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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2056화 (1,813/2,000)
  • 2056화. 교환조건

    *

    악신의 머리통은 결국 그곳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사납게 울부짖다 핏빛 장막과 함께 사라졌다.

    그걸 본 한립의 눈빛이 반짝였다.

    핏빛 진법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모종의 혈도(血道) 진법이라는 것과 적린공경에서 보았던 읍혈대진과 비슷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물론 어떻게 금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는 떠오르는 게 없었다.

    “진귀한 보물을 지키고 있는 만큼 금제가 강력합니다. 힘을 좀 써야겠어요.”

    뇌옥책이 입을 열었다.

    “그래봤자 진법입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였는데 힘을 합쳐 공격을 퍼부으면 언젠가는 깨지지 않겠습니까.”

    코웃음을 친 근류는 당장이라도 모든 보물을 갖고 싶어 눈이 돌아가 있었다. 그의 방법이 거칠기는 했지만 다른 사람들도 반대하지 않았다.

    사실 무력으로 깨부수는 게 가장 간단하고 효과적인 금제 파훼법이기는 했다.

    그러나 한립은 미간을 좁혔다.

    핏빛 진법의 정체는 모르나 무력으로 부수는 방법은 아닌 것 같았다.

    “안에 든 보물들을 얻고 싶은 거라면 그런 식으로 때려 부숴서는 안 될 거예요.”

    말이 없던 남안이 불쑥 목소리를 냈다.

    “남 수사, 그게 무슨 뜻입니까? 이 진법에 대해 아시는 겁니까?”

    뇌옥책이 반색하며 물었다.

    “그렇다고 볼 수 있죠. 진법에 관한 공부했던 터라 고대 경전에서 관련 기록을 본 적이 있으니까요. 이건 칠살혈신대진(七殺血神大陣)이에요! 혈도의 7대 흉신(凶神)들의 힘을 빌려 펼친 진법이라 강제로 부수려 들면 일곱 개의 기운이 서로 충돌해 자폭하기 때문에 안에 든 재료들도 사라지고 말 거예요.”

    남안은 차분하게 설명했다.

    눈썹을 끌어올린 한립의 얼굴에 놀란 기색이 스쳤고, 다른 이들도 표정이 변했다.

    근류도 자신의 말대로 무턱대고 공격을 했더라면 크게 후회했을 거란 생각에 얼굴이 어두워졌다.

    유수선련이 그의 수련공법과 기운이 잘 맞는 터라 이걸 기회로 더 높은 경지에 이를 수 있었기에 욕심이 앞섰던 것이다.

    그리고 천금첩 역시 그가 오랜 세월 찾던 재료였다.

    한립을 포함한 선발대가 금빛 문으로 먼저 들어갔을 때, 그곳의 금속성 원기가 농염해서 천금첩이 있지 않을까 기대했었는데 이곳에서 학수고대하던 재료를 찾게 될 줄은 몰랐다.

    “그럼 이 진법을 파훼할 방법도 아시겠군요? 저희에게 가르침을 주시지요.”

    “글쎄요? 아무 대가도 없이요?”

    뇌옥책의 부탁에 남안이 작게 웃음 지었다.

    “보수를 원하시는 겁니까? ……남 수사의 공을 생각해 진법을 파훼한 다음 가장 먼저 보물 중 하나를 고를 수 있게 해드리면 어떻겠습니까.”

    뇌옥책의 제안에 나머지 수사들의 표정이 순간 어두워졌지만 나서서 반대하지는 않았다.

    “모두를 위해 칠살혈신대진을 파훼해 드릴 수 있어요. 하지만 제가 원하는 건 저 안의 보물이 아니라 다른 거예요.”

    남안은 힐끗 한립을 보았다. 한립은 그녀가 그러는 이유를 알았지만 무표정하게 서 있었다.

    “무엇입니까?”

    “제 사형이 석 수사에게 잡혀 있어요. 그를 풀어주는 조건으로 하죠.”

    “수사의 사형이 어찌…….”

