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2화. 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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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아앗!
도문에 빛이 들어온 진언보륜이 주술문자들을 흩날리더니 뜻밖에도 주위의 영역에 녹아들었다.
스스로 한립에게서 벗어난 진언보륜이 둥그런 달처럼 금빛 광채를 퍼트리고 있었다.
다음으로 금색 모래시계가 바닥으로 내려가 담고 있던 모래알들을 방출해 별안간 기마자 발밑까지 쌓아 올렸다.
기마자는 깜짝 놀랐지만 왜인지 순간 걸음을 떼지 않았다.
이런 망설임이 순식간에 지나고 그가 성큼성큼 환진사를 밟으며 느리지만 꾸준하게 걸어왔다.
이제 다른 시간법칙 보물들도 분분히 변화하기 시작했다.
광음정병의 금색 액체가 찬란한 강 그림자를 이루고 흘러나왔고, 동을신목은 금색 모래가 깔린 지면에 뿌리를 내리고 수풀 허상을 응결했다.
금색 횃불은 고공으로 날아올라 수많은 불빛을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였다.
“이건…… 설마!”
기마자는 또 한 번 경악하며 걸음을 멈추었다.
한립조차도 기이한 현상에 놀라고 있었다.
시간법칙이 형상화된 다섯 가지 물체가 그의 시간영역에 녹아들어 다양한 환상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었다.
두 사람의 경지의 차이가 극심한 탓에 기마자가 약간의 우위를 점하고 있었지만, 그의 영역의 시간법칙 파동은 몇 배로 강렬해져서 기마자가 펼친 단시류화 불빛과 완강하게 겨루고 있었다.
“이놈, 사존의 <대오행환세결>을 얻어 영역공명(靈域共鳴)의 경지까지 이르렀구나! 이번만큼은 절대 달아나게 둘 수 없다. 그 공법은 내 것이어야 해!”
기마자의 얼굴에는 놀람 대신 형언할 수 없는 흥분이 어려있었다.
수결을 맺은 그는 금색 횃불에서 더욱 밝은 빛을 발하며 검은 도끼를 회수해 한립의 머리를 찍었다.
피할 방도가 없는 한립은 급한 마음에 <대오행환세결>과 <천살진옥공>을 동시에 극성으로 발휘해 체내의 진령혈맥을 불살라 삼두육비의 거마로 변해 이번 일격을 막으려 했다.
바로 그 순간 이변이 생겼다!
화아아…….
시간법칙 보물들이 돌연 법칙정사를 방출해 공중에서 연결되더니 스스로를 불사르는 것처럼 요란한 빛을 내뿜었다.
다섯 가지 기운이 융합된 금빛에 휩싸인 기마자는 놀란 얼굴 그대로 굳어 한립처럼 꼼짝하지 못했다.
융합 금빛은 기마자의 몸에서 겹겹이 그와 똑같은 허상을 만들고 있었다.
‘이 무슨!’
기마자 허상들은 반짝거리면서 몸이 나무토막처럼 썩어 먼지가 되어 흩어졌고 그런 일이 반복될 때마다 실제 기마자의 기운에도 아주 미세한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한립은 대체 무슨 기연 조화가 겹쳐 이런 일이 생긴 지는 몰랐지만 혹시라도 자신의 행동이 무언가 변수가 될까 봐 꼼짝 않고 전력을 다해 <대오행환세결>만 운용했다.
놀랍게도 허상들이 하나씩 소멸할 때마다 기마자의 수행이 줄어들고 있었다.
아니, 그보다는 기마자의 나이가 어려지고 있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었다.
수많은 허상이 사라지자 기마자는 세월을 거슬러 시간의 함정에 빠진 것처럼 수만 년, 수십만 년 심지어 백만 년 전의 상태로 돌아가고 있었다.
불과 수십 초 만에 기마자는 대라 초기의 경지도 간신히 유지하고 있었다.
“겨우 허상일 뿐이거늘! 어떻게 이런 위력을…….”
