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2057화 (1,814/2,000)

2057화. 폭증

*

편전 안.

한립은 수결을 맺은 양손을 펼쳐 내부에 겹겹이 설치한 금제 보호막을 일으켰다.

바깥을 잘 막아둔 그는 화지공간 입구를 열어 안으로 들어섰다.

화지공간 안 누각은 새까만 기운으로 둘러싸여 거대한 검은 구슬처럼 보였다.

제혼이 오소귀왕을 소화시키면서 체내의 귀력(鬼力)을 장악하지 못해 나타난 현상이었다.

한립이 수십 개의 금빛을 날리자 누각 주위로 보호막이 생겨 검은 기운을 가두었다.

시간법칙의 힘이 느껴지는 금제진법이었다.

그걸 본 한립은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 날 때 만들어 놓은 시간법칙의 힘을 함유한 진법 도구였는데 쓸 만한 것 같았다.

연이어 그의 소매 속에서 은색 불새가 날아올랐다.

“화지공간 입구를 지키거라. 침입하려는 자는 누구든 죽여도 된다.”

한립의 분부에 맑게 운 정염불새가 날개를 펄럭여 입구를 빠져나갔다.

그 후, 한립은 화지공간에서 공터를 찾아 벌집들을 늘어놓고 앉았다. 길게 숨을 내쉰 그는 <대오행환세결>을 운용해 화려한 금빛을 방출했다.

진언보륜, 광음정병, 환진사루, 동을신목, 단시횃불 다섯 개의 보물들이 떠올라 한립 주위를 천천히 맴돌았다.

보물에서 흘러나온 시간법칙 정사가 한곳으로 뭉쳐 금색 소용돌이를 이루자 한립이 주문을 외고는 수결을 바꾸었다.

그러자 강렬한 시간법칙 파동이 지나고 금색 소용돌이의 금빛이 내부로 허물어지며 고리로 변해갔다.

시간법칙의 힘을 응결해 고리를 만들어 낸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이번에는 뭔가 달랐다.

<대오행환세결> 공법의 문자들이 물처럼 뇌리로 흘러들어 어느 때보다 선명하게 다가온 것이다.

그 순간 공법의 의미를 더 깊게 체득한 한립은 체내의 법칙의 힘이 변화하려는 것을 느꼈다.

‘무슨 일이지?’

한립은 당황스러웠지만 고민할 시간이 없었다.

그의 손짓에 몇 배로 커진 금색 고리가 벌집 중 하나를 품고 급속도로 회전했다.

그리고는 마치 신이나 마물의 음성 같은 나지막한 소리와 함께 찬란한 금빛이 화염처럼 일어나 강력한 흡입력으로 화세형충의 벌집을 불살랐다.

우웅.

가볍게 진동하는 고리 안에서 금색 수정 실 한 줄기가 빠져나와 한립을 돌아 단시횃불로 날아갔다.

그 모습에 한립은 더욱 공법 운용에 힘을 쏟았다.

빛이 짙어진 금색 고리는 벌집에서 추출한 시간법칙의 힘을 시간법칙 정사로 뽑아내기 시작했다.

한 줄기, 또 한 줄기 수정 실들이 단시횃불로 날아들 때마다 벌집이 수축했다.

벌집이 사라진 후에는 52가닥의 시간법칙 정사가 단시횃불을 감고 노닐며 강렬한 시간법칙 파동을 발산했다.

그렇게 그에게 강한 열망을 느끼게 했던 벌집은 확실히 그에 못지않은 시간법칙의 힘을 품고 있었다.

법칙정사가 돌연 배로 늘자 시간법칙의 힘이 충만하게 차올라 모든 것이 이전과 다르게 느껴졌다.

<대오행환세결>의 ‘그 신통’을 사용하기에도 충분할 만큼!