    이번에는 뇌옥책이 당황해 줄곧 보이지 않던 남원자를 떠올리며 한립을 돌아보았다.

    다른 이들도 그녀의 말을 듣고 한립을 쳐다보고 있었다

    남안은 이번 기회를 이용해 다른 수사들이 그가 남원자를 풀어주도록 압박을 가하게 만들 작정이었다.

    속으로 냉소를 흘린 한립은 말없이 뒷짐을 쥐고 섰다.

    한 가지 이상한 것은 그녀가 어떻게 남원자가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을 아는가였다.

    “석 수사, 정말 남원자 수사를 붙잡고 계십니까?”

    “예, 두 오누이가 협공해 저를 공격하기에 붙잡아 두었지요.”

    뇌옥책의 물음에 한립이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소안천은 남안의 태도를 봤을 때부터 한립과 충돌이 있지는 않았을까 의심했는데 자신의 추측이 맞았다는 사실을 알았다.

    뇌옥책도 그들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은 눈치로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 원한일 줄은 몰랐기에 난감해졌다.

    “저는 세 분 사이에 어떤 은원이 있는 줄 모릅니다. 하지만 다 같이 탑에 갇혀있어 힘을 합쳐 빠져나가야 하는 상황이니, 석 수사께서 남 수사의 사형을 풀어주심이 어떻겠습니까?”

    “뇌 수사, 남 씨 오누이는 저를 죽이려 하고 있습니다. 남원자를 풀어주었다가 저들이 또 저를 공격하면 어쩌란 말입니까.”

    중재자를 자처하는 뇌옥책을 보고 한립이 냉랭히 반문했다.

    “남 수사께서 어찌하실 건지 말해 주시지요.”

    뇌옥책은 한립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여겨 남안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사형만 풀어준다면 맹세할게요! 이 비경 안에서는 절대 당신을 공격하지 않겠다고. 게다가 당신의 실력이 우리를 압도하는데 우리가 왜 멍청한 짓을 하겠어요?”

    “맹세 같은 건 믿지 않습니다. 심마를 걸고 한 맹세라 해도, 어떻게든 벗어나려면 방법은 있으니까요. 나의 안위를 남에게 맡길 생각 없으니 헛꿈 꾸지 마시지요.”

    한립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남원자와 남안을 이겼으나 구원관의 추적이 계속되고 있기에 만일을 대비해 남원자를 잡아 둔 것이었다.

    그래야 남안이 함부로 허튼짓을 못 할 게 아닌가?

    “석 수사, 남 수사가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일단 사적인 은원은 내려놓고 사내답게 대의를 위해 결정을 내려 주세요. 다 같이 힘을 합치기로 해놓고 이래서는 해결이 나지 않습니다.”

    보물을 앞에 두고 마음이 급해진 근류는 안 그래도 한립이 못마땅했던 터라 남안의 편에 서서 압력을 가했다.

    눈살을 찌푸린 한립의 시선이 싸늘해졌다.

    그는 어찌 보면 근류를 구해준 적이 있는 은인이었는데, 은혜를 갚기는커녕 이익을 앞에 두고 그의 반대편에 선 것이었다.

    “제가 위험해지든 말든 제안을 받아들이란 강요로 들립니다.”

    “사적인 원한은 바깥에 나가서 풀든지 말든지 하시란 뜻입니다. 거기다 이렇게 많은 이들이 수사의 안전을 보장하는데 믿지 못할 건 또 뭐랍니까!”

    근류는 냉랭하게 그를 타박했다.

    “좋습니다, 동행은 여기까지인 것으로 하지요. 당신들은 당신들 갈 길을 가고 저는 제 갈 길을 가는 것으로요. 만일 누구든 내 앞을 막는다면 그 결과는 스스로 감당해야 할 겁니다.”

    “석 수사, 잠시만 화를 가라앉히시지요. 사실 저희도 곤란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러지 마시고 수사께서 남 수사의 사형을 풀어주시면 금제를 연 다음 두 번째로 보물을 고를 수 있게 해드리겠습니다. 어떠십니까?”

