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8화. 문답(問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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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안천과 근류가 기합을 넣으며 남색 창과 남색 깃발을 두 개씩 날려 보내 남색 덮개가 떨어지는 것을 막는 사이, 뇌옥책과 문중이 측면으로 튀어 나가 한립 등을 노렸다.
금색 검기들을 두른 두 사람 때문에 주변 벽과 바닥에 흔적이 남고 공간이 웅웅 떨리고 있었다.
웅산과 흑의 남녀 그리고 남원자가 서둘러 각자의 신통을 펼쳐 그들을 상대했다.
쿠쾅쾅!
네 사람이 힘을 합쳐서야 겨우 뇌옥책과 문중의 공격을 막을 수 있었다.
대전 안의 금제가 충돌로 부서지면서 건물이 무너져 내려 폐허가 되어갔고, 공간의 제약이 없어진 이들은 공중으로 날아올라 한데 엉켜 격전을 펼쳤다.
남안은 홀로 소안천과 근류를 상대하고 웅산 등 네 명이 뇌옥책과 문중을 상대했다.
뇌옥책 등은 본 실력이 아니라 누군가의 조종을 받고 있기에 간신히 대치하고 있는 것이었다.
“누가 숨어서 이런 짓을 벌인 것인지 모르겠으나 모습을 드러내시지요.”
공중에 떠오른 한립은 싸움에 끼어들지 않고 밝은 보랏빛을 품은 눈으로 주위를 살폈다.
“구유마동이라? 이곳에서 마족의 신통을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제법 괜찮은 환노(幻奴)로 만들 수 있겠어.”
나른한 목소리가 곳곳에서 메아리쳐 수많은 사람이 동시에 말하는 것 같았다.
한립은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포착하지는 못했지만 리기마의 목소리가 아니라는 판단에 심장이 철렁했다.
이번 층에는 리기마 말고 다른 죄수도 있는 것이었다.
“이런 수행을 지니고도 모습을 드러낼 용기조차 없으십니까?”
“말 몇 마디로 나를 움직일 수 있을 거라 여기지 말거라. 내가 세 살 먹은 어린아이 같더냐? 나를 찾고 싶으면, 네가 그럴 능력이 되어야겠지! 하하하…….”
“그렇습니까?”
한립은 도처에서 울리는 웃음소리를 듣고 피식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의 두 손이 허공의 어느 방향을 가리키자 굵직한 금색 뇌전 두 줄기가 날아가 수백 장 밖의 모처를 내리쳤다.
콰르릉!
귀청이 떨어질 것 같은 벼락이 지나가고 파문이 인 허공에서 놀란 얼굴의 중년인이 나타났다.
푸른 장포를 입은 단정하게 생긴 중년인은 눈동자가 흐릿한 회백색이라 괴이한 분위기를 풍겼다.
금색 뇌전이 아직도 완전히 흩어지지 않고 그를 둘러쌌는데, 중년인은 소매를 펄럭여 무형의 힘으로 뇌전을 밀어냈다.
한립은 중년인이 대수롭지 않게 벽사신뢰를 치우는 것을 보고 동공을 수축했다.
중년인은 분명 처음 보는 얼굴인데 어쩐 일인지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몰랐지만 뇌옥책, 문중과 싸우고 있던 흑의 청년이 중년인을 보고 기뻐했다.
“나를 어찌 찾은 것인지 들어나 보자꾸나.”
중년인은 한립을 보며 천천히 입을 뗐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어째서 함정을 파고 저희를 해치려 하는 것입니까.”
“서로 대답할 마음이 없는 것 같은데……. 번갈아 가며 문답을 해서 각자 궁금증을 풀면 어떻겠느냐?”
눈을 가늘게 뜬 중년인의 제안에 한립은 격전 중인 일행이 아직 괜찮은 것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제안한 것이니 먼저 묻거라.”
“당신은 누구십니까?”
“이곳에 너무 오랜 세월 머물러서 이름을 말해봐야 모를 테고, 여기 갇힌 죄수다.”
한립은 중년인의 대답이 만족스럽지 않았지만, 그가 이곳의 죄수라는 것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의혹이 줄었다.
“이제 내 차례겠지! 너희는 누구고 왜 이곳에 들어온 것이냐?”
“저희는 금원선역 수사들입니다. 우연히 태세선부가 나타났다는 것을 알고 보물을 찾으러 들어온 겁니다.”
“태세 그 자식의 동부가 세상에 나타났다고?”
중년인이 한립의 말에 흥분해 되물었다.
“이제 제 차례인 듯싶습니다.”
한립은 그의 표정을 보고 머리를 굴리며 담담히 말했다.
“그래, 말해 보거라.”