기마자와 싸운 뒤 한동안 기척이 없던 시간 보물들은 기운을 회복한 뒤에도 빛이 암담했는데, 이제는 시간정사 덕에 이전보다 더 밝게 빛나고 있었다.

특히 단시횃불의 광채는 엄청났다.

흥분을 가라앉힌 한립이 수결을 맺자 금색 고리가 다음 벌집을 품고 회전했다.

2, 3시진이 지나 자리에서 일어선 한립은 몸에 가득 찬 시간법칙의 힘을 자연스럽게 통제했다.

확인해 보지 않아도 분명 이전의 그 신통을 다시 쓸 수 있을 거라는 것을 확신했다.

“그렇지. 금제는 파훼했으려나?”

기분 좋게 혼잣말을 한 한립이 제혼이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아직 넘치는 귀력을 연화시키는 중인 제혼을 방해하지 않고 그는 화지공간을 나서 편전으로 돌아갔다.

푸른빛을 뿜어 곳곳에 설치해둔 진법 도구들을 회수한 한립은 일행들이 있는 대전에 들어서자마자 굉음과 함께 핏빛과 남색빛이 가득한 광경을 보았다.

바닥에는 어느새 거대한 방원형의 남색 진법이 완성되어 원래 있던 일곱 도안을 품고 있었고, 아직 부상에서 회복하지 못한 남원자와 소안천을 제외하고는 전부 진법 안에서 수결을 맺고 있었다.

남원자와 함께 남색 진법 바깥에 서서 적의 기습을 경계하던 소안천은 한립이 다시 나타나자 기뻐하며 말을 붙였다.

“석 수사…….”

그러나 말을 다 잇기도 전에 한립을 훑다가 깜짝 놀랐다.

겨우 반나절 만에 엄청난 변화가 생긴 듯했는데 어떻게 된 건지 알 수 없었다.

남원자도 그를 보고 표정이 부자연스러워졌다.

그들에게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한립은 남색 진법으로 고개를 돌렸다.

남안 등이 수결을 맺는 속도가 빨라질수록 태양처럼 강렬한 남색 광채가 진법에서 분출되어 핏빛 장막을 향해 날아갔다.

쿠쿵

광채 속에 숨겨진 수많은 남색 주술문자들이 물의 법칙의 힘을 품고 핏빛 장막을 뒤흔들었다.

크하학!

장막 안에서 일곱 개의 눈부신 핏빛이 떠오르더니 악신의 형상으로 변해 손에서 진득한 핏빛을 내뿜었다.

핏빛은 남색 광채를 갈라 더는 장막을 흔들지 못하게 했고, 또한 남색 진법으로까지 밀려들고 있었다.

그러나 남안은 예상한 일이었는지 표정 변화 없이 일고여덟 번 수결을 바꿔 손끝으로 자신의 손목을 그었다.

폭!

그녀의 손목에서 핏방울 두 개가 빠져나와 남색 진법과 융합되었고, 즉시 진법의 색깔이 혈홍색으로 변해 물의 법칙이 아닌 혈도법칙의 기운을 내뿜기 시작했다.

“호오.”

한립도 이런 법칙 변화는 처음 보는 것이었다.

일곱 악신이 내뿜은 공격은 핏빛 진법에 해를 끼치지 못하고 그대로 흡수되었고 동시에 촉수와 같은 빛이 일행의 진법에서 튀어 나가 악신들을 휘감았다.

웅!

이때 남안을 비롯한 사람들의 수결이 일시에 바뀌고 핏빛 진법이 더욱 밝게 빛나면서 촉수들을 일곱 개의 고리로 만들어 악신들을 가두었다.

빼곡하게 주술문자가 새겨진 핏빛 고리는 강력한 구속력으로 악신 형상들을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었다.

남안은 자신의 계획한 대로 되자 기뻐하며 손을 저었다.

핏빛 영패가 날아올라 피의 법칙정사인 수정실 다발을 내뿜었다.

