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3화. 필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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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가늘게 뜬 한립은 그들이 달아나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사방을 살핀 다음 가부좌를 틀고 앉아 운기조식에 들어갔다. 의식손상에 시간법칙의 힘을 과도하게 소모해서 무척 피로했다.
일다경이 지나 천천히 눈을 뜬 그는 한결 맑아진 눈빛으로 다섯 가지 시간보물들의 이현상을 되뇌었다.
기마자의 반응으로 보아 그건 우연히 일어난 게 아니라 대오행환세결을 일정 정도 이상 수행하면 쓸 수 있는 신통인 게 틀림없었다.
거기다 이제 진언보륜 등 시간법칙 보물들을 한동안 쓸 수 없게 되었다는 생각에 이르자 머리가 아팠다.
“기쁨에 근심이 따르는구나. 어쩔 수 없이 이대로 가보는 수밖에…….”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 그의 곁에 오소귀왕을 잡아먹은 제혼이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와 내려섰다.
“끅…….”
땅에 발이 닿자마자 소녀의 입에서 트림 소리가 들렸다.
“음, 속이 더부룩해요.”
제혼이 민망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속이 허하다더니 배가 불렀다면 잘된 일이다. 며칠간 동천에 들어가 휴식을 취하거라.”
싱긋 미소를 지은 한립이 말했다.
“이 힘을 온전히 소화하기 위해서 한동안 폐관 수련을 해야겠어요. 그래야 앞으로 주인님께 도움이 될 수 있을 테니까요!”
제혼의 말에 한립은 고개를 끄덕여 주고 은색 빛의 문을 열었다.
빛의 문을 닫은 한립은 부서진 사당에 덩그러니 남은 원형 문으로 날아갔다.
칠이 심하게 벗겨진 나무문 중간에는 비휴를 닮은 짐승의 모습이 조각되어 있었고, 짐승의 입에 달린 문고리에는 복잡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문고리에서 전해지는 파동은 3층으로 들어올 때 느꼈던 것과 똑같았다.
말할 것도 없이 4층도 들어갈 때는 쉬워도 여기로 다시 돌아오기는 어려운 게 확실했다.
한립은 복잡한 마음을 거두고 진법을 파훼하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근류와 소안천이 돌아왔다.
“석 수사…….”
근류는 머뭇거리다 그를 향해 포권을 하며 인사를 했다.
그러나 소안천은 포권을 하지도 말을 건네지도 않고 한립을 향해 경계심 어린 눈빛을 보냈다.
“잡으셨습니까?”
한립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진법을 파훼하는 데 집중하며 물었다.
“종문의 장로 둘을 죽인 녀석들인데 그냥 보낼 수 없지요.”
근류는 그가 자신을 쳐다보지도 않고 묻는 것을 보고 불쾌했지만 그래도 성실하게 답했다.
“시체를 묻어 주고 오겠어요.”
소안천이 근류에게 말하고 날아갔다. 그녀가 멀어지자 근류는 인상을 찌푸리고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실력이 대단하시던데 여태껏 수행을 숨긴 것은 그만한 사정이 있어서겠지요?”
“산수로 살아가느라 항시 몸을 사리는 것이 습관이 되어 그렇습니다. 근 수사에게 악감정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앞으로도 그러지 않기를 바라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지요.”
한립은 여전히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눈앞에 태산을 몰라보고 그동안 무례를 범했습니다. 일전에 부 곡주 등을 도왔던 것으로 보아 수사가 악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겠습니다. 수사와 결맹을 맺고 싶습니다.”
“하하, 저는 홀로 행동하는 것이 좋습니다. 게다가 이런 상황에서 결맹을 맺는다 한들 피차 서로를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건 그렇지만…….”
“여기까지 동행한 것도 인연이라 할 수 있으니 제 능력이 되는 한에서 두 분을 도울 것이지만 과한 요구는 마시지요. 때가 되어 서로 갈 길을 가면 될 겁니다.”
한립은 파훼 진법을 다 펼쳤는지 손을 털고 허리를 폈다.
촤랑랑.
비휴 조각이 물고 있던 문고리가 수축하면서 나무문이 천천히 바깥쪽으로 열려 암홍색 빛의 문을 드러냈다.
“수사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저도 따르겠습니다.”
조금 안심한 근류가 고개를 끄덕였다.
소안천이 돌아와 몇 마디를 나눈 세 사람은 암홍색 빛의 문 안으로 사라졌다.
* * *
세월탑 모처.
서늘한 바람이 부는 돌무지 황야에 흑백 비석이 외로이 서 있었다.