중년인은 열이 받았으나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화를 참았다.
“이곳에는 당신을 제외하고 다른 죄수가 몇이나 있습니까?”
눈을 반짝인 한립의 물음에 중년인이 대답 없이 박장대소를 했다.
“왜 웃으시는 거죠?”
“그걸 내가 대답해 줄 것이라 여긴 것이냐?”
“제게 더 물을 것도 없다는 뜻이겠군요.”
웃음기를 거둔 중년인을 보고 한립이 눈을 가늘게 떴다.
“시간도 끌만큼 끌었으니 더는 네 놈과 떠들고 있을 시간이 없다. 이제 그만 죽거라!”
괴소를 흘린 중년인이 두 눈에서 회백색 빛을 터트렸다.
흠칫 놀란 한립은 서둘러 시선을 피하며 전신에서 금빛을 일으켰다.
그러나 헛수고였는지 주변 풍경이 바뀌고 흐릿한 회백색 공간에 갇히고 말았다.
주변의 궁전과 남안 등 일행들은 물론 중년인도 보이지 않았다.
“환술?”
조용히 중얼거린 한립은 냉정을 되찾고 주먹을 쥐었다.
전신에서 금빛 뇌전을 뿜어 찬란한 뇌전 갑옷을 두르고 비검 36자루를 불러내 사방으로 날려 보냈다.
촤악!
회백색 공간은 비검에 잘려 반짝이다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얼굴이 굳은 그가 다른 수를 쓰려는데 회백색 공간에서 눈을 제대로 뜨기 힘들 정도의 요란한 빛이 방출되었다.
한립은 금빛 뇌전 갑옷에서 뇌전법칙을 방출하고 청죽봉운검들을 회수해 주변을 지키게 했다.
요란한 빛이 사라지고 눈을 뜬 그는 깜짝 놀랐다.
회백색 공간에 갑자기 어디서 나타났는지 청동 기둥이 생기고 그곳에 연결된 고리에 발이 묶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뇌전 갑옷이며 청죽봉운검도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한립은 즉시 9백여 개의 현규를 밝히고 전력을 다해 힘을 주었다.
하지만 미세하게 진동한 청동 기둥은 여전히 그를 붙들고 있었다.
그의 힘을 생각했을 때 청동 기둥이 강력한 선기라고 해도 이렇게 반응이 미미할 수는 없었다.
쿵.
돌연 청동 기둥에서 불길이 일어 서늘하던 기둥을 빨갛게 달구었다.
그러자 한립의 피부도 새까맣게 타서 푸른 연기를 내뿜고 단단하기 그지없던 몸은 삽시간에 화마에 휩싸였다.
뼈에 스며드는 고통에 굳센 의지를 지닌 한립도 끙 앓는 소리를 냈고, 그가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전방 허공에 회백색 칼날들이 떠올라 찔러 들었다.
순간 얼굴이 창백해진 한립은 진언보륜을 불러내 수많은 금색 파문으로 주변 천장을 채웠다.
문제는 청동 기둥의 불길은 물론 회백색 칼날도 전혀 진언보륜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윽!’
거센 불길이 그를 태우고 날카로운 칼날들이 그의 몸을 푹푹 찔러 대서 한립도 참지 못하고 고통스럽게 비명을 질렀다.
적의 고명한 환술에 깊이 빠져들어 오감은 물론 의식도 장악당한 것이다.
이렇게 허와 실을 구분할 수 없는 무서운 환술은 살면서 처음 보았다.
그 순간, 마치 외부의 기운이 침입한 것을 감지한 것처럼 한립의 몸에서 시간법칙의 힘이 새어나왔지만 불길과 칼날은 그의 몸이 아닌 의식의 방어벽을 허물고 그를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눈동자가 점점 회백색으로 물들어가는 와중에도 한립은 이쯤에서 포기하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안간힘을 다해 연신술을 발동했다.
수정 검이 의식 속에 떠올라 사납게 배회하자 약해졌던 마음도 가라앉았다.
이마에 식은땀이 맺힌 한립은 엄청난 고통을 감내하면서 결연히 <대오행환세결>의 신통을 이용해 회백색 공간을 깨부술 결심을 했다.
그때, 회백색 공간이 느닷없이 흔들렸다.
서걱!
핏빛 검 그림자가 공간을 횡으로 가르면서 회백색 공간에 침입한 것이다.
차가운 물을 부은 것처럼 머리가 맑아진 한립은 핏빛 검 그림자 속으로 혼백이 빨려 들어갈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이건!”