    뇌옥책은 한립이 불쾌해하는 것을 보고 서둘러 말하며 문중 등에게 눈짓을 했다.

    문중 등은 한립의 실력을 보았기에 그와 반목하고 싶지 않았다.

    “모두의 의견이 그렇다면……. 좋습니다, 남원자를 놓아 주는 대신 저 안의 보물 말고 다른 조건이 있어요.”

    한립은 곰곰이 생각하다 운을 뗐다.

    “무슨 조건인지 말씀해 주십시오.”

    뇌옥책은 상황이 좋게 풀리려는 듯하자 좋아하며 말했다.

    “당신의 사형을 풀어주는 대신, 화세형충의 벌집을 받아야겠습니다.”

    한립은 몸을 돌려 남안을 직시했다. 그 말에 남안은 순간 말문이 막힌 듯했다.

    “화세형충의 벌집……. 그게 뭔데요? 제게 없는 것을 어떻게 주란 말이죠?”

    “당신에게 없다고 이 중 누구에게도 없는 것은 아니겠지요.”

    한립은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로 근류를 향해 턱짓을 했다.

    “석목, 당신!”

    화가 난 근류가 소리를 질렀다.

    “강요하는 건 아닙니다? 그냥 제 조건이 그렇다는 거예요. 어디 근 수사는 대의를 위해 어디까지 희생할 수 있는지 보겠습니다. 저는 이미 모두를 위해 한발 양보했어요.”

    한립은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했다.

    근류는 이런 식으로 자신의 논리를 역이용할 줄 몰랐는지 매섭게 그를 노려보았다.

    “근 수사, 정말 화세형충의 벌집을 지니고 계시나요? 제게 넘겨주시면 선원석이나 다른 진귀한 재료로 충분한 대가를 지불하겠습니다.”

    남안은 한립이 뜻을 굽히자 기뻐하며 급히 근류에게 다가가 사정했다.

    “근 수사, 금제를 파훼하기 위해 도움을 부탁드리겠습니다.”

    뇌옥책도 그를 향해 말했다.

    근류의 실력은 한립보다 훨씬 낮았기에 그를 어려워하며 돌려 말할 이유가 없었다.

    그의 말에 깔린 은근한 협박에 근류는 눈을 굴리다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표정이 편안해졌다.

    “뭐, 화세형충 벌집을 드릴 수는 있습니다. 그 대가로 선원석이나 재료 대신, 금제를 파훼한 다음 남 수사에게 가장 먼저 보물을 택할 기회를 준다고 했는데, 그걸 제가 대신 갖는 것으로 하지요.”

    근류가 웃음을 흘렸다.

    화세형충 벌집도 귀하긴 해도 금제 안의 보물이 그에게는 더 중요했다.

    “……알겠습니다.”

    다른 이들과 눈짓을 한 뇌옥책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립은 상황이 정리된 것을 보고 더는 쓸데없는 소리를 하고 싶지 않아 손을 저어 은색 빛의 문에서 기절한 남원자를 불러냈다.

    “사형!”

    남안은 황급히 날아들어 남원자를 껴안았다.

    그들은 함께 법칙융합 공법을 수련 중이었는데 아직 대성하지는 못했지만 그 덕분에 서로에 대한 특수한 감응 능력이 생겨 남원자의 생사를 알 수 있었다.

    적의 수중에 떨어진 남원자의 안위를 걱정하느라 전전긍긍하다 드디어 그를 보게 되니 저절로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러나 남안도 태을경 수사인지라 들끓는 마음을 순식간에 가라앉히고 남색 빛으로 남원자의 몸 상태부터 점검했다.

    한립은 그녀가 무얼 하든 상관하지 않고 근류에게 다가섰다.

    근류는 내키지 않는 얼굴로 시간법칙 파동이 출렁출렁 새어 나오는 벌집을 꺼내 주었다.

    고의로 천천히 건네 모두가 벌집을 자세히 볼 시간을 주면서 말이다.