기마자는 발버둥 쳤지만 어쩌지 못했고, 이를 악문 한립은 공법 발동에만 집중했다.
다시 십여 초가 지나 기마자의 육신이 수백만 전으로 퇴행하면 태을경 최고봉의 수행에도 이르지 못할 터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기마자 머리 위의 오색 융합 금빛이 점점 흐릿해지다 힘을 다했는지 흩어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제발 조금만 더, 조금만…….’
미간을 찡그린 한립은 속으로 부단히 빌었으나 곧 퐁, 하고 오색 융합빛이 모든 색깔을 잃고 그 안의 시간정사들도 시간법칙의 힘을 잃고 말았다.
이어서 영역 안의 달이 떨어지고 별들이 합쳐지며 산이 평평하게 변하고 강이 거꾸로 흘러 모든 환영이 속속들이 사라지고 있었다.
그 대신 다섯 가지 시간법칙 보물들이 나타나 어두워진 채 한립의 체내로 돌아가 소환하려 해도 나타나지 않았다.
한립은 기마자가 먼저 공격하기 전에 <천살진옥공>을 발동해 기합을 터트리며 진령혈맥을 운용해 삼두육비의 모습으로 변했다.
쉭!
중간의 거원 머리가 눈을 부릅뜨고 거대한 주먹으로 기마자를 내리쳤고, 또 다른 금색 비늘이 덮인 용의 발이 쇄도해 기마자를 잡으려 했다.
화륵!
드디어 자유를 되찾은 기마자는 수행이 떨어진 것도 신경 쓰지 않고 급히 기괴한 수결을 맺어 금색 횃불의 불길을 크게 일으켰다.
그러자 시간법칙의 힘을 품은 화염이 용처럼 응결해 말도 안 되는 속도로 한립의 주먹과 용 발톱보다 먼저 달려들었다.
금색 화염용이 이른 곳은 순식간에 시간이 멈추어서 상대의 수행이 떨어지지 않았다면 한립의 손발이 묶였을 터였다.
하지만 예상하고 있던 한립은 금색 화염용이 나타난 순간 비취색 현천호리병을 불러내 병 입구를 기울이고 기다리고 있었다.
호리병 입구에서 녹색 빛이 빠르게 돌아 나와 화염용의 접근에도 느릿해졌을 뿐 움직임이 완전히 멈추지는 않았다.
금색 화염용에게 다가간 녹색 빛은 그걸 집어삼켰고, 호리병은 극심하게 떨리면서 스스로 뚜껑을 닫고도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한립은 호리병박의 이상에 신경 쓸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서 그대로 주먹과 용발을 동시에 뻗어 성신지력을 남김없이 발휘했다.
기마자는 오색 융합빛의 영향에 수행이 떨어진 채로 무리해서 비술을 펼쳤으나 그마저 정체 모를 호리병박 때문에 실패하자 막대한 힘이 실린 일격을 고스란히 맞고 말았다.
쿠앙!
별빛이 터지고 기마자의 몸이 붕 떠서 날아갔다.
온몸의 뼈가 빠각빠각 뒤틀리는 소리와 함께 피를 뿜은 기마자는 원한 서린 눈으로 한립을 노려보면서 오소귀왕이 펼쳐 놓은 검은 장막에 충돌하고서야 바닥으로 떨어졌다.
한립이 펄쩍 뛰어올라 바로 쫓았지만 기마자는 번득하고 먼 곳으로 달아나 보이지 않았다.
멀리서 홍포 귀장들과 싸우고 있던 천수종 수사들은 그런 일이 있었던 것도 모르고 살짝 갈라진 검은 장막이 봉합되면서 언뜻 삼두육비의 거마만 보았을 뿐이었다.
아쉬운 시선을 거둔 한립은 단시류화에 구금되어 있던 36자루의 청죽봉운검과 정염불새를 불러들이고, 오소귀왕과 싸우느라 전신에 깊은 상처가 가득한 제혼을 돌아보았다.