연신술을 이용해 혼백의 이상을 억제한 그는 핏빛 검 그림자가 바로 천호화혈도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이번 일격으로 회백색 공간이 찢어져 회백색 빛으로 흩어졌고, 한립은 다시 무너져 내린 궁전 상공에 떠있는 자신을 볼 수 있었다.
주변의 청죽봉운검과 몸에 두른 금색 뇌전 갑옷도 그대로였다.
천장 밖에서 청포 중년인이 얼떨떨한 얼굴로 흑의 청년을 보고 있었다.
흑의 청년은 천호화혈도를 들고 있었고 언제 끼어들었는지 리기마가 나타나 흑의 여인과 싸우고 있었다.
리기마는 네다섯 마리의 하얀 바람 교룡을 부려 그 안에 품은 바람의 칼날로 흑의 여인을 공격했는데, 바람의 칼날이 지날 때마다 공간이 종이처럼 잘려 미세한 균열이 나타났다.
등 뒤로 육각형의 매화꽃 문양 구멍이 뚫린 암홍색 고리를 띄운 흑의 여인은 무시무시한 법칙의 힘을 분출해 리기마의 공격을 받아내고 있었다.
다른 이들은 눈동자가 회백색으로 변해 조종을 당하고 있었지만 지금은 한쪽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흑의 사내와 여인의 동태를 파악한 한립은 상황을 이해했다.
“천호화혈도! 네 정체가 무엇이냐?”
중년인이 흑의 청년에게 냉랭히 물었다.
미소를 머금은 청년은 주문을 외워 붉은빛으로 몸을 씻더니 은발을 흩날리는 마른 청년으로 변했다.
회계에서 헤어졌던 호삼이었다.
한립도 변신한 상태라 상대가 자신의 신통을 보고 알아보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저는 천호족 9대 자제 류삼성이라 합니다! 선배님께 인사 올립니다!”
호삼이 청포 중년인을 향해 공손히 예를 올렸다.
“천호족이라……. 이곳에서 동족을 만날 날이 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그 천호화혈도는 ‘그 사람’이 준 것이냐?”
호삼의 진짜 얼굴을 본 중년인은 확실히 얼굴이 풀렸다.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합니다.”
“뭐라는 것이냐? 그를 택해 놓고 여기는 또 왜 온 것이야! 내가 동족이라는 이유만으로 너를 죽이지 않을 것 같으냐? 아니면 천호화혈도를 손에 넣었으니 나와 겨뤄볼 수 있을 것 같다 여긴 것이냐.”
“제가 감히 그런 마음을 품을 리 있겠습니까. 선배님의 환술은 가히 최고의 경지에 이르러 저는 천호화혈도를 네다섯 자루 지니고 있다고 해도 상대가 되지 못할 것을 압니다. 제가 여기까지 온 것은, 바깥에 변고가 있어 천호족이 휘말리게 되었기에 선배님께 도움을 구하기 위해서입니다.”
살기를 드러낸 중년인을 앞에 두고도 호삼은 두려워하지 않고 진심을 담아 답했다.
“떠날 때 이미 선언을 했다. 천호족에 대해 더는 신경 쓰지 않겠다고! 네 수행이 아까우니 살려는 주겠다만 그만 떠나거라.”
청포 중년인이 냉담히 말하고 손가락을 튕겼다.
멀리서 흑의 여인과 싸우던 리기마가 당장 공격을 멈추었다.
“윤회법칙을 잘 쓰던데 오늘은 여기까지밖에 싸워보지 못하겠구나. 다음에 날을 잡아 제대로 붙어보자!”
눈을 반짝인 리기마는 번득 사라져 청포 중년인 옆으로 이동해 있었다.
그 불가사의한 속도에 한립은 내심 놀랐다.
흑의 여인은 그를 추격하지 않고 암홍색 고리를 백여 가닥의 수정 실로 해체해 회수했다.
청포 중년인은 호삼 옆으로 날아든 여인을 힐끗 본 뒤 말없이 리기마에 올라 자리를 뜨려 했다.
“선배님, 천호족이 위험에 처했습니다. 정말 그냥 두고 보실 작정입니까?”
조급해진 호삼이 그를 몇 걸음 따라붙었다.
“천호족과 나는 이제 무관하다지 않았더냐.”
멈칫한 중년인이 리기마를 몰아 나아가는데 호삼은 더이상 그를 설득할 말을 떠올리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잠깐!”
이때 호삼의 손에든 천호화혈도에서 핏빛 그림자가 떠올랐다.
도령(刀靈) 석경후였다.
“넌! 너도 아직 살아 있었구나. 어쩐지 천호화혈도의 위력이 그대로라 했지. 너도 그놈에게 붙다니!”
석경후를 본 청포 중년인은 더욱 표정이 싸늘해지고 심지어 혐오하는 기색마저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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