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5화. 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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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립은 감사 인사를 건네는 뇌옥책 등에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남안은 신경 쓰지 않고 하얀 신영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기습해서 하얀 바람기둥은 깼지만 결코 얕볼 수 없는 상대였다.
그나마 뇌옥책 등과 힘을 합칠 수 있으니 전세를 역전할 수 있을지 기대할 뿐이었다.
“그래, 드디어 그나마 실력 있는 녀석이 나타났구나! 이 몸이 여기까지 달려 나온 보람이 있어.”
하얀 신형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기둥을 이룬 바람이 멎고 옥으로 만든 백마(白馬)가 늠름한 모습을 드러냈다.
사람처럼 뒷발로 선 백마는 한 손은 허리에 얹고, 다른 손에는 푸른 곰방대를 들고 연기를 뿜고 있었다.
다들 생각지도 못한 상대의 모습에 깜짝 놀랐다.
“누구신지 성함을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한립이 빠르게 감정을 추스르고 백마 등쪽의 갈기를 눈여겨보며 물었다.
“눈이 삐었더냐? 이 몸을 알아보지 못하다니! 잘 기억해두거라, 본 노조는 ‘리기마’다! 자자, 어디 한 번 싸워보자고!”
전의를 불태운 리기마가 곰방대를 놓고 앞으로 내달리려 했다.
그런데 다음 순간 무슨 이유에선지 눈빛이 달라진 그는 콧방귀를 뀌고 멈추었다.
하얀 영역까지 순식간에 거둔 그는 하얀빛으로 변해 먼 곳으로 사라져 버렸다.
맞붙으려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던 한립은 리기마가 그냥 가버리자 어안이 벙벙해졌고 다른 이들도 이유를 몰라 서로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강적이 스스로 물러난 것은 어찌 되었든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거기다 뇌옥책 무리는 리기마와 싸우느라 선령력을 상당히 소모해서 급히 휴식이 필요했다.
“소 수사, 여기에는 언제 오신 겁니까?”
단약을 먹고 선령력을 회복한 뇌옥책이 부상을 다스리면서 소안천에게 물었다.
그녀는 먼 곳을 바라보며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한 것 같았고, 한립도 침음하고 있어 근류가 대신 나서서 그간 있었던 일을 간략하게 들려주었다.
벌집을 얻었다거나 그들이 공간선기에 종문 수사들을 숨겨 데려왔다는 불필요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한립이 슬쩍 그를 보았다.
벌집은 몰라도 근류가 공간선기를 이용해 천수종 수사들을 숨겨 들여온 것은 꺼림칙한 일이었다.
그의 시선을 느낀 근류가 그를 마주 보며 경고의 눈빛을 보냈다.
어차피 상대의 의중을 떠보려던 것이고 떠벌릴 생각은 없었기에 한립은 조용히 시선을 돌렸다.
이에 한숨을 돌린 근류는 뇌옥책과 살갑게 대화를 나누며 여기까지 오며 겪은 일에 대해서도 캐물었다.
대충 들으니 그들과 비슷하게 여러 위기 속에서 점점 일행들이 죽거나 실종되어 소수만 살아남은 것이었다.
어차피 되돌아갈 길이 없으니 계속 앞으로 나아가 살길을 찾으려던 것 같았다.
그러던 중 반나절 전에 홀로 이동 중인 남안을 만나 동행을 하게 되었고, 리기마의 기습을 당해 지금까지 싸우고 있었던 것이라 했다.
“수백 명이 들어왔는데 이제 남은 것이 이게 전부란 소리군요. 세월탑이 이리 위험한 곳인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근류는 뇌옥책의 이야기에서 빈틈을 찾았지만 굳이 따지지 않았다. 어차피 그도 숨기고 있는 것은 똑같았다.
비통한 얼굴로 탄식하는 근류를 보고 뇌옥책 무리의 표정도 어두워졌다.
“뇌 수사, 리기마가 갑자기 떠나기는 했지만 언제 다시 찾아와 공격할지 모릅니다. 이렇게 만난 김에 함께 세월탑을 오르시는 것이 어떠십니까?”
근류는 비통한 표정을 거두고 앞으로의 계획을 상의했다.
“저도 바라는 바입니다. 근 수사, 석 수사 또 소 수사 많은 도움 부탁드립니다.”
뇌옥책이 기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반기는 것이 소안천인 것은 누가 보아도 뻔했다. 다른 이들도 근류 등의 실력을 보았기에 반대하지 않았다.
남안은 절대 한립과 동행하고 싶지 않았지만 이미 결정된 것을 알았기에 침묵했다.
“별말씀을요. 여기서 지체한 시간이 적지 않은데 어서 가시지요.”
근류가 웃으며 말했다.
휴식을 취해 원기를 회복한 이들은 리기마가 사라지자 훨씬 약해진 모래바람을 뚫고 앞으로 나아갔다.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리기마를 대비하기 위해 속도를 줄여 주위를 경계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뇌 수사, 이곳에 먼저 도착하신 것 같은데 다음 층으로 가는 공간의 문은 보신 적이 없나요?”
