되찾는 것도 도와드리죠. 그 대신 제가 도움이 필요할 때도 나서주셔야 합니다.”

    “그러지!”

    “당연한 말씀입니다!”

    석경후와 호삼이 기뻐하며 답했다.

    교삼은 무언가 생각하는 표정이었지만 반대하지 않았다.

    “이렇게 된 것, 바로 출발하지.”

    석경후는 이렇게 말하며 청포 중년인을 보았다.

    “나를 따라오거라. 가면서 뭘 보든 함부로 만지지 말고, 뭐냐고 묻지도 말고.”

    담담히 충고한 중년인은 리기마를 몰아 앞으로 날아갔다.

    남안 등 그에게 정신 통제를 당한 이들도 꼭두각시처럼 쪼르르 그를 따라갔다.

    그렇게 하루를 이동한 중년인은 호리병 모양의 높은 산을 떠나 사막, 습지 그리고 산맥을 지나갔다.

    한립은 이동하는 도중 사막에 우뚝 선 얼음 조각이라던가 밀림 속 대량의 핏빛 사슬 같은 이상한 물건들을 보았지만 청포 중년인이 미리 경고했기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지나쳤다.

    그들은 여러 지대를 지나 낯선 초원의 검은 대전에 도착해 안으로 들어섰다.

    어둑한 대전 안에는 작은 화로가 밝혀져 있었고, 암홍색 빛의 문이 붉은빛으로 반짝였다.

    “여기가 6층으로 통하는 공간의 문이다. 가거라.”

    청포 중년인은 할 말만 하고 몸을 돌렸다.

    “선배님, 6층과 7층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몰라 저희끼리만 움직이는 것은 어려울 듯합니다. 그러니 저들도 함께 가도록 풀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호삼이 남안 등을 쳐다보며 부탁했다.

    “저들의 실력이 상당해서 원패를 찾는 데 도움이 될 겁니다. 그리고 환노가 부족한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석경후도 거들었다.

    “그러든지.”

    미간을 좁힌 청포 중년인은 대충 수결을 맺어 회백색 빛 일곱 줄기를 남안 무리에게 쏘아 보냈다.

    회백색 수정실이 몸에서 빠져나와 중년인이 몸으로 돌아갔다.

    “7층에 가서 내 본명원패를 발견하면 그것도 챙기는 것을 잊지 말게. 내게 가져다주면 보상을 할 것이야.”

    다른 이들이 회백색 실에 정신이 팔린 사이 한립의 뇌리에 아주 작은 목소리가 울렸다.

    리기마가 전음을 보낸 것이었다.

    한립이 슬쩍 보았지만 리기마는 충실한 말의 역할을 다하며 그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만 가거라.”

    할 일을 마친 청포 중년인이 리기마를 타고 사라지자 남안 등도 차차 원래대로 돌아가고 있었다.

    붉은빛을 일으킨 한립이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호삼, 교삼 등도 분분히 수결을 맺어 흑의 남녀로 분장했다.

    “여긴 어딥니까? 분명 보물이 회백색 수정실로 변해 몸에 파고들었었는데…….”

    뇌옥책, 소안천 등이 경황없는 얼굴로 주위를 살폈다. 정신을 놓은 후에 기억이 없는 것이 분명했다.

    “다들 걱정하지 마세요. 적은 떠났고 우리는 이제 안전합니다.”

    호삼이 입을 열었다.

    “자네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아는 것인가?”

    뇌옥책이 그를 돌아보았다.

    “알고말고요! 크흠, 그러니까 그게…….”

    헛기침을 해서 목을 푼 호삼은 낭랑하게 한립이 엄청난 무위를 발휘해서 홀로 적을 격퇴하고 모두를 구했다는 식으로 떠들었다.

    원래 거짓말을 잘하는 터라 상황에 딱딱 떨어지게 말도 잘 꾸며냈다.

    한립은 내심 쓴웃음을 지었지만 반박하지 않았다.

    “저희를 또 구해주시고, 감사한 마음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태세선부에서 빠져나가면 꼭 천수종에 머물다 가세요. 정성을 다해 대우할 것입니다.”