5, 60가닥의 수정실들이 핏빛 진법으로 흘러들어 사람만 한 거대 주술문자를 형성하고 보물을 감싼 장막으로 날아갔다.

극심하게 떨리는 핏빛 장막은 언제라도 터질 것처럼 보였다.

크아악!

악신들도 그걸 알고 포효하며 전신에 물처럼 짙은 핏빛을 머금었다.

사악한 기운이 일곱 악신의 몸에서 폭발적으로 터져 나와 악신 머리만 나타났을 때보다 10배 이상 강한 법칙의 힘으로 일행의 뇌리를 공격했다.

사악한 기운의 침식에 눈에 핏발이 선 한립도 끝없이 펼쳐진 피의 바다의 시체와 백골이 쌓여 만들어진 백골 환상을 보았다.

그러나 곧바로 그의 체내에서 시간법칙이 스스로 움직여 사악한 법칙의 힘을 밀어내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러나 다른 이들은 정상이 아니었다.

두 눈이 핏빛으로 물든 웅산은 벌써 강렬한 흉살기를 발산하며 사악한 기운에 정신이 지배당한 듯했고, 근류와 문중 그리고 중상을 입은 남원자 등도 아직 눈빛이 맑기는 했지만 야수처럼 낮게 으르렁거리면서 점점 통제를 잃어갔다.

다행히 일행 중 가장 수행이 높은 남안, 소안천, 뇌옥책은 영향을 덜 받아서 각자의 법칙의 힘을 이용해 체내에 침입한 이질적인 기운을 몰아내는 중이었다.

눈썹을 꿈틀한 한립은 다른 이들 말고 진법 안의 흑포 남녀를 눈여겨보았다.

흑포 남녀는 악신이 터트린 사악한 기운의 영향에서 그보다 조금 늦게 벗어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정신을 차린 뒤 눈짓을 교환하고 다시 핏발이 선 흐리멍덩한 눈으로 돌아가 연기를 했다.

그들보다 먼저 머리가 맑아진 한립은 그걸 똑똑히 보았지만 모른 척했다.

진법을 발동하던 이들이 정신을 통제당하니 핏빛 진법이 어두워져 악신들을 가둬두던 고리들도 힘이 빠졌다.

악신들은 그 틈에 빠져나가려 몸부림을 쳐서 일곱 핏빛 고리에는 벌써 균열이 가고 있었다.

막 남색빛과 금빛을 번득이며 정신을 차린 남안과 뇌옥책이 그걸 보고 안색이 달라졌다.

“제길!”

남안은 상황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았으나 다들 아직 사악한 기운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기에 뇌옥책과 그녀의 힘만으로는 되돌릴 수가 없었다.

그때 화려한 금빛이 떨어져 일곱 악신들을 가두는 커다란 금색 고리가 되어 파문을 내뿜었다.

고리 안에는 한립이 들어가 있었다.

그는 양손에서 다섯 줄기의 금빛이 날려 대량의 시간법칙으로 웅산 등의 몸에서 사악한 기운을 제거했다.

“서두르세요!”

한립의 외침에 남안 등 일곱 사람이 핏빛 진법을 다시 장악하고 악신을 가둔 고리에 힘을 실었다.

남안은 정혈을 토해 핏빛 영패에 불어 넣었다.

쿠쿠쿵!

악신들을 결국 꼼짝하지 못하고 장막을 공격하던 힘은 더욱 강해져서 위태위태하던 금제가 깨져나갔다.

그걸 본 한립이 금빛을 거두었고, 마지막 포효를 한 일곱 악신 허상마저 폭발해 핏빛으로 흩어졌다.

“다행히 금제를 깨는 데 성공했어요. 전부 석 수사 덕분이에요!”

한숨을 내쉰 남안이 몸을 바로 하고 한립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

막 대답을 하려던 한립은 날카로운 파공음을 들었다.