날아가면서 소안천이 뇌옥책을 향해 물었다.
“사실 저희도 여기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제대로 찾아보기도 전에 리기마를 만나 세 분보다 이곳을 잘 모를지도 모릅니다.”
소안천은 고개를 끄덕이고 더는 말이 없었는데, 뇌옥책이 그녀가 먼저 말을 붙여 준 것에 기뻐하며 다른 화제를 찾으려 머리를 굴렸다.
“뇌 수사, 리기마에 대해 혹시 알아낸 바가 있습니까?”
하필 그때 한립이 다가와 끼어들었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뇌옥책은 소안천과 단둘이 대화할 기회를 놓친 것에 마음이 좋지는 않았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수사께서도 세월탑이 태세선존이 요마들을 구금하던 장소라는 것은 알아채셨을 겁니다. 리기마는 말이 많은 성격 같던데, 싸우면서 한 말 중에 이곳에 대한 정보는 없었는지 알고 싶습니다.”
“아……. 한참 싸우면서 이런저런 대화를 하기는 했지만 자신의 신분을 밝히거나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저 실력이 강한 것을 보면 이곳에 갇힌 죄인이 아닐까 싶기는 합니다.”
뇌옥책이 머뭇거리다 답했다.
이제 생각하니 후회가 되었다.
리기마와 싸울 때는 어떻게든 이길 생각에 정신이 없었는데, ‘석 수사’의 말을 듣고 보니 말을 붙여 유용한 정보를 캐낼 기회였었다.
그의 대답을 들은 한립은 생각에 잠겨 더는 아무 소리 하지 않았고, 일행은 조용하게 날아가기만 했다.
“석 수사, 뇌옥책의 추측이 맞을까요?”
얼마 후, 소안천이 한립에게 다가가 전음으로 물었다.
“4층에서 발견한 하얀 짐승의 털을 기억하십니까?”
한립도 전음으로 대답했다.
“그러고 보니 리기마의 갈기와 비슷했어요.”
“비슷한 정도가 아니라 분명 같은 종류의 털입니다. 어쩌다 4층에 리기마의 갈기가 남아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상대를 그냥 평범한 죄수 취급하지는 않는 게 좋을 거예요.”
한립의 분석에 소안천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암암리에 대화를 나누는 것을 알아챈 뇌옥책이 언뜻 눈에 힘을 주었다가 금방 풀었다.
그렇게 한참을 가다 맨 앞에서 날아가던 근류가 탄성을 내뱉자 모두 멈춰 섰다.
아래에 호리병박 모양의 높다란 산봉우리 꼭대기에 황궁처럼 드넓은 공간이 보이고 검은 궁전 건물들이 모여 있었다.
이전 층에서 보았던 공간의 문이 있던 건물들과 양식이 같았다. 다들 같은 생각이었지만 선뜻 다가가지는 못했다.
리기마가 저 안에 있을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모이기 전에는 리기마에게 밀렸지만 이제는 상황이 다릅니다. 한 번 달아났던 리기마예요. 모두 힘을 합쳐 무찌릅시다! 궁전 안에서 희미하게 보광(寶光)이 새어 나오는 게 귀한 보물이 숨겨져 있는 게 틀림없습니다.”
뇌옥책이 나서서 사기를 북돋고 모두를 이끌었다.
한립은 무리를 따라 궁전 건물들 앞에 이르러 대문에 걸린 황동 편액의 ‘명심궁(銘心宮)’이란 세 글자를 보았다.
바닥에 내려선 무리의 안색이 달라졌다.
강력한 금제의 힘이 대문 앞 공터까지 영향을 미쳐 의식을 크게 제한하고 있었다.
강대한 한립의 의식으로도 백 장 앞을 내다보기가 어려웠다.
“수행을 억제하는 것도 아니고 의식 금제일 뿐입니다.”
뇌옥책도 섬뜩했으나 자신만만하게 해 놓은 말이 있어 억지로 맨 앞에 서서 대전 안으로 들어갔다.
금색 발우 선기를 머리 위에 띄워 금빛으로 단단히 몸을 지키고 있었다. 그걸 본 수사들은 선기들을 방출해 방어하면서 그를 따라서 안으로 들어갔다.
가장 바깥 대전에 기둥 몇 개가 서 있는 것을 빼면 아무것도 없어 일행은 안쪽으로 이어지는 쪽문을 지나 이동할 수 있었다.
내부의 방이 많았으나 리기마가 숨어 있다 언제 공격할지 몰라 흩어지지 않고 모여서 탐색하다 보니 이동속도가 나지 않았다.
반나절 만에 겨우 절반을 수색하고 몇 가지 보물을 찾아냈지만 다들 가슴이 답답했고, 계속 긴장 속에 돌아다니다 보니 분위기도 가라앉아 있었다.
긴 회랑을 지나 또 다른 궁전 앞에 이른 그들은 용과 봉황이 조각된 벽이나 수려한 곡선을 뽐내는 지붕을 보면서 안에 대단한 보물이 있지는 않을까 기대했다.