그 아래 팔다리가 길고 손발이 유난히 큰 홍발 사내가 붉은 장포를 입고 기대어 앉아 있었다.
방금 한립과 싸우다 달아난 기마자였다.
가슴 앞에서 손을 합장한 그는 모종의 고계 공법을 발동해 부단히 금빛 파동을 방출하다 눈을 번쩍 떴다.
“<단시류화집> 한 권만 천만년 간 수련했더니 이 꼴이 난 것 아닙니까. 노조, 대체 <대오행환세결>은 누구에게 전수한 것입니까? 그 녀석이 당신의 관문 제자와 연관이 있단 말입니까?”
기마자는 이를 부득부득 갈며 한참을 생각했다.
“아니면, 그 녀석도 회색 쥐새끼처럼 설법을 훔쳐 들었을지도?”
그러나 그는 금방 고개를 저어 그런 가설을 지웠다.
아니, 설법을 몇 번 훔쳐 들은 것으로 <대오행환세결>의 비밀을 알아냈다면 제대로 사존에게 설법을 듣고도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한 그와 사형제들은 버러지 중에 버러지란 소리가 아닌가!
“다행히 그놈도 겉핥기식으로 익혀 오행환세(五行幻世)의 영향이 오래가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수행을 회복하면 공법을 빼앗는 것은 물론, 네 놈을 완벽하게 제거해 후환을 없애겠다.”
그는 천천히 숨을 내쉬어 마음을 가라앉히고 눈을 감았다.
* * *
그 시각, 한립 일행은 빙원에 도착해 있었다.
아주 두꺼운 얼음 조각 위에서 사방을 둘러보니 대량의 빙산들이 화려한 빛을 발산하고 있었다.
차가운 바람이 마치 포효를 하는 듯 몰아치는 그곳에는 ‘사(四)’라고 적힌 공간의 문이 박힌 빙산이 보였다.
세 사람은 예상대로 4층에 이른 것을 확인하고도 마음을 놓지 않고 주변을 경계했다.
이곳의 시간 금제는 3층보다 강력해서 의식을 더욱 제한하고 둔술에도 영향을 미쳤다.
“여긴 어떤 곳인지 둘러봅시다.”
소안천이 먼저 출발하고 한립과 근류도 각기 다른 방향으로 날아올랐다.
예상대로 비행속도가 느려졌지만 세 사람은 그 와중에도 전속력을 다하지 않고 무척 조심스럽게 날아갔다.
특히 한립은 겉으로는 태연했지만 내심 살얼음 밭을 걷는 것 같았다.
기마자의 출현은 예상했지만 직접 만나고 나니 실력 차이가 가히 충격적이었다.
이기지는 못해도 목숨은 부지할 수 있을 줄 알았건만 현실은 전혀 달랐다.
가장 큰 문제는 이제 진언보륜 등 시간보물도 사용했는데 이번에 기마자에게 입힌 타격이 영구적인 게 아니라 그가 언제든 다시 튀어나올 수 있다는 점이었다.
게다가 세월탑 안에 갇혀 위로 올라갈 수 없는 상황에서 필연적으로 그와 다시 만나 목숨을 걸고 싸워야만 했다.
한숨을 내쉰 한립은 단약을 꺼내 삼키고 소모한 선령력을 회복하면서 날아갔다.
뜻밖에도 선령력이 차오르니 고요하던 진언보륜 등 시간법칙 보물들이 깨어날 조짐이 보였다.
한립은 기뻐하며 단약 연화에 더 공을 들였다.
소안천과 근류도 서서히 주변을 살피면서 선령력을 회복 중이었다.
반나절 후, 그들은 4층에서 어떤 위험도 보물도 마주치지 않았지만 그게 더 기묘한 불안감을 조성했다.
“왠지 아무 일도 없으니까 마음이 더 불안합니다.”
한데 모인 자리에서 근류가 중얼거렸고, 한립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곳은 아무리 멀리까지 가보아도 빙원, 빙산 그리고 서늘한 바람이 다였다.
“이상하기는 하지만 어쨌든 4층은 안전하다니 다행이에요. 어서 다음 층으로 올라갈 수 있는 공간의 문을 찾아봐요.”
소안천의 말에 한립과 근류도 반대하지 않고 의식을 퍼트려 공간 파동을 감지했다.
그들은 반나절을 더 가 거대한 빙산 앞에 도착했는데 그 아래 녹색 목재로 만든 궁전 건물들이 세워져 있었다.
3층의 사당 건물과 양식은 비슷하지만 음산한 귀기는 느껴지지 않는 오래전에 무너져 내린 궁전들이었다.