뇌옥책, 문중, 근류, 소안천이 번개처럼 튀어 나가 남색 빛 두 줄기와 금색 빛 두 줄기로 변해 금제를 지나고 있었다.

그들은 돌 탁자에 도달하기도 전에 손을 뻗어 원하는 보물을 취하려 들었다.

펑!

돌 탁자가 기운의 충돌로 쪼개졌으나 그들은 각자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었다.

총 9개의 물건 중 문중, 근류, 소안천이 각각 두 개씩 그리고 가장 강한 뇌옥책이 세 개를 가져갔다.

“왜들 이러십니까? 금제를 깨면 보물은 다 같이 나누기로 한 것 아닙니까?”

웅산이 얼굴을 굳히고 따졌다.

흑의 남녀는 기분이 좋아 보이지는 않았지만 입을 다물고 있었다.

한립과 남안, 남원자도 침묵했다.

“나눠 갖자고? 고작 그 수행으로 우리와 보물을 나눌 자격이 된다고 생각하나?”

유수선련과 천금첩을 손에 넣은 근류가 웅산과 흑의 남녀를 흘낏 보며 조소했다.

난색을 표한 웅산은 주먹을 세게 쥐었다가 그냥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남 수사와 석 수사 두 분은 다르지요. 칠살혈신대진을 파훼할 수 있었던 데에는 두 분의 공이 큽니다. 보물을 원치 않는다고 했으나 하나씩이라도 받으시지요.”

소안천과 시선을 교환한 뇌옥책은 자신들이 차지한 보물을 하나씩 그들에게 날려 보냈다.

“됐습니다. 저는 벌집을 얻은 것으로 충분히 만족했어요.”

눈동자에 보랏빛이 떠올랐다 사라진 한립은 금빛을 내뿜어 보물을 돌려보냈다.

“저도 사형을 구한 것으로 충분합니다.”

남안도 손을 저어 보물을 받지 않았다.

“하하, 그렇다면 강요하지 않겠습니다. 아직 가볼 곳이 많으니 다른 보물을 찾으면 두 분에게 보상하겠습니다.”

뇌옥책은 더이상 권하지는 않고 웃으며 보물을 거두려 했다.

그때 파삭, 하는 소리가 들리고 그가 지닌 보물들이 흐릿해지더니 회백색 수정실로 변했다.

“이게…….”

눈을 부릅뜬 뇌옥책을 향해 세 가닥의 회백색 수정실들이 지척에서 날아들고 있었다.

너무 뜻밖의 일이라 뇌옥책이 전신에 금빛을 일으키고 무언가를 하려 했을 때는 이미 회백색 수정실들이 보호막을 뚫고 체내로 파고든 뒤였다.

파삭. 파삭. 파삭…….

소안천과 다른 이들이 든 보물들도 마찬가지로 회백색 수정 실로 변해 그들 몸에 파고들었다.

그들은 몸을 부들부들 떨며 다리가 풀려 바닥에 꿇어앉은 채 머리를 부여잡고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질렀다.

그걸 지켜보던 이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흩어져 고통스러워하는 이들을 피했다.

그나마 한립이 가장 침착해 보였다.

아까 구유마동으로 보물들을 보았을 때 뭔가 부자연스러운 느낌이 들어 받지 않았는데 이런 일이 생길 줄은 몰랐다.

처절하게 비명을 지르던 네 사람은 얼굴에 회백색 빛이 드리우고 눈동자가 같은 색깔로 변하면서 서서히 떨림이 잦아들었다.

“누군가 조종하려 하고 있어요!”

남안이 놀라 그들을 향해 양손을 뻗었다.

남색 빛이 날아가 실로 짠 거대한 덮개를 이루고 수만 겹의 물이 파문으로 뇌옥책 등 네 사람을 가두려 했다.

그러나 사납게 고개를 든 뇌옥책 무리는 이미 눈동자가 회백색으로 변해 있었다.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