    “고맙습니다.”

    한립은 그의 꼼수를 알았지만 신경 쓰지 않고 벌집을 받아 챙겼다.

    총 3개의 벌집을 손에 넣었으니 이제 안전한 곳을 찾아 시간법칙의 실을 제련해 시간법칙의 힘을 늘릴 일만 남았다.

    그래야 일전에 기마자를 격퇴한 강력한 신통을 쓸 수 있을 것이었다.

    그 강력한 위력을 떠올리자 마음이 뜨끈해져서 한시라도 빨리 벌집을 연화해야 한다는 강한 충동이 생겼다.

    리기마든 기마자든 아니면 다른 위험을 맞닥뜨리더라도 그 신통만 펼칠 수 있으면 빠져나올 자신이 있었다.

    침음하던 한립은 결정을 내리고 주위를 둘러보다 편전으로 통하는 쪽문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봐요, 사형이 왜 아직도 깨어나지 못하는 거죠! 무슨 짓을 해둔 건 아니겠죠?”

    그가 가려는 것을 보고 남안이 따지듯 전음을 보냈다.

    한립은 무표정하게 수결을 맺어 금빛 한 줄기를 남원자의 몸으로 쏘아 보냈다.

    금빛이 부드럽게 감쌌다가 사라지고 남원자가 눈을 떴다.

    “사형, 괜찮은 거예요?”

    그제야 남안의 얼굴에 웃음이 어렸다.

    “사매가 어떻게…….”

    그녀를 본 남원자가 힘없는 목소리로 입술을 달싹였다.

    그때 한립은 편전 쪽으로 걸어갔다.

    “석 수사, 어디 가시려는 거예요?”

    소안천이 그걸 보고 급히 물었다.

    “일이 있어 저는 잠시 물러나 있겠습니다. 금제 안의 보물은 여기 계신 분들끼리 나누세요. 저는 됐으니.”

    한립은 이 말을 마지막으로 남기고 문을 열고 빠른 걸음으로 사라졌다.

    문을 닫고 보니 그리 넓지 않은 편전은 텅 비어있었다.

    의식으로 세밀하게 내부를 살핀 한립은 두 손을 펼쳐 각양각색의 빛들을 날려 보냈다.

    대청의 사람들은 한립이 떠나려는 줄 알고 걱정하다 그가 편전에 머무는 것을 감지하고 안심했다.

    한립이 빠지면 그만큼 전력이 줄어 리기마가 다시 나타났을 때 이겨낸다는 보장이 없었다.

    무리 중에는 웅산과 흑포 남녀가 끼어 있었는데, 셋 다 금선들이라 오는 내내 말을 아끼고 있었다.

    “여긴가요?”

    흑포 여인이 입술을 미세하게 움직여 곁의 흑포 청년과 대화를 했다.

    “확실합니다. 바로 여기예요.”

    눈을 감고 무언가를 감응하던 청년이 눈을 뜨고 흥분한 눈빛을 보였다.

    “찾았다고 해도 성공하기 쉽지 않은 일인데 자신은 있나요?”

    “자신이 없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을 겁니다.”

    청년은 여인의 의심에 불퉁거리며 답했다.

    “다행이네요. 당신이 여기서 죽으면 나 혼자서 임무를 수행하기는 어려울 테니까.”

    작게 웃음 짓는 여인을 보고 청년이 코웃음을 친 뒤 눈을 감았다.

    흑포 여인은 더는 동료와 떠들지 않고 이채를 띠고 편전 쪽을 쳐다보았다.

    웅산도 같은 곳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한편 남안은 남원자에게 단약을 먹이고 몸 이곳저곳의 혈자리를 누르고 있었다.

    그때 남안을 향해 뇌옥책이 다가왔다.

    “남 수사의 사형도 기운을 차린 것 같은데 이제 금제를 해결해 주시지요.”

    “물론 그래야죠.”

    남안은 창백한 얼굴에 혈색이 돌아온 남원자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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