시선을 교환한 셋은 일단 멈춰 섰다.
“3층과 비슷한 건물이에요. 귀왕의 말에 따르면 세월탑은 층마다 중죄인을 가두고 있다 했으니 조심해야겠어요.”
“그래, 어찌 되었든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으니 말이다.”
소안천과 근류가 말을 주고받았다.
한립은 그들의 의견에 이의가 없었다.
각자 의식을 퍼트려 일대를 수색한 그들은 별다른 위험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직접 날아가 구석구석 살폈지만 특별한 점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들은 서늘한 바람을 뚫고 궁전 건물들 깊은 곳의 대전으로 향했다.
그 안으로 들어선 한립이 눈을 반짝였다.
“왜 그러시죠?”
소안천이 그를 보고 질문하자 근류도 긴장했다.
한립은 대답 대신 대전 구석의 돌 틈에서 반투명한 하얀 털 몇 가닥을 집어 올렸다.
워낙 얇은 털이라 육안으로는 확인할 수 없고 강대한 의식으로 샅샅이 훑지 않았으면 찾지 못했을 것이다.
“무슨 털일까요? 짐승의 것 같은데.”
소안천이 그걸 보고 생각에 잠겼다.
“이곳에 짐승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른다는 뜻이겠지요.”
털을 거둔 한립은 대전 깊은 곳을 바라보았다.
여러 진령혈맥을 지닌 그는 진령의 기운에 극히 민감했다.
이 반투명한 하얀 털에서 청란 혈맥과 비슷한 진령의 기운이 감지되고 있었다.
소안천과 얼굴을 마주 본 근류는 잠시 고민하다 소매를 펄럭여 녹색 빛을 전방으로 날렸다.
빛이 가시고 나타난 청록색 여우는 평범한 여우보다 코가 길고 눈빛이 아주 영민해 보였다.
청록색 여우는 바닥에 엎드려 킁킁거리면서 빠르게 앞으로 내달렸다.
“벽정영호(碧睛靈狐)!”
“허허, 석 수사께서는 견문도 넓으십니다. 제 영수를 다 알아보시고요.”
한립의 말에 근류가 의외라는 듯 웃었다.
“우연히 관련 기록을 본 적이 있습니다.”
벽정영호는 호족의 한 종류로 전투력은 떨어지지만, 시각과 후각이 뛰어나 보물을 찾는데 특화된 영수였다. 그러나 개체 수가 많지 않아 이 여우를 영수로 두는 경우는 드물었다.
“벽정영호에게 길을 찾게 하면 한결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을 겁니다. 갑시다.”
세 사람은 청록색 여우의 뒤를 쫓아 몇 개의 대전을 지나갔다.
긴 회랑을 지난 그들은 어두운 대청으로 들어서자 희색을 드러냈다. 그 안에 석문으로 둘러싸인 암홍색 빛의 문이 빛나고 있어서였다.
문에 아무런 금제도 없는 것으로 보아 누군가 이미 파훼한 것 같기도 했다.
“이번에는 쉽게 찾았네요.”
소안천은 기뻐하면서도 섣불리 다가서지 않고 의식으로 자세히 대청을 관찰했다.
여기까지 오면서 수많은 위험과 맞닥뜨렸는데 방심할 수는 없었다.
한립과 근류도 마찬가지였고, 근류의 벽정영호도 열심히 대청 안을 뛰어다녔다.
잠시 후, 그들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소안천은 심지어 영역까지 펼쳐 보았는데 어떤 함정이나 기관도 발견할 수 없었다.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나 보네요. 궁전 건물 대부분이 붕괴하자 여기 갇혀 있던 죄수는 죽거나 떠난 것 같아요. 바로 5층으로 가면 되겠어요.”
이렇게 말한 소안천이 먼저 공간의 문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무사히 들어가는 것을 본 한립과 근류도 안으로 따라 들어가 삭막한 사막 위에 나타났다.
모래 먼지가 섞인 광풍이 부는 광활한 사막이었다.
곳곳에 솟아오른 흙산은 오랜 세월 바람을 맞으며 기이한 형태를 띠고 있었다.
공중에 떠오른 소안천을 따라 한립과 근류도 주변을 살폈다.
“이상한 곳입니다.”
시간금제가 더 강해져 평소의 1할밖에는 의식을 발휘하지 못한 그들은 마치 돌덩이를 얹고 의식을 퍼트리는 기분이었다.
“가요. 정말 탑이 총 7층으로 되어 있다면 이제 세 층만 통과하면 되는 거잖아요?”
가볍게 숨을 내쉬며 소안천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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