휘휘휙!
대문을 열고 막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궁전 주위에 남색 빛이 일어나 보호막을 펼치고 앞을 가로막았다.
코웃음을 친 뇌옥책이 손가락을 튕겨 뱀처럼 꿈틀거리는 비범해 보이는 금색 검을 쏘아 보냈다.
검은 기다란 금색 천처럼 빛을 늘어뜨리며 남색 보호막으로 떨어졌다.
솨아아.
강력한 공격이었지만 남색 보호막은 출렁이기만 할 뿐 금색 천을 막아냈다.
체면을 잃을 수 없던 뇌옥책은 소매를 펄럭여 여섯 자루의 금색 곡도(曲刀)를 날려 보냈다.
앞서 날아간 금색 뱀 모양 검도 함께 공격했다.
“다들 함께 부숩시다!”
소리를 높인 문중이 금빛을 날리고, 다른 이들도 각자 선기를 이용해 보호막을 강타했다.
남색 보호막 위로 여러 가지 빛들이 펑펑 터지고 있었다.
펑!
결국 충격을 이기지 못한 남색 보호막이 깨지고, 일행은 선기를 거둔 채 안으로 들어갔다.
‘흠…….’
한립은 활짝 열린 대문을 보며 불길한 예감에 눈살을 찌푸렸다.
이런 예감은 순식간에 지나가 자신도 착각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고개를 저은 한립은 가장 마지막으로 대전 안에 들어섰고, 꽤 넓은 내부에는 돌기둥 말고 기다란 돌 탁자가 놓여 있었다.
중앙에 정체 모를 문자가 적힌 금색 위패가 놓여 있자 다들 눈이 번쩍 뜨였다.
그 위에는 위패 말고 적잖은 물건이 놓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홉 가지 재료들은 마치 신당에 바쳐진 제물처럼 하나같이 놀라운 파동을 내뿜고 있었다.
“저 검은 연꽃은 유수선련(幽水仙蓮)! 진선계 10대 연꽃 중에 하나로 복용하면 수행을 크게 늘려주고 물 속성 법칙을 익히기 쉬운 유수선체(幽水仙體)로 만들어준다는 보물입니다!”
“천금첩(天金帖)! 저걸로 선기를 만들면 부수지 못할 게 없다던데…….”
“저기 병에 들어있는 건 현진정(玄眞精) 아닙니까? 저 정도 양이면 두 사람이 대라의 경지에 이를 때 쓸 수 있겠어요!”
돌 탁자 위의 물건들을 본 사람들은 깜짝 놀라며 탄성을 내뱉었다.
한립도 그것들을 보고 욕심이 생기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돌 탁자 주변 벽과 지면을 보자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그 순간, 근류가 유수선련과 천금첩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갔다.
“근 수사, 기다리세요!”
그의 눈앞에 한립이 그림자처럼 나타나 앞을 가로막았다.
“석 수사, 이게 뭐 하자는 겁니까?”
근류는 그가 자신과 유수선련을 두고 경쟁하려는 줄 알고 한립을 지나 먼저 보물을 향해 달려들려 했다.
“우선 탁자 주위를 살펴보시고 말씀하시지요.”
한립의 담담한 말에 멈칫한 근류가 정신을 차리고 바닥과 벽을 보고는 표정이 달라졌다.
탁자 주변 벽에는 신(神)을 형상화한 일곱 폭의 암홍색 도안이 새겨져 있었는데, 다 정상적인 신이 아니라 삼두육비이거나 사람의 몸에 짐승의 머리를 한 악신(惡神)들이었다.
그런 암홍색 도안들이 바닥과 벽을 타고 규칙적으로 배열되어 있었다.
다른 이들도 보물을 보고 가슴이 쿵쿵 뛰다가 한립의 말에 걸음을 멈추고 자세히 도안들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금제 진법 같아 보입니다.”
문중이 중얼거리고 다른 이들을 보았지만 아무도 말이 없었다.
무슨 진법인지 아는 이가 없어서였다.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느니 깨려는 시도나 해봅시다.”
근류가 참다못해 손을 들었다.
“근류 사형, 충동적으로 그러지…….”
소안천이 말리려 했지만 근류의 손에서 이미 남색빛이 날아가고 있었다.
남색빛이 돌 탁자로 접근하자 일곱 개의 도안들이 핏빛을 방출해 장막을 이루었다.
우웅.
핏빛 보호막 위로 악신 도안 중 하나의 머리가 떠올라 남색 빛을 꿀꺽 삼키고는 한립 무리를 향해 포효를 했다.
당장이라도 장막을 벗어나 그들을 죽일 것만 같았다.
악의가 담긴 포효소리가 그들의 의식을 파고들어 눈이 뻘겋게 변한 일행은 시체가 산을 이루고 그 피가 강이 되어 흘러내리는 새빨간 천리 강산의 환각을 보게 되었다!
이곳에 모인 이들의 수행과 의식의 힘을 생각할 때 이런 일이 가능하다는 것은 악신의 살기가 그만큼 엄청나다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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