오소귀왕은 진작 서생의 모습이 아닌 핏빛 갑옷 위에 새빨간 장포를 걸친 거대 귀물의 본모습을 드러내고 콧구멍에서 끔찍한 피 냄새가 나는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거대 귀물이 핏빛 주술문자가 가득 새겨진 커다란 백골 삼지창을 들고 제혼의 미간을 찌르려는데, 제혼의 제3의 눈에서 핏빛 빛기둥이 뻗어 나와 충돌했다.
“가라!”
한립은 즉시 청죽봉운검들을 오소귀왕을 향해 날려 보냈다.
파치치칙.
금빛 뇌전들이 청죽봉운검 36자루에서 검기와 섞인 채 뻗어 나와 오소귀왕을 뒤덮었다.
“끄악!”
귀왕의 몸에 난 수많은 상처에서 핏빛이 반짝이고 검은 연기가 치솟았다.
고개를 들어 한립을 본 그는 크게 입을 벌렸다.
훅!
검은빛의 짙은 화염이 겹겹이 불의 장벽을 이루고 길을 가로막았다.
눈을 반짝인 한립은 그걸 알면서도 어떤 대응도 하지 않았다.
화륵.
그의 옆에서 은빛이 반짝이고 일곱 빛깔 화염을 길게 늘어트린 거대 은색 불새가 날아올라 날개를 펼치고 검은 불의 장벽을 갈랐다.
은색 불새가 빠져나가고 불의 장벽 가운데에는 사람이 지나갈 수 있는 통로가 생겼다.
한립이 그 안으로 빠져나가며 뇌붕의 기운을 일으켜 순식간에 오소귀왕 옆으로 이동해 주먹을 내질렀다.
쾅!
엄청난 충격에 오소귀왕의 방대한 몸이 왼쪽으로 기울어지고 손에 든 백골 삼지창도 제대로 제혼을 겨누지 못했다.
스스스…….
방해물이 없어지자 제혼의 핏빛 빛기둥이 귀왕의 어깨로 흘러들었다.
오소귀왕은 처참하게 비명을 질렀고, 핏빛에 닿은 어깨의 갑옷은 힘없이 녹아 구멍이 뚫리고 말았다.
“다 죽고 싶어 환장했구나! 가루로 만들어 버리겠다!”
매섭게 소리친 귀왕의 검에서 수많은 악귀 허상들을 품은 검은빛이 폭발적으로 뿜어져 나와 한립과 제혼을 물어뜯으려 달려들었다.
악귀 허상들은 진짜 같기도 하고 가짜 같기도 해서 한립이 주먹으로 치거나 벽사신뢰를 발산해도 두려움 없이 흩어졌다가 다시 모여 달려들었다.
악귀 허상들이 다가올 때마다 음울한 힘이 그의 몸을 투과해 골수로 스며드는 느낌이 들었다.
횟수가 늘어갈수록 체내에 이런 음울한 힘이 쌓여 몸을 찌르는 듯한 한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는 그나마 괜찮았는데 제혼은 상태가 더 나빠져 오소귀왕의 움직임을 쫓지 못하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두 사람이 패할 것이 분명했다.
그때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한립이 굳은 얼굴을 풀었다.
“제혼, 이리로 오거라!”
그는 검은 화염 장벽을 열심히 먹어 치우고 있는 정염불새를 체내로 불러들여 몸을 수축해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간 뒤 오소귀왕을 향해 쇄도했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오소귀왕은 들고 있던 백골 삼지창을 횡으로 휘둘렀다.
그걸 본 한립은 허리춤에 걸어둔 비취색 호리병박을 들어 입구를 오소귀왕을 향해 기울였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경쾌하게 호리병 바닥을 두드렸다.
콰르릉!
호리병 입구에서 녹색 소용돌이가 급속도로 회전해 귀왕을 향해 금색 화염용을 토해냈다.