    소안천이 감격해 말했다.

    웅산, 남안, 남원자도 인사를 하기는 했는데, 남 씨 오누이는 그를 더 경계했다.

    뇌옥책, 근류, 문중 등의 표정은 조금 떨떠름했다.

    공들여 금제를 파훼하고 언쟁까지 불사했던 근류는 얻는 것도 없이 벌집마저 한립의 손에 들어간 것이 불만인 듯했다.

    “아닙니다. 적은 잠시 물러난 것뿐이니 어서 이곳을 떠나 6층으로 올라가야 합니다.”

    “맞아요, 서둘러요.”

    한립의 말에 소안천이 호응했다.

    뇌옥책 등은 어쩔 수 없이 공간의 문의 금제를 풀기 시작했다.

    이전 공간의 문 금제와 똑같아 익숙한 손놀림으로 금제를 파훼하고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눈앞이 확 밝아졌다 나타난 곳은 무한히 펼쳐진 금색 모래사막이었다.

    동서남북 어느 방향을 쳐다봐도 모래만 가득하고 건조한 공기에 숨이 턱 막혀 왔다.

    빛의 문을 빠져나온 이들은 은연중에 두 무리로 갈라졌다.

    호삼과 교삼이 한립과 가까이 서고, 천수종 두 명과 뇌옥책 문중이 몰려 있자 남원자 오누이도 그들 뒤에 섰다.

    이상한 일은 웅산이 어느새 한립 쪽에 붙어 있다는 것이었다.

    교삼이 허리를 굽혀 바닥의 모래를 집어 들었다.

    “이건 금사(金砂)…….”

    “금사가 아니라 대량의 짐승 골분(骨粉)이네.”

    한립이 고개를 저었다.

    “이게 다 뼛가루라고요? 그럴 리가요?”

    “골분이 확실해.”

    교삼도 의아해하는데 뇌옥책이 손을 뻗었다.

    그가 가리킨 곳에 반달처럼 땅이 불룩 솟아 있었는데 무리가 다가가 보니 거대한 짐승의 황금색 뿔이었다.

    교삼이 다가가 만져보려는데 손이 닿자마자 폭, 하고 뿔이 흩어져 금색 모래로 변했다.

    “망망대해나 다름없는데 어디로 가야 할까요?”

    호삼이 막막하게 중얼거렸다.

    하늘에는 하얀 태양이 떠서 뜨거운 햇살을 내리쬐고 있었다.

    뇌옥책이 무슨 말을 하려는데 한립이 어딘가를 가리켰다.

    “저쪽…….”

    6층도 의식을 제약하는 힘이 강해서 백 리를 살피기 어려웠다.

    “거기에 뭐가 있는 데요?”

    소안천이 호기심을 드러냈다.

    “의식을 퍼트릴 수 없어 무엇이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특수한 기운이 감지되는 게 가보는 것이 좋겠어요.”

    한립의 말에 교삼과 호삼도 망설이는 표정이었다.

    “석 수사, 여기까지 오는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지 아실 겁니다. 감에 의존해 움직이기보다는 더 안전한 길이 없을지 상의를 해보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뇌옥책도 마땅치 않아 했다.

    “맞습니다. 탑이 얼마나 위험한 곳인지 알았는데 무턱대고 아무 데로나 갈 수 있나요.”

    소안천이 뭐라 말하기 전에 근류가 나섰다.

    소안천은 다른 이야기를 하려던 것 같았지만 입을 다물었다.

    “두 분의 호의는 감사드립니다. 기왕 6층까지 온 것 이제 각자 갈 길을 갈 때도 된 것 같군요. 저는 저곳으로 먼저 가보려 합니다.”

    미소를 지은 한립은 포권을 하고 미련 없이 떠나려 했다.

    “석 수사, 저도 함께 가고 싶습니다.”

    이때 웅산이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그 말에 한립은 말없이 둔광을 일으켰고 웅산이 그를 쫓았다.

    “저희도 그럼.”

    교삼은 잠시 고민하다 호삼과 같이 둔광을 연결해 날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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