기마자와 싸울 때 호리병박에 가둬둔 화염용은 크기와 속도는 줄었지만 시간파동은 그대로라 주변의 모든 것을 느릿하게 만들고 있었다.
제혼과 오래 격투를 벌인 귀왕은 한립까지 끼어들자 힘이 달렸는지 급히 백골 삼지창을 놓아 날려버렸다.
화염용의 속도가 엄청나서 삼지창이 얼마 날아가지 못했을 때 서로 충돌했다.
쿠콰쾅!
금색 화염이 폭발하며 오소귀왕을 덮쳤다.
“시간법…….”
거의 폭발의 중심에 있던 오소귀왕은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 그 자리에서 멈춰 섰다.
육신뿐 아니라 정신마저 정지한 듯했다.
‘시간법칙의 힘…….’
화염의 시간법칙의 힘이 급격히 줄어 오소귀왕의 사고가 정상으로 돌아왔을 땐 이미 한립이 날아든 후였다.
<천살진옥공>을 전력으로 발휘한 그는 청죽봉운검 36자루를 한 자루의 거검으로 합일해 들고 귀왕의 목을 베었다.
벽사신뢰가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속에 서걱,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소귀왕의 머리가 높이 날아올랐다가 눈을 부릅뜬 채 떨어졌다.
잘린 목에서 피 대신 수많은 악귀와 혼백들이 꿀렁꿀렁 흘러나와 거대한 새 떼처럼 울부짖었다.
만귀(万鬼)의 출현에 음산한 바람이 거세지고 음살기가 수십 배로 진해졌다.
한립은 정염불새를 방출하려다 제혼이 온 것을 보고 다시 거둬들였다.
형수로 변한 그녀의 코에서 흥, 하고 노란 광채가 빠져나가 오소귀왕 목에서 흘러나오는 수많은 악귀 혼백들을 사로잡았다.
악귀 혼백들은 무참히 찢겨 새까만 빛으로 변해 그녀의 몸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제혼의 몸속으로 검은빛이 홍수처럼 빨려 들어가자 주변의 검은 장막도 버티지 못하고 차차 흩어져 갔다.
그걸 본 한립은 장검을 들고 제혼을 보호하며 주위를 경계했다.
멀리 전장에서는 아직도 격렬한 전투가 한창이었고, 일대의 건물들은 완전히 파괴되어 둥그런 문만 남아 있었다.
이제 10명이었던 홍포 귀장 중 살아남은 것은 가는 목소리의 서생과 소머리, 말머리 귀장들 셋밖에 없었고, 천수종에서는 소안천과 근류 두 사람만이 남아 있었다.
바닥에 떨어진 시체들은 몇 구 되지 않아 나머지는 귀장들에게 잡아먹힌 것인지 아니면 근류가 보탑으로 회수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부 곡주와 네 명의 산수들은 백골이 되어 서로 등을 맞댄 채 흐느끼는 악귀들에 휩싸여 있었다.
망설이던 한립은 주먹을 뻗어 권풍으로 주변 악귀들을 물리고 바닥의 돌멩이와 흙을 일으켜 그들의 시체를 묻어 주었다.
그제야 싸우느라 바쁘던 두 사람과 세 귀장들이 그의 존재를 인지했다.
“귀왕께서…….”
문인 귀장이 마치 정신을 놓은 사람처럼 소리를 지르며 제혼을 향해 달려들었다.
한립이 번득 그의 앞을 막아서고 청죽봉운검을 세로로 갈랐다.
찬란한 금색 뇌전이 어둑한 공간을 가르며 문인 귀장을 두 쪽으로 쪼개 버렸다.
“귀왕……. 귀왕……. 귀…….”
광증에 걸린 듯 중얼거리던 문인 귀장의 갈라진 몸이 연기로 변해 흩어졌다.
고개를 돌려 그 모습을 본 소머리 귀장과 말 머리 귀장이 깜짝 놀라 각자 다른 방향으로 달아났고, 근류와 소안천이 그들을 쫓아 